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3인의 성공기 | 1인기업가 공병호 박사
남들 쉬는 연휴에도 하루 10시간 일하는 억척파 힘들지만 나는 자유인 … 자기 페이스 유지가 중요

대한민국 A급 강사, ‘자기경영’분야에서 베스트셀러 제조기라는 별명을 가진 공병호 박사. 안정된 조직을 뛰쳐나와 자신의 이름을 건 공병호경영연구소를 차린 지 정확히 10년이 된 지금, 1인기업가로서 대표적인 성공모델이 됐다. 공 박사의 홀로서기 10년을 통해 ‘인생 2막’의 성공 원칙을 추적했다.







2009년 한 해 강연 257회. 2000년 이후 10년간 저서 71권. ‘공병호경영연구소’ 외에 공식 운영 사이트 5~6개. 직접 운영하는 자기경영아카데미 4개.’공병호경영연구소의 공병호(50) 박사 프로필이다. 프로필만 놓고 보면 그는 분명 성공한 인물이다.

공 박사가 90분 외부강연을 하고 받는 강연료는 평균 200만~300만원. 하루 두 번 강의하면 그 수입이 보통사람의 월급이 된다. ‘공병호아카데미’를 통한 하루 수입만 1000만원이다. 올해는 공 박사에게 의미 있는 해다. 하늘의 뜻을 안다는 지천명의 나이에 들어선 해이자 그가 조직을 떠나 1인기업가로 서기 시작한 지 정확히 10주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남들은 바쁘게 살아온 인생을 정리하기 시작할 50의 나이. 그의 인생은 이제 막 피어난 꽃처럼 화려하다. ‘공병호’라는 브랜드 하나로 책 저술뿐 아니라 각종 언론매체에 칼럼을 기고하고 자기경영 전문가로서 수많은 인터뷰를 요청받는 유명인이 됐기 때문이다. 1월5일 오후 서울 강서구 가양동의 자택을 찾았을 때도 공 박사는 이미 방송사 취재팀과 ‘새해 경제전망’을 주제로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192m2(58평)의 아파트는 그의 자택 겸 집무실이다. 사방 벽면 전체가 빼곡하게 책으로 둘러싸인 거실 한가운데 커다란 탁자와 소파가 놓여 있었다. 어느 때든 이 공간은 서재가 되기도 하고 인터뷰 장소가 되기도 한다. 붉은 넥타이에 감색 정장을 한 그는 나이에 비해 훨씬 젊어 보였다.

스무 살 청년의 열정과 중년남성의 안정감을 모두 갖춘 모습이었다. 비결을 물었다.“홀로서기에서 성공할 수 있는 가장 큰 비밀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진 하루 24시간을 잘 활용하는 것입니다. 오늘만 해도 새벽 2시에 자고 4시 반에 일어났습니다. 2시간 반을 자고 일어난 이유는 새벽 5시 반 강연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월간중앙> 인터뷰가 오늘의 네 번째 인터뷰입니다. 저의 하루는 보통 새벽 3~4시에 시작합니다. 일어나자마자 바로 집필을 시작합니다. 매일의 강연 준비는 주로 차에서 합니다. 제가 독립해 ‘호사’를 누리는 단 한 가지는 운전기사를 두었다는 것입니다. 차로 이동하는 시간이 많은데, 그 시간이 아까워서죠. 최근 현대자동차와 삼성전자에서도 강연을 의뢰해왔습니다. 중요한 강연이어서 팸플릿과 주요 내용을 계속 구상 중입니다. 숨가쁘기는 하지만 힘들지는 않습니다. 생활을 체계화해 이런 생활에 이미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죠.”

하루 24시간 그는 쉬지 않고 계획에 따라 움직인다. 인터뷰 하루 전인 1월4일. 새해 첫 출근을 하는 날 서울에는 100년 만의 폭설이라는 큰 눈이 내렸다. 직장인들이 출근대란을 겪고 온 도시가 마비되던 그날 아침에도 공 박사는 새벽 5시에 일어나 강남 모 기관에서 있었던 일정을 어김없이 소화하고 자신의 미니홈피에 첫 출근에 대한 소회를 남겼다.

새벽 3~4시 기상은 조직생활 때부터 몸에 밴 습관이다. 일찍 일어나 집필하고, 강연을 나갔다가 오후 10시면 어김없이 집에 들어와 잠을 청하는 규칙적인 생활. 술·담배는 절대 하지 않는다. 운동은 시간이 없어 집에서 틈틈이 러닝머신을 이용한다. 이 룰을 지키지 못했다면 그의 말대로 ‘공병호의 제2의 인생’은 성공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저는 지금 자유롭습니다. 제 스스로 돌아봤을 때 꽤 괜찮게 나이를 먹어가는 것 같아요. 누구에게 보고하고 명령받을 필요도 없고, 내가 만든 의견과 주장에 대해 누군가를 의식할 필요도 없습니다. 제가 어떤 조직이나 기관에 속해 있다면 지금처럼 사는 것이 힘들었을 거예요. 지금 제게 주어진 자유는 젊었을 때 열심히 준비한 인생을 살았기 때문이라고 자부합니다. 누군가 새로운 인생을 지금 다시 시작하고 싶다면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먼저 되돌아봐야 합니다. 그 이후 자유를 유지하는 비결은 스스로 정한 자기 인생의 스케줄을 잘 지키는 것이죠.”

1인기업가로서 성공 가도를 달리는 그도 안정된 조직을 박차고 처음 세상에 나와 홀로 섰을 때는 막막했을 것이다. 스스로 당당하고 괜찮은 인생을 살고 있다는 이 남자. 끝없는 자신감의 뿌리가 궁금했다.

 

모든 성공의 시작은 ‘두려움’에서 출발






공 박사는 잘 알려진 대로 경제학박사다. 1979년 고려대 경제학과에 입학해 1983년 졸업하고 그해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에 있는 라이스(Rice)대 박사과정에 입학 후 4년째 되던 1987년 경제학 박사학위를 마쳤다.

이후 1988년부터 1990년 5월까지 국토개발연구원에서 근무했다. 그가 이코노미스트로서 확실한 토대를 갖출 수 있었던 곳은 한국경제연구원이었다.

1990년 6월부터 1997년 3월까지 거의 7년 동안 연구위원·산업연구실장 등을 거치면서 자유주의자로서 기본적 소양과 토대를 굳힐 수 있었다. 평소 시장경제원리의 홍보·교육·계몽·연구사업을 목적으로 하는 싱크탱크 설립을 구상했던 그는 1997년 4월 자유기업센터 초대 소장을 맡기도 했다.

2000년 2월에는 개인후원자 300명과 기업후원자 150명으로부터 기부금을 받아 총 150억원을 웃도는 기금(기존 기금 30억원 포함)을 바탕으로 재단법인 자유기업원을 출범시키는 데 성공했다. 공 박사의 돌파력과 추진력이 십분 발휘됐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로부터 1년 후인 2001년. 일찍부터 꿈꾸었던 개인 브랜드를 내건 경영연구소를 설립하기로 결정한다.

공병호경영연구소의 출범이었다. 미국의 피터 드러커, 일본의 오마에 겐이치, 프랑스의 자크 아탈리와 기 소르망 등을 벤치마킹하되 경영과 경제 전반에 대해 대중적 글을 쓰면서 강연·기고·방송·경영컨설팅 등으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 나가겠다는 꿈을 담았다.

- 회사를 나오게 된 결정적 계기는 무엇이었습니까?

