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껏 살아온 삶에 대해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어요. 20대에도, 30대에도 그리고 지금까지도
항상 준비하고 도전하는 자세로 삶을 마주하기 때문이죠. 내가 지금 이룬 것들에 대해 안주하거나
자만하게 되면 먼 미래의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됩니다.”

‘1인 기업가’로 알려진 공병호경영연구소 소장 공병호(48) 박사는 이제껏 살아왔던 자신의 삶에
대해 “당당하다”고 말한다. 지금은 연구, 강연, 저술 등의 활동으로 1년 3백65일을 바쁘게 살지만
그는 한때 연구원, 기업체 CEO 등 여러 일을 거치면서 변화를 꿈꾸고 새로운 것에 도전해왔다.
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바탕에는 책이 있었다. 끊임없이 책을 읽으며 자신의 삶에 대해 반성하고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왔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가 연구실로 쓰는 아파트는 수많은 책들로 가득했다. 1만 권은 족히 넘어 보였다.
특히 복도와 거실 곳곳에 책꽂이를 세워 책을 종류별로 깔끔하게 분류해둬 작은 도서관에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평소 수많은 책을 읽어온 그에게 몇 번을 곱씹어 읽어도 좋은 책을 묻자 단박에
찰스 핸디의 <포트폴리오 인생>을 꼽았다.



“직업, 죽음 등 인생 전반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는 일종의 컨설팅 책입니다. 피터 드러커처럼
유명한 매니지먼트 사상가인 찰스 핸디가 일흔이 넘은 나이에 이제껏 살아온 삶을 노년의 지혜로
승화시켜 보여줘 자아의 정체성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하게 만들죠.”

찰스 핸디는 자신이 겪었던 경험을 토대로 삶에 대한 깨달음을 잔잔하게 일깨워준다. 그는 한때
잘나가던 석유 회사의 간부였고 런던경영대학원의 교수가 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어떠한
직함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자신만의 ‘포트폴리오 인생’으로 뛰어들어갔다. 어떤 일이든 평생
할 수 있는 것은 없을 뿐더러 사람은 계속 나이를 먹어가면서 예기치 못한 미래를 만나기 때문이다.

찰스 핸디는 스스로가 인생을 경영하는 포트폴리오 인생을 통해 단기적인 업무와 중·장기적인 계획
속에서 균형을 유지하고 나만의 특별한 경력을 쌓는 것이 중요하다고 얘기한다. 공 박사 역시
“아무리 현재의 자신이 잘되고 있을지라도 안주하지 말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책 8장에 보면 역S자 커브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요. 가장 좋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 때 오히려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라는 얘기죠. 사실 이때 뒤돌아보며 반성하고 앞을 향해 나아갈 것을 다짐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더 고민하면서 미래에 대한 준비를 하면 자신의 경력을 다양하게 만들 수 있고
결국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길이 됩니다.”

공 박사는 자서전을 읽는 것을 좋아한다. 자신이 살아보지 못한 다양한 인생을 대신 경험할 수 있어서다.
그는 “찰스 핸디의 삶을 통해 앞으로 10년, 20년 후의 미래를 위해 더 열심히 노력하고 도전해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며 “이 책이 사람들에게 인생의 방향을 잡아주는 내비게이션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글·김민지 기자 / 사진·조영철 기자
출처 : http://gonggam.kore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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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은 자식들에게 “기본부터 착실히 다질 것”을 강조했다고 한다. “아버님은 항상 ‘내가 많은 사람들과 겨뤄 상대를 쓰러뜨렸지만, 그 비결은 결코 화려한 공중돌기나 발차기가 아니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비장의 무기는 오직 ‘정권치기’ 하나였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발차기가 화려할수록 위력적일 것이라 생각하지만, 실전에선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님이 미국 프로레슬러 톰 라이슨과 붙었을 때 얘깁니다. 만화에선 공중에 붕 떠서, 링 3면을 돌아가면서 발로 차, 가속도를 붙여 그 힘으로 톰 라이슨을 가격한 것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상황은 그와 다릅니다. 상대도 평생을 갈고 닦은 고수 아닙니까? 그런 상대의 빈틈은 눈 깜빡하는 순간, 0.1초도 안되는 짧은 순간에 불과합니다. 그 순간을 잡느냐 못잡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립니다. 그런 상대 앞에서 벽을 세 번씩이나 차면서 빙빙 돌면, 그게 통하겠습니까? 그때도 아버님의 무기는 단 한 방, 상대가 ‘깜빡’하는 그 틈을 파고든 정권치기였다고 합니다.”

 

“기본에 충실하라” 역설

최광범씨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아버님을 보면 늘 ‘칼 끝에 서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하곤 했습니다. 아버님은 항상 자신을 다듬으며 정진하셨거든요. 집에서도 좌선을 하시고, 천천히 산책하며 차를 마시곤 하셨습니다.”

“아버님에겐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은 통하지 않았습니다. 아버님은 그 말을 몹시 싫어하셨어요.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그 나름대로 열심히 해보겠다는 말 아니냐’는 거죠. ‘자기 상황에 따라 단지 성실히 노력하는 정도로는 이뤄지는 것이 적다’는 뜻이었습니다. 아버님은 ‘목숨을 걸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거다 싶으면 목숨 걸고 정진해야 한다’는 겁니다.”

 

‘배달’에게 최광범씨는 늦둥이다. 52세에 첫아들을 낳았으니 늦둥이도 이만저만한 늦둥이가 아니다. 무예를 위해 결혼마저도 뒤로 미뤘던 것일까?

