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에서 가장 뛰어난 여자’
훗날 로즈 장학생 선발을 위한 에세이에서 클린턴은 자신이 조지타운에 온 것은 ‘실천적인 정치가로서의 삶을 준비하기 위해서’이며, 옥스퍼드에서 학문에 전념하며 자신이 이미 깊이 빠져버린 정치 세계의 압박에서 잠시라도 떠나길 원한다고 썼다. 클린턴은 남부 지역에 할당된 네 명의 로즈 장학생 중 한 사람으로 최종 선발되었다. 외교위원회에서 상사로 모시고 있는 풀브라이트 상원의원처럼 로즈 장학생이 된 것이다. 특유의 친화력과 밝고 확신에 찬 화술, 그리고 유머감각 덕분에 그는 인터뷰나 대중 연설에서 늘 상대방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빌 클린턴은 힐러리를 가리켜 ‘내가 인생에서 만난 모든 여자 가운데 가장 뛰어난 여자’라고 말하곤 한다. 클린턴의 예일대 법대 동창인 힐러리 로댐은 탁월한 변호사인 동시에 아동복지 전문가였다. 공부에 매진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우울했던 2년간의 옥스퍼드 생활을 접고 미국으로 돌아온 클린턴은 1972년 예일대 로스쿨의 강의실에서 커다란 안경을 낀 힐러리 로댐을 만나게 된다. 힐러리는 당시 로스쿨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으로 소문나 있었다. 법대의 남학생들은 너무나 똑똑하고 빈틈없는 힐러리를 경계했지만 클린턴은 바로 그 같은 똑똑함 때문에 힐러리에게 끌렸다.  


로스쿨 졸업 후 두 사람은 각각 아칸소 로스쿨 교수와 매사추세츠의 아동보호재단에 취직해 떨어져 있게 되었다. 그러나 클린턴의 강력한 추천으로 힐러리는 아칸소 로스쿨로 직장을 옮겼고, 두 사람은 1975년 10월11일 빚을 내 산 집의 거실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어디로 보나 젊고 평범한 부부였지만, 클린턴의 가슴속에는 더 큰 야심이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정치에 대한 야망이었다. 처음 나선 하원의원선거에서 고배를 마신 그는 워싱턴을 목표로 한 야심을 약간 수정했다. 자신의 고향인 아칸소 주지사 선거에 뛰어들기로 한 것이다.  


남부에 위치한 아칸소는 작고 보수적인데다 대다수의 미국인이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주였다(이 때문에 1992년 대통령선거 당시, 공화당은 ‘클린턴이 대통령이 되면 미국인들 모두가 아칸소 사람들처럼 평생 닭털이나 뽑아야 할 것’이라는 비방광고를 하기도 했다). 대신 작은 마을들로 이루어진 아칸소는 ‘풀뿌리 민주주의’를 실천하기에 적절한 지역이었다. 클린턴은 아칸소의 구석구석을 누비며 주유소, 교회, 잡화점에서 주민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목장에 가면 주인의 제안을 받아들여 즉석에서 로데오 경기에 나서고 마을 축제의 토마토 빨리 먹기에 참가해 식탁 위의 토마토를 모조리 먹어치우기도 했다. 아칸소 주민들은 명석한 머리와 능란한 화술을 갖춘 동시에 이웃집 청년처럼 친근해 보이는 젊은 후보에게 매료되었다. 이런 장점을 등에 업고 클린턴은 약관 서른둘의 나이로 아칸소 주지사에 당선된다.  


아칸소 주지사로서 그가 보여준 모습은 약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유능한 행정가, 그리고 자상한 아버지와 남편이었다. 그는 아칸소를 다스리며 추진력 있는 행정가로서의 면모도 발휘했다. 예를 들면, 1985년 일본의 산요전기가 아칸소 포레스트시티에 있는 TV 부품공장을 닫으려 하자 클린턴은 직접 오사카로 가서 산요전기 회장을 설득했다. 그가 내놓은 카드는 “철수하지 않으면 월마트에서 산요전기의 TV를 팔게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산요는 이 제안에 동의했고, 이후 8년간 월마트는 2000만대 이상의 산요 TV를 팔았다.  


