죠스’의 흥행 성공으로 스필버그는 순식간에 백만장자가 되었다. 할리우드의 유망주가 된 그에게 많은 시나리오가 몰려들었다. 그러나 스필버그는 ‘죠스2’를 비롯해 ‘킹콩’ ‘슈퍼맨’ 등 흥행이 보장된 시나리오들을 모두 거절했다. 그가 바라는 건 ‘뻔한 영화’를 찍는 것이 아니었다. 스필버그가 선택한 차기작은 그가 오랫동안 꿈꾸어왔던 공상과학영화인 ‘미지와의 조우’였다. 그는 자신이 직접 극본까지 쓴 이 영화를 통해 처음으로 아카데미상 감독상 후보에 올랐다. 하지만 이런 성공은 전주곡에 불과했다. 스티븐 스필버그라는 이름을 영화사에 남기기에 충분한 걸작 ‘E.T.’가 개봉을 기다리고 있었다.  


터무니없이 큰 눈에 1m가 될까 말까 한 땅딸막한 몸매,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과 넓적한 얼굴, 총 대신 식물표본을 든 선량한 외계인 E.T.는 스필버그의 상상력이 빚어낸 결정체이자 스필버그의 분신 같은 존재다. 1982년 이 영화가 개봉되었을 때, 관객이 가장 의외로 받아들였던 것은 외계인이 ‘나쁜 놈’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때까지 미국인들이 생각하는 외계인의 모습은 로스웰 사건에서 드러난 외계인 시체처럼 무언가 음험하고 위험한 존재, 또는 지구를 정복하러 온 무서운 괴물의 이미지였다. 그러나 스필버그는 착하고 연약한 식물학자 E.T.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킴으로써, 외계인과 지구인이 서로 공생해야 한다는 자신의 가치관을 펼쳐 보였다.  


E.T. 스필버그의 분신  


‘타임’지 인터뷰에서 스필버그는 애리조나에 살던 어린 시절, 컴퓨터 엔지니어인 아버지가 한밤에 자신을 흔들어 깨우던 기억을 회고했다.
“아버지는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나를 차에 태우고 한밤에 사막으로 달려갔습니다. 전 아버지가 무얼 하려는지 몰라 좀 무서웠죠. 어느 지점에 가자 아버지가 차를 세우시더군요. 넓은 벌판에서 사람들이 온몸에 담요를 둘둘 감은 채로 누워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유성우를 보러 나온 사람들이었어요. 아버지와 저 역시 나란히 담요 위에 누워 밤하늘에서 쏟아지는 유성우를 보았습니다. 장관이었지요. 그 순간, 우주에 우리 아닌 또 다른 생명체가 살고 있다면, 그들은 분명 우리의 친구들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T.’는 지금껏 스필버그가 감독한 모든 영화 중에서 가장 고전적이고 감동적인 작품으로 손꼽힌다. 영화 속에서 E.T.가 소년 엘리엇과 손가락을 맞부딪치는 장면은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를 떠올리게 하는, 장엄한 아름다움으로 가득하다. 또 엘리엇과 E.T.가 함께 자전거를 타고 보름달을 배경으로 날아오르는 장면은 피터팬이 관객을 달나라 너머의 네버랜드로 인도하는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훗날 영화사 ‘드림웍스’를 설립한 스필버그는 이 장면을 드림웍스에서 제작한 영화들의 오프닝 시그널로 사용했다.  


‘E.T.’는 당시 레이건 대통령과 낸시 여사를 위해 백악관에서 특별 상영되었으며 유엔은 이 영화를 제작한 공로로 스필버그에게 유엔 평화 메달을 수여했다. 영국 시사회에 참석한 다이애나비는 영화를 보던 도중 울음을 터뜨렸다. ‘롤링 스톤’지의 평론가 마이클 스트라고는 ‘E.T.’에 대해 “스필버그가 이 영화에서 보여준 것은 놀라운 특수효과가 아니라 그의 마음 깊숙이에 숨어 있는 따스함이다”라고 평했다.  