“어머님이 일본서 유학할 때 아버님을 만났습니다. 당시 어머님은 24세, 아버님은 45세였습니다. 사실 아버님에겐 어머님을 만나기 전, 다른 여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일본사람이어서 집안 어른들이 인정하시지 않았습니다. 어머님을 데려오자 집안 어른들이 비로소 인정했다고 합니다. 한국인이었으니까요. 1974년에 제가 태어나자 부모님은 한국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아버님은 귀국 후 한국과 일본을 왔다갔다 하며 생활하셨습니다. 하지만 한국에선 공식적인 사회활동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무패의 파이터에게도 사생활은 있었을 터. 부부싸움이나 자녀 교육문제 등 일상생활과 관련된 ‘배달’의 모습이 궁금했다.

“아버님은 큰소리를 내지 않으셨어요. 소리지르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부부싸움은 제가 기억하는 한 한 번도 하지 않으셨어요. 트러블이 생길 것 같으면 어머님은 아무말도 않고 그냥 가만히 계시기만 했어요. 그럼 그냥 모든 것이 조용해졌습니다.”

 

최광범씨는 ‘최배달’의 아들로서 “고교시절 동급생들의 눈길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딱 한 번 사고를 친 적이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후회했어요.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었는데…. 상대편 얼굴이 부서지다시피 했거든요. 의사가 보더니 ‘교통사고가 났느냐’고 물었을 정도였으니까요. 애들이 ‘최배달 아들이 싸운다’며 우루루 몰려 나와 에워싼 채 구경하려 몰려들어서…, 저도 모르게 그만 우쭐해진 겁니다.”

10여년 전 치료비로 400만원이 나왔을 정도라니, 집에서 엄청 혼났을 법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아버님은 아무 표정도 없이 ‘무술은 너 자신을 닦는 거다’라고 딱 한마디만 하시더군요. 무서워서 아무 말도 못했어요. 나중에 그러셨다더군요. ‘그래도 맞고 들어온 것 보단 낫다’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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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아이리스'의 이병헌
생방송에 가까운 드라마… 견딜 수 있을지 두려워… 1년간 캐스팅 고사
모방 통해 더 나아지는 법… '미드' 따라갈 수 있다면 성공한 것 아닌가
할리우드선 걸음마 단계… 내가 잘할 수 있는 건 한국말 연기하는 한국인

'월드스타'란 말은 남들은 인기 있다고 하지만, 우리는 쉽게 인기를 느낄 수 없는 배우를 칭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하지만 미국(할리우드 영화 '지 아이 조'), 일본(한일 합작영화 '히어로'), 그리고 유럽(프랑스·미국 합작영화 '나는 비와 함께 간다')까지 실제 활동 영역이 지리적으로 세계를 아우르고 있는 이병헌(39)은 좀 다르다. 국내 팬들에게도 손만 뻗으면 쉽게 닿을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진다. 이처럼 생생하게 현재적 의미를 갖는 월드스타는 그동안 흔치 않았다.

대중들이 최근 그를 더 가깝게 여기는 건, KBS 2TV 수목 드라마 '아이리스'에서 데뷔 후 18년간 응축시켜온 연기의 힘을 마음껏 뿜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 조직과 친구에게 지독한 배신을 당한 뒤, 적(북한)과 손잡고 복수에 뛰어든 야수 같은 남자 김현준이 그가 맡은 배역. 이 첩보 드라마는 지상파 방영에서 10회 만에 시청률 33.7%를 기록했다. 케이블 채널, DMB 채널, 인터넷 VOD까지 합치면 50% 이상의 실질 시청률을 기록 중인 것으로 추산된다. 빠른 구성과 역동적 화면의 힘도 컸지만 이병헌의 열연을 빼놓고는 설명하기 힘든 성공이다. 15일 오후 서울 청담동 BH 엔터테인먼트 사무실에 나타난 그는 목에 머플러를 감싼 채 가벼운 기침을 하고 있었다. "지금은 밝힐 수 없는 해외 프로젝트 건으로 신라호텔에서 미팅을 하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이어 그는 "아이리스는 사실 내가 출연할 작품이 아니었다"고 하더니, "죄송하다"며 말보로 담배 한 대를 피워 물었다.





최근 할리우드 영화에까지 진출한 한류스타 이병헌. 그러나 그는“내가 최고로 잘 할 수 있는 배역은 결국 한국에서 한국말로 연기하는 한국인”이라고 말했다./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무슨 소리인가? '아이리스'는 이병헌의 출연을 전제로 한 기획 아니었나?

"글쎄, 처음 출연제의를 받았을 때 다른 프로젝트가 이미 진행 중이었다. 시놉시스를 보고는 '나와는 인연이 아니다'란 느낌이 들어 1년간 고사했다. 내심 '생방송에 가까운 우리나라 드라마 제작과정을 과연 견딜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다."

―'아이리스'는 그래도 꽤 사전 제작이 이뤄졌다고 들었다.

"요즘은 드디어 생방송 단계로 진입했다. 하하하. 격렬한 액션이 많아 한 장면 찍는 데 하루가 걸릴 때도 있다. 인터넷을 통해 대중의 반응을 실시간으로 확인해 가면서 드라마를 찍는 건, 우리나라에서만 가능한 일인 것 같다. 좀 창조적이지 못한 방식인 듯하다."

