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모순 자체가 처칠의 인간적인 매력이었음이 분명하지만, 동시에 처칠은 보좌관과 내각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모시기 어려운 상사였다. 그리고 그가 전권을 장악한 5년 동안 쌓인 주위의 불만은 1945년 7월 영국 총선에서 ‘대폭발’하고 말았다. 승전을 보고한 지 두 달 만에 치러진 총선에서 처칠이 이끄는 보수당은 하원의석 197석 대(對) 393석으로 애틀리의 노동당에 참패했다. 총선 당일 미·영·중·소 4개국 회담을 위해 포츠담에 가 있었던 처칠은 뜻밖의 소식에 부랴부랴 귀국해야 했다. 히틀러에게 이기고도 노동당에 졌으니, 처칠의 입에서 “이 배은망덕한 국가 같으니! ”라는 말이 튀어나온 건 당연한 일이다.  


국왕이 참석한 장례식  


6년 후인 1951년 처칠은 총선 승리로 다시 한 번 총리직에 복귀했으나 77세의 노령으로 국정을 수행하기에 무리였다. 결국 4년 후인 1955년 앤서니 이든에게 총리직을 물려주고 내각에서 물러나 하원의원으로 남았다. 두 번째 총리 재임 중 처칠은 ‘제2차 세계대전 회고록’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는데 한 나라의 수장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경우는 처칠이 유일하다.  


처칠은 평생 하루 여덟 개의 시가를 피우고 매일 샴페인과 와인을 마셨지만 한 세기 가까운 긴 삶을 영위했다. 처칠이 1965년 1월21일 91세로 타계하자 영국의 노동계는 그를 애도하는 의미에서 모든 파업을 일시적으로 중단했다. 국장으로 치러진 그의 장례식에는 ‘군왕은 신하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깨고 엘리자베스 2세가 참석했다.  


처칠은 업적만큼이나 많은 과오도 남겼다. 생의 대부분을 20세기에 살았지만, 그는 근본적으로 빅토리아 시대에 태어난 19세기적 인물이자 제국주의자였다. 그는 여성참정권과 인도 독립을 맹렬하게 반대했고 마하트마 간디를 ‘현자인 척 하는 사기꾼’으로 매도했다. 일본의 진주만 폭격 이후에도 일본의 군사력을 과소평가해 영국의 아시아 식민지 대부분을 상실하는 오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결함에도 불구하고 21세기의 영국인들에게 처칠은 하나의 신화다. 아니, 비단 영국인뿐 아니라 전쟁에 나서는 모든 지도자는 처칠이 보여준 비범한 용기와 리더십을 본받으려 한다. 2002년 1월 이라크전을 앞둔 부시 미국 대통령은 연두교서에서 “우리는 실패하지도 물러서지도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약해지거나 지치지도 않을 것입니다”라는 처칠의 1941년 2월 연설을 그대로 인용했다.  


해로우 스쿨에서 낙제를 거듭하던 키 작은 소년, 병정놀이와 역사서에 빠져 있던 이 열등생이 히틀러의 무서운 야망에 맞서 전 유럽을 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핵심은 ‘참전이 불확실한 동맹국들을 믿고, 나치스에 맞서 싸울 용기가 있느냐’에 달려 있었다. 당시 영국 정치인 대다수가 이 같은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었지만, 처칠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감히 전쟁에 뛰어들 용기를 내지는 못했다.  


꾀 많고, 겁 없던 ‘진짜 남자’  


내각에서 탄탄대로를 걸어온 여타 정치인들과 달리, 처칠은 젊은 시절부터 성공과 실패를 숱하게 반복해왔다. 다르다넬스 작전의 실패, 재무장관 시절의 실책, 두 번에 걸친 당적 이탈, 1930년대에 겪었던 10여 년간의 야인 생활 등 그의 경력은 롤러코스터처럼 극과 극을 달리고 있었고, 이런 와중에서 처칠은 ‘도저히 이겨낼 수 없는 상황은 없다’는 용기를 갖게 된 것이 아니었을까?
아니, 그보다는 처칠이 본래부터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는 판단이 더 합당할 것이다. 보어 전쟁에서 도망칠 수 있었는데도 부상병을 구하기 위해 열차로 뛰어들었다가 포로로 붙잡혔던 것처럼, 그에게는 도박사에 가까운 승부사 기질이 있었다. 그리고 진정한 승부사답게 그는 전쟁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맞을 때마다 주저 않고 목숨을 내걸었다. 1년 가까이 끈 다르다넬스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처칠은 해군장관 직을 내던지고 직접 동부 전선으로 가 종군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스코틀랜드와 동유럽을 비롯해 영국군이 전투 중인 모든 전장을 직접 찾아가 군인들을 독려했다. 1944년 6월 연합군이 프랑스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했을 때는 ‘영국군과 함께 노르망디 땅을 밟겠다’는 처칠의 결의가 너무도 굳세어 결국 조지 6세가 ‘친애하는 윈스턴에게’로 시작되는 친서를 보내 그의 노르망디행(行)을 만류했을 정도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처칠은 참다운 남자이자 진짜 군인이었다.  


만약 처칠이 오늘날 신화로 부각된 자신을 본다면 어떻게 반응할까? 역사학자이기도 했던 그는 아마 자신이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인물이 된 것을 자랑스러워할 것이다. 불도그처럼 입을 꾹 다문 채 턱을 내밀고 승리의 V자를 그리던 이 남자는 본질적으로 겸손하기보다는 오만하기를, 모자라기보다는 조금 넘치는 편을 택하는 승부사였으니 말이다. 처칠은 스스로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우리는 모두 벌레처럼 하찮은 존재일지도 몰라. 하지만 나는 그중에서도 반짝반짝 빛나는 벌레일 거야.”




1945년 5월 8일 승전을 기념하며 구중에게 손을 흔들고 있는 윈스턴 처칠(가운데).
런던의 마담 티소 박물관에 전시된 아돌프 히틀러와 윈스턴 처칠의 밀랍인형.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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