“자유기업센터를 독립시키는 과정에서 젊은 부자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들과 만남은 제게 신선한 충격과 동시에 가치의 위기를 느끼게 했죠. 세상의 변화를 감지한 것입니다. 지금껏 제가 살아온 삶이 전부가 아니라는 회의가 들었어요. 경제력이 곧 파워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거죠. 경제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잖아요? 제가 가지고 있는 젊음의 힘을 공적 임무에만 수행하는 것은 시간낭비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성공의 요건이 꼭 ‘돈’을 많이 버는 것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베이비붐세대로 태어났습니다. ‘권욕주의’에 사로잡힌 사회 분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죠. 시골 출신의 고려대 졸업자로서 입신출세의 욕망이 강했습니다.”

-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나요?

“제 장점이자 단점은 일단 무엇인가 하기로 결심한 이상 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세월이 흘러 지난날을 돌아보니 그동안 제가 도전해 성공했던 모든 일이 ‘두려움’을 감수하지 않았다면 얻지 못했으리라는 것을 알았죠. 두려움을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공 박사는 고려대 재학시절 중앙도서관에 걸려 있던, 산악인들이 매킨리봉을 오르는 사진을 좋아했다. 정상을 향해 천천히 오르는 그들의 모습을 통해 자신이 앞으로 살아갈 인생의 모습을 떠올려보고는 했다는 것. 사람의 캐릭터나 본질은 크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 공 박사의 생각이다. 이 때문에 평상시 ‘습관’이 중요하다는 말도 했다.

“조직에 있든 사회에 홀로 나오든, 그 사람이 매사 어떻게 삶을 가꾸어 왔는지가 다음 인생의 모습을 결정합니다. 지금의 제 부지런한 습관은 어릴 때부터 몸에 밴 것입니다. ‘대박’을 노리기보다 꾸준히 무언가를 만들어 내고 성실하게 일하는 습성이 새로운 인생길에 들어설 때 자신에 대한 ‘해낼 수 있다’는 강한 믿음을 부여하는 것이죠. 결국 믿을 것은 자신밖에 없거든요.”

 
공병호 박사가 말하는 ‘인생 2막’ 성공 원칙
■ 10-10-10의 단계로 인생을 짜임새 있게 설계하라
■ 인생 계획의 마감시간을 반드시 정하라
■ 남의 이야기에 솔깃하지 말고 내 안의 북소리에 민감하라
■ 지금의 ‘습관’이 10년 후 미래를 책임진다
■ 자신과의 약속은 메모해 두고 매일 지켜라

조직의 생존논리에 섭섭해하지 마라

공 박사는 그동안 ‘자기경영’ 관련 서적을 수도 없이 펴냈다. <미래 인재의 조건> <공병호의 초콜릿> <1인기업가로 홀로서기> <공병호의 자기경영 노트> 등. 최근에 펴낸 <공병호의 내공>도 자기경영서의 일종이다. 그는 자신의 성공 이야기를 책에 소개하며 사람들에게 새로운 인생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 도전하라고 말한다.

그가 개인 사이트나 책 속에서 꾸준하게 홀로서기 성공 법칙으로 강조하는 원칙 중 하나가 ‘10-10-10’ 원칙이다. 인생을 크게 10년 단위로 나누어 항상 10년 후의 삶에 대비하라는 것이다. 공 박사는 새로운 10년을 맞는 2010년 1월4일 자신의 미니홈피에 ‘첫 출근길’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10-10-10’의 원칙을 다시 한번 언급했다. 그가 올려 놓은 글을 보자.

“‘10-10-10’이라는 숫자가 떠오른다. 내 인생에서 처음 ‘10’은 고교시절·대학시절·유학시절을 합쳐 얼추 10년 동안의 준비기간이 있었다. 다음의 ‘10’은 한두 번 정도의 전직을 통해 자리를 잡을 수 있는 직장을 잡고 그곳에서 전력투구하면서 보낸 10년이었다. 전문가로서 평생을 살아갈 수 있는 지적 토대와 내 자신의 브랜드를 만들어 내는 기간이었다. 끝으로 ‘10’은 2001년부터 시작되는 10년으로, 조직생활을 청산하고 자신의 일을 통해 스스로를 만들어 가는 10년이었다. 그동안의 삶과는 완전히 다른 또 다른 10년이었고, 그 10년의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앞과 뒤, 좌와 우를 둘러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시간이었다.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지만, 지나온 30여 년의 세월 동안 10년 터울로 삶의 굵은 매듭을 지어왔다. 이제 나이는 장년기에 접어 들었고 ‘앞으로 10년을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내 자신에게 진지하게 던져보게 된다. 젊은 날보다는 불확실함은 훨씬 줄어들었지만 반면에 선택 가능한 대안들도 한층 줄어들게 됐다. 훤히 보이는 선택 대안들 가운데 자신의 북소리에 맞추어서 충실하게 살아가는 일이 내 인생의 남은 과제다. 10년이란 시간은 물리적으로는 그렇게 긴 시간처럼 보이지 않지만 한 사람의 삶에 있어서는 굵직한 족적을 남길 정도로 긴 시간이었다. 그렇다면 앞으로 10년도 분명히 그럴 것이다.”

공 박사는 명예퇴직이나 은퇴를 하고 나서야 노년을 계획하는 것은 무책임한 행동이라고 강조했다. 돌발사고는 예측할 수 없으나 자신의 은퇴 시점은 누구나 예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회사는 언제든 나를 내보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조직입니다. 조직의 생존논리에 대해 섭섭해하면 안 돼요. 오너가 아니고서야 능력이 안 되면 누구나 나갈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이런 명백한 이론 속에서 사는 우리가 준비하지 않는 것은 본인의 인생과 가족 부양의 책임에서 일종의 직무유기에 해당합니다.”

문제는 성공할 확률이다. 공 박사만 해도 한국사회에서 명문대 출신에 미국유학을 다녀온, 소위 인프라를 갖춘 인재 아닌가? 다른 사람들보다 성공할 확률이 높은 축에 속한다. 공 박사 자신의 기본 ‘배경’이 성공한 홀로서기 사례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지 의문을 제기하자 손사래를 친다.

“제게도 암담하고 가슴 아픈 시기가 있었습니다.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어요. 학벌이나 그동안 조직 안에서 쌓아왔던 인맥은 조직을 떠나자 순식간에 휴지 조각이 돼버렸습니다. 독립 당시 가족도 외국에 나가 있어 제 주변에는 정말 아무도 없었습니다. 외로움은 둘째치고 경제적 압박감이 이루 말할 수 없었죠. 아이들 교육비는 나가는데 일정한 소득이 없어 가장으로서 심각한 위축을 느꼈습니다. 앞으로 믿을 것은 나 자신밖에 없다는 사실을 처절하게 깨달은 시기죠. 내가 바로 서지 않으면 내 인생은 여기서 막을 내린다는 생각에 정신을 가다듬었습니다.”

공 박사는 홀로서기에 성공하기 위해 먼저 자신만의 룰을 만들었다. ‘허세를 부리지 않는다’ ‘돈을 절약한다’ ‘하루 24시간을 쪼개 나만의 스케줄을 짠다’ ‘자리 잡을 때까지 가급적 저녁약속을 하지 않고 시간을 아껴 쓴다’ 등.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이었습니다. 홀로 사업을 시작한 후 밑바닥부터 다시 올라간다고 생각했어요. 37세부터 출세해 3년 동안 운전기사가 딸린 가장 좋은 승용차를 타고 다녔습니다. TV 출연도 여러 번 했죠.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홀로서고도 누군가 나를 우러러 봐주기를 바라는 것은 오산입니다. 사회에 나오면 그 모든 배경이 물거품처럼 사라지기 때문이죠. 조직을 떠나 1년은 택시 한 번 타본 적이 없습니다. 마을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강연을 다녔습니다. 당시 저의 강연료는 고작 30만원이었어요. 인생을 바닥부터 다시 포맷하자고 굳은 결심을 했습니다. 새로운 공병호로 다시 태어나기로 결심했죠.”