―하지만 대중 반응이 폭발적이지 않나.

"칭찬도 있고 기대보다 부족하다는 불만도 있다. 그래도 새로운 장르를 향한 모험을 감행했는데 폭넓은 공감을 얻고 있는 것 같아 다행스럽다."

―'아이리스'는 미드(미국 드라마)를 짜깁기한 것 같다는 평가도 받는다.

"미드를 따라갈 수만 있다면 성공한 것 아닌가? 모방을 통해 좀 더 뛰어난 것을 탄생시킬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된다. 처음에 우리 드라마를 '쉬리'와 비교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때 이미 난 '아이리스'는 미국 드라마 '24'나 영화 '본(Bourne) 아이덴티티' 시리즈를 꿈꾼다고 말했었다. 방영을 시작하니 누군가 이병헌의 '뵨 아이덴티티'라고 해 크게 웃은 적이 있다(이병헌의 일본 애칭 '뵨사마'와 '본 아이덴티티'를 합친 말)."

―올해 당신은 두 편의 외화를 통해 해외에서도 주목받는 배우로 거듭났다. 할리우드 첫 경험은 어땠나?

"돈의 논리로 움직이는 게 확연히 보이더라. 투자자들 입김이 거세다. 무섭다. 국내 촬영현장에서 쉽게 느낄 수 있는 인간적인 끈끈함은 찾아보기 힘든 곳이다."

―당신이 '지 아이 조'에 캐스팅된 건 솔직히 일본, 한국 관객 주머니를 노린 할리우드의 계산 속 아니었나?

"그럴 거다. 계산기 두들겨서 남는 게 없으면 등 돌리는 게 그들의 방식이니까. 그쪽에서 손 내밀고, 내가 그 손을 잡은 건, 서로 이용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지 아이 조' 일본 홍보 행사 때는 팬들의 열기가 하도 대단해, 함께 간 외국 배우들이 '너 일본에서 완전히 마이클 잭슨이네'라며 감탄했다. 다행이었다. 사실 '지 아이 조'에서 기존의 패턴과 전혀 다른 연기를 보여줘야 했기 때문에 많이 불안했다. 복면 쓰고 칼싸움하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게 내 스타일은 아니라서."

―미국서 촬영하면서 차별을 당해봤나?

"영어에 꽤 자신이 있었는데도 슬랭(속어)을 잘 모르니까 쉽게 끼어들지 못하겠더라. 촬영 초반에는 나 때문에 분위기 썰렁해질까 봐 버스로 함께 이동할 때도 가만히 있었다. '왕따 아닌 왕따'가 됐었다. 다른 배우들 사이에서는 '쟤 왕자야?', '너무 거만한 것 같지 않아?' 같은 얘기가 돌았다고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친해졌다. 종종 연락하고 만난다. 시에나 밀러는 LA에 갔을 때 연락을 하니 수많은 파파라치들이 달라붙어도 편하게 나오더라."

―할리우드에서 이병헌은 어디쯤 있나?

"걸음마 단계도 못 된다. 내가 언제 할리우드 진출을 본격적으로 시도하겠다고 한 적이 있었나? 난 내 '베이스'를 잃고 싶지 않다. 내가 아무리 고급 영어를 마스터한다고 해도 미국인의 습성과 문화를 그 나라 사람들만큼 표현해낼 수 있겠나? 내가 최고로 잘할 수 있는 배역은, 한국에서 한국말로 연기하는 한국인이다."

1991년 KBS 공채 탤런트 14기로 데뷔한 이병헌은 "신인 시절 PD들로부터 구박을 많이 받았다"고 했다. "군 입대를 앞두고 어머니 친구의 부추김으로 탤런트 시험에 도전했다가 덜컥 합격했다"는 그는 "'이 길이 아니면 말고'라는 생각이 늘 가슴 한구석에 있었다"고 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PD들의 차 문을 열어주는 배우가 아니라, PD들이 차 문을 열어주는 배우가 돼야겠다"고. "방송사 PD들이 엄청 권위적이었던 시절이었는데, 욕먹다가 '깡다구'가 생긴 셈"이라며 웃었다.

―화면에서 보면 타고난 배우처럼 느껴지는데?

"친한 사람 두셋 있을 땐 리더 노릇을 하지만 그 이상 사람이 많아지면 얼어붙는 그런 스타일 있지 않나? 내가 그렇다. '난 사이즈가 작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었고, 배우는 꿈도 꾸지 않았다. 배우가 되고 보니 의외로 많은 사람들 앞에 설 일이 많지는 않더라."

―배우를 안 했으면 지금 뭘 하고 있을까?

"글쎄? 영화를 좋아했으니까, 배우 말고 영화 쪽 일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재수를 하겠다 했을 때, 건설회사를 운영하는 아버지가 진지하게 '포크레인을 사줄 테니까 중장비 면허를 따보라'고 하셨다. 그랬으면 지금쯤 날리는 중장비 기사가 됐을 수도 있다."

―'욘사마' 배용준씨 못지않게 일본에서 당신의 인기도 대단하다. 누구의 인기가 더 높을까?

"(잠시 침묵) 제가 듣기로는 두 사람 색깔이 너무 달라서 비교하기가 어렵다고들 하더라."

―배용준씨처럼 직접 사업을 해보고 싶은 생각은 없나?