그러나 선풍적인 흥행 열기에도 ‘E .T.’는 1982년 아카데미영화제에서 작품상과 감독상을 받는 데 실패했다. 아홉 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된 ‘E.T.’는 네 개 부문-음향, 음악, 특수효과, 시각효과-의 상을 수상하는 데 그쳤다. 이 영화가 아카데미 감독상이나 작품상을 받지 못한 것은 영화가 담고 있는 감성적이고 순수한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전개가 전형적인 해피엔딩 스토리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감동을 남발하는 과도한 휴머니즘 영화다”라는 비판도 있었다.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기 위해 스필버그는 더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상업영화의 귀재  


사람들은 흔히 스필버그를 ‘흥행영화의 귀재’라고 생각한다. 물론 ‘죠스’와 ‘E.T.’에 이어 내놓은 작품들, 전편의 흥행성과를 능가하는 ‘인디애나 존스’나 ‘쥬라기 공원’의 흥행성적을 보면 ‘스필버그=최고의 흥행감독’이라는 공식에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다. 그러나 스필버그가 단순히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는 흥미진진한 모험영화를 만드는 데만 출중한 감독인 것은 아니다. ‘E.T’를 논외로 한다 해도 스필버그는 흑인 여성들의 우정을 그린 ‘컬러 퍼플’(1985),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을 무대로 한 ‘태양의 제국’(1987) 등 작품성과 흥행성을 동시에 갖춘 영화를 적잖게 감독했다. 그가 워낙 대단한 블록버스터를 양산해낸 탓에 이런 작품들의 존재가 잘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스필버그가 영화를 지나치게 빨리 찍는다는 점도 그를 상업영화 감독처럼 보이게 하는 요소다. 그는 한 해에 두 편의 영화를 찍는 일이 허다하다. 예를 들면 그는 ‘쥬라기 공원’과 ‘쉰들러 리스트’라는 두 편의 대작을 1993년 한 해 동안 완성했다. 2002년에도 ‘캐치 미 이프 유 캔’과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함께 감독했다. 그의 프로듀서 중 한 명인 캐슬린 케네디는 이런 작업 속도에 대해 “열세 살 때부터 영화를 감독해서 그런지, 스필버그는 그 누구보다 영화촬영 메커니즘에 통달해 있다. 그 때문에 작업 속도가 빠를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캐치 미 이프 유 캔’에 출연한 톰 행크스 역시 “영화에 관한 지식에서 스필버그는 가히 백과사전 수준”이라고 말했다.  


1981년 작인 인디애나 존스 시리즈 1편 ‘레이더스’는 스필버그의 영화 중 작품성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사례로 손꼽힌다. 가죽채찍을 든 학자 겸 탐험가 인디애나 존스 박사를 처음 등장시킨 이 영화는 제작된 지 28년이 지난 지금까지 모험영화의 고전으로 손꼽힌다. 스필버그는 이 영화로 1981년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에 동시에 노미네이트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레이더스’는 너무나 재미있다는 이유로 작품성이 평가절하된 경우다.  


조지 루카스가 제작을 맡고 스필버그가 감독한 ‘인디애나 존스’ 시리즈는 ‘시리즈물은 감독하지 않는다’는 스필버그의 평소 지론과 달리 4편까지 제작되었고, 모두 흥행에 성공했다. 이 중 2편은 “지나치게 폭력적이고 동양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담고 있다”는 혹평을 들었으나 스필버그는 이 영화를 통해 현재의 아내 케이트 컵쇼를 만났다. ‘인디애나 존스 2’에서 툭하면 소리를 지르다 존스 박사에게 핀잔을 듣는 여주인공 윌리 스콧이 케이트 컵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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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말해서, 이 영화들의 성공 요인은 스필버그의 독특하고도 천재적인 상상력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놀라운 상상력, 아이처럼 순수하고 기발한 상상력이 영화감독 스필버그를 만든 가장 큰 원동력이다. 그와 함께 ‘죠스’를 촬영한 배우 리처드 드레이퍼스는 스필버그를 가리켜 “영화감독이 되기로 결심한 열두 살의 덩치 큰 소년 같다”고 말했다. 스필버그는 가끔 자신이 ‘지구에 몰래 들어와 살게 된 착한 외계인’일 거라는 생각을 한다고 농담처럼 말하곤 한다. 어찌 보면 스필버그는 네버랜드에서 돌아와 어른으로 성장한 피터팬일지도 모른다.  


그 자신의 성채에 ‘네버랜드’라는 이름을 붙이고 영원한 피터팬으로 살고자 했던 마이클 잭슨은 ‘E.T.’를 40번 이상 본 스필버그의 열렬한 팬이었다. 비록 마이클 잭슨은 불행하게 삶의 종지부를 찍고 말았지만, 또 다른 피터팬, 예순셋이 된 할아버지 피터팬 스필버그는 ‘꿈의 공장(드림웍스)’을 짓고 오늘도 부지런히 영화를 제작하고 있다.
열세 살의 영화감독
‘인디애나 존스’ 시리즈의 3편을 보면, 도입부에 보이스카우트 대원인 어린 인디애나 존스가 나온다. 열세 살 정도로 보이는 이 소년은 스필버그의 영화 속에 가끔 등장하는 그의 분신이다. 어린 시절 스필버그는 보이스카우트 대원이었다. 그가 첫 번째 영화인 ‘라스트 건파이트’를 찍은 것 역시 보이스카우트 활동의 일환이었다. 대원들의 활동 중 하나로 사진촬영이 있었는데, 하필 그의 집에 있는 카메라가 망가졌던 것이다. 스필버그는 사진 대신 아버지의 무비카메라로 짧은 영화를 찍어왔고, 이 활동을 인정받아 우수대원 배지를 받았다. 열세 살이던 1959년의 일이다.  