대부분의 직장인이 휴식을 취했던 올 새해 연휴 3일간 공 박사는 하루 평균 10시간 이상씩 책상 앞에 앉아 일에 매진했다. 남들이 쉴 때 같이 쉬지 못하는 것 역시 1인기업가의 삶이다. 믿는 것은 자신뿐인 삶. “매일 채찍질하고 긴장하며 살아야 하는 삶이 힘들지 않으냐”고 묻자 고개를 저었다.

“대신 자유를 얻었잖아요? 노력한 만큼 받는다고 생각하면 힘들지 않습니다. 어릴 때부터 바닷가에서 멸치 잡는 사업을 해온 부친을 보고 자랐기 때문에 인생은 낭만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았어요. 부친은 바다에 상어가 나타나면 단 한 번의 실수로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삶을 살아내셨습니다. 조직 안에서 꼬박꼬박 월급을 받을 때는 못 깨달았던 긴장감을 조직에서 나오면 뼛속 깊이 깨닫게 됩니다. 누구나 조직에서 영원할 수는 없습니다. 빈틈없이 준비해 위기에 대응할 것이냐, 준비 없이 위기에 휘청댈 것이냐는 순전히 자기 하기에 달려 있죠.”

“자신만 무너지지 않으면 살 길은 반드시 있다”

유명한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강사인 그에게도 고민이 있다. 평균 한 해 5권의 책을 내고는 있지만 그도 매년 베스트셀러에 준하는 책이 나오지 않으면 초조해지기도 한다. 남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리기 때문이다. 이때 남의 평가나 목소리에 심하게 흔들리면 홀로서기는 위태로워진다.

“내 북소리에 맞춰 춤을 춰야지, 타인의 북소리에 맞춰 춤을 추다가는 아무 것도 못하고 주저앉게 됩니다. 내 페이스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죠. 자기 인생을 잘 경영하는 것은 철학자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과 같아요.”

일단 조직을 벗어나면 ‘남의 이야기를 듣지 말라’는 것이 공 박사의 조언이다. 조직에서 나오면 소위 ‘사기꾼’이 많다는 것. 그는 많은 사람이 고수익·동업·호기라는 말에 이끌려 많은 돈을 잃는 것을 수없이 지켜봤다. 특히 대부분의 동업 요청은 믿을 것이 못 되니 냉정하게 귀를 막으라고 일침을 가했다.

인생 계획의 마감시간을 정하는 것도 중요하다. 재기에는 준비기간이 필요하고, 언제까지 이 목표를 해내겠다는 결심이 없으면 목표나 계획은 금세 흐지부지되고 말기 때문이다. 공 박사의 10년 전 일기장에는 10년 후 자신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적혀 있다. 자신의 인생 스케줄이 빼곡히 적힌 일기장을 그는 지금도 가지고 있다.

“저는 10년 전 일기장에 적어 놓았던 2010년 목표매출액을 이미 달성했습니다. 마지막까지 나를 지켜주는 것은 ‘자기경영’입니다. 사람들이 새로운 길을 걸을 때 실패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자신이 스스로 무너지기 때문이죠. 자신만 무너지지 않는다면 살 길은 반드시 있습니다. 초조·불안·조바심·두려움. 이런 것들은 삶을 사는 데 필요악입니다. 자기 사업을 하는 이는 항상 두렵지만 스스로 극복해나가야 합니다.”

공 박사가 사는 서울 강서구 가양동 아파트단지에는 유난히 은퇴한 노인이 많다. 그는 가끔 무료하게 다니는 그들을 지켜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고 했다.

“노년의 인생은 마치 수영을 배우는 것과 같아서, 잘사는 법도 스스로 깨우쳐야 합니다. 세상은 빠른 속도로 변하고 평균수명도 늘고 있습니다. 베이비붐 세대는 앞으로 가야 할 세월이 온 세월만큼 남았습니다. 앞으로 30년, 40년의 세월은 완전히 새로 시작이 가능하다는 것이죠. 주춤거릴 여유가 없습니다.”

마음가짐만 가지고 제2의 인생에 도전하기에는 다소 무모해 보인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물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는 본인이 해왔던 분야를 바탕으로 일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분야든 내공을 쌓은 사람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죠. 오랫동안 조그마한 포장마차를 해온 사람도 우리가 책으로 배울 수 없는 엄청난 노하우를 가지고 있습니다. 동떨어진 분야는 그만큼 위험이 크다는 것이죠. 젊을 때처럼 무모한 도전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본인이 해왔던 분야에서 새로운 일을 찾거나, 꼭 그 일이 아니더라도 그 분야에서 해본 경험을 바탕으로 익숙한 것을 살릴 수 있는 일을 모색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공 박사 역시 자신이 기존에 해오던 일을 기반으로 일어선 대표적 경우다. 30대에 글을 많이 써본 경험과, 연구소에 있을 때의 수많은 강의 경험이 홀로서기를 하는 데 자신감을 주었던 것.

“사람들은 대부분 퇴사 후 두 가지 기로에서 고민하죠. 그 중 하나는 다른 회사에 들어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특히 후자의 경우 대부분의 사람이 휴식기를 가지며 새로운 일을 구상하는데, 이 때 휴식은 독이 되기 쉽습니다. 휴식을 취하기에 40~50대의 1~2년은 너무나 아까운 시간이죠. 감각을 잃게 하는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처럼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저 역시 퇴직 후 6개월간 외국에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앞으로의 인생이 불투명했기 때문에 휴식기간을 과감히 건너뛰었습니다.”

아버지의 홀로서기는 자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현재 공 박사의 두 아들은 모두 미국유학 중이다. 방학 때마다 한국에 와 집에서 일하는 아버지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경제교육을 받았다.

“조직을 떠나 집에서 일하면서 얻은 것 중 하나가 아이들의 교육이 아닐까 싶습니다. 산업혁명 전까지 우리 사회는 가게와 집이 한 곳에 있지 않았습니까? 1층에는 공장이나 가게를 차리고 2층은 가정집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런 집의 구조 때문에 아이들의 경제교육이 따로 필요 없었던 것입니다. 산업혁명 이후 이런 모습은 사라졌습니다. 가장이 일하는 모습을 직접 보지 못하고 자란 자녀들에게 아버지는 그저 밖에 나가 뚝딱 돈을 벌어다 주는 기계에 불과한 자리로 전락한 것입니다. 제가 집에서 새벽부터 밤까지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직접 지켜본 제 아들들은 분명히 느끼는 점이 있었을 겁니다.”

“안정처럼 위험한 것은 없다”

