달과 게 - 제144회 나오키상 수상작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은모 옮김 / 북폴리오 / 2011년 3월
평점 :
절판




어른이 전하는 이야기

돌이켜본다. 어른이 된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어른이 되고 싶다는 건 어떤 마음일까. 나는 왜 어른이 되고 싶었을까. 어른스럽다는 것은 아직 어른이 아니라는 뜻일까. 어른이 되었다면 모두 다 어른다운 것일까.

내가 아이였을 때 해보았던 고민을 다시 어른이 된 후 아이를 바라보는 심정으로 그 시절을 회상하게 된 작품이다. 아이였을 때의 뜻밖의 상처와 어른이 되고난 후의 씁쓸한 후회등이 고르면서도 치열하게 공격해오던 이유로 두 배로 허탈해지는 소설이었다. 기실 사람을 겪고 세상을 알아간다는 것, 살면서 이보다 더 큰 일이 어디 있겠는가. 나만이 유난떨며 성장하는 것이 아니기에 다만 입술을 꼭 깨물고 미늘이 달린 ‘바늘’을 힘껏 뽑아야 할뿐인 것이 인생이라는 ‘낚시’임을 우리는 잊고 사는 것일 테다. 여기 목숨을 걸지 않는 한 제거 할 수 없었던 소년의 몸에 자란 ‘바늘’에 관한 이야기가 일본의 어느 해안마을에서 소름돋아나듯 내 가슴을 찬찬히 박음질하였음이다. 많이 ‘아프다’고 말하기에 나는 어른이었고 어쩔 수 없이 다시 어른처럼 뒤돌아 그런대로 ‘아프지 않다’고 말해야 했다. 어른들은 모두 그렇게 말하곤 하니까. 어른이 된다는 건 아픈 것도 괜찮다 말하는 것이니까.

그곳은 어디일까. 달빛은 유난히 빛나고 소라게는 그 빛을 받아 더욱 생생한 곳일까. 일본에선 유명한 지역이었다. 가마쿠라(鎌倉,겸창)시, 한때 무사들의 도시로 알려진 중세 일본의 고도 가마쿠라엔 유난히도 신사와 절이 많다. 쇼조 할아버지는 가마쿠라시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해변마을에서 멸치잡이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선장이었다. 평온하고 낭만적으로 다가오는 직업이었다. 하지만 퍼뜩, 얼마 전 후쿠시마 원전 인근 해역에 방사능 오염수가 방출되었고 그로인해 이바라키 현에는 멸치잡이 조업이 중단되었다는 기사가 떠올랐다. 쓰나미로 폐허가 되버린 미야기현의 처참한 해안마을도 오버랩되었다. 마을의 생존자로 보였던 백발의 할아버지가 허탈하게 웃으면서 의연하게 인터뷰에 응하던 장면을 기억한다. 마치 늘 이런 일을 겪고 살아 온 것처럼 살면서 이런 일은 처음이라 읊조리던 할아버지. 만약 쇼조가 같은 인터뷰를 했다면 뭐라고 말했을까, 얄궂은 상상을 하기도 했다. ‘결국은 자기한테 되돌아오는 법이야.’ 같은 자조적인 말씀으로 무언가 참회하는 식의 묘한 웃음을 보였을까. 아니면 손자에게 타이르듯 ’다음부터는 조심‘해야겠다는 다짐의 말씀을 하셨을까. 예전 같았으면 이 책에서 신이치의 할아버지로 의미심장한 역할을 주도했던 쇼조는 나같은 반일 감정을 가진 독자의 눈엔 탐탁치 않았던 인물로 여겨졌을 터이다. 개인적인 일에는 습관적인 ‘사과’를 입에 달고 살지만 국가적인 일에는 절대 강박적으로 ‘사과’하지 않는 제국주의 일본 전쟁세대를 표상한다고 느꼈을 것이기 때문에. 그런데 일본 지진의 여파때문인지 나는 아이들 못지않게 쇼조라는 조연도 어쩐지 아프고 짠하게 다가왔다. 뇌에서 핏덩어리가 뭉치는 병에 걸려 生을 마감했기에 느껴지는 인간으로서의 연민도 없지 않았지만 그 핏덩어리를 뭉치게 한 生의 이력이 새삼 같은 인간임을 깨우치게 했달까. 그를 보면서 사람은 암이든 무엇이든 결국 평생 동안 뭉쳐진 것들이 불치의 병인이 되어 생을 마감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인체를 좀먹는 암도 결국은 비정상적으로 자라나 뭉쳐진 덩어리(종양)의 결과가 아닌가. 알려졌듯이 덩어리의 세포가 퍼져나가는 모습이 게의 다리와 닮았다고 하여 암은 게의 이름인 ‘cancer’가 되었고 별자리로서 게자리 ‘cancer’와 동음이의어가 되었다. 헤라클레스의 발에 밟혀 한쪽 발이 부러진 채 죽은 게가 하늘의 별자리가 되었다는 신화를 생각하니 의족으로 생을 마감한 할아버지가 쓸쓸히 그곳에 계시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그런데 게자리의 수호성은 방위와 여행을 관장하는 달이다. 이때 달은 사생활을 관장하기 때문에 강한 생활력을 지닌다고 한다. 어딘가 모르게 이 책에서 할아버지를 중심으로한 달과 게의 역학관계를 연상하게 된다. ‘카니(게)는 먹어도 가니(독)는 먹지 말라’는 쇼조의 첫 대사와 ‘뱃속에다가 너무 묘한 걸 기르지 말’라는 후반부의 대사는 신이치의 生에 뭉쳐질 수 있는 위험적 존재에 대한 간곡한 부탁이자 경고는 아니었을까. 게자리를 지키는 것이 달이라 보았을 때 할아버지는 손자의 어두운 심연을 비추는 수호신으로서의 달, 손자의 집과 인간관계의 길목을 지키는 도조신(道祖神, 일본에서 마을의 길을 지키는 수호신)으로서의 달은 아니었을까. 달빛이 그윽한 어느 봄날, 달에 비추인 카니(게)의 그림자는 맹독을 품어 맨몸으로 스스로를 파멸할 수도 있는 열두 살 아이의 가니(독)라는 덩어리의 실체는 아니었을까. 그래서인지 (변사辯士처럼 느껴진)할아버지는 이 책의 제목이 된 ‘달과 게’의 신비스런 비밀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사람으로 더욱 정당해보였다.