학창 시절은 스필버그에게 그리 즐거운 기억을 남기진 못했다. 부모의 이혼으로 여러 번 이사를 다녀야 했고, 학교 친구들은 큰 코에 고수머리 등 유대인의 신체적 특징이 뚜렷한 스필버그를 따돌렸다. 설상가상으로 책을 잘 읽지 못하는 난독증이 있어서 학교 성적도 엉망이었다. 고등학교 평균 성적은 C에 불과했다. 훗날 그 자신이 ‘지옥 같은 고교 생활’이라고 술회할 정도로 힘든 나날이었다. 그런 스필버그에게 영화촬영은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그는 열여섯 살에 독립영화 ‘파이어라이트(Firelight)’를 촬영해 동네 영화관에서 상영했다. 이 영화로 그는 아버지에게 빌린 투자금액 400달러를 갚고도 100달러 정도의 수익을 남겼다고 한다.  


특수효과의 제왕  


영화는 현실에서 움츠려 있는 소년 스필버그가 자신의 상상력을 아낌없이 발휘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10대 감독 시절, 스필버그는 적은 예산으로 공상과학영화나 전쟁영화를 촬영하기 위한 나름의 특수효과들을 개발해냈다. 화약연기가 자욱한 전쟁 장면을 찍기 위해 모래구덩이 속에 밀가루를 넣어두고 배우들-스필버그의 가족이나 친구-이 구덩이를 밟아 밀가루가 날리게 하는 식이었다. 이때 이미 스필버그는 영화촬영에서 특수효과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고 있었고, 훗날 영화 시나리오를 검토하는 단계부터 각 장면에 적절한 특수효과들을 고안하게끔 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스필버그가 10대 시절 고안해낸 몇몇 특수효과가 나중에 실제로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전쟁영화인 ‘파이어라이트’의 전투 장면을 찍을 때 실제 차 대신 장난감 자동차와 기차를 사용한 방법은 훗날 ‘인디애나 존스 2: 사원의 저주’에서 그대로 등장한다. ‘인디애나 존스 2’에 등장하는 협궤열차의 추격신은 실물이 아니라 섬세하게 만든 미니어처 기차와 궤도, 그리고 주인공들을 닮은 인형들을 등장시켜 찍은 것이다.  


고교를 졸업한 스필버그는 캘리포니아 주립대 LA캠퍼스(UCLA)와 남캘리포니아대(USC)의 영화학과에 지망했지만 모두 낙방했다. 캘리포니아 주립대 롱비치 캠퍼스에 입학한 그는 학교를 다니는 둥 마는 둥 하다 할리우드의 유니버설 스튜디오에 숨어들어갔다. 그러고는 몇 달 동안이나 직원인 척하며 스튜디오 안을 어슬렁댔다. 심지어 비어 있는 사무실 하나를 찾아내 멋대로 자신의 이름을 걸어두기도 했다. 이런 엉뚱한 행동 끝에 스필버그는 일주일 내내 일하며 월급은 한 푼도 안 받는 인턴으로 채용되었다. 대학 진학은 자연히 흐지부지되었다. 입학한 지 35년이 지난 2002년에야 스필버그는 대학을 졸업한다. 그를 대학입시에서 떨어뜨렸던 USC는 1994년 그에게 명예 학위를 수여했다.  


1969년 유니버설 소속 감독으로 TV 시리즈 ‘나이트 갤러리’의 파일럿 프로그램을 찍으면서, 스필버그는 감독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몇 가지의 TV 영화와 감독 데뷔작인 SF영화 ‘슈가랜드 익스프레스’에서 만족스러운 성적을 거둔 스필버그는 1975년, 자신의 출세작인 공포영화 ‘죠스’의 촬영에 들어간다. 피터 벤츨리의 소설을 영화화한 이 작품은 20만달러를 들여 제작한 상어 모형이 두 번이나 바닷속에 가라앉고 제작 기간과 예산이 두 배 이상 초과되는 악전고투 끝에 완성한 작품이었다. 스필버그는 ‘죠스’에 대해 “영화감독으로서 처음 겪은 혹독한 시련”이었다고 여러 번 회고했다.  