공 박사는 40~50대 가장의 홀로서기 성공은 우리 시대 가족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지난해 40~60대의 자살인구가 1만3000명이라고 들었습니다. 아버지의 위기가 온 것은 오래 전입니다. 남성에게 ‘직장’이란 곧 자기정체성과 같아서, 직장을 잃으면 정신적으로 예민해지고 공격적으로 변합니다. 조직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해내다 갑자기 명예퇴직 등으로 사회에서 떨어져 나와 정체성을 잃고 우왕좌왕하다 결국 죽음으로 삶을 끝내는 가장이 늘고 있습니다. 자기 컨트롤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퇴직 후 마치 꽃밭을 일구는 것처럼 내면을 가꾸어야 합니다. 뿌리 깊은 나무처럼 자아의 상실에도 흔들리지 말아야죠. 어떤 분이 퇴직 후 사업을 시작하면서 2년 정도 금주하는 모습을 지켜봤습니다. 독한 마음을 먹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올해도 취업불황의 분위기는 수그러들 낌새를 보이지 않는다. 기업은 잔뜩 움츠리고 있고, 한창 일할 시기인 40~50대 가장들은 명예퇴직 신청서를 내고 거리로 나앉을 판이다. 공 박사는 앞으로 10년은 이전 10년보다 더 가혹한 시대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국사회는 계속 성장해 좋은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빈부격차의 확대로 계급의 양극화 현상은 더욱 심해질 것입니다. 일자리는 갈수록 줄어들 것이 불 보듯 뻔합니다. 어중간한 노동력으로는 어디에 명함도 못 내밀 상황이 이미 벌어지고 있습니다. 좀 더 자신의 미래와 실력을 연마해야 합니다. 기대수준을 낮추고 재기전(再起戰)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여전히 ‘제2 인생’을 주저하는 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조직을 벗어나도 죽지 않습니다. 어디든 다 사람 사는 곳입니다. 인생을 사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을 명심하세요.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잘살기 위해서는 열심히 준비해야 합니다. 감이 안 잡히면 새벽시장에 나가 자영업자들이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 직접 살펴보십시오. 안정된 보수를 받는 삶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안정처럼 위험한 것은 없어요. 매사 긴장감을 잃지 말고 자신이 가장 즐겁게, 열심히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고 목적을 확실하게 정하세요. 개인의 삶을 나라가 도와줄 수는 없습니다. 처지에 한탄하지 말고 위기를 기회로 즐겁게 받아들이세요. 변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열심히 사는 것. 본인의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 많은 것을 바꾸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부모세대에 비해 얼마나 좋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까? 변화가 온다면 당당하게 맞서 흥미진진한 인생을 즐기며 사세요.”



[출처] “동업 유혹엔 귀를 막았다 1년간 택시 한번 안 타”|작성자 빛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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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에게 듣는 산이야기] 김홍신 소설가
역사 대하소설 ‘대발해’ 펴낸
“대학시절부터 등산 다녀…산은 영혼의 고요를 주는 곳”




▲ 소설가 김홍신씨가 부암동 동사무소에서 인왕산을 올라가다 주변 숲을 둘러보고 있다.




소설 ‘인간시장’으로 한국 최초의 밀리언셀러를 기록한 작가,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소설가 3위, 자랑스러운 서울시민에 선정, 86년 한국소설문학상 수상, 87년 소설문학 작품상 수상, 헌정사상 처음으로 8년 연속 의정활동 1위 정치인, 지금까지 쓴 책은 모두 117권.


소설가 김홍신(金洪信·61)을 지칭하는 수식어들이다. 수없이 많지만 대표적인 몇 개만 추린 것이다. 일반인들은 김홍신 하면 보통 인간시장을 떠올린다. 원체 사람들 입에 많이 오르내렸고, 또한 많이 읽어 한국 소설사상 첫 밀리언셀러를 기록한 소설이다. 지난 2004년 총선에서 낙선하면서 8년간의 정치인이란 외도생활을 끝낸 그는 3년여의 칩거생활 끝에 소설가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그것도 10권짜리 역사 대하소설 ‘대발해’란 화제작을 발표하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한마디로 ‘작은 거인’이다. 160cm의 작은 체구지만 부드러운 듯하면서 강단 있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의 소유자다. 그가 쓴 글에서나, 의정활동에서 보면 그런 행동을 쉽게 볼 수 있다.



부드러운 듯 강단 있고, 불의 보고 못 참아






▲ 97년 소설가 등반대회에서 한국의 유명 소설가들과 자리를 같이 했다.



그의 소설 ‘인간시장’에 나오는 주인공 장총찬도 그래서 탄생한 인물이다. 김홍신은 장총찬을 등장시켜 부패하고 부조리한 권력층을 마구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현실에서 하지 못한 정의를 소설을 통해 에둘러 대리만족을 느끼게 한다. 독자들도 그의 소설, 그의 말을 통해 통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첫 밀리언셀러라는 폭발적 호응으로 그의 노고에 화답했다.


거칠지 않으면서 입바른 표현이나 말 때문에 그는 필화(筆禍), 설화(舌禍) 사건을 여러 번 겪었다. 순전히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그의 성격 때문이다. 정의가 통하고 살아있는 사회였다면, 옳은 말을 할 수 있는 사회 같았으면 발생하지 않았을 사건들이다. 


그 첫 번째 사건이 80년에 나온 그의 책 ‘도둑놈과 도둑님’에서 비롯됐다. 도둑놈은 남의 물건을 훔친 인간이 법률적, 사회적 제재를 받지만, 도둑님은 도둑놈과 똑같은, 아니 그 이상의 나쁜 행위를 하지만 법망을 교묘히 빠져나가는 부패한 권력층의 모습을 비아냥거리는 어투로 사용한 말이다. 권력층에서 발끈한 건 당연한 일이다.


두 번째가 81년에 출판된 소설 인간시장으로 인해 발생했다. 홍길동같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면서 부패한 권력을 가차 없이 차단하는 그의 활약에 많은 독자들은 고소해 했지만 살아있는 권력은 불편한 심기를 감출 수 없었다. 군부 시절이었으니 더 심했을 것이다. 그 살아있는 권력은 노골적으로 폭력 없는 테러를 감행했다. 하루 종일 전화로 협박하고, 집에 수시로 돌이 날아오고, 입에 담지 못할 언어폭력 등 이루 말할 수 없다. 부인은 애들을 데리고 남편도 모르게 잠적하기까지 했다. 급기야 모처에 끌려가 취조받기에 이른다. 고문당한 건 아니지만 정신적 고문을 심하게 당하고 풀려났다. 그 뒤부터 그의 글은 사전검열을 거친 뒤 세상에 나온다. 


세 번째는 90년 라디오를 진행하면서 방송노조원들이 경찰에 맞아 피투성이 되는 걸 보고 “아직도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게 서글프다. 대한민국이 민주국가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고 예고되지 않은 발언을 했다. 다음 날 바로 출연 금지를 당했다.


네 번째는 YS시절 크고 작은 비리사건이 수없이 터지자 라디오 진행자였던 그는 방송 도중 “우리나라는 옳은 말을 할 자유가 없는 것 같습니다. 저는 최근 어떤 신문에 대통령과 정부를 비난하는 글을 썼다고 해서 칼럼이 중지 당했고, 대중강연에서 똑같은 일을 했다고 해서 정부요원이 뒷조사를 하는가 하면 결국에는 이 방송도 그만두라고 합니다”라고 혼자만의 계획된 발언을 하고 방송을 중단했다.


다섯 번째는 의원시절 그 유명한 DJ를 향한 ‘공업용 미싱’ 발언이다. 전화협박은 물론이고 살해위협까지 받았다. 대충 알려진 것만 이 정도다.






▲ 인왕산 정상에서 시내를 바라다보며 포즈를 취했다.



그의 이러한 행위는 어디서 나올까? 어머니한테서 받은 영향이 컸다고 말한다. 어릴 적 어머니와 관련된 일화 한 토막. 그의 어머니가 얼마나 강단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하루는 그가 동네에 사는 친척뻘 애를 때렸다. 그 집안의 5형제가 와서 보복했다. 김홍신은 외아들이다. 실컷 두들겨 맞았다. 어머니가 그 사실을 알고 어린 김홍신을 학교 운동장 나무에 묶어놓고 자신은 바로 그 앞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그 부모가 용서를 구할 때까지 일어서지 않았다. 소문은 삽시간에 온 동네로 퍼졌고, 버티던 그 집 부모가 결국 찾아와 사과를 했다. 무언의 시위로 상대방을 굴복시킨 어머니의 보이지 않은 교육이 커서도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어린 김홍신을 아들이 없는 큰집에 양자로 보내려고 하자, 어머니가 “외아들인 내 아들을 절대 못 내준다”며 끝까지 버텨 결국 지켜낸다.