그렇다면 (비밀을 알고 있는)쇼조가 다음 세대에게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소설 전반부에 쇼조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성장기 체험을 아이들에게 들려주며 일본 최초의 무사정권 가마쿠라 막부시대때 지어진 일본 최초의 선종 사찰 겐초사의 종소리를 비롯, 주오암의 전설, 가마쿠라 축제, 왕권을 둘러싼 미나모토 가문의 이야기, 정권싸움에 희생된 비련의 무희 시즈카의 춤등에 관해 (역사적인)가이드 역할을 맡게 된다. 자국의 역사와 자기가 태어난 고장에 대단한 자부심을 느끼는 할아버지가 하치만궁에서 신이치와 나누는 대화는 흡사 일본 역사교육의 현장에 와있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공교롭게도 아이들은 이 책에서 학교 외에 유일하게 하치만궁에서 한자리에 모이게 된다. 신이치와 하루야는 할아버지와 함께, 나루미는 아버지와 함께, 반에서 적대감을 갖고 있던 마키오카까지.(마치 할아버지의 옛날 이야기를 들으려 옹기종기 모여든 아이들처럼) 시즈카의 춤을 볼 수 있었던 하치만궁은 일본 각지에서 무인의 수호신인 하치만신(八幡神)을 모시는 곳이며 하치만신은 곧 천황을 상징한다. 쇼조는 이 하치만신에게 봉납했다는 가마쿠라 지역의 가다랑어와 새우에 유달리 자부심을 느끼는 지역 어업자이기도 했다. 쇼조가 운행하던 시라스선에서 사고로 죽은 나루미의 엄마는 어류를 연구하는(어류생태학이나 해양생물학으로 추정) 연구원이었고 신이치의 엄마 스미에는 어협의 사무원이었다. 이들 두 여성은 암으로 죽은 신이치의 아버지와 함께 이 소설에서 죽음과 파행의 상징이 된 ‘게’자리에 속한 어두운 인물들로 여겨졌다. 특히 신이치의 엄마 스미에는 온갖 생선으로 다양한 요리를 해내는 현모양처의 자격을 갖추고 있었지만 극중에서 기계적으로 보인 주부역할과 수동적, 소극적인 인간관계로 존재감은 미약해보였다. 바닷가와 다소 이질적으로 보였던 나루미의 아버지 정도만이 파괴와 죽음에 내몰린 아이들과 스미에를 붙들어 주는 구원의 ‘달’ 역할을 할 것으로 보였다. 그의 직업이 유리회사 부장인 것이 흥미로왔는데 딸에게 자신이 사귀는 여성을 숨기지 않는 솔직한 성격을 의미하는 것으로 비쳐지기도 했지만 역시 충격에 깨어지기 쉽고 인공적인 속성을 가진 유리세공품처럼 그는 ‘게’의 실체를 인위적으로 반사하는 일시적인 기념품에 지나지 않았다. 어쩐지 할아버지를 제외한 이 책의 어른들은 모두 한계가 느껴졌다고 할까.

그래서인지 페이지를 넘겨갈수록 나는 할아버지가 이야기의 실마리를 쥐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 책에 등장하는 다른 어른들은 어른답지 못했거나 어른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에 이 작품은 할아버지의 ‘충고’에서 시작해 할아버지의 ‘유언’으로 끝나는 할아버지가 전해주신 ‘달과 게’의 이야기라고 해도 좋았다. 할아버지는 자신이 독처럼 간직해온 ‘게‘와 같은 평생의 죄의식을 아이들과 세상살이에 다각도로 투영하며 ’달‘과 같은 구원을 받기위해 여생을 보낸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신이치와 하루야, 나루미를 끝까지 결속시키던 ‘달과 게’라는 이야기는 결국 할아버지 세대에서 시작된 아니 훨씬 그 이전부터 발생한 개인의 역사와 집단의 믿음으로부터 전수된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한편의 오래된 서늘하고도 서글픈 이야기, 달빛처럼 아름답고 묘하면서 그림자처럼 알 수 없어 자꾸 마음이 젖어드는 이야기. 지금은 어른이 되었기로 돌아볼수록 애틋하고 지켜볼수록 안타까운. 나는 신이치가 마을을 떠날 때 그의 귓전에 울려오던 겐초사의 종소리는 틀림없이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울음소리라 믿었다. 이야기를 전해준 어른의 마지막, 그것은 한 인간의 어른된 안녕, 그래서 미어지는 이별의 눈물이었을 것이기에.


어른이 되어가는 이야기

생각해본다. 나는 언제 어른이 되었을까. 아니 언제부터 어른이라 말할 수 있었을까. 나 자신이 이제부터 어른이다 생각한 그 시절은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다. 아니, 어쩜 나는 아직도 어른이 아닐지 모른다. 어른이란, 어른이 된다는 건 혹 죽는 날까지 진행되어야 할 평생의 숙제는 아닐까.