그러나 영화는 아카데미상 세 개 부문(편집, 음향, 음악)을 수상하며 수많은 ‘죠스마니아’를 낳았고 1975년 최고의 흥행작품으로 등극했다. ‘타임’지는 ‘죠스’에 대해 “오슨 웰스의 ‘시민 케인’ 이후 할리우드 영화의 역사를 바꾼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스필버그는 2005년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죠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30년의 감독 생활에서 저는 늘 행운아였습니다. 그 행운을 가능하게 해준 작품이 ‘죠스’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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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스’ ‘E.T.’ ‘인디애나 존스’ ‘쥬라기 공원’으로 매번 자신이 세운 흥행기록을 스스로 깨뜨린 이 시대 최고의 영화감독. 그는 블록버스터 제작에 천재적인 감각을 발휘할 뿐 아니라, ‘쉰들러 리스트’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보듯 인간의 눈물과 땀, 고뇌를 담아내는 데도 독보적이다.

 
 





스티븐 스필버그 연표
● 1946년 12월18일 신시내티에서 태어남
● 1963년 140분 분량의 독립영화 ‘파이어라이트’ 제작, 상영
● 1965년 캘리포니아 주립대 롱비치 캠퍼스 영문학과 입학
● 1974년 첫 번째 극장영화 ‘슈가랜드 익스프레스’ 감독
● 1975년 영화 ‘죠스’ 개봉. 이해 최고의 흥행영화로 기록
● 1981년 인디애나 존스 시리즈 1편 ‘레이더스’ 감독
● 1982년 공상과학영화 ‘E.T.’ 감독. 유엔 평화메달 수상
● 1984년 ‘인디애나 존스 2: 사원의 저주’ 감독
● 1985년 에이미 어빙과 결혼
● 1989년 ‘인디애나 존스 3: 최후의 십자군’ 감독
● 1991년 두 번째 부인 케이트 컵쇼와 결혼
● 1993년 ‘쥬라기 공원’ 감독. 1990년대 최고의 흥행영화로 기록. ‘쉰들러 리스트’ 감독, 이 영화로 아카데미영화제 감독상, 작품상 수상
● 1997년 ‘쥬라기 공원 2: 잃어버린 세계’ 감독
● 1998년 ‘라이언 일병 구하기’ 감독. 아카데미영화제 감독상 수상
● 2001년 스탠리 큐브릭 감독 미완성작 ‘A.I.’ 감독, 영국 여왕으로부터 명예 기사 작위 서훈
● 2002년 ‘마이너리티 리포트’ ‘캐치 미 이프 유 캔’ 감독
● 2005년 ‘뮌헨’ 감독
● 2008년 ‘인디애나 존스 4: 크리스탈 해골의 왕국’ 감독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의 취미는 영화감상과 비디오 게임이다. 아내인 영화배우 케이트 컵쇼(인디애나 존스 2편 여주인공)와 함께 입양아 둘을 포함해 일곱 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처지지만, 영화촬영이 없는 주말이면 동네 영화관에 가서 개봉 영화를 본다. 그의 ‘스케줄’은 여름이 되면 더 바빠진다. 여름방학 시즌을 겨냥한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기 때문이다.  


‘라이프’매거진 선정 ‘우리 세대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남자’, ‘프리미어’지 선정 ‘영화사상 가장 강력한 인물’, 스티븐 스필버그. 그의 삶이 부러운 것은 그가 자신의 직업에서 성공한 남자라서거나, 영화를 통해 엄청난 재산을 모은 자산가(그는 ‘포브스’ 지가 선정한 세계 최고 부자 순위 287위다)라서가 아니다.  


스필버그는 자신의 직업인 영화를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영화감독으로, 제작자로 365일 영화만 생각하는 삶을 40년 이상 살아온 그의 취미가 ‘영화감상’일 수 있겠는가 말이다. 음악가들은 평소에 음악을 잘 듣지 않고, 요리사들은 집에 오면 요리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음악가들이 음악을 사랑하지 않거나, 요리사들이 요리를 못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직업의 세계가 주는 부담과 긴장감에서 잠시나마 해방되려는 반사적 행동일 것이다.  


그러나 스필버그는 예외다. 열세 살의 나이로 첫 번째 영화 ‘라스트 건파이트(The Last Gunfight)’를 찍은 이래, 큰 코에 선량해 보이는 눈을 가진 이 털북숭이 남자는 여전히 영화에 열광하는 열세 살 소년의 마음가짐으로 살고 있다. 스필버그에게 영화는 자신의 또 다른 분신이자 불가능이 없는 세계이며 변치 않는 꿈이고 광대한 우주다.
그가 감독한 영화에 스필버그의 분신 같은 주인공이 등장한 경우도 적지 않다. 진정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 일로 성공을 거두었다면 더더욱 행복한 사람이다. 하물며 스필버그처럼 세계 최고의 감독으로 등극한 경우는 말할 나위도 없다.  