클린턴이 아칸소 주지사로 취임할 때, 부부의 외동딸 첼시는 두 살이었다. 첼시는 유치원 선생님이 부모의 직업을 물으면 “엄마는 변호사고 아빠는 전화하고 커피 마시고 연설해요”라고 대답하곤 했다. 클린턴은 주지사 집무실에 딸을 위한 작은 책상을 가져다두고 첼시가 그림을 그리거나 책을 읽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곤 했다. 그것은 그의 친아버지가 결코 누릴 수 없었던 행복이었다. 이상적인 남편과 아버지인 주지사의 모습은 아칸소 주민들에게 절로 흐뭇한 미소를 짓게끔 했다. 그러나 이때 이미 클린턴은 지역방송국 기자인 제니퍼 플라워스를 비롯한 여러 여자와 외도를 즐기고 있었다.  


‘소년 주지사’에서 미국 대통령으로  


주지사 정도의 직위에서는 그의 외도가 걸림돌이 될 수 없었지만 대통령선거라면 문제가 달랐다. 1992년, 걸프전 승리로 부시 대통령의 지지율이 70%에 육박하는 상황에서 클린턴은 민주당의 대통령선거 후보 경선에 뛰어들었다. 심지어 그의 텃밭인 아칸소 주에서도 조지 부시 대통령에게 밀릴 것이라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클린턴에게는 나름의 확신이 있었다. 자신의 장기인 풀뿌리 민주주의 방식의 선거운동, 그리고 주지사로 쌓아온 행정가로서의 능력, 여기에 더해 12년간 계속되어 온 공화당 집권을 종식시키고픈 미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면 승리할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민주당 예비경선은 그의 예상대로 돌아갔다. 마흔을 갓 넘긴 나이에 동안인 그는 ‘소년 주지사’라는 비아냥 속에서도 송거스, 브라운, 봅 케리 등 다른 후보들을 차근차근 물리쳐나갔다. 유권자들은 일단 그의 잘생긴 외모와 카리스마 넘치는 연설 능력에 매료되었고, 두 번째는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그리고 여성과 유색인종을 배려하는 정강정책에 기울었다. 여성, 백인 블루칼라, 흑인 유권자들이 그를 열정적으로 지지했다. 중간에 제니퍼 플라워스 스캔들, 마리화나 복용 문제, 병역기피 등 갖가지 악재가 터져 나왔지만 놀랍게도 대중의 지지도는 떨어지지 않았다.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지명되어 공화당의 조지 부시 후보와 맞붙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공화당 측은 ‘남부의 가난한 촌놈’으로 그를 비난했고, 보수적인 TV대담 프로그램은 클린턴을 불러놓고 20분 내내 혼외정사에 대한 질문만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대중의 지지도는 더 올라갔다. 어차피 미국인 대다수는 엘리트가 아닌 평범한 중산층이며, 그런 중산층과 사회적 약자들에게 클린턴은 인간적으로, 그리고 정책적으로도 매력적인 후보였기 때문이다. ‘뉴욕 포스트’는 “개인적인 문제 때문에 이처럼 유례없이 비난을 받고도 클린턴이 살아남았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정치가로서 그의 자질이 그만큼 훌륭하다는 점을 증명한다”라고 쓰기도 했다.  


아칸소 주지사선거 시절 목장과 주유소, 잡화점을 방문했던 것처럼 클린턴은 부통령후보인 앨 고어 부부와 함께 뉴저지, 펜실베이니아, 웨스트버지니아, 오하이오, 켄터키, 인디애나, 일리노이를 거치는 1600㎞의 버스 유세에 나섰다. 군중이 모여 있으면 어디에나 멈춰 서 즉석 유세를 하는 방식의 선거운동은 클린턴의 이미지만큼이나 새롭고 신선했다.  

그의 대중적 이미지는 세 번에 걸친 TV 토론에서도 유리하게 작용했다. CBS TV에서 방송된 후보 토론회가 끝난 후, 시청자의 53%는 클린턴 후보가 가장 잘했다고 평가했다. 젊은 중산층 유권자들은 TV에 비친 클린턴의 모습에서 어딘지 모르게 친구 같은 느낌을 받았고, 이는 곧 그에 대한 지지로 이어졌다. 반면, 조지 부시 후보가 잘했다는 평가는 25%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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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들이 너무도 사랑하고, 또 미워했던 한 남자

 
 




클린턴-힐러리 부부와 딸 첼시는 한때 이상적인 가족으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클린턴은 힐러리와 결혼한 직후부터 여러 여자와 외도를 즐기고 있었다.