아이들은 모두 ‘분노’의 씨앗을 품어내고 있는 중이었다. 각자가 공평한 씨앗을 가지게 된 아이들은 할아버지가 들려주신 이야기로부터 자신들의 이야기를 완성해 나가게 된다. 물론, 할아버지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이들에겐 자신들이 듣고 보고 느낀 이야기가 무의식적인 소재가 되었던 것이다. 작가는 말했다. ‘아이들은 기성의 神을 믿을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들만의 神을 창조할 수 밖에 없’다고. 작가는 아이들의 무능력을 새로운 창의력으로 본 것이다. 신이치에게 자라난 상처는 엄마로부터의 ‘배신’이었고 하루야에게 남겨진 상처는 아버지로부터의 ‘폭력’, 나루미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는 엄마의 ‘상실’이었다. 공교롭게도 모두 부모로부터의 ‘분노’가 상처의 시발점이 되어 열매를 형성했다는 것이 흥미로왔다. 부모는 이들 소년들이 아직 자신들로부터 분리하지 못한 자기 生의 수호神이었다. 5학년이면 점차 부모나 가족으로부터 분리되어 자신에게 의존하는 경향이 한창 높아질 시기이다. 하지만 이들 모두 그 분리과정이 긍정적으로 자연스럽지 못해 수호神과 원치 않는 충격의 이별을 하게 된 것이다. 모두 자신들의 첫번째 수호神으로부터 발생한 거대한 상처를 품게된 이들은 서로의 상흔을 위무해줄 비밀의 장소를 발견한다. 상처의 연대와 공감이 이들을 특별한 세계로 인도한 것이다. 할아버지는 종종 ‘평범한 소리가 달리 들릴 때가’ 있다고 했다. 어제까지 떠오른 태양이 오늘 달라 보일 때는 상처를 피해 내가 세상을 향해 귀기울일 때가 아닐까. 바로 사찰과 불상에서 불어오던 서슬퍼런 바람소리, 바위의 기괴한 신음소리, 울음소리로 느껴지던 종소리...하나같이 사연을 안고 멀리서 다가오는 이들의 메시지는 어느새 자신들의 상처와 동일시되며 결코 평범하지 않은 새로운 추억의 연대를 구축하게 된다. 세상 모든 은밀한 소리가 블랙홀처럼 집합된 장소에서 이들은 불안의 공감으로 안정을 찾게된 것. 아이들의 공감을 이끌어 내는 세심한 문장들이 꼭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마냥 고요하고도 은밀했다. 특이했던 건 할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 속 ‘형장에서 사형당한 죄인들의 울음소리’에 이들이 크게 동요하며 반응을 보였다는 것인데 이는 할아버지가 깊숙이 간직한 (무의식적인)죄의식마저 내러티브의 모티브로 전수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치밀하고)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할아버지의 죄의식은 선장으로서 사망사고를 유발했다는 공적인 책임의식과 어린 시절 산에서 추락한 친구를 내버려 두고 제일 먼저 도망쳐 왔다는 사적인 윤리의식이 굳건하게 시너지를 일으켜 평생토록 단련된 有의식이었다. 그것이 곧 할아버지의 뇌에 뭉쳐진 컨텐츠, 핏덩어리라는 병인이 된 것은 아닐까.

구성원의 분노 에너지(동기), 장소적 비밀성(무대), 이야기의 내러티브(컨셉)가 최적화된 상황에서 아이들이 자신들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단순유희에서 벗어난 체계적인 사고과정이었다. 피아제의 인지발달론에 따르면 신이치의 나이(11-12세)에 논리적 사고과정의 증가로 추상적 개념을 이해하고 문제를 해결하는데 활용이 가능해진다고 한다. 가능한 모든 논리적 형식을 조작할 수 있다 하여 이 시기를 ‘형식적 조작기’라 부르기도 한다. 아이들이 창조한 논리형식은 ‘분노’ 에너지를 ‘소원’에 대한 기대로 치환한 것이었다. 분노가 일상이라면 소원은 일탈에 해당된다. 이는 곧 일상의 수호신(부모)에서 벗어나 일탈의 수호신(소라게)을 조작하는 체계를 따른 것이다. 그런데 가만 보면 아이들이 일상의 수호신에서 이탈하여 새롭게 창조한 신은 아주 새롭고 혁신적인 존재는 아니었다. 이들은 바위나 바람의 주술적인 힘을 빌려 소라게를 소라검으로 격상시킨 후 사람에게 화와 복을 내려주는 신으로 삼고 소라검의 바위를 신사처럼 사당으로 완성짓는다. 이들이 신성한 비밀의 사당에서 소원을 비는 방법은 소라게를 불에 지지거나 태우는 것이었는데 이는 ‘돈도야끼(どんど焼き)’라는 일본의 새해 액막이 행사를 연상시킨다. ‘돈도야끼’는 어린 아이들이 주인공이 되어 마을의 커다란 나무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 물건(일본의 설날 장식품)들을 태우는 놀이이다. 물건을 태우면서 액운을 날려버리는 것이므로 우리의 정월 대보름에 행해지던 쥐불놀이와도 유사한 풍습이라 할 수 있다. 불을 놓는 것이 잡귀를 쫓고 액을 달아나게 한다는 민간신앙에서 기원된 것은 같으나 일본의 아이들은 이때 ‘도소신(道祖神)’이라는 마을신을 자신들의 수호신으로 삼았다.(일본은 어느 나라보다 다양한 신을 자랑한다) 자신들이 모아온 물건과 나뭇가지를 쌓아 ‘도소진고야(道祖神小屋)’를 만들어 불에 태운 것이다. 즉, 자신들의 神을 직접 선택해 그 神의 오두막집(小屋)을 만들고 그것을 태움으로써 소원을 비는 것이 아이들이 형식적으로 조작한 논리의 모태인 것이다. 작가는 역시, 일본인이었다.