"하하, 그런 쪽에는 전혀 소질이 없다. 난 지금 하고 있는 일 한 가지에만 완벽하게 몰입해야 그나마 그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스타일이다. '아이리스' 찍으면서도, '지 아이 조', '놈놈놈' 홍보 때문에 일본 행사를 다녀오고 나면 대본이 머리에 안 들어와 아주 고생했다."

―사실, 장동건이나 정우성, 배용준 같은 조각미남은 아닌 것 같다.

"젊었을 땐, 내가 나온 드라마를 보면서 '내가 봐도 멋있네' 한 적이 꽤 있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는 그런 생각을 단 한 번도 못 해봤다. 잘 생겼다는 칭찬을 들어도 별 감흥이 없다. 요즘은 '배우같이 생겼다'는 말이 나를 흥분시킨다. 그게 나의 힘 아니었을까?"

―그래도 나이에 비해서는 꽤 젊어 보이는 얼굴이다.

"어릴 때 노숙해 보이는 사람이 나이 들어서도 별로 변함이 없다. 내가 그런 과(科)가 아닌가 싶다. 중학생 시절 사진 보면 그때 이미 어른 얼굴이었다. 사실 배우로서 존재감을 위해서는 무작정 어려보이는 게 좋지는 않다. 역시 내 나이에 맞는 얼굴이 가장 좋다. 그런데 종종 중·고교 동창들을 만나 술을 마시다 보면 '요즘 확실히 내가 어려보이는구나'라고 생각한다."

―당신의 나이도 내년이면 마흔이다. 결혼할 생각은 없나?

"빨리하고 싶다. 하지만 결혼은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노력해서 되는 부분이 아니지 않나? 사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해서 느긋했었는데 최근에는 너무 일만 해서 그런지 정말 기회가 안 생긴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이제 어느 정도 노력을 해야 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그럼 2004년 송혜교씨와 헤어진 이후, 단 한 번도 이성을 교제하지 않았단 말인가?

"한 명 있었다. 공부하는 사람이었다. 대학원생. 또 한 명은 글쎄 딱히 사귀었다고 말하기는 좀 그렇다."

―배우로서 당신의 꿈은 무엇인가?

"지금 이 시간이 오래갔으면 한다. 소박하게 들리나? 아니다. 선택을 받는 게 아니라 선택을 하는 배우로 살아가는 건 정말 힘든 일이다. 이 자리를 계속 지키고 싶다. 하지만 불가능하다는 걸 안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는 법이다. 언젠가 나는 다시 선택을 기다리는 배우로 돌아가겠지."

☞ 이병헌은…

2009년을 기점으로 한국보다 외국 영화에 출연하는 게 더 익숙해진 배우. 그러나 현재 드라마 ‘아이리스’를 통해 국내 팬들에게 ‘나는 변함 없는 한국의 스타’라는 점을 확인시켜줬다.

91년 KBS 공채 탤런트 14기로 데뷔했으나 신인 시절에는 고난도 많았다. 한 PD는 이병헌에게 “넌 이게 데뷔작이자 은퇴작이다. 이 드라마 끝나면 방송사 근처에 얼씬 거리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캠퍼스 드라마 ‘내일은 사랑’(93년)의 신범수 역을 통해 청춘 스타로 뜬 그는 ‘폴리스’(94년), ‘사랑의 향기’(94년), ‘아스팔트 사나이’(95년) 등 남성 냄새가 물씬 풍기는 역을 통해 주연급으로 성장했다.

영화배우로 주목 받는 데는 5년이라는 시간이 더 걸렸다. ‘런어웨이’(95년), ‘그들만의 세상’(96년), ‘지상만가’(97년)의 흥행 성적이 신통치 않았다. 하지만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2000년) 이후 그는 ‘연기파’로 통하기 시작했고 김지운 감독의 ‘달콤한 인생’을 통해 백상예술대상 최우수 연기상 등을 수상하며 영화판에서도 사랑받는 이름이 됐다. 이 영화에서 이병헌을 버렸던 폭력 조직의 보스 김영철은 ‘아이리스’에서는 첩보기관 NSS의 부국장으로 변신해 똑같은 ‘만행’을 저지른다. 이병헌은 “제가 김영철 선배님을 ‘아이리스’에 추천했다”며 “비슷한 설정을 같은 사람과 다시 연기하니까 배우로서 몰입도가 더 높아지는 효과가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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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한두 번 해본 취재원도 아닌데 대단히 궁금한 게 있을까요.
편안한 마음으로 그를 만나러 갑니다. 그러나 그의 시선으로 해석한 대답들은
느슨해지려는 세포에 기분 좋은 탄력을 불어넣습니다. 어떻게 기여해야 하나,
일흔의 배우는 여전히 연기와 세상에 대해 생각이 많더군요.