정책적으로는 성공한 대통령, 그리고 도덕적으로는 실패한 대통령. 이것이 클린턴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대체 왜 그는 지킬박사와 하이드처럼 상반된 두 모습을 대중 앞에 드러낼 수밖에 없었을까? 이 비밀의 열쇠는 그의 유년 시절에서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클린턴은 남부 아칸소의 블루칼라 가정 출신이라는 보잘것없는 배경에도 명문 조지타운 대학에서 2년 연속 학년회장을 지냈으며 3학년 때는 상원 외교위원회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며 일찌감치 정계 진출을 꿈꾸었다. 대학 졸업 후에는 전 미국에서 32명만을 선발하는 로즈 장학생이 되어 영국 옥스퍼드 대학으로 유학하고 유학 후 다시 예일대 로스쿨에 입학하는 등 엘리트 코스에서 승승장구했다. 

 그가 이 세 명문을 거치며 사귄 친구들은 훗날 아칸소 주지사와 미국 대통령선거에 나설 당시 큰 자산이 되었다. 남부 사투리를 쓰는 덩치 큰 시골뜨기 클린턴은 동부 출신이나 명문가의 자제들이 다니는 조지타운과 예일 대학에서 놀라운 친화력을 발휘하면서 친구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클린턴에게는 친구 대다수가 잘 알지 못하는 비밀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알코올중독자인 양아버지의 폭력이었다. 클린턴은 자서전인 ‘빌 클린턴: 마이 라이프’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어렸을 때 나의 생활은 친구들과의 놀이, 지식 습득의 기쁨 등으로 충만해 있었다. 하지만 내 내면에는 불확실성과 분노, 그리고 폭력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했다.” 어린 시절의 상처는 클린턴의 인생에 그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고 어두운 그늘을 드리웠다. 그리고 그는 대통령 탄핵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이하며 영광의 절정과 고통의 맨 밑바닥을 롤러코스터처럼 오가야 했다.  


남부 출신 시골뜨기  


클린턴의 본명, 즉 윌리엄 제퍼슨 클린턴은 그의 진짜 이름이 아니다. 그의 아버지 윌리엄 제퍼슨 블라이드 주니어는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교통사고로 죽었다. 아칸소 주 호프에서 태어나 핫스프링스에서 자란 빌(윌리엄의 애칭)은 다섯 살 때까지 야채가게를 하는 외조부모의 손에서 컸다. 생계가 막막해진 어머니 버지니아 카시디가 아이를 떼어놓고 다른 도시에 있는 간호학교에 다녔기 때문이었다. 마취담당 간호사가 된 버지니아는 빌이 다섯 살 때 핫스프링스에서 자동차 대리점을 하는 로저 클린턴과 재혼해서 5년 후 빌의 이복동생 로저를 낳았다.  


로저 클린턴, 즉 빌의 양아버지는 결코 좋은 아버지는 아니었다. 그는 구제불능의 알코올중독자, 도박중독자였으며, 술에 취하면 아내를 심하게 때렸다. 심지어 가위로 버지니아를 찌르려 한 적도 있었다. 이 때문에 버지니아는 이혼할 결심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도망 나오기도 했으나 결국 로저가 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둘은 갈라서지 않았다. 열 살 아래의 동생을 무척 사랑했던 빌은 열네 살 때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의 성을 블라이드에서 클린턴으로 고쳤다. 나중에 동생이 컸을 때, 형과 성이 다르다는 사실 때문에 혼란을 느낄까봐 걱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름과는 달리 빌은 로저 클린턴을 자신의 친아버지로 인정하지 않았다. 폭력 속에 하루하루를 불안하게 살아가면서도,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였던 친아버지는 분명 더 나은 모습이었을 거란 믿음을 갖고 살았다. 그 믿음은 어린 빌에게 결코 작지 않은 희망이었다. 열두 살 때 외가에 놀러간 빌을 보고 지나가던 누군가가 말했다. “너 빌 블라이드의 아들이로구나! 아버지랑 똑같네.” 빌은 이 말을 듣고 며칠 동안 싱글거리며 다녔다. 아버지의 폭력을 경험하며 자란 형제였지만, 친아버지에 대한 믿음을 가졌던 빌과 아버지의 폭력성이 자신에게도 유전되었을 거란 두려움에 떨었던 로저의 인생은 180도 달라졌다. 훗날 빌이 아칸소 주지사를 거쳐 미국 대통령에 당선될 때, 로저는 코카인 밀매 혐의로 감옥을 들락거리고 있었다.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다  


고교 2학년 때 소년단원으로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만난 클린턴은 이 잠시 동안의 만남에서 ‘정치가’로 자신의 진로를 결정짓게 된다. 이후 케네디 대통령을 비롯해서 로버트 케네디, 마틴 루터 킹 등 진보적인 정치가들은 그의 우상이 되었다. 고교 3학년 때 킹 목사의 유명한 연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를 듣고는 감격한 나머지 한참을 울기도 했다. 그리고 남부 출신으로는 드물게 동부의 가톨릭 명문인 조지타운 대학교 외교학부에 입학하는데, 학업 성적이 뛰어났던 그가 아이비리그 대학들을 외면하고 굳이 조지타운을 선택한 것은 이 학교가 미국 정치의 중심인 워싱턴 DC에 있었기 때문이다.  