고갈되지 않는 상상력의 샘  


아마 중년층 이상의 영화팬들은 스필버그가 영화계에 센세이셔널하게 등장했던 때를 기억할 것이다. 그를 세계적 인물로 만들어준 첫 번째 영화는 ‘죠스’(1975)다. 무시무시한 이빨을 가진 식인상어가 등장하는 이 공포영화를 찍을 당시, 스필버그는 아직 서른이 채 되지 않은 젊은 감독 이었다. ‘죠스’는 전세계적으로 4억7000만달러의 흥행기록을 세우며 천재감독 스필버그의 등장을 알렸다.  


스필버그를 세계적 인물로 만든 두 번째 영화는 1982년 개봉한 ‘E.T.’다. 지구에 불시착한 난쟁이 외계인과 소년 엘리엇의 순수한 우정을 다룬 이 공상과학영화는 사실상 스필버그의 자전적 스토리에 가깝다. 어린 시절의 스필버그는 부모의 이혼 때문에 상처 받은 소년이었으며, 스스로를 ‘지구에 불시착한 외계인’으로 여긴 엉뚱한 아이였다. 이 영화를 통해 스필버그는 상업적인 성공뿐 아니라 할리우드의 주류 영화감독으로 부상하는 영광도 누렸다. ‘E.T.’는 작품상, 감독상을 비롯해 아카데미상 9개 부문에 후보로 올랐다. 당시 주인공인 E.T. 역할을 가면을 쓴 난쟁이 배우가 맡았다는 이야기는 격세지감이다. 요즘 같으면 당연히 컴퓨터그래픽(CG)으로 E.T.의 모습을 합성해냈을 것이다.  


이후 절친한 동료 조지 루카스와 함께 ‘인디애나 존스’ 시리즈를 연이어 성공시킨 스필버그는 1993년,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기상천외한 공상과학영화를 들고 나왔다. 마이클 크라이튼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쥬라기 공원’이 그것이다. 화석 속에 보존된 공룡의 DNA를 통해 현대에 공룡을 탄생시키고, 그 공룡들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면서 아수라장이 되는 공룡 테마파크를 그린 ‘쥬라기 공원’에 전세계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까지 열광했다. 벨로시랩터, 티라노사우루스 등 공룡의 모습을 실제처럼 정밀하게 재현해낸 ‘쥬라기 공원’으로 스필버그는 9억달러가 넘는 흥행수입을 올리며 영화사상 최고 흥행기록을 또다시 경신했다.  


위의 영화들을 보면 스필버그가 참으로 천재적인 감독임을 금방 실감할 수 있다. ‘죠스’나 ‘E.T’, 또 ‘인디애나 존스’와 ‘쥬라기 공원’ 등은 한 사람의 감독이 일생 동안 한 번 제작할까 말까 하는 대작들이다. 이 모든 영화를 스필버그 한 사람이 탄생시킨 것이다. 지금까지 스필버그가 감독한 영화의 총 수입은 127억달러에 달한다(‘엠파이어’지 추산). 가히 할리우드를 움직이는 미다스의 손이라고 할 만하다. 더구나 그는 1990년대 들어 ‘쉰들러 리스트’ ‘라이언 일병 구하기’ 같은 작품성 높은 영화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연달아 거머쥠으로써 ‘상업영화 감독’이라는 콤플렉스까지 뛰어넘었다.  


그런데 이 영화들을 살펴보면 한 가지 공통분모가 보인다. 영화의 주인공이 외계인이든, 공룡이든, 또 고고학자든 간에 이 영화들은 분명 기발한 상상력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스필버그 이전에는 동물 중에서도 물고기, 그것도 큰 입을 벌리고 사람을 꿀꺽 삼켜대는 식인상어가 영화 주인공이 될 수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지구를 정복하러 온 흉포한 외계인이 아니라, 식물 채집을 하는 착한 외계인은 더더욱 보통 사람들의 상상을 넘어선다. 툭하면 채찍을 휘둘러대고 여자 꼬이는 데도 선수인 고고학자 역시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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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노 1부는 회식 때문에 다음날 저녁에야 보았습니다. 그 회식 장소에서 대형극장에서 영사기사로 일하는 후배가 말했습니다. "오늘 저는 일찍 들어가서 추노나 봐야겠어요." 그리고 그 친구는 2차를 마다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습니다. 거나하게 술이 오른 우리는 오랜만에 방앗간에 들른 참새들처럼 어시장 골목을 떠나지 못하고 2차로, 3차로 아쉬움을 달랬지요.