토요일 점심 나절, 지나가는 사람도 차들도 드문드문. 한강변 지척의 호젓한 주택가를 걸었다. 한자리에서 30년은 족히 뿌리를 내렸음직한 낡은 이층집들이 정겹다. 만개한 꽃처럼 한껏 피어오른 감들이 담장 너머로 주렁주렁. 이렇게 취재를 핑계 삼지 않으면 딱히 발길 향할 일 없는 동네. 지난 시대의 오래되고 마모된 풍경이 건네는 위안에 낯빛이 너울거린다. 곁에는 익숙한 얼굴이 동행 중이다. 동네 산책 나온 이웃이 따로 없다. 요기를 해야 할 때라 밥집부터 찾는다. “이 집 설렁탕이 맛있어. 괜찮겠어?” 최불암이라는 배우. 어디서 누구와 함께라도 눈 맞추고 대화하는 모습이 그대로 일상 같다. 설렁탕집 사람들도 단골손님 대하듯 격의 없이, 그러나 공손하게 말을 섞는다. 대배우의 힘은 어쩌면 거기에 있을지도.
저도 모르게 배시시 웃게 되는 드라마를 만났다. 제목도 담백하게 ‘그대 웃어요’(SBS주말 드라마). 호화찬란한 톱스타 캐스팅도 아니고 독한 대사가 오가지도 않지만 ‘사람 사는 게 저런 거지’ 이심전심 마음이 통한다. 압축 성장의 현대사를 관통하며 살아온 아버지가 드라마의 무게 중심이다. 매주 토요일이면 그(강만복 사장)가 운영하는 ‘승리 카센터’를 배경으로 야외 촬영이 진행된다. 아침 일찍, 사고 친 서정길(강석우)을 경찰서에 집어넣는 신을 찍고 이곳으로 넘어왔단다. 얼핏 피곤한 기색을 뒤로하고 설렁탕을 몇 숟가락 후루룩 들이켜고는 카센터로 자리를 옮겼다. 가만 보니 카센터 뒤편 강만복 일가의 살림집은 모형이다. 사진 찍을 만한 곳을 손수 물색하며 늦가을 마당을 거닐던 그가 플라스틱 의자 깊숙이 몸을 밀착시켰다.

‘초록색 추리닝’이 드라마의 트레이드마크가 됐어요. 트레이닝복이 아니라 ‘추리닝’이라고 표현해야 할 것 같은…

일종의 제복이라고 해야겠지. (운전기사 강만복이) 평생 모시던 회장님이 돌아가신 후에 가업을 물려받은 철부지 아들이 부도를 내고 하루아침에 무일푼 신세가 돼. 그 식구들을 거두면서 두 가족이 함께 살게 되는데, 죄다 그 제복을 입혀놨어. 질서와 원칙의 상징이잖아. 강만복이란 아버지는 한데 섞일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두 가족의 화해를 이끌어. 심하면 독재가 되겠지만 자유스런 제복이 아직은 필요한 것 같아. 우리 사회를 봐도 말이야.

아무래도 실제 모습과 캐릭터 사이에 교집합이 있겠지요

내가 캐릭터를 만들기도 하고 캐릭터가 나를 만들기도 하고, 반반쯤 섞인다고 봐야지. 이번엔 연기가 부족하단 생각이 들어. 순발력이 떨어진다고 해야 하나. 나이가 있으니 체력도 예전 같지 않고, 모든 게 조금씩 어눌해져요. 그 인물이 창조적으로 얼른 나오지 않더란 얘기야. 그래서 부대낄 때도 있고. 쉽게 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연기란 게 의식이 배어 나와야 하는데, 큰소리만 치고 있는 것 같아(웃음). 연출하는 이태곤 PD가 ‘그대 그리고 나’ 조연출 출신이야. 그때 캡틴 박, 그 아버지처럼 해달라는 주문이 있었지. 와일드한 아버지잖아. 하지만 앞에서 야단쳐도 등 뒤에선 눈물짓는, 애환과 아픔이 있는 그 이면을 표현해야 하거든. 그런 쓸쓸함이 보여야 하는데….

‘그대 웃어요’에서 말씀하고 싶은 게 있나 봐요

작품을 시작하면서 기대하는 바가 있었지. 안방 아버지들의 생각이 잘 전달되지 않잖아. 훈시 말고, 젊은 사람들과 즐겁고 의미 있게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 우리 시대 가장의 모습이랄까. 다들 일등을 좇고, 돈을 좇지만 물질만능주의에 빠진 풍요로운 삶은 결코 바람직하지도, 행복하지도 않아. 삶의 방향성을 세대 간에 서로 공감하자는 거지. 작가가 영리한 것 같아. 스토리를 끌고 가는 힘이 있어.

다작을 하지 않는데, 배우로서 작품에 매력을 느끼는 지점은 어디쯤일까요

남는 작품을 해야지. 한국인의 인간상, 한국인의 남성상 같은 걸 남기고 싶어. 한국인의 원형은 이렇다는 아이덴티티를 만들어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거든. 요즘 박범신 작가의 『고산자』를 읽고 있어.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 얘기지. 지도는 유유히 내려오는데 김정호의 생애는 아무도 정확하게 모르는, 역사에 숨어 있는 인물이야. 젊었을 때 소설 ‘동의보감’ 쓰신 이은성 선생과 언젠가 ‘대동여지도’를 드라마로 만들게 되면 함께 하자고 했던 약속이 울렁증처럼 자꾸 치받쳐 올라와요. ‘영웅시대’의 정주영도 그렇고 ‘그대 웃어요’의 강만복도 현대사의 상징적인 인물을 표현하고 있는 거지. 삶의 신념이 확실하고 충직한 사람들.