조지타운은 아칸소 출신에게는 영 어울리지 않는 대학이었다. 동급생들은 대부분 동부의 명문 사립고교 졸업생이었고, 외교관이나 상원의원 아버지를 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클린턴은 이런 환경에 겁먹거나 주눅 들지 않았다. 그는 입학하기 전부터 대학 기숙사에서 남부 출신이거나 민주당을 지지하는 학생들을 찾아내 모조리 친구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친화력을 기반으로 해서 외교학부 1,2학년 학생회장에 연속으로 당선된다. 그로서는 최초의 정치적 경험이었던 셈이다.  


유복하거나 좋은 환경에서 자란 것은 아니었지만, 클린턴이 밝고 활달한 성격으로 자라날 수 있었던 데는 어머니의 역할이 컸다. 아들이 자신의 잘못된 결혼으로 인해 피해를 봤다고 생각한 버지니아는 클린턴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쏟았다. 클린턴은 자신이 고3 때 신청했던 한 장학금 지원서류에서 어머니의 편지를 뒤늦게 발견한 적이 있다. 편지의 내용은 이랬다. “이 편지가 빌에 대한 저의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기 바랍니다. 직업 때문에 제가 빌에게 어머니 노릇을 제대로 한 적은 거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빌이 하고 있는 일, 그리고 빌이 앞으로 해내는 일에 대한 칭찬은 모두 빌 혼자서 받아야 합니다. 빌은 그야말로 ‘자수성가한’ 남자입니다.”  


‘자수성가한 남자’라는 어머니의 평가는 정확한 것이었다. 그에게는 아무런 배경도, 또 경제적 풍요나 롤 모델로 삼을 만한 아버지도 없었다. 조지타운에 입학할 당시 양아버지는 암으로 인해 많이 쇠약해진 상태였지만, 클린턴은 어머니와 동생을 양아버지의 폭력 앞에 무방비 상태로 두고 떠나야 하는지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그리고 이 ‘자수성가한 남자’는 대학교 3학년 때부터 상원 외교위원회에서 일하며 ‘정치가의 꿈’을 향해 한발을 내디디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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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지 않은 미국인이 섹스 스캔들을 끊임없이 일으키는 이 바람둥이 대통령에게 넌더리를 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클린턴이 바람둥이인 동시에 아주 유능한 대통령이자 매력적인 남자라는 것이었다. TV 토크쇼에 출연해 색소폰을 연주하고 로데오 경기에 즉흥적으로 뛰어드는 클린턴 특유의 친화력은 인생의 고비마다 그를 승리로 이끌었다.

 
 



빌 클린턴
● 1946년 8월19일 아칸소 주 호프에서 출생
● 1963년 소년단원 자격으로 존 F 케네디 대통령 만남
● 1964년 조지타운대 외교학부 입학
● 1968년 로즈 장학생으로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 유학 철학·정치·경제 통합과정 전공
● 1971년 예일대 로스쿨 진학
● 1975년 힐러리 로댐과 결혼, 1978년까지 아칸소 로스쿨 교수로 재직
● 1978년 아칸소 주지사 당선
● 1980년 외동딸 첼시 출생. 아칸소 주지사 재선 실패
● 1982년 아칸소 주지사 재출마 당선. 이후 1992년까지 주지사로 재임
● 1992년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출마, 제42대 미국 대통령 당선(지지율 43%)
● 1996년 민주당 후보로 대통령선거에 재선(지지율 49%)
● 1998년 르윈스키 스캔들로 인해 대통령 탄핵동의안이 하원 통과, 상원에서 부결됨
● 2000년 힐러리 클린턴 뉴욕주 상원의원에 출마, 당선
● 2001년 대통령 퇴임
● 2009년 전 미국 대통령으로는 두 번째로 방북, 김정일 면담



8월4일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북한을 전격 방문,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면담해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클린턴은 회동 하루 뒤인 8월5일, 북한에 5개월째 억류되어 있던 커런트 TV의 두 여기자, 로라 링과 유나 리를 데리고 미국으로 귀환하는 데 성공했다. CNN은 캘리포니아 버뱅크 공항에 도착한 두 여기자가 가족과 눈물 흘리며 포옹하는 감격적인 장면, 그리고 그들의 뒤를 이어 클린턴 전 대통령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는 장면을 생중계했다. 실로 번개같이 이루어진 ‘미국발 깜짝 쇼’였다.  