이렇듯 신이치와 하루야는 (지역상 쉽게 눈에 띄는)소라게를 수호神으로 삼은 것이었다. 다만, 풍습에선 무생물을 태웠다면(소멸의식) 소설에선 생물을 태움으로써(희생의식) 잔혹성을 보다 미학적으로 가공했다고 할까. 이 소설에서 소라게의 살을 찢거나 태워버리는 행위가 단순히 어린 아이들의 쾌감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라 神이라는 대상에 부여되는 하나의 의식이었다는 것이 나는 다행스러웠다. 즉 순수를 앞세운 도덕성의 결여를 장애로 보지 않고 2차적인 욕망을 성취하기 위한 단계적 행위, 성장에의 과정으로 보고 싶었다. 잔혹행위에 대한 선악판단이 무의미했던 것은 행위가 상징하는 메타포가 소원으로서 정당한가의 여부에도 있었다. 잔혹한 행위에 이어지는 더 잔혹한 소원, 이 때 우리는 소원에 대한 충격으로 행위를 잊게 된다. 소라게가 희생한만큼 더 큰 소원을 빌게 되는 아이들을 이해하고 용서하게 되는 것이다. 안타까운 희생을 지불하고 이루어지는 소원이기에 소원이 정당할 수 있다고 까지 여기는 것이다. 이렇게까지 이어지는 단계를 살펴보면 결국 (자신들과는 상관없던) 죄의식이 부모라는 수호신을 버렸다는 죄의식과 결합하면서 (우발적인)죄에 선행하게 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내제된 죄의식은 죄를 더욱 유발하는 계기가 되었고 마침 할아버지의 죄의식까지 이야기로 잘 연결되어 완벽하게 흡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직, 수평적으로 잘 구성된 내러티브의 완성도가 높았기에 이 책이 청소년소설이나 장르문학 혹은 대중소설의 특정범주에 머무르지 않고 순수문학으로서 수준높은 평가를 받은 것은 아닐까.

또 하나 비인간적 '행위'보다 아이들이 소라게에 빌었던 비윤리적 ‘소원’에 더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소원이 ‘상처’를 반영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신이치의 시점에서)소라게에 투사된 상처는 할아버지의 의족,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 엄마의 밀회, 친구 하루야의 멍, 나루미에 대한 열등감, 하루야로부터의 소외감, 배신감등이었고 소라게를 희생시키면서 기대하던 소원은 이러한 상처에의 보상을 의미한다. 그리고 보상은 아이들이 생각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소원이 100엔짜리 동전이 생기는 것에서 점점 사람이 사라지는 것으로 발전하는 과정은 보상이라는 욕망이 더 커져가는 단계로 이해되었다. 신이치와 하루야는 소원행위를 유지하기 위해 소원의식에 참여한 구성원으로서 각자 친구의 소원에 조력하는 것으로 공범자의 역할을 수행했다. 소원성취가 이루어져야 다음의 소원의식에도 희망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아이들은 서로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 상처가 치유되는 방법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치유는 서로가 바라는 소원 그 너머, 소원을 가지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헤아리는 일이었고 그것은 곧 어른이 되어가는 모습일 터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때 그 사실을 알 수 없었다.

작가는 영리하게도 아이들이 소원을 빌고 그것을 바라는 과정에서 서로가 원하는 것을 알게 하도록 하였다. 소원을 안다는 것은 곧 친구의 상처를 안다는 것이었고 그것은 타자의 고통을 헤아리는 연습과정을 의미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타인과 공감할 수 있다는 것, 타인의 고통에 아파할 수 있다는 것이야 말로 어른이 되어가는 명징한 증거가 아닐까. 대부분의 (순수한)아이가 잔혹할 수 있는 건 상대의 고통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이들수록 내가 겪은 고통만큼이나 남의 고통을 헤아리는 능력도 많아진다.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인 것이다. 이 책에서 아이들이 소라게를 고통스럽게 하면서도 소라게의 아픔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 못하는 천진난만함이 무조건 이해되었던 건 아니다. 상대의 고통을 알면서도 가혹행위를 반복한다는 건 개인적 쾌감이 윤리에 우선하기 때문인데 다행히도 아이들은 자칫 행위자체에만 몰두하지 않고 그 댓가로 상대의 아픔을 얻었던 것. 내가 가진 고통만큼이나 친구도 고통스러울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데 소라게가 촉매역할을 했다는 생각 때문에 나는 이 소설을 미스테리나 스릴러장르와 다르다 느꼈는지도 모른다. 소라게를 공격장치나 환상기제로 더 이상 확장하지 않고 인간내면의 성장과 연결시켰다는 점이 결국 ‘달과 게’가 이룬 문학적 성취가 아닐까. 만약 이 소설이 내면을 끌어안지 않고 외면으로 아픔을 가시화했다면 필히 장르소설로서 꽤 흥미진진한 자극을 제공했을 듯하다. 연쇄살인범이나 사이코패스의 과거를 추적해보면 어린 시절 동물을 학대한 경험을 가진 경우가 많고 이들 대부분은 잔혹행위에 어떠한 죄의식도 느끼지 못한다고 알려져 있다. 우리들 대부분이 눈물흘릴 수 있는 타자의 고통에 그들은 둔감하다. 공감능력이 턱없이 부족하므로 필히 정신적 장애에 해당한다 할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이 소설에서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이 가장 떨어져 보였던 건 누구일까.