드라마도 조미료 잔뜩 친 듯 들큰하고 자극적인 맛에 길들여지는 것 같아요

막장이란 말은 죽기 아니면 살기란 뜻이거든. 결국은 자본주의의 논리야. 이익을 많이 창출하니까 대접을 받는 거지. 도덕이나 윤리와는 상관없는 일이 되어버렸어. 안방이 무너지면 모든 게 무너지는 거야. 복수, 암투와 같은 비상식적이고 비윤리적인 것들이 질서와 도덕을 허무니 문제지. 그래선 가정의 축이 서질 않아. 드라마는 아이들에게 학교 칠판 같은 역할을 해야 해요. 재밌고 메시지가 있고, 귀감이 될 만한 무엇이 있어야 되는 거야. 드라마 안에서 사회와 관계를 배우고, 가족과 사랑, 성공 등의 가치도 배우게 되니까. 아이들의 미래를 지키려면 엄마들이 안방을 사수해야지. 그런 드라마는 안 보면 돼. TV 하나만 지켜내도 교육이 달라져요. 똑똑한 엄마들이니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해.

한 시간에 기껏 해야 한두 신 찍는, 지루할 만큼 공정 과정이 긴 작업이잖아요

드라마는 팀워크 싸움이야. 시간도 오래 걸리고, 한 번에 50~60명 정도씩 대부대가 움직이니 서로 호흡이 삐끗하면 힘들어져. 스태프들이야 대체로 큰 문제 없지만 배우들끼리 자존심 싸움이라도 벌어지면 전체가 흔들려. 엇비슷한 여배우들 간에 기 싸움이 종종 생기더라고. 내가 드라마 시작하면서 강조한 게 있어. 바로 인화야.

세월이 흐르니 촬영장 풍경도 많이 변하죠. 현장의 밀도랄까요

우리가 필름 세대잖아. 옛날에는 필름 값 아끼려고 한 컷에 승부를 걸었지. 요즘은 보통 서너 번씩 찍는데, 난 예전 습관 때문에 똑같은 거 여러 번 못하겠어. 장단점이 있겠지만 연기적인 완성도는 그때가 더 좋았을 수도 있지. 한 번에 응축된 걸 내보여야 하니까. 배우를 둘러싼 환경들은 여전히 아쉬운 점들이 있어. 카메라와 조명, 음향 같은 것들. 아직 우리나라는 배우 의존도가 높아. 배우더러 다 설명하라는 식이지. 배우는 말을 안 해도 희로애락이 표현돼야 하거든. 음악으로, 컬러로, 앵글로, 조명으로…. 외국의 잘 만들어진 작품들을 보면 처절한 아픔과 고민을 연기하는 배우의 느낌이 그대로 전달되잖아. 꼭 천연색이어야 하나? 상황에 따라서 모노톤으로 갈 수도 있는 거지. 그런 환경적인 조건들이 20% 정도만 개선되면 좋겠어.

젊은 후배들과는 소통이 자연스러운가요

연기 잘하는 후배들을 보면 기특해. 송옥숙이 며느리로 나오는데, 눈에 총기가 반짝반짝하는 게 얼마나 좋아 보이는지 몰라. 강석우도 역할 아주 제대로 만났고, 천호진은 연민이 비치는 정의로운 남자 캐릭터를 천연덕스럽게 소화해. 허윤정은 연기에 대해 지적하는 걸 보니 학교 교수로 성공하겠고. 이민정은 알고 보니 내가 현대예술극단을 운영할 때 우리 연극에 아역으로 출연한 적이 있더라고. 뾰루퉁한 연기를 예쁘게 잘해. 정경호는 내가 그 아버지 정을영 감독(‘엄마가 뿔났다’ 연출) 팬이라 더 유심히 보고 있지. 연기력이 괜찮은 친구야. 얼굴이 참 작지. 이규한이나 이천희나 얼굴들이 어떻게나 작은지, 나도 예전엔 얼굴 작다 소리 들었는데 비할 바가 못돼(웃음). 똑똑한 최정윤은 실물이 더 예쁜 아이야.

말이 나온 김에, 선생님 얼굴엔 몇 점 주실 건가요? 질문이 무례해도 용서하시길…

배우로 살기에 어정쩡해. 더 거칠든가 더 수려하든가. 거울 보면서 “그 얼굴로 무슨 배우야?” 할 때도 있어. 연극하던 시절에 하루는 배우 김순철씨 집에 갔는데 그 친구 아버지가 “뭐 하러 나가냐?” 물으시더라고. “연극하러 갑니다” 대답을 했지. 잠깐 정적이 흐르더니 한마디 툭 던지셨어. “너희들은 거울도 안 보냐?”(웃음)

이병헌씨는 “배우처럼 생겼다”는 말이 자신을 흥분시킨다고 하던데요. 모름지기 배우의 얼굴은 이래야 한다는 조건이 있을까요

임현식이 MBC 1기인데, 질박하고 구수한 한국 사람의 얼굴이잖아. MBC가 안목이 있었던 거지. 배우는 이런저런 사람이 다 있어야 돼. 우린 연극배우로 시작해서 잘생겨야 배우 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 나도 거칠고 투박하게 보이려고 일부러 사포로 얼굴을 문지르고 그랬었지. 70, 80년대 산업화 시대의 인간 군상, 그 시대의 남자가 상징되는 얼굴을 표현하고 싶은 욕심에…. 소싯적 내 우상은 최무룡, 김승호, 최남현 선생 같은 분들이었어. 그 양반들이 명동 거리에 뜨면 사람들이 다 쳐다봤지. 정말 배우같이 생겼거든. 배우의 힘, 아우라가 대단했어. 가장 중요한 건 인생의 깊이를 얼마나 담을 수 있느냐의 문제야. 50억 인구 모두가 다 배우의 얼굴을 하고 있는 셈이지.