그러나 세계를 감탄시킨 이 깜짝 쇼는 클린턴의 입장에서 보면 결코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의 방북은 9년 전부터 계획된 숙원사업이었다. 2000년 말, 두 번째 임기 막바지에 이른 클린턴은 미국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북한을 방문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우선순위에서 중동 평화협상에 밀려 실현되지 못했다. 북한을 방문하지 못하게 된 것이 못내 아쉬웠던 클린턴은 자신의 후임자인 조지 W 부시 대통령 당선자에게 “지금 북한에 가면 북한과 미사일 개발 금지 협정을 맺을 수 있다”고 말했으나 부시 당선자는 대답을 피했다. 그리고 부시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해빙 무드였던 북미 관계는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아무튼 모든 미국인에게 ‘너무도 특별한 한 남자’였던 빌 클린턴(Bill Clinton) 전 대통령은 이번의 ‘여기자 구출 작전’으로 다시 한 번 특별한 이미지로 전 미국인에게 각인되었다. 사실 클린턴은 1992년 대통령선거전 때부터 늘 특별한 남자였다. 미국 역사상 세 번째로 젊은 대통령(클린턴은 1992년 만 46세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1946년생으로 최초의 베이비붐 세대 대통령, 8년의 재임기간 중 미국 경제를 지속적 호황으로 끌어올린 대통령, 민주당 출신으로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다음으로 재선에 성공한 대통령 등등.
1992년 미국 대선후보로 나설 당시 빌 클린턴은 완전한 무명인사였다. 그러나 12년에 걸친 아칸소 주지사 경력이 전부인 클린턴은 선거에서 당시 대통령이던 조지 부시 공화당 후보를 꺾는 대이변을 연출했다. 버스를 타고 미국 전역을 도는 신선한 방식의 선거유세와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It′s the economy, stupid!)’라는 슬로건으로 미국인의 심리를 정확하게 꿰뚫은 점, 그리고 젊고 잘생겼으며 절로 마음을 쏠리게끔 하는 매력적인 연설솜씨 등이 승리의 원인이었다.  


대통령이 되어서도 그의 행보는 대체로 순탄했다. 선거 공약대로 미국의 경제를 최대치의 호황으로 끌어올렸고 교육개혁에서도 적잖은 성과를 거두었다. 또 이스라엘과 중동 간 평화협상을 위해 꾸준한 노력을 기울였고 1998년 체결된 북아일랜드 평화협정(‘굿 프라이데이’ 협정)에 막후 해결사 노릇을 하기도 했다. 2000년 클린턴이 대통령직을 떠날 당시 미국의 재정 흑자 규모는 5590억달러로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이러한 성과 때문에 미국인의 66%는 클린턴이 대통령직에서 퇴임하는 순간까지 그를 지지했다. 클린턴의 뒤를 이은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8년의 임기를 아프간, 이라크 전쟁과 전세계로 퍼져나간 미국발 경제위기로 마감한 것과 비교하면 클린턴의 유능함은 더욱 두드러진다.
정책적으로 성공하고, 도덕적으로 실패한 대통령

8월4일, 전격적으로 북한을 방문한 클린턴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회동하고 두 명의 여기자를 석방시키는 ‘깜짝 드라마’를 연출했다.