이 작품에서 가장 무서웠던 순간은 신이치에게 편지를 보낸 주인공이 같이 소원을 빌었던 하루야였음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하루야는 장르와 순수의 경계에서 사실상의 방향키를 쥐고 있던 인물이 아니었을까.  경상도 사투리로 번역된 하루야의 대사는 이 책에서 발견한 가장 큰 독서의 기쁨이기도 했다. 신이치와 나루미에 비해 입체적인 캐릭터로 표현된 하루야는 자신의 상처를 가장 친한 친구에게 투사하는 잔혹한 우정의 소유자였다. 하루야는 ‘ね(네)’ 라는 글자를 여기저기 사인처럼 남겨두었는데 나는 이것을 일종의 자학을 표상하는 낙서로 이해했다. 글자의 뜻보다는 단순히 ‘도망가는 놈을 밧줄로 붙잡는 모양’을 가진 그림으로 받아들였다. 실제로 내가 글자를 연속해서 써보니 누군가의 목을 밧줄로 묶어버린다는 느낌, 묘한 쾌감이 들긴 했다. 마치 속상한 일이 있을 때 노트에 ‘바보’라고 반복해서 칸을 메우는 심리와 마찬가지로 가정폭력에 빈번하게 노출된 자신의 처지를 스스로 조롱하는 행위. 그러면서 같은 행위를 누군가에게 갚아주고 싶다는 복수심의 기록. 자존감이 없었던 하루야가 신이치의 분노와 수치심을 자극하기 위해 보낸 편지들은 혹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들에 대한 부러움의 투정은 아니었을까. 하루야의 편지엔 자신은 따로 만나보지 못한 나루미와 친해보이는 신이치를 놀리는 글, 자신에겐 없었던 할아버지가 의족인 것을 허수아비에 빗대는 글, 신이치 외엔 친구가 없는 자신이 한심해 친구가 없는 녀석들끼리 잘 논다는 글등이 주 내용이었다. 가만 보면 나(하루야)는 아버지에게 매일 맞아 이렇게 아픈데 너(신이치)는 친구의 아픔조차 모르고 있으니(안다고 해도 느낄 수 없을테니) 이렇게라도 내 고통을 당해(느껴) 보아라, 하는 공감호소문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네 고통을 알고 있으니 너도 알아야 한다는 혼자만의 서약서일 수도 있다. 다만 공감하고 약속해달라는 의사를 표현하는 어른다운 방법을 몰랐을 뿐.

이 책을 보면서 새삼 그 시절 내가 친구의 아픔에 공감하던 순간이 생각나기도 했다. 대체로 중학생 이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전엔 신이치가 엄마를 사고로 잃은 나루미를 대할 때 겉으로 보여지는 것처럼 괜찮은 것이겠지, 생각하듯 그들의 상처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시간을 한참 건너 뛰어 이제는 내가 겪었던 종류의 고통을 똑같이 누가 당하게 되었을 때 자연스레 눈물이 앞서는 것은 아마도 세월의 누적만큼이나 공감대가 넓어졌다는 것의 반증일 터이다. 작가는 신이치, 하루야, 나루미가 어떻게 서로 꼭꼭 숨겨둔 상처를 알게 되어 그것에 대응하고 변화하는지를 심도있게 그려내면서 어른이라는 성장이 진행되고 있는 풍경을 서정적으로 완성해 내었다. 쉬운 일이 아니다. 작가도 언급했듯이 어른보다 어린이의 과정을 그리는 것은 더 어렵다. 지나왔기 때문에 뻔히 아는 것이 아니고 지나왔기 때문에 잊은 것들이기 때문에. 하지만 바로 어렵기 때문에 어린이를 선택했고 그 선택은 다시 어른을 돌아보게 하였다. 나는 이 책을 통해 한 명의 어린이와 그가 자라 지금의 어른이 된 나를 천천히 기억할 수 있었다. 마치 은은하게 빛나기로 서로 주고 받을 수 있는 반딧불처럼, 이 책은 누구든 성장해온 자신을 기특하게도 격려해내는 매력이 있었다.


어른이 슬퍼지는 이야기

아쉽게도, 나는 어른이 되었다. 그런데 나는 왜 자꾸만 마음에 바람이 부는 걸까. 마음 깊은 어느 곳에서 종소리가 들려오는 걸까. 혹시 어른이 된 것이 기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돌이켜보니 어른이 더 이상 목표가 되지 않았을 때 나는 어른이 되어버린 것 같다. 그렇다면 신이치, 하루야, 나루미 이 삼총사는 얼마나 더 있어야 어른이 될 수 있을까. 그들도 어른이 되고나면 나처럼 슬퍼지게 될까.