또 한번은 동네 꼽추를 놀렸다가 어머니한테 호되게 혼났다. 그런 다음 어머니는 장애인들을 집으로 초대해 음식을 대접했다. 김홍신은 어머니를 통해 사랑과 희생과 용기를 배웠다. 그 힘이 아직 그를 지배하고, 지탱해주고 있다.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대목도 있다. 71년 소대장으로 최전방 철책근무를 할 때 북한군 3명을 총격전 끝에 전원 사살하는 무공을 세웠다. 초임 장교가 일약 영웅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사태는 조그만 사건으로 급반전됐다. 거적을 아무렇게나 덮어놓은 북한군 시신이 불쌍하게 보여 나무로 만든 십자가를 놓고 소대원들과 기도를 했다. 전부대가 발칵 뒤집혔다. 빨갱이 소대장으로 몰렸다. 군수사대에 끌려가 취조를 받았다. 그는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하는 게 무슨 죄냐, 인간적으로 측은해서 그렇게 했다”고 항변하는 순간 그의 몸은 바닥에 나뒹굴었다. 아무 일 없이 끝나긴 했지만, 하루아침에 영웅에서 빨갱이로 추락할 뻔한 웃지 못할 사건이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보면 그럴 만도 했다.
그가 어머니 다음으로 많은 교훈을 얻는 곳이 바로 산이다. 대학시절부터 산을 다녔으니 산행경력만도 40년이 훌쩍 넘는다. 일반 산악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 산과 그렇게 인연이 깊은 그가 산을 어떻게 생각할까?

     


산은 스스로의 한계를 시험하는 잣대





▲ 1)2002년 의정활동을 평기한 한국유권자운동연합이 김홍신씨를 1위로 선정했다. 나머지 순위에 오른 의원들과 기념촬영 했다. 2)8년간의 정치인 외도생활 중 한나라당 대변인으로 있으면서 이회창 총재와 상의하고 있다. 3)김홍신 후원회 모임행사에 배우 김수미가 참석해 환담하고 있다.



“산은 내게 육신의 건강을 주고 영혼의 고요를 주는 곳입니다. 나의 영혼을 맑고 평화스럽고 자유로워지게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어요. 산에는 너무 많은 교훈과 메시지가 담겨 있어 인간이란 존재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게 만들죠. 인간 생존의 근원이기도 합니다.”


그와 함께 지난 9월6일 인왕산을 찾았다. 그는 지금 햇빛 알레르기를 겪고 있다. 지난 3년간 하루 12시간씩 햇빛을 보지 않고 대발해를 쓰는 작업을 한 결과 얻은 영광의 상처다. 하루에 최소한 원고지 20장 이상은 꼭 썼다. 의정생활을 하면서 발해와 고구려를 자신들의 역사로 만들려는 중국 동북공정을 보고 사명감을 느껴 시작했다. 의정생활하면서 5년간의 준비 끝에 작업에 들어갔다. 산악인들이 목숨 걸고 산에 가듯이 그도 목숨 걸고 소설을 썼다고 했다.






▲ 최근 펴낸 10권짜리 대하소설 대발해 겉표지.



“지난 3년여간 두문불출하면서 너무 힘들었다. 하지만 내가 이 작업을 끝내지 못하면 다른 사람을 볼 수가 없다. 결과물이 나와야 사람들이 ‘아, 김홍신이가 저 작업하느라 그동안 보이지 않았구나’하고 용서가 되지 않겠느냐.”


자신과의 처절한 싸움을 통해 나온 결과가 바로 대발해란 대작이다. 산이 주는 교훈이기도 하다. 산은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는 잣대가 된다. 쉽게 오를 수 있는 산도 날씨나 신체 조건 등 상황에 따라 오르지 못할 때가 있다. 못 오를 것 같은 산도 강력한 의지로 도전하면 해내기도 한다. 그는 햇빛 알레르기를 얻었지만 해냈다.


인왕산에 오르면서 햇빛 차단제를 얼굴에 발랐다. 좀 미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3년 동안의 작업을 끝내고 가장 먼저 찾은 게 산이라고 강조했다. 그만큼 산은 그에게 소중한 존재다. 산이 주는 깊이, 넓이, 포용력에 항상 감사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자신 있게 말했다. “산이 아니었다면 지금과 같이 빨리 건강을 회복하지 못했을 것이다. 단순히 건강만을 위한 차원이 아닌 정신적인 차원에서 안식처와 같은 곳이다. 요즘은 매일 산에 간다.”


산은 어떻게 보면 법정 스님이 말한 ‘무소유’의 가르침을 주는 곳이다. 세속적인 기준으로 보면 권력, 명예, 돈이 사람을 가늠하는 잣대가 된다. 김홍신씨는 고비 때마다 명예를 선택했다. 결과적으로 잘 한 일이었고,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장관직 제의도 있었고, 국회의원 보선 출마까지 제의받았지만 모두 거절하고 소설에 매달렸다. 그는 나아가 “지난 총선에 떨어지길 잘했다. 떨어지지 않았다면 대발해를 쓰지 못했을 것 아니냐”고 했다.


그는 종로에서 500여 표차로 아깝게 낙선했다. 전혀 후회하지 않았다. 재검표 하자는 주변 의견도 있었지만 군말 없이 승복하고 소설 쓰는 일에 정열을 쏟았다. 그게 바로 김홍신이다.


그는 앞으로의 계획까지 벌써 세워 놓았다. 한 개가 아니라 세 개씩이나 있다. 먼저, 다음달(10월)쯤 인도로 갈 예정이다. 인왕산 가기 바로 직전 달라이 라마의 처제를 만나고 왔다. 달라이 라마를 인도에서 만날 약속을 전하기로 했다. 불교에 관한 소설을 쓰기 위한 정지작업이다. 제목은 잠정적으로 ‘붓다’로 정했다.


두 번째는 권력이 가지는 긍정과 부정적 측면을 모두 아우른 정치소설을 쓰는 것이다. 8년간의 정치인 경험을 백분 살릴 계획이다. 자료는 이미 축적돼 있다. 세 번째는 지독한 사랑에 관한 얘기로 심금을 울리고 싶다고 했다. 사람 사는 얘기인 것이다. 벌써부터 기대된다. 역시 그는 소설가가 제격인 것 같았다.


산 예찬론자들은 많다. 그도 산 예찬론자 중 한 명이다. 그냥 산에 오르는 등산객에서부터 목숨 걸고 산에 가는 산악인까지 모두들 나름대로의 다양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산이 담고 있는 철학적 의미, 존재의 의미 등 단순한 듯하면서 심오함까지 있을 것이다. 그에게 산이 담고 있는 무궁무진한 소재로 소설을 쓰는 걸 기대하면 무리일까? 산의 대중화에 휠씬 기여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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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진수 기자] 8년 전 영국에서 로또 당첨금 970만 파운드(약 180억 원)나 거머쥐었던 청소원 마이클 캐럴(26)이 빈털터리가 된 채 실업수당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사연을 7일(현지시간) 언론에 공개해 화제다.

8일 영국 일간 메일에 따르면 캐럴은 8년 사이 마약·도박·매춘으로 970만 파운드를 탕진하고 현재 주급 실업수당 42파운드로 살아가고 있다.

그의 말마따나 "파티가 끝나고 현실로 돌아왔지만 1주에 100만 파운드로 사는 것보다 42파운드로 사는 게 더 행복하다"고.




그는 "옛날 청소부로 돌아가 평범하게 살고 싶다"며 "이제 한 푼이라도 벌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캐럴은 2002년 잭팟을 터뜨린 뒤 가족·친지에게 수백만 파운드나 마구 뿌렸다. 마약 구입에도 돈을 펑펑 썼다.

2003년 말 즈음 그는 2000파운드짜리 코카인을 날마다 흡입하고 32만5000파운드짜리 집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마약·술 파티를 열었다.