그럼에도 적잖은 수의 미국인은 그를 맹렬하게 ‘미워했다’. 참 이상한 일이다. 미국인은 그를 정말로 싫어한 것이 아니라 감정적으로 미워했다. 그 이유는 너무도 간단하다. 클린턴은 임기 내내 섹스 스캔들을 끊임없이 일으켰다. 대통령선거 당시 불거졌던 제니퍼 플라워스와의 12년에 걸친 외도뿐만 아니라 폴라 존스와의 성희롱 소송, 결정적으로 집권 2기에 터진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섹스 스캔들 때문에 클린턴은 탄핵으로 대통령직을 상실할 위기에 몰렸다. 하원에서는 과반수 찬성으로 탄핵 동의안이 통과되었지만, 상원에서 부결됨으로써 그는 대통령직을 간신히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통령직은 지켰다 해도 400쪽에 달하는 ‘지퍼게이트’ 보고서와 낱낱이 까발려진 사생활 등으로 그의 명예는 바닥으로 떨어진 후였다.
아이러니한 것은 탄핵 사태까지 간 이유가 그의 업무상 과실이나 실책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클린턴의 가장 개인적 문제, 즉 외도에서 비롯됐다는 점이다(표면적인 이유는 위증죄와 사법방해 혐의였지만). 미국인은 그를 뛰어난 대통령이라고 인정하면서도 몇 년째 폭로에 폭로가 거듭되고 도청, 성희롱, 심지어 그의 정액이 묻은 드레스까지 등장하는 상황에 넌더리를 냈다. 2000년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 후보 앨 고어가 공화당의 조지 W 부시 후보에게 패한 것은 고어 개인이나 민주당의 문제가 아니라 클린턴에 대한 유권자의 혐오감이 빚어낸 결과라는 분석이 나올 정도였다.


문제를 더욱 악화시킨 것은 이 같은 스캔들을 앞에 두고 끊임없이 말 바꾸기와 거짓말을 시도한 클린턴의 유들유들한 태도였다. 예를 들면 TV 대담 프로그램에 출연해 “르윈스키와 부적절한 관계가 없었나?”라는 질문에 “르윈스키와 관계는 없다(There is no relationship with Rewinsky)”라고 현재형으로 대답하는 식이었다.  

즉, ‘과거에는 부적절한 관계가 있었지만 현재는 없다’는 의미의 대답이었고, 이런 방식으로 그는 위증죄를 교묘하게 피해갔다. 보수적 경향의 ‘워싱턴 포스트’는 클린턴을 가리켜 ‘태양 아래 있는 모든 것에 대해 거짓말을 하고도 남을 사람’이라고 혹평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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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땡땡’ 시리즈 3부작이다. 2011년 개봉 예정으로 현재 후반 작업에 들어간 ‘땡땡 1: 유니콘 호의 모험’은 벨기에의 만화가 에르제가 그린 탐정만화 ‘땡땡’ 중 ‘유니콘 호의 모험’ ‘황금 집게를 가진 게’ ‘레드 라캄의 보물’ 세 편을 합쳐 만든 작품이다. 스필버그는 1981년경, 막 개봉된 ‘레이더스’의 신문평을 읽다 우연히 땡땡의 삽화를 보게 되었다. 의협심에 불타는 기자로 기삿거리를 찾다가 모험의 세계에 빠져드는 땡땡에게 매료된 스필버그는 “이 이야기야말로 아이들을 위한 ‘인디애나 존스’ 시리즈”라며 흥분했고 직접 벨기에로 가 원작자의 유족에게서 ‘땡땡’의 영화 판권을 사들였다. 그리고 ‘땡땡’의 시나리오 작업을 의뢰했지만 시나리오는 스필버그의 마음에 들게끔 나오지 않았다.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20년 가까이 표류하던 ‘땡땡’ 이야기는 땡땡의 또 다른 팬인 피터 잭슨(‘반지의 제왕’ 감독)과 스필버그가 만나며 비로소 결실을 보게 됐다. 두 사람은 시리즈의 1편인 ‘땡땡의 모험: 유니콘 호의 비밀’은 스필버그가, 2편은 피터 잭슨이, 그리고 3편은 스필버그와 피터 잭슨이 함께 감독하기로 의기투합했다. ‘땡땡’은 스필버그가 처음 감독하는 애니메이션이기도 하다. 소니와 파라마운트가 합작하는 이 영화는 실사가 아니라 3D 모션 캡처 그래픽 기법으로 제작된다. 주인공인 땡땡 역의 성우로는 제이미 벨이, 그리고 악당 해적인 레드 라캄에 다니엘 크레이그가 캐스팅된 상태다.  


스필버그의 분신 존스 박사는 환갑이 넘었으니 ‘크리스털 해골의 왕국’을 끝으로 모험 일선에서 은퇴(?)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스필버그 자신 역시 예순세의 적지 않은 나이다. 이 나이까지 현역으로 활동하는 감독은 거의 없다. 그러나 스필버그는 은퇴 대신 새로운 캐릭터를 발굴하는 길을 택했다. ‘어린이 버전 인디애나 존스’라는 스필버그 자신의 평가처럼, ‘땡땡’은 지금까지 스필버그가 메가폰을 잡은 어떤 작품보다도 더 철저하게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춘 작품이 될 공산이 크다.  