이 책에서 가장 큰 어른은 할아버지였고 그는 어른을 마치고 돌아갔다. 어찌보면 소설에서 희생되며 신이치의 소원을 들어주신 것이니 그가 소설의 소라신이 된 것 같기도 하다. 허나 그가 아이들에게 훌륭한 답을 주고 떠난  것은 아니다. 우리 역시 어른이라고 정답을 말해줄 수는 없다. 생각해보니 그건 참 슬픈 이야기였다. 작가가 치밀하다고 느낀 것은 바로 신이치의 시선으로 던져진 어른에 대한 의문들에서였다. 신이치는 어른들의 행동과 말의 의미를 곱씹어 보는 과정에서 자신이 이해하기 힘든 이유를 질문으로 남겨둔 것이다. 예를 들어, 아빠는 죽는 날이 다가오는 것을 알았을 것인데 왜 글러브를 사러 가자고 ‘약속’한 것인지, 나루미의 아빠를 만나고 들어오는 엄마를 보고는 왜 어른이 초등학생인 자신에게 (엄마가 아들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인지 어째서 자신에게 ‘사과’하지 않는 것인지 의아해 한다. 나루미 역시 사고로 죽은 엄마를 떠올리면 사람은 ‘죽지 않으면 안 될 이유’가 있는 것인지 하필 내가 ‘엄마가 없는 이유’는 무엇인지 애꿎은 허공에다 질문한다. 신이치는 어른이면서도 아이들에게 자신있게 대답하지 못하고 모르는 일이면서 모두 그럴듯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게 된다. 신이치가 종합해본 어른들의 세계란 ‘이렇게 싫은데도, 이렇게 숨이 막히는데도, 낯빛 하나 바꾸지 않는 사람들만이 살고 있는 세계’이며 어른들의 태도란 ‘감정에 이끼가 몇 겹으로 들어붙은 듯이 멍한’ 감각으로 정리할 수 있었다. 대체로 어른들이라 함은 무엇도 모르지만 당당하고 무엇을 못 느끼도록 무감각한 존재였던 것이다. 나는 신이치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이 그렇게 가슴아플 수가 없었다. 내가 아이였을 때 제일 짜증나고 화가 나는 것은 어른들은 대체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우리집은 친가 외가 할 것 없이 늘 모임이 많았는데 친척들은 대부분 어린 나와 한 약속을 우습게 여기는 경향이 있었고 나는 그러한 어른이 되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물론 내가 어른이 되고 보니 나 역시도 아이와 한 약속을 아이의 기대만큼 잘 지켜주고 있는 것인지는 자신이 없다. 왜 어른이 되면 약속을 지키지 못할 이유가 많아지는 것인지 애석하게도 나는 어른이 되고 나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아이였을 때 그렇게 이해할 수 없었던 이유였지만 어른이 된 나는 부러 그것을 밝혀야 할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 사실이 화가 날만큼 슬퍼진다. 아이가 어른이 된다는 건 이렇듯 그 많던 이유가 없어지기에 슬퍼지는 일이 아닐까. 나도 그렇게 해서 어른이 되었으니 아이도 그럴 것이라 믿는 이 마음이 서글프다.

어른은 이미 자기 자신의 심판관이다. 그것만으로 어른은 충분히 슬픈 존재인 것인다. 신이치는 하루야를 꾸짖는 선생님이 죽으면 좋겠다 생각하고 그런 자신도 죽어버리고 싶어한다. 친구를 불행하게 해달라고 소원을 빌고 난 후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이 싫어졌다고 했다. 나루미 역시 신이치가 처음엔 엄마를 죽게 한 자의 가족인 것이 싫었고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도 싫어했다고 말한다. 타인의 상처를 외면하는 것은 어른의 태도가 아니라는 심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이 시기가 중요한 것이 바로 타인의 고통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역으로 타인을 고통스럽게도 할 수 있다는 것 아닐까. 그 유명한 사르트르는 ‘타인은 나의 지옥이다’라 말했다. 인간이란 어쩔 수 없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매순간 ‘검증’받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인간을 만들어 가는 것은 결국 타인이 아니고 자신이다. 타인이라는 지옥이 있기 때문에 나 자신이라는 천국이 더 소중한 것 아닐까. 그런데 누구나 자기 자신이 천국이 되는 행운을 얻는 것은 아니다. 할아버지는 말한다. “결국은 자기한테 되돌아오는 법이야.”

“모든 일에는 반드시 이유라는 것이 있다. 세상일 전부에 분명히 이유가 있어. 내 다리가 잘린 것도, 그때 그 녀석을 제대로 찾지도 않고 도망쳤기 때문이야. 제일 먼저 도망쳤기 때문이지. 뭐든지 결국은 말이다...“ 189p

할아버지가 과거나 전생의 인연에 따라 훗날 길흉화복이 결정되어 진다는 인과응보(因果應報)의 논리를 주장하는 건 아이들에게 윤회사상을 강조했다기 보다는 언제나 현세에 ‘선행’을 하라는 일본 특유의 가정교육이라고 본다. 지금 세상에서 선행을 해야 누구에게도 원한을 사지 않고 조상에도 면목이 서고 환생하더라도 인간으로 올바르게 살 수 있다고. 절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어릴 때부터 교육받아온 일본인의 정서와도 연결되었다는 느낌이다. 할아버지는 또 옛날분이다보니 어른됨의 정도에 있어서도 남녀의 차등을 두신 듯하다.