부인은 흥청망청 써대는 남편에게 질려 딸을 데리고 그에게서 벗어났다.
캐럴은 이후 거리의 여인들에게 집착하기 시작했다. 그는 하루에 네 여성과 잠자리를 같이 한다며 떠벌리고 다녔다. 지난 8년 동안 총 2000명의 여성과 섹스에 탐닉하는 데 10만 파운드를 썼다.

캐럴은 금 장신구와 고급 자동차 구입에도 돈을 물 쓰듯 썼다. 그가 구입한 금 장신구 모두 2004년 도난 당했다. 시가로 치면 10만 파운드.

이튿날 캐럴은 그만한 가치의 금 장신구를 다시 사들였다.
그는 "로또 당첨금을 날려버린 것과 관련해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파티가 끝나 기쁘다. 내 돈이 가는 곳마다 돈 냄새를 맡은 하이에나가 따라다녔다. 그 덕에 인간의 진면목을 깨달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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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제가 마지막에 후기를 올리는 듯 합니다. 먼저 올리고 싶었는데 시간도 내기가 힘들고 내용이 정리가 잘 안되어 있다보니 늦어지게 되어서 더 늘어질까봐 오늘 좀 늦게 자더라도 올리고 자야겠습니다.

 

일요일에 있었던 스승님과의 자리에서 각자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저도 마찬가지구요. 가볍게 즐기다 오신 분들도 있겠지만 전 아직 여러가지로 미약하기에 메모를 나름대로 열심히 했습니다. 사실 저도 메모는 안하고 김용희님이나 다른 분이 올려주시는 후기 보면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가 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어서 메모를 하게 되었습니다. 녹음을 했으면 좋았겠지만 금지당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처음 부분은 메모가 안되어 있습니다 키워드만 메모를 해놓아서 나름대로 문장을 만들었으니, 문장 구성보다는 내용을 읽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 내용 저 내용 왔다갔다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하셨고 겹쳐지는 내용도 많지만, 비슷한 주제끼리 나름대로 모아서 작성 하겠습니다. 다른 회원님들께서 이미 올리신 내용은 제외하였습니다.  내용은 스승님을 1인칭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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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언론>





1) 경제를 보는 눈을 키워야 한다. 그것은 신문에서 얻을 수 있다.  IMF가 터졌을 때 나는 무엇을 했었느냐? 일단 서점에 가서 멕시코 같은 다른 나라의 사례를 먼저 찾아보았다. 그리고 반드시 극복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투자를 했다. 911때도 대공황이 일어나면 어떻게 되는지 지난 사례를 찾아보고 결과를 연구했다.


 

2) TV프로그램 중에도 좋은 프로그램이 많다. 요새는 와이프가 선덕여왕을 열심히 보길래 재미있냐고 물은 적이 있다. 와이프는 원래 연속극을 보지 않는데, 선덕여왕은 재미도 있고 배울 점이 많아서(?) 본다고 했다. 물론 이런 드라마에서 삶의 교훈이나 여러가지를 배울 수도 있다. 삼국지 같은 고전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효율이 형편없으므로 시간이 많이 들게 된다.

 


<2. 리빙과 라이프의 밸런스>

 

1) 라이프와 리빙의 밸런스에서 정답은 없는 것 같다. 라이프에 지나치게 치중하면 생활이 피곤해진다. 조화가 필요하지만, 같이 보내는 시간과 행복의 크기가 비례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관심을 가지고 있고 생각을 했다는 증표가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선물같은 것은 시간 날 때 미리 준비를 해두었다. 생일 때에는 이상하게 바빠지기 때문에 때맞춰서 사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꽃은 미리 준비하기가 힘들지만, 선물 같은 것은 가능하다.

 

2)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시간을 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럴 때 아이들에게 좋은 것은 책보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다. 이때 부모가 TV를 보면서 자식들에게 책을 보라고 말하는 것은 효과가 없다. 아이들은 부모가 하는 행동을 본받기 때문이다.

 

3) 내가 라이프와 리빙에서 놓쳤다고 생각하는 점이 있다. 나는 운전면허를 딴지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아이들이 어렸을 때에는 기사가 운전을 했다. 기사가 운전을 하면 난 조수석에 앉아서 무게를 잡아야만 했다. 기사 앞에서 가족들과 있을 때처럼 편한 분위기를 만들기는 힘들었다. 그리고 바쁘기도 했다. 가족들과 여행을 가서 가족들은 조용히 시키고 전화만 한참 하기도 했다.

 

4) 출장을 가면 공항에서 회의를 하고 바로 이동하기도 했다. 지도상으로 보면 점만 찍으며 이동을 한 것이다. 공항에 도착하면 FAX 50~60장씩 도착해 있기도 했다. 한창 바쁠 때에는 타고 간 비행기에 있던 승무원들을 올 때 그대로 만난 적도 있었다. 그들은 도착지에서 2~3일 체류하므로 그만큼 바쁘게 돌아다녔던 것이다.

 

5) 바쁜 생활을 계속하다 뭔가 놓치는 것 같아서 2000년 부터는 사업을 줄였다. 와이프가 생기는건 돈밖에 없다 라는 말을 하기도 했었다




6) 난 솔직히 왠만한 자연에서 감동을 받지 못한다. 그랜드 캐년도 경비행기로 관광을 하고, 알래스카도 가고, 희망봉에서 일출도 보고 나니 왜만한 곳에서는 감동을 받지 못한다. 200억을 내고 우주여행을 가는 부자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




7) 부자의 안 좋은 습성은 자꾸 자연을 끌어온다는 것이다 내가 아는 부자중에는 중국에 여행을 갔다가 분재 가게를 아예 통째로 사버리는 사람도 보았다.

 
 

<3. >




1) 돈은 벌려고 해서 벌리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운도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 그리고 종잣돈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처음에는 무조건 미련하게 모으라고 말한다. 언론에서 이야기하는 수익률에는 사기가 많다. 경매 투자 모임도 마찬가지다. 사심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친구가 돈 좀 벌자며 나에게 좋은 땅좀 소개시켜 달라고 하는 경우라면 내가 땅을 소개시켜 주겠는가? 좋은 땅이면 내가 사서 내가 돈을 벌어야 한다. 물론 작은 규모(억대 미만)는 직원에게 소개를 시켜줄 수도 있다. 하지만 큰 규모라면 친구에게 소개시켜줘서 수익을 나눌 필요가 없다. 친구니까? No.


 

2) 주식 같은 경우는 사라고 권유하는 것들은 거의 그 사람이 소유한 주식이다





3) 출장을 갈 때 지역마다 옷차림이 바뀌어야 한다. 남미를 갈 때는 금으로 도배하고 간다. 일본을 갈 때는 명품으로 도배를 하고 간다. 유럽이나 미국을 갈 때는 그냥 간다.




4) 나는 딸만 둘이므로 아들을 키워 본 경험은 없다. 다만 내가 아들을 키우게 된다면 운동보다는 모형물을 조립하는 취미를 권하고 싶다. 물론 딸에게도 마찬거지이다. 이 사회에서 보수를 많이 받는 직종은 남이 써놓은 것을 이해하고 풀이하는 사람이다. 나는 이런 직종을 서류해독자라고 부르며 이들은 서류만으로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는 일을 한다. 이런 종류에는 대표적으로 CEO가 있다. 변호사나 판사도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서류해독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 나는 아카데미 같은 곳에서 나오는 모형물 조립을 권한다. 거기에는 조립 설명서가 포함되어 있다. 가장 쉬운 종류의 서류이지만 처음부터 이해하는것이 쉽지는 않다. 엔지니어가 작성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제작자이므로 세세한 다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입장에서 작성한 서류는 남이 알아보기가 힘든 것이다. 이런 문제점은 휴대폰이나 기타 전자기기 설명서에서도 나타난다.