스필버그가 감독한 영화 중에 피터팬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후크’(1991)가 있다. 영화에서 피터팬 역할을 맡은 로빈 윌리엄스는 중년이 다 되어 네버랜드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더스틴 호프만, 줄리아 로버츠, 로빈 윌리엄스라는 호화 캐스팅에도 이 영화는 스필버그의 여타 블록버스터에 비해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나이 든 피터팬이 새삼스럽게 네버랜드로 돌아간다는 설정은 그리 신선하지 않다. 스필버그 역시 ‘엠파이어’지와의 인터뷰에서 ‘후크’의 실패를 인정했다. 
 

“나는 ‘후크’를 어른들을 위한 영화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피터팬이 네버랜드로 돌아가는 장면 이후부터 ‘후크’는 영 유치한 영화가 되어버렸지요.”
어른이 된 피터팬에게는 네버랜드가 아닌 새로운 세계, ‘현실’이라는 세계가 더 어울리지 않는가. 동화 속 네버랜드에 비하면 현실은 항상 똑같고 무미건조해 보이지만, 그 속에서 가끔씩 예측불허의 모험이 펼쳐지기도 하니까 말이다.  


‘타임’지 인터뷰에서 스필버그는 “아이의 열정이 마음속에 가득 차는 날이 오면, 다시금 아이들을 위한 영화를 찍겠다”고 말했다. 그는 이제 할아버지가 된 나이에, 젊고 새로운 주인공 땡땡과 함께 또 다른 모험의 여정을 떠나려 하고 있다. 그가 떠날 모험의 세계가 어떤 모습일지 자못 궁금해진다. 확실한 것은 그 모험의 세계가 분명 관객에게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즐거움을 안겨주리란 사실이다. 아무리 나이가 들었다 해도, 피터팬은 영원한 피터팬이니 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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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스 제작-스필버그 감독-해리슨 포드 주연-존 윌리엄스 음악’이라는 환상적인 콤비 플레이가 만들어낸 ‘인디애나 존스’ 시리즈는 3편이 탄생한 지 19년만인 2008년 ‘인디애나 존스 4: 크리스탈 해골의 왕국’으로 되살아났다. 영화의 주인공인 해리슨 포드나 감독 스필버그는 모두 예순이 넘은 노장이 된 상태였다. 그러나 나이 든 존스 박사는 여전히 터프하고 멋졌으며, 스필버그의 발랄하고도 기발한 상상력 역시 관객을 즐겁게 하기에 충분했다.
‘인디애나 존스’ 시리즈 네 편에서 모두 존스 박사로 출연한 해리슨 포드는 “스크린 속에서 시각적인 효과를 멋지게 표현하는 데는 스필버그를 따라갈 감독이 없다”고 평했는데, 이는 관객의 처지에서 보아도 충분히 수긍이 가는 말이다.  


영웅이 아닌 인간의 영화  


‘인디애나 존스’가 재미와 스타일을 겸비한 영화라면, ‘쉰들러 리스트’는 한결 진지하고 무거운 주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작품이다. ‘쉰들러 리스트’의 경우는 스필버그의 ‘아카데미 콤플렉스’뿐 아니라 스필버그 자신이 오랫동안 극복하지 못했던 본연의 콤플렉스를 뛰어넘은 작품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더욱 깊다. ‘쉰들러 리스트’의 성공 후, 스필버그는 학창 시절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동급생들에게 따돌림을 당했고 ‘죠스’로 인정받기 전까지 크고 작은 차별대우에 여러 번 맞닥뜨렸다고 털어놓았다.  


“아이들에게 심하게 맞아서 코피가 터진 적도 많았습니다. 코가 좀 작아지면 유대인처럼 보이지 않을까 싶어서 밤마다 코에 테이프를 붙이고 잠들곤 했죠.”
‘쉰들러 리스트’의 원작은 1982년 부커상을 수상한 소설 ‘쉰들러의 방주(Schindler′s Ark)’다. 유니버설 스튜디오 시절, 스필버그를 처음 발굴했던 시드 샤인버그는 이 소설의 ‘뉴욕타임스’ 리뷰를 스필버그에게 보냈다. 영화화를 검토해보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스필버그는 이 제의를 단번에 거절했다. 유명한 감독으로 인정받은 상황에서 굳이 유대인이라는 스스로의 콤플렉스를 환기시키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또 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를 유대인 감독이 제작한다면 반유대주의 감정을 부추길 위험도 있었다. ‘쉰들러의 방주’는 스필버그를 거쳐 마틴 스콜세지, 로만 폴란스키, 시드니 폴락 등 여러 유력한 감독을 거쳤으나 그 누구도 선뜻 이 작품을 승낙하지 않았다. 결국 소설이 출간된 지 10년이 다 되어서야 스필버그는 이 영화를 감독하기로 결심했다.  