“여자는 여자아이일 때부터 여자지만 말이다, 너는 지금밖에 남자아이가 아니란다. 여러 가지를 해보렴.” 168p

나는 이 말이 남자아이는 어른이 되기가 더 어렵다는 말로 들렸다. 그런데 그 말은 역으로 어른이 되기 전에는 그동안 무엇이든 이해해줄 수 있다는 의미로도 느껴졌다. 또 그 대신 남자는 그렇게 어려운 어른이 되고 나면 더욱 책임지고 짊어져야 할 것이 많아진다는 말씀으로도 들렸다. 소라게의 껍질을 속살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로 여기기(여성적 시각)보다는 평생토록 짊어지고 가야할(남성적 시각) 짐으로 표현하는 작가의 의식에서도 이제 소년의 시절을 지나온 어른된 묵직한 책임이 느껴졌달까. 그래서인지 작가는 남자아이인 신이치와 하루야보다 여자아이인 나루미를 더 어른스럽게 위치시켰던 것은 아닐까. 모든 걸 다 알고서도 아무말 하지 않은 나루미는 ‘그러는 편이 어른이라고 생각했다’ 고 하지만 ‘어른이 되는 건 정말 어’렵다고 말한다. 하루야는 칼을 들고 덤벼든 자신에게 쫄아버린 아버지를 보고 ‘어른도 약’하다고 말한다. 어른을 말하는 여자와 남자친구를 둔 신이치만이 어떤 이유에선지 변화한 생각을 말하지 않았다. 그건 꼭 작가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라는 생각이다. 어른이 되는 건 어렵고 그렇게 된 어른도 약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아팠기 때문에 어른이 되는건 아닐까 하고. 그렇다면 어른들도 아픈 것이 아닐까, 내심 나는 이렇게 기대를 한다. 그래, 어른이기 이전에 인간은 모두 약한 것이다. 더 키가 크고 더 아는 게 많아져도 완벽한 인간은 되지 않듯 어른은 완성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이 책을 덮고서 씁쓸하게 깨우친 어른된 진리이기도 할 것이다.


어른이 되기 위한 이야기

그렇다면 이미 한 번 어른이 된 내가 어른답게 어른을 살아가는 방법은 무엇일까. 혹시 어른도 자꾸 갱신하고 새로운 자격을 얻어야 하는 존재가 아닐까.

다행히도 이 책은 인문서적이 아니면서도 내게 소라게라는 실마리를 제공했다. 소라게는 어떤 생물이 죽고서 남긴 딱딱한 껍질을 자신을 보호하는데 사용하는 편리한 공생의 주인공이다. 그런데 이 껍질은 자랄 때마다 바꾼다고 한다. 성장이 바로 외피를 결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외피가 더 커지고 단단해졌다 해서 껍질속에서 바닷가로 홀로이 빠져나왔을 때의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닌 것이다. 언제나 껍질속에서 두려움을 극복하려 노력할 뿐인 것이다. 신기하게도 그것은 인간이 어른이 되는 과정을 닮았다. 우리는 어른을 성인(成人)이라 하는데 일본은 어른을 대인(大人)이라 하고 중국은 장자(長者)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성인(成人)’에 대한 기대가치가 높아 지혜와 덕이 뛰어나 존경받을 만한 ‘성인(聖人)’을 ‘어른’이라 여기는 듯하다. 어른이 된다하는 것에 이미 어른 노릇이나 어른 값을 포함시켜 어른답다는 평가를 덧붙이고 싶은 것이다. 단순히 경험많고 세상일에 익숙한 어른은 나같이 나이든 사람에 불과하다. 저 유명한 니체는 다행히도 사람을 ‘아직 고정적으로 완성되지 못한 동물(Das noch nicht Festgestellte Tier)'이라 말했다. 사람은 고정적인 형식의 모습을 가지고 있지 않을뿐더러 완전한 모습도 불분명하기에 그저 일생동안 ’되어가는 과정‘일 뿐이라는 그의 말은 어쩐지 우리 어른에게 희망으로 느껴진다. 이 말에 (허락없이)사람을 어른으로 동물을 사람으로 바꾸어 보자. ’어른은 아직 고정적으로 완성되지 못한 사람‘, 틀린 말이 아니지 않은가. 죽을 때까지 한 번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보지 못하는 존재가 어른인 것, 그러므로 사람으로 완성되기 위해 죽을 때까지 노력해야 하는 존재. 어른은 아이의 완성형이 아니고 인간의 진행형인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신이치의 나이를 몇 번이나 지났으면서 아직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확인하지 못한 채 가슴깊은 곳에서 피어나는 잔혹의 덩어리만 남몰래 키우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어른이 되는 것이 종착점이 없는 여행이라면 우리는 매순간 어른답고 더 오래 어른값을 하기 위해 얼마든지 미쳐 놓쳐버린 미늘을 제거해야 하지 않을까. 누군가 라이터 불로 내 안온한 게 껍질을 지지더라도 당당히 뾰족한 집게발을 들고 맨몸으로 꿋꿋하게 자극을 이겨내야 하지 않을까.  피로 얼룩진 집게발을 들고서도 비바람 몰아치는 바닷가를 향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튀어나온 내 몸뚱아리가 어스름한 달빛에 비쳐진 기괴한 형체로 드러난 어느 날, 밤하늘 보다 더 뚜렷하고 짙은 내 그림자를 발견하게 된 그 날 우린 할아버지의 구원과도 같은 유언이 생각나지 않을까. 어른이라는 완성을 위해 우린 그렇게 소년처럼 울어야 하지 않을까.

“달밤의 게는 글렀어. 달빛이 말이다, 위에서 내리 비쳐서.... 바다 속에 게의 그림자가 생기거든. 자신의 그 그림자가 너무나 추해서...게는 무서운 나머지 몸을 움츠리지...그러니까 달밤의 게는 말이야.”   391p