요즘엔 기업적 규모로 돈을 벌어들이는 배우들도 제법 생겼어요

예전에 만났던 일본 NHK 프로듀서는 배우란 어느 분야 사람이든지 함께 디스커션(토론)해 보고 싶은 사람, 누구와도 타협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군. 남의 영혼과 생명을 나에게 가져올 수 있는 순수함도 있어야 하고, 뭘 하더라도 밉상이면 안 되고, 지루해도 자격 미달이야. 난 배우는 남의 집 안방에 노크 없이 불쑥 들어갈 수 있는 허락받은 손님이라고 생각해요. 때문에 깨끗해야 하고 위선이나 허례허식이 있으면 곤란하지. 배용준이나 이병헌, 장동건 같은 친구들을 보면 거기에 부합되는 면도 있고 모자라는 면도 있을 테지만 나름대로 자기 역할을 잘하고 있는 것 같아. 모든 국민이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시대에 배우로 사는 게 어려울 거야. 부와 인기를 떠나서, 얼마나 외롭고 고독할까. 배용준처럼 신적인 인기를 누리는 배우들은 어떨까. 그래 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말야(웃음). 배용준이 일본 공항에서 경호가 불안한 상황에서도 입국장을 정면 돌파했다거나 공연장에서 다친 팬을 직접 병문안했다는 뉴스를 들으면 인간적인 순수함이 보여. 자기 가슴을 그처럼 진동시켜 주는데 안 좋아할 수 있겠어.

가끔은 나이 드는 게 서글퍼지기도 하겠지요

자꾸 눈이 처져서 고민이야(웃음). 순리대로 늙어가는 거겠지. 세월을 거슬러서 젊어지고 싶진 않아. 내가 설 자리가 젊은이 쪽은 아니니까. 집에 청바지 몇 벌 있지만 젊어지려고 안간힘 쓰는 것 같아 안 입게 되더라고. 올해 칠십이 됐는데, 60세의 즐거움, 65세의 즐거움, 70세의 즐거움이 각각 달라요. 그러니까 살맛이 나는 거야. 여든이 되면 도사처럼 또 뭔가 즐길 거리가 생기지 않겠어. 연기도 마찬가지야. 40대, 50대, 60대, 70대의 연기가 다 다르더란 말이지. 세월에 따라 명분적 의미가 달라지고 연기도 점점 내면으로 향하게 돼.

요즘 사는 즐거움 한 토막 들려주세요

며칠 전에 불암산(서울 노원구) 명예 산주 시비 제막식이 있었어. 내 이름하고 같잖아. 불암(佛岩). 내 본명은 영한이고, 중학교 때 큰아버지가 불암이라는 이름을 하나 더 주셨어.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는데 영한이란 이름이 단명할 운이니 장수하라고 부처 불자에 바위 암자를 붙이셨대. 그 나이에 어울리는 이름이 아니어서 어머니가 가지고만 계셨지. 그러다 연극할 때 동명이인이 있어서 불암이란 이름을 쓰게 됐어. 내겐 그렇게 특별한 이름인데, 나를 불암산 명예 산주로 위촉한다잖아. 지질 문화유산으로 보존 가치가 높은 곳이야. 불암산 보존회 회원 600여 명이 쓰레기도 치우면서 환경 지킴이 역할을 하고 있더군. 그날 시비 제막식 한다고 사람들이 많이 왔어. 고마운 마음을 담아서 자작시(‘불암산이여’)를 낭송했지. 「이름이 너무 커서 어머니도 한번 불러보지 못한 채/ 내가 광대의 길을 들어서 염치없이 사용한 죄스러움의 세월, 영욕의 세월/ 그 웅장함과 은둔을 감히 모른 채 그 그늘에 몸을 붙여 살아왔습니다/ 수천만 대를 거쳐 노원을 안고 지켜온 큰 웅지의 품을 넘보아가며/ 터무니없이 불암산을 빌려 살아왔습니다/ 용서하십시오」 보존회 회장이 행사 끝나고 너무 좋아서 이틀 내리 술을 마셨노라고 아침에 전화가 왔어. 나야 고마운 일이지. 친구들은 산 하나 거저 생겼으니 한턱 쏘라고 야단이야(웃음). 요즘엔 드라마에서 어른의 자리를 보여주는 것도 즐거움이고, 이렇게 사회에 참여하는 것도 즐거움이지.



약주도 종종 하시잖아요. 최근의 술친구는 어떤 분들인가요

요샌 주로 후배들이야. 동년배들은 건강 때문에 잘 못 마시지. 며칠 전에 대학 후배, 국회 있을 때 함께 일하던 친구들이 모여서 한잔했어. 젊은 사람들과 얘기하니 즐겁고 반갑고 그랬지. 술자리에 오래 있진 않아. 딱 1차로 끝내지. 2차 가거나 노래방 가는 일은 거의 없어. 집사람도 기다리고, 다음 날 스케줄도 있으니 몸을 과하게 놀리진 않게 돼. 어쩌다 노래방에 가면 ‘낭만에 대하여’ ‘옥경이’ 같은 노랠 불러. 우리 세대의 정서를 담고 있거든.

세월이 주는 깨달음이 있을 거예요

정신이 건강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해. 물질이 먼저냐 정신이 먼저냐, 긴 얘기가 될 수도 있지만 지금은 정신적으로 고매해져야 할 때야. 좋은 차 타고, 좋은 집 사고, 출세하고, 그런 게 뭐 그리 중요한가. 모두가 잘살진 못해도 평균적인 풍요는 경험했으니 이젠 정신적인 가치를 추구했으면 좋겠어. 좋은 사람들과 인간적으로 사람답게 살아야지. 그 좋은 사람 중에 하나가 최불암이면 난 그 이상 없겠어.