사진제공@kbs




곽정환 감독이 만든 작품은 무조건 본다는 후배 

그리고 다음날 저녁에 그 후배가 한 말이 생각났습니다. "저는 곽정환 감독님을 엄청 좋아하거든요. 그 감독님이 만든 거는 무조건 봅니다. 진짜 훌륭한 분입니다." 그는 '곽정환 감독'이라고 하지 않고 꼬박꼬박 '곽정환 감독님'이라고 했습니다. 좋아하는 정도를 넘어 아예 존경하는 모양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는 대형극장에서 영사기사로 일합니다. 그리고 그런 직업에 걸맞게 영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가 주로 갇혀 있는 국내와 헐리우드를 벗어나 프랑스, 이태리 등 유럽 나아가 동유럽, 인도, 아시아까지 폭이 아주 넓습니다. 감탄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후배가 추노를 일러 "아마 최고의 드라마가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자기는 "곽정환 감독님(!)이 만드신 작품은 무조건 본다"고 하니 아니 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 오늘 저녁이로군요. 컴퓨터로 재방송(재방송이 맞나요? 아무튼)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포스팅을 이미 몇 시간 전에 올렸습니다. <추노 장혁을 위해 준비된 인물, 대길>

저는 그 포스팅에서 <추노>가 단 1부의 방영만으로도 세상을 평정한 것은 장혁의 매력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실로 장혁은 추노를 위해 준비된 인물이었습니다. 아니 추노 대길이 오직 장혁을 위해 마련된 캐릭터라고 말했던가요? 아무튼 장혁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껄렁거리는' 그의 독특한 연기는 대길을 조선 최고의 추노답게 만들었습니다. 






사진제공@kbs

그러면서 저는 감독의 연출과 시나리오에 대해선 판단을 보류했습니다. 단 1부의 방영만으로도 세상을 평정한 것은 오로지 장혁의 빛나는 매력 때문이었다는 말로 우선은 지켜보기로 하자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방금 전 2부를 보고난 후에 비로소 저는 이 드라마의 가공할 마력 뒤에는 감독의 놀라운 힘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역시 추노의 힘의 원천은 곽정환 감독이었다

아, 정말 그렇군요. 제게 곽정환을 '감독님'이라고 호칭하던 후배의 말처럼 과연 곽정환 감독은 대단한 연출자였습니다. 신비하고 화려한 영상들이 마치 구름처럼 흐르는(실제로 화면이 구름처럼, 어떨 땐 바람처럼, 물결처럼 흘렀어요) 장면들에선 온 몸의 근육이 팽창하며 숨이 멈출 듯했습니다. 마지막 광활한 갈대밭에서 마주 선 장혁과 오지호를 보셨나요? 그 두 사람 주변을 흘러드는 화사한 영상들에선 비장한 슬픔마저 배어나왔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 2부에서 드디어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한 오지호, 껄렁거리는 대길과 대조되는 강인하고 비장한 남자의 모습에서 뿜어 나오는 매력이 대길과는 또 다릅니다. 그렇군요. 대길에게 송태하가 없다면 조선 최고의 추노꾼 대길일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찬가지로 오지호 역시 장혁이 없이는 자신을 완성하기 힘들겠지요.






그러나 역시 이들 두 사람의 멋진 연기를 화려한 영상에 담아내는 것은 감독이었습니다. 광활한 갈대밭을 가로질러 달리는 두 사람의 동작들을 감싸고 흐르는 신비한 화면의 변화들은 순식간에 보는 사람을 압도했습니다. 신비한 빛에 싸여 세상이 멈춘 듯한 화면, 그 속에서 빛나는 대길과 송태하의 숨 막히는 대결, 이것들을 만들어낸 것은 역시 감독이었습니다. 

하하~ 아무튼 저도 앞으로 그 후배처럼 곽정환을 감독님이라고 불러야 될까요? 그런데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니 그렇게 나이가 많이 들어 보이시진 않는군요. 그리고 <추노 홈페이지>에도 들어가 봤습니다. 극본을 쓰신 분은 천성일 작가로군요. 그런데 천성일 작가가 올려놓은 한 구절이 제 눈에 너무나 크게 들어옵니다. 