 


 <4. 미국>





1) 나는 미국에서 거주한다거나 이민 가는 것을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예전에 국제회의를 참석했는데 한 미국인이 나에게 오더니 불어로 뭐라고 말을 걸었다. 내가 대답을 못하고 있자 그는 그냥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그래서 알아본 결과 미국 상류층은 불어에 대한 동경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불어로 메뉴라도 말할 줄 알아야 하나 하는 생각도 했으나... 영어도 벅찬데..ㅎㅎ


 

2) 이런 일도 있었다. 미국에서 맥주 집에 일본인들과 간 적이 있다. 맞은 편 테이블에서 미국인들이 맥주를 4가지 주문하자 그들에게 맥주잔을 4잔씩 주었다. 그런데 우리가 6가지 맥주를 주문하자 각자 한잔씩만 주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나는 대판 싸웠으며 나는 이런 종류의 차별을 참지 못한다. 미국에는 이런 차별들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5. 기타>




1) 의료 업계는 의사가 아니더라도 병원을 개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에 찬성하며, 영국 같은 의료보험 제도가 좋은 것 같다. 한국의 의료제도는 모두를 평등하게 만족시키려고 하는데 문제가 있다. 프리미엄 시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의사들은 아직 부자들 주머니속에서 돈이 자발적으로 나오도록 하는 방법을 모른다. 의사들은 환자 위에 있으면 안된다. 환자와 눈높이를 맞추며 환자에게로 내려가야 한다.



<6. 옷차림>




1) 30대 초 까지는 정형화된 차림새를 하는 것이 좋다. 나도 그랬으며 30후반부터는 자유롭게 입었다. 남자는 정장차림이 좋다.


 

<7. 여자>




1) 여자가 성공하기는 우리나라와 일본을 비교할 때 일본이 더 어렵다. 사회적 인식이 더 보수적이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미스터 피자로 성공한 여자가 있다. 그 여자가 여자로써 성공하기 위한 방법으로 3가지를 이야기 했다. 첫째는 개처럼 일하라는 것이다. 힘든 일이다. 남자가 열심히 일하면 일에 미쳤다고 하지만 여자가 그러면 독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둘째는 여자처럼 행동하라는 것이다. 여자가 똑똑하더라도 남자와 논리적으로 대립하면 안 된다. 싸움이 날 뿐이다. 논리적으로 지더라도 엉뚱한 것으로 트집을 잡는다. 여자가 왜 그러냐느니, 암탉이 울면 어쩌구 말을 할 때도 직접적으로 비난하기 보다는 당신이 이러이러해서 이렇게 되지 않았느냐 하는 식으로 돌려 말하는 것이 필요하다. 옷차림도 여성스럽게 입는 것이 좋다. 한마디로 말하면 여우가 되라는 것과 비슷하다. 세번째는 남자처럼 행동하라는 것이다. 남자 머리 위에 있게 되면 겉으로는 아니더라도 경계심을 품고 대하게 되기 때문이다.


 


<8. 일>





1) 가장 말단 직원들의 관리를 잘 해야 한다. 경비나 주차요원들은 손님을 가장 처음 맞이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핵심이다. CCTV를 경비실 머리 위에 설치하고 고객이 찾아왔는데도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맞이하는 경비가 보인다면 당장 해고다. 아무리 어린 손님이 오더라도 공손하게 맞이해야 한다.




2) 명품과 명품이 아닌 것의 차이는 미약하다. 승자의 패자의 차이는 미약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윗사람에게 잘 해야 한다. 똑똑한 것도 좋지만 충성이 필요하다.

 

3) 프로가 되려면 아마추어를 능가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아마추어가 너무 많이 장사를 한다.

 

4) 과외를 한다면 내가 잘 아는 것 만으로는 안된다. 아이들 머리속에 집어 넣어 줘야 한다. 한달 뒤에 임금 협상을 해 보아라. 50%인상을 요구해서 받아들여 진다면 성공한 것이다. 부모가 꺼리더라도 학생이 잡게 된다. (농담->)다만 능력에 자신이 없다면 섣불리 시도하지는 마라. 일자리를 잃게 된다.

 

5) 고액과외를 가게 되면 구두를 좋은 것을 신어야 한다. 학생방에 들어가게 되면 학부모가 보는 것은 남겨진 구두 뿐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과외도 이미지 싸움이다. 좋은 차를 타고 방문할 여건이 안된다면 차라리 대중교통을 이용해라.




6) 일을 잘하는 지는 금방 나타난다 하찮은 실수를 하는 자들 치고 일 잘하는 놈이 없다. 일을 잘해야 프로다.

 

7) 똑같은 물건을 판다면 형 동생의 물건을 살 것이다. 고객의 형 동생이 되어라. 고민을 상담하되 솔직하고 진실되게 해라. 그럼 그들이 인생 선배로써 조언도 해주고 밥도 사줄 것이다. 봐라 여기도 내가 사잖아? <-내용은 중복되지만 멘트가 기억나서 다시 적어보았습니다^^

 

8) 광고의 효과는 잡지나 신문은 효과가 없다. TV도 별로고 차라리 라디오가 낫다. 하지만 최고의 광고 수단은 입소문이다. 입소문은 신뢰의 대가로 퍼지게 된다. 좋지만 비싼 상품을 팔아라. 같지만 비싼 상품을 팔려 하면 망하게 된다.

 

9) 같은 상품이라도 뭔가 복잡하고 의식이 있는 상품이 좋다. 오렌지 주스에 얼음을 담아 팔더라도, 고객이 직접 얼음에 주스를 부어 먹는 상품이 더 로맨틱하다. 고객에게는 뭔가 복잡한걸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다만 쓰잘데기 없는 것을 보여주면 안된다.

 

10) 고객들이 중간 과정을 알 수 없는 의심업종(?)에서는 투명하게 밝히는 것이 잘 팔리게 된다. 고객이 의심하지 않도록 모든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신뢰는 곧 돈이기 때문이다. 돈이 결부되면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 세이노를 사람들이 믿는 것은 세이노가 글을 통해서 돈을 벌지 않기 때문이다.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투명하게 까발려야 한다. 때로는 고객을 감탄시키기 위해 쇼를 해야 하기도 한다. 다만 쇼를 통해 고객의 신뢰를 얻은 뒤에는 노력한 만큼 얻게 될 것이다.



 
11) 직원들은 좋게 타일러서는 기억하지 못한다. 물건을 던지고 난리를 핀 일은 오래 기억하지만 가볍게 넘어간 일은 기억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안다.

 


<9. 부자>


 


1) 큰 부자들은 사기를 치거나 속이지 않는다. 이는 작은 부자들이나 하는 것이다. 언론에 부자들이 그런 모습으로 비치는 것은 나쁜 놈들만 뉴스에 나오기 때문이다. 반대로 뉴스에 나오는 가난한 자들이 저지르는 범죄를 보면 가난한 자들은 모두 나쁜 놈이라는 말도 성립하게 된다. 언론에 나오는 부자들과 실제 큰 부자들은 다르다.

 

2) 부자 2세들은 두가지 유형이 있다. 첫번째 유형은 그냥 흥청망청 쓰며 물려받은 사업이나 돈을 말아먹는 유형이다. 여자를 돈으로 사 왔기에 신랑감으로는 빵점이다. 두번째 유형은 1세의 재산에 손을 대지 않고 물려받은 만큼 물려주려는 이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근검절약하며 돈을 아껴쓴다. 물려받은 재산을 돈으로 환산하여 원금에는 손을 대지 않는 자존심을 가진 사람들이다.