폴란드에서 1000명이 넘는 유대인의 목숨을 구한 독일인 사업가 오스카 쉰들러의 실화를 다룬 이 영화를 스필버그는 흑백 필름으로 제작했다. 파격적인 시도였다. 영화의 소재가 실화인 만큼,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찍은 다큐멘터리처럼 보이게 하기 위한 장치였다. 스필버그는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 모든 대사를 폴란드어와 독일어로 처리하고 영어 자막을 삽입하는 방법을 고려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리암 니슨, 랄프 파인즈 같은 연기파 배우들이 열연한 이 영화는 1993년 아카데미영화제에서 작품상, 감독상, 음악상을 포함한 7개 부문 상을 수상했고, 2007년 미국 영화협회가 뽑은 ‘역대 최고의 미국영화 100선’에서 8번째 영화에 선정되었다. 영국 아카데미와 골든 글로브에서도 작품상을 수상한 ‘쉰들러 리스트’를 통해 스필버그는 작품성에 대한 논란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평론가 존 그로스는 ‘뉴욕타임스’에 실은 영화평에서 “솔직히 디즈니 만화영화와 스필버그풍의 모험영화가 뒤섞인 작품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영화를 보니 그런 생각은 나의 편견일 뿐임을 알게 되었다. ‘쉰들러 리스트’는 인간 본연의 도덕성과 감성이 훌륭하게 결합된 걸작이다”라고 호평했다. 스필버그는 ‘쉰들러 리스트’ 개봉 이후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을 위한 재단을 만들어 이 영화에서 얻은 수익 전액을 기부했다.  


‘쉰들러 리스트’를 기점으로 스필버그는 아프리카 노예들의 이야기를 다룬 ‘아미스타드’, 1972년 뮌헨올림픽 테러를 주제로 한 ‘뮌헨’, 가벼운 코미디 영화 ‘캐치 미 이프 유 캔’ 등 ‘쥬라기 공원’풍의 모험영화에서 조금 변화된 양상을 보이고 있다. 교묘한 방법으로 경찰을 따돌리는 지능범의 이야기 ‘캐치 미 이프 유 캔’이나 음울한 미래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전쟁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모두 180도 다른 이야기이지만, 여기에는 ‘동화 같은 스토리’가 아니라 인간의 눈물과 땀, 그리고 고뇌가 담겨 있다. 스필버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점점 더 평범해지고 있고, 그의 영화는 영웅이 아닌 인간의 일상을 다룬다.  


2005년 막 환갑을 맞은 스필버그는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했다.
“사람들은 여전히 저에게 묻습니다. 왜 ‘E.T.’나 ‘레이더스’ 같은 영화를 더 이상 찍지 않느냐고요. 사실 마음만 먹으면 그런 기회는 많지요. 예를 들면 ‘해리 포터’ 시리즈와 ‘스파이더맨’의 감독 제의 같은 것들 말이죠. 저는 두 작품을 모두 거절했습니다. 이 영화들은 아이의 순수함이 담긴 눈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저는 그런 것들을 예전에 이미 해봤으니까요. 하지만 제 마음속에 어린 시절의 열정이 가득 차는 날이 오면, 다시금 이런 영화들로 되돌아갈 날이 있을지도 모르지요.”
같은 해 개봉된 ‘우주전쟁’은 어둠과 고통으로 가득한 화면과 사악한 외계인이 등장해, ‘스필버그판 공상과학영화’에 대한 관객의 기대를 여지없이 깨뜨린다. 스필버그는 더 이상 꿈꾸지 않게 된 걸까? 나이 든 피터팬은 이제 네버랜드를 떠나기로 마음먹은 것일까?  


할아버지가 된 피터팬, 땡땡과 손잡다  


1994년 영화사 ‘드림웍스’를 설립한 이후 스필버그는 대부분의 영화를 직접 감독하기보다는 제작하고 있다. ‘트랜스포머 2’를 제작해 올여름 극장가를 강타하기도 한 스필버그의 향후 스케줄은 2011년까지 꽉 짜여 있다. 그가 제작하는 영화들 중에는 2011년 링컨 탄생 200주년을 맞아 개봉하는 영화 ‘링컨’(리암 니슨이 주인공 링컨 역할을 맡았다)도 포함되어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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