"사극은 '어떤 시대를 쓰는지' 보다 '어떤 시대에 쓰는지'가 중요하다는 말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백성들의 희망은 작고 부질없지만, 그것이 모여 역사를 만든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아, 명품 감독에 명품 작가의 어록입니다. 제가 원하는 것이 바로 이겁니다. 저도 바로 몇 시간 전에 썼던 <추노 장혁을 위해 준비된 인물, 대길>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극은 '어떤 시대를 쓰는지' 보다
           '어떤 시대에 쓰는지'가 중요하다

"작년 한해를 풍미했던 <선덕여왕>은 현대 정치사를 고대 신라에 옮겨놓은 것 같은 각본으로 대성공을 연출했습니다. 선덕여왕이나 미실은 단순히 고대 신라인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과 호흡하며 우리들의 이야기를 그 시대의 언어로 말함으로써 커다란 공감을 불러냈습니다. 인터넷은 온통 <선덕여왕> 천지였지요. <추노>(본문에선 '장혁')도 그리 할 수 있을까요? 1부에서 만난 <추노>라면 충분히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리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네, 맞습니다. 사극은 '어떤 시대를 쓰는지' 보다 '어떤 시대에 쓰는지'가 훨씬 중요합니다. 저는 이 말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추노>에 거는 기대가 더 큽니다. <추노>에는 곽정환 감독의 화려하고 신비한 영상만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명품 감독과 만난 명품 작가가 전해주는 메시지가 어떤 것일지 기다려지는 이유입니다. 

다음 주 수요일이 빨리 왔으면 좋겠군요. 정말 기다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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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들을 위한 집




20대부터 자연스럽게 제 방은 나를 위한 방이라기보다 책을 위한 방이었습니다. 서재가 따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서 거기서 책과 함께 자고 먹고 놀고 다했죠. 그래서 어떤 공간을 보면 먼저 책을 둘 장소부터 생각하게 됩니다. 이 집을 처음 만났을 때 내부는 텅 빈 채 골조만 올라가 있는 상태였어요. 천정이 높다는 이유로 덜컥 이곳으로 이사를 결정했습니다. 천장이 높으면 책을 많이 넣을 수 있겠다 싶어서였지요. 제가 외부에 작업실을 두고 작품을 쓰는 체질도 아니고 우리 식구는 같이 글을 쓰는 사람들이기에 집안에 서재가 두 개는 필요했어요. 그래서 그냥 집 자체를 서재화, 작업실화 시켰습니다. 그래서 문을 열어놓고 외출해도 걱정이 없을 정도에요. 책 말고는 가져갈 게 없으니까요(웃음). 하지만 이러한 서재를 만들기 위해 일상적인 것들을 많이 포기했고 그것이 나중에 저를 많이 불편하게 하더군요. 책꽂이를 하나 더 만들기 위해 2층 화장실을 포기하는 등 오로지 책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생활적인 면에서는 많이 불편해졌습니다. 하지만 이 많은 책들을 보며 '이것을 내가 가지고 있구나'. '너무나 많은 것을 내가 누리고 있구나' 하는 묘한 안도감과 행복감을 느꼈습니다. 아직도 빈 책꽂이가 많아서 앞으로도 상당기간 마음 놓고 책을 꽂을 수 있다는 사실이 참 기쁩니다.


다 읽고 나니 봄이 왔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3개월 동안 읽었던 삼성출판사의 한국문학 전집 60권은 저의 자양분이었어요. 낮에도 창에다 검은 도화지를 붙여 방을 어둡게 하고 불을 켜고 읽었죠. 겨울에 읽기 시작했는데 다 읽고 나니 봄이 왔고 뭔가 다른 힘이 생긴 듯이 든든해졌죠.

문학을 하다 보니 여전히 문학신간 위주의 독서가 주가 되긴 하지만 작품을 쓰다 보면 필요에 의해 하게 되는 독서도 상당수 있어요. 이를테면 낚시꾼을 묘사하기 위해서 낚시입문 서적을, 토끼를 등장시키기 위해 토끼 기르는 법에 관한 책을 읽기도 합니다.
30대 지나면서는 저절로 심리학, 정신분석 ,역사, 철학, 미술 ,신화 쪽으로 관심을 두게 되었습니다.도스토예프스키는 다 읽기가 벅차서 악령 빼고는 나중에 나이 들면 읽어야지 하고 미뤄놓기도 하고 이방인 같은 작품은 매년 한 번씩 다시 읽어보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최근에는 전기나 자서전 ,평전을 읽는 재미에 푹 빠졌어요. 스콧니어링 자서전이나 로렌 아이슬리 자서전 ,로맹 가리 전기를 보면서 저는 그렇게 못 살았지만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그 영역이 얼마나 광활한지를 실감하죠. 그때마다 인간에 대한 신뢰가 싹트기도 합니다.


한 권의 책은 곧 한 명의 사람


서재는 제 보금자리이자 둥지여서 따로 분리가 안 되요. 그냥 함께 사는 것이지요. 책도 그래요. 한 권의 책은 곧 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한 권의 책을 읽는 다는 것은 한 사람과 깊이 소통하는 일과 같습니다. 모르고 있던 해박한 지식이나 세상의 수많은 낯선 이야기들을 알 수 있으니 사실 나로서는 득만 보는 소통이 되겠네요. 그들을 통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 인간이라는 존재가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아가는 지에 대한 교감을 통해 세상을 알아가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에게 책은 곧 사람이고 저 자신이기도 합니다.