 

<10. 기부>





1) 기부는 대상을 지정할 수 있는 단체를 선호하는데 법적으로 보호받는 소년소녀가장 같은 사람들은 절대 굶어 죽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호적상으로 부모는 있는데 그 부모가 술꾼이라던가, 장애인은 아닌 환자라던가, 아니면 부모가 둘 다 가출하였던가 하는 상황에 처한 아이들은 법적으로 보호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2) 우리나라 법은 기부에 대한 혜택이 적은데 이유는 우리나라는 남을 돕는 일은 국가가 알아서 해야 한다는 생각이고, 외국은 나눠서 같이 도와주자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맺음말>





내가 카페에 글을 올리는 것은, 글을 올리다 보면 다른 이들이 그 내용에 덧붙여서 점점 전파가 될 것이고, 그러다 보면 위선들에 제재가 가해질 것이다. 그러다 보면 세상이 아름다워 지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에서 이다. 나는 이런 것들에서 보람을 느낀다.
 

나의 실체를 알아달라. 나는 허상이 아니다. 나는 어차피 평생 다 쓰지 못할 돈을 벌었다. 와이프도 알고 나도 안다. 이제는 좋은 일이 하고 싶다. (이 부분은 메모를 하지 못해서 기억에 의존해서 쓴 내용이라 문장이 이어지질 않습니다. 중요한 마무리였는데 어설프게 작문하기보다 기억나는 내용만 적는 것이 나을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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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임에 대한 개인적 감상>




아직도 그때 기억이 생생합니다. 제가 좀 나중에 들어갔는데 저를 향해 미소를 지으시며 손을 살짝 들어주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명 합니다.  스승님에 대한 첫 인상은 전혀 부자처럼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헤어스타일도 그 또래의 분들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다만 글에서 느껴지시는 차가움이 느껴지는 이미지가 아닌 너무나 따뜻하고 편안하신 분이셨습니다. 내용을 떠나 저희들에게 글을 써주실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스승님의 따뜻함을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함께 오셨던 여러분들도 정말 반가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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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모순 자체가 처칠의 인간적인 매력이었음이 분명하지만, 동시에 처칠은 보좌관과 내각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모시기 어려운 상사였다. 그리고 그가 전권을 장악한 5년 동안 쌓인 주위의 불만은 1945년 7월 영국 총선에서 ‘대폭발’하고 말았다. 승전을 보고한 지 두 달 만에 치러진 총선에서 처칠이 이끄는 보수당은 하원의석 197석 대(對) 393석으로 애틀리의 노동당에 참패했다. 총선 당일 미·영·중·소 4개국 회담을 위해 포츠담에 가 있었던 처칠은 뜻밖의 소식에 부랴부랴 귀국해야 했다. 히틀러에게 이기고도 노동당에 졌으니, 처칠의 입에서 “이 배은망덕한 국가 같으니! ”라는 말이 튀어나온 건 당연한 일이다.  


국왕이 참석한 장례식  


6년 후인 1951년 처칠은 총선 승리로 다시 한 번 총리직에 복귀했으나 77세의 노령으로 국정을 수행하기에 무리였다. 결국 4년 후인 1955년 앤서니 이든에게 총리직을 물려주고 내각에서 물러나 하원의원으로 남았다. 두 번째 총리 재임 중 처칠은 ‘제2차 세계대전 회고록’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는데 한 나라의 수장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경우는 처칠이 유일하다.  


처칠은 평생 하루 여덟 개의 시가를 피우고 매일 샴페인과 와인을 마셨지만 한 세기 가까운 긴 삶을 영위했다. 처칠이 1965년 1월21일 91세로 타계하자 영국의 노동계는 그를 애도하는 의미에서 모든 파업을 일시적으로 중단했다. 국장으로 치러진 그의 장례식에는 ‘군왕은 신하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깨고 엘리자베스 2세가 참석했다.  


처칠은 업적만큼이나 많은 과오도 남겼다. 생의 대부분을 20세기에 살았지만, 그는 근본적으로 빅토리아 시대에 태어난 19세기적 인물이자 제국주의자였다. 그는 여성참정권과 인도 독립을 맹렬하게 반대했고 마하트마 간디를 ‘현자인 척 하는 사기꾼’으로 매도했다. 일본의 진주만 폭격 이후에도 일본의 군사력을 과소평가해 영국의 아시아 식민지 대부분을 상실하는 오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결함에도 불구하고 21세기의 영국인들에게 처칠은 하나의 신화다. 아니, 비단 영국인뿐 아니라 전쟁에 나서는 모든 지도자는 처칠이 보여준 비범한 용기와 리더십을 본받으려 한다. 2002년 1월 이라크전을 앞둔 부시 미국 대통령은 연두교서에서 “우리는 실패하지도 물러서지도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약해지거나 지치지도 않을 것입니다”라는 처칠의 1941년 2월 연설을 그대로 인용했다.  


해로우 스쿨에서 낙제를 거듭하던 키 작은 소년, 병정놀이와 역사서에 빠져 있던 이 열등생이 히틀러의 무서운 야망에 맞서 전 유럽을 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핵심은 ‘참전이 불확실한 동맹국들을 믿고, 나치스에 맞서 싸울 용기가 있느냐’에 달려 있었다. 당시 영국 정치인 대다수가 이 같은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었지만, 처칠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감히 전쟁에 뛰어들 용기를 내지는 못했다.  


꾀 많고, 겁 없던 ‘진짜 남자’  


내각에서 탄탄대로를 걸어온 여타 정치인들과 달리, 처칠은 젊은 시절부터 성공과 실패를 숱하게 반복해왔다. 다르다넬스 작전의 실패, 재무장관 시절의 실책, 두 번에 걸친 당적 이탈, 1930년대에 겪었던 10여 년간의 야인 생활 등 그의 경력은 롤러코스터처럼 극과 극을 달리고 있었고, 이런 와중에서 처칠은 ‘도저히 이겨낼 수 없는 상황은 없다’는 용기를 갖게 된 것이 아니었을까?
아니, 그보다는 처칠이 본래부터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는 판단이 더 합당할 것이다. 보어 전쟁에서 도망칠 수 있었는데도 부상병을 구하기 위해 열차로 뛰어들었다가 포로로 붙잡혔던 것처럼, 그에게는 도박사에 가까운 승부사 기질이 있었다. 그리고 진정한 승부사답게 그는 전쟁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맞을 때마다 주저 않고 목숨을 내걸었다. 1년 가까이 끈 다르다넬스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처칠은 해군장관 직을 내던지고 직접 동부 전선으로 가 종군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스코틀랜드와 동유럽을 비롯해 영국군이 전투 중인 모든 전장을 직접 찾아가 군인들을 독려했다. 1944년 6월 연합군이 프랑스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했을 때는 ‘영국군과 함께 노르망디 땅을 밟겠다’는 처칠의 결의가 너무도 굳세어 결국 조지 6세가 ‘친애하는 윈스턴에게’로 시작되는 친서를 보내 그의 노르망디행(行)을 만류했을 정도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처칠은 참다운 남자이자 진짜 군인이었다.  


만약 처칠이 오늘날 신화로 부각된 자신을 본다면 어떻게 반응할까? 역사학자이기도 했던 그는 아마 자신이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인물이 된 것을 자랑스러워할 것이다. 불도그처럼 입을 꾹 다문 채 턱을 내밀고 승리의 V자를 그리던 이 남자는 본질적으로 겸손하기보다는 오만하기를, 모자라기보다는 조금 넘치는 편을 택하는 승부사였으니 말이다. 처칠은 스스로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우리는 모두 벌레처럼 하찮은 존재일지도 몰라. 하지만 나는 그중에서도 반짝반짝 빛나는 벌레일 거야.”




1945년 5월 8일 승전을 기념하며 구중에게 손을 흔들고 있는 윈스턴 처칠(가운데).
런던의 마담 티소 박물관에 전시된 아돌프 히틀러와 윈스턴 처칠의 밀랍인형.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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