<덧붙임>

아름답고도 놀라운 이야기였다. 이 책을 덮고서 나도 모르게 한명의 일본작가가 반사적으로 떠올랐다. 알고 보니 소설을 홍보하는 메인카피에도 ‘제 2의 하루키’라는 문구가 있었다. 작년에 방대한 분량의 1Q84 전권을 몰아서 읽은 후 비로소 하루키에 대해서 마음을 열게 된 순간이 떠올랐다. 무엇보다 그가 세상에 던지는 질문이 뇌리에 가슴에 와 닿았기 때문이다. 1Q84는 그가 작가생활 30주년이 다되어 발표한 소설이었다. 문학인으로서는 성인에 해당되는 경력이므로 ‘어른’의 수준에 오른 작품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미치오 슈스케는 지금 삼십대 중반이다. 작가경력을 보니 아직 십년도 채 되지 않았다. 슈스케가 사람의 인생에서는 벌써 ‘어른’이 되었겠지만 문학인생에서는 아직 ‘어른’이 되려면 많은 시기가 남아있다는 뜻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직은 그의 유소년기라 할 수 있는 이 작품이 퍽이나 놀랍고 일본문단에서 흥분하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나이가 먹었다고 무조건 어른이 다 되는 것이 아니듯 문단의 경력이 쌓였다고 모두다 어른된 작품을 내는 것은 아닐 것이다. 허나 이 작품은 분명 아직 어른이 되지 않았음에도 충분히 어른스러운 작품이었고 그렇기에 그가 어른의 수준에 이르러 어른다운 작품을 보여줄 날이 멀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아직은 열 살도 되지 않은 문학적 자아가 무궁무진하게 성장하여 하루키처럼 독특한 세계관으로 세상을 응시할 날도 얼마남지 않은 것이다. 작가는 아마도 신이치가 호된 성장통을 겪었듯 똑같이 문학의 성장통을 앓고 있을 터이다. 세계무대에서 발견한 일본인의 위치발견 및 재인식이 하루키의 ‘원더랜드’였다면 나약한 인간이 어떻게 세상이라는 독을 헤쳐나와 성숙한 어른으로 성장되는지 그 완성된 ‘미치오 매직’을 설레게 기다려본다.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 열두 살짜리 아이의 눈과 귀로 나는 미치오의 바위같은 신음과 울음같은 종소리에 귀기울 일 것이다. 이 책의 수익금과 리뷰대회 상금의 일부를 일본 지진복구를 위한 성금으로 기부할 것이라는 출판사측의 주최의도가 이 책을 사고 리뷰를 쓰게 하는데 한 몫을 했다. 비록 수상하지 못해도 순수한 선의에 참여하고 싶었다. 나로서는 일본문학을 읽고 글로써 그들을 사유해보았다는 것이 문화적 기부라 생각한다. 이 책은 하루키 문학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정서가 녹아든 보편적인 인간성을 아이들 시선으로 잘 전달하는 작품이다. ‘가장 일본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그들의 믿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했다. 슈스케처럼 젊은 작가의 약진이 부러운 시점이다. 슈스케가 문학의 어른이 되어갈 때 우리도 마냥 아이처럼 머물러서는 안 될 것이다. 오늘같은 문화적 기부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가장 한국적인 문학이 가장 세계적인 문학’을 이끌 그날을 위해 우리의 젊은 작가들에게도 힘을 실어주는 일일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2011년 나오키상 수상작 <달과 게>를 읽었기에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어른된 독자로서의 예의는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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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04-16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단한 작품인가 보군요.
우리나라에선 최진영이란 작가가 난린가 본데,
저의 지인 한 분은 이 사람이 다음 작품으로 뭘 내놓을지,
과연 내놓고 전작만 할 건지 의문을 갖더군요.
그러니 처음부터 두각을 나타낸다는 건 어느만큼의 부담을 안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도 읽을까 하다 포기했는데, 그냥 읽을 걸 그랬습니다.
나중에라도 꼭 읽어보도록 하죠.
저는 1큐84를 1권만 읽고 아직도 못 읽고 있네요.
예전에 가졌던 하루키에 대한 부담인 건지,
다른 책에 치인건지 아무튼 그렇습니다.ㅠ

한사람 2011-04-16 22:54   좋아요 0 | URL

한겨례문학상 받은 작가 말하는 건가요?
그정도는 아니던데 ㅋㅋ

이 책은 의외로 건진 책이어요^^
몇가지 반복되는 지루함이 없지않지만,
이야기 흡입력이 높이 살만하구요..무엇보다 주제전달이 미학적인게 전 좋더라구요

일큐팔사를 능가하지 싶어요, 나중엔...
그런데 처음에 너무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 후속작이 늘 부담될거 같아요
모든 문학상은 다 휩쓸었던데..

네오 2011-04-24 0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 좋게보셨군요~ 솔직히 저도 리뷰는 썼지만 (신중하게 말해야 겠지만) 나스메 소세키나 미시마 유키오만큼 좋은 소설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요~ 반면에 최진영은 지지할만한 소설이었습니다~ 그녀의 파멸적인 세계관이 저에게는 매우 감미로워 거든요 ㅋ

한사람 2011-04-24 07:26   좋아요 0 | URL

기대를 전혀 안하고 보았어요, 일본작가들 글을 거의 읽지 않아서 솔직히 제가 비교할수 있는 글은
하루키밖에 없었구요 ㅋㅋ
원래 문학도도 아니었고 경력에 비해 이룬 성취가 커보였어요
또 개인적으로 서정적인 글을 좋아라 하구요

최진영 작가에 대한 기대가 그 정도인지는 몰랐어요
문학상 수상작은 대부분 기획작이라는 생각이 많아요..
계획된 글(물론 다 계획된 것이지만ㅋ)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거든요
하지만 그들중에서 인상이 강렬했던 기억은 분명 기대쪽이겠죠??

네오 2011-04-26 18:25   좋아요 0 | URL
음~ 그동안의 많은 일이 있었네요~ 음음~ 오랫동안(한 6개월) 글을 본사람으로서 한사람님 응원할께요~

2011-04-26 18:2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