미셸 투르니에처럼




햇볕이 잘 드는 한낮에 블라인드를 다 올려놓고 책장을 올려다 보며 서재 바닥에 누워볼 때가 있어요. 바닥이 타일이라 차가워요. 그래도 마치 마당에 누워 있는 것처럼 아늑하답니다. 제겐 조카들이 많은데 그들이 몰려와서 서재에서 이 책 저 책 들춰보며 뒹굴기도 하고 책을 읽는 것을 볼 때면 기분이 참 좋아요. 그래서 프랑스의 미셸 투르니에처럼 주변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서재를 만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는 오래된 수도원을 구해서 집으로 여기고 사는데 항상 문을 열어두어 온 동네 아이들이 수시로 드나들며 논다고 해요. 투르니에가 없을 때도 말이죠.
나중에는 소중한 책을 낸 저자들도 초대해서 낭독회를 가져볼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당장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동의도 구해야 하는 일이니 정말 먼 훗날쯤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인간은 누구나 존엄하다라는 것을 알게 해 준 작품




어려서부터 책 읽는 것을 매우 좋아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시골 마을이라 읽을거리가 풍성했던 것은 아니었어요. 그저 책을 본다는 것이 너무 좋아서 읽을 수 있는 것은 소리 내어 다 읽었던 것 같아요. 간판이며 과수원의 배나 포도를 싼 신문지까지도요. 저는 형제가 여럿인데 오빠가 책 읽기를 좋아해서 그가 빌려오는 책들을 제가 먼저 읽기 시작 했고 그것이 독서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는 난독이어서 뭘 읽었는지는 기억에 없습니다.
그러다가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라는 책을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접하게 되었는데 그 동안에 읽었던 무수하고 잡다한 책들이 모두 뒤로 밀려나는 느낌이었어요. 난쟁이 일가족의 삶을 통해 참다운 문학작품의 품격을 알게 되었던 것 같아요. 소외된 사람들이 그의 문학 안에서는 오히려 중심이었고 이 작품은 저에게 인간은 누구나 존엄하다는 것을 알게 해 준 작품이기도 합니다. 필사를 해볼 기회가 있었는데 간결한 문체인데도 울림이 크고 견고하고 아름다웠습니다. 작품을 쓰고 있는 지금도 제 문장들이 그런 아름다움을 유지하길 하는 바람입니다.


그림 앞에서 울어본 사람들의 이야기


작년에 그림과 눈물이라는 책을 우연히 접하게 되었는데 그림 앞에서 눈물을 흘려본 적이 있는가? 라는 첫 문장이 무척 마음에 와 닿았어요. 또 그림 앞에서 울어본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독특한 소재와 제임스 엘킨스의 독특한 이력에도 매력을 느꼈고요. 이 책은 설문을 토대로 쓰여진 글이라서 읽고 있는 이가 직접 참여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우리는 예술작품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걸 쑥스러워하죠. 감동이 메마른 시대에 살고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감동의 눈물조차도 타인의 시선을 느껴야 하는 데서 오는 억압도 한 몫 한다고 봐요. 이 책을 읽으면 그런 무의식적인 억압이 풀리는 느낌이 듭니다. 마크 로스코의 텍사스 예배당에 걸린 그림 앞에서 울었던 사람들 이야기를 읽고 있는데 나도 당장 그 그림을 보러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저 검고 어두운 색깔 때문에 울었다는 사람들 마음이 그대로 전해져 와요. 눈물은 슬플 때만 흘리는 것이 아니에요. 마음이 정화되고 치유될 때도 눈물을 흘리죠. 결국 이 책은 부제처럼 그림 앞에서 울어본 행복한 사람들의 이야기인데 읽다 보면 내 안에 흐르다가 멈춰버린 감동의 눈물을 찾아 나서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울어 본지가 굉장히 오래되셨다거나 내 마음이 메말랐다는 생각이 드는 분들에게 특별히 권해 드리고 싶네요.


새해에도 좋은 책을 가까이 두고




책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모두 따뜻하고 꿈이 많은, 좋은 분들이라 생각됩니다. 또 자기 자신을 사랑하시는 분들 일 것 같아요. 그래서 저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 너무 감사하고 책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함께 있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새해잖아요. 책과 함께 하는 시간들이 조금 더 많아지고 우리의 만남도 더 깊어지리라 기대합니다. 저는 저자이기도 하고 독자이기도 해요. 그러니 우리는 늘 그렇게 함께 있다고 생각해요. 어려운 시절이지만 새해에도 좋은 책을 가까이에 두고 한 발짝 나아가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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