참 어려운 숙제, 사랑의 해답은 찾으셨나요

내년이면 결혼 40주년이야. 사랑도 결국은 인간적으로 돌아가더군. 신기하게 집사람(배우 김민자)이 점점 더 좋아져요. 애정이 승화되는 거지. 연민, 나를 위해 희생한 시간들에 대한 고마움, 주름 하나하나의 역사를 아니까 서로가 서로를 보는 시선이 더 애틋하고 아끼게 돼. 결국은 부부밖에 없어. 애들이 전화도 않고 그러면 서운하지만 어쩌겠어, 나도 젊어 그랬는걸.

사랑도 인스턴트 시대라 옛날의 낭만이 그리워지기도 해요

남자는 자고로 말이 없어야 돼. 그 시절 남자들은 순정을 품으면 여자가 사랑하지 않고는 못 견디게, 기어이 넘어오고 말게 유도를 해요. 그런 낭만이 있었어. 젊었을 때 그레이스 켈리 닮았던 우리 집사람한테 나도 그랬고. 약속 장소에는 보통 10분쯤 늦게 나타나는 거야. 왜 안 오나 초조할 때쯤 바바리 깃 날리며 다방 안으로 들어가요, 아주 바쁜 척하면서(웃음). 걸을 때도 3~4미터 떨어져서 오게 하고, 영화표 살 때도 여자에게 묻지도 않고 박력 있게 내 맘대로 정해 버리지. 봤다고 하면 “또 봐” 한마디면 끝이야. 말 없는 남자의 순정이지.

딸 혼사를 조용히 치르셨던데, 아빠 마음이 젖어들었겠네요

자기들끼리 연애했지. 사위는 컨설턴트고 딸은 대학원에서 공부해. 결혼식 앞두고 시집가는 딸에게 장문의 편지를 썼어. 어렸을 때 보았던 모습부터 자라면서 느껴던 것들, 아내와 며느리로 살아야 할 도리까지 쓰다 보니 한 달 넘게 걸리더라고. 결혼식 끝나고 건네줬는데, 받고는 말이 없어. 아마 말하고 나면 혼자 간직하지 못할 것 같아 속으로 묻어두는 눈치야. 내가 염려한 것들을 가슴에 품고 있는 게 찬찬히 보이지. 최백호가 ‘애비’라는 노래에서 딸 시집보내는 심정을 논바닥 갈라지듯 가슴이 찢어진다고 했는데 그 말이 맞아. 아들 때와는 달랐어.

친손녀도 보셨잖아요. 핏줄은 신기한 거예요

모임에 와서 손자 손녀 자랑하는 친구들이 제일 한심했었어. 그런데 내 손녀가 생기고 보니 나도 똑같이 되더라고(웃음). 예쁜 거야 말로 다 못하지. 손녀는 동포일 뿐이라고 거리 두기를 하려고 해도 할아버지 마음이 어디 그런가. 저 아이에게 정신적으로 무엇을 물려줘야 하나 고민도 하게 되고. 우리 아이들한테도 그렇고, 내 DNA 중에서 대물림하고 싶은 건 예술성이야. 어떤 일을 하든 예술적?인문학적 토양이 있으면 삶이 풍요로워지거든. 다행히 우리 아이들이 그런 면에 좀 강해.

시대의 어른으로서 꼭 이루고 싶은 과업이 있을까요

우리 사회에도 문화적?예술적 DNA가 배양되면 좋겠다는 거지. 한강에 예술섬을 만드는 일에 참여하고 있어. 서울시 한강 르네상스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한강예술섬가꾸기추진위원회가 발족됐지. 문화 전문가 20여 명이 모여 있는데 그 추진위원장을 맡았어. 한강이 아파트만 있지 스토리가 없잖아. 나는 한강을 중심으로 한 그 공간이 우리나라 문화예술의 기능과 정신을 집화하는 터전이 되길 바라지. 뉴욕 링컨 센터에 갔을 때, 물론 시설도 훌륭했지만 그 안의 자료가 대단했어. 눈물 나도록 감동적이야. 그걸 기반으로 모든 공연 예술이 만들어지는 거지. 연기 외에 다른 사명이 있다면 이런 거야. 미래 세대를 위한 나와 우리 세대의 숙제라고 생각해.

인터뷰 끄트머리. 카메라 앞에 서야 할 차례가 왔다. 슛 들어가기 5분 전, 카센터 사무실로 미리 들어간다. 요란한 분장도 없이 거울 한 번 쓰윽 보고는 자리에 앉아 몰입을 준비하는 배우. 무심한 듯 툭툭 던지는 대사에 인생이 실린다. 연기가 성에 차지 않는다는 고백에서 그의 번뇌가 읽히지만, 이토록 배우다운 배우를 어디서 만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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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타' 17일만에 관객 10억 돌파
흥행성공으로 '3D영화' 시장 창출
엄청난 제작비용 부담등 반대 불구
자기자본투자 초강수로 폭스 설득

유주희기자 ginger@sed.co.kr
 

 

지난 1998년 영화 '타이타닉'으로 11개의 오스카 트로피를 거머쥔 제임스 캐머런(55) 감독은 수상소감을 통해 "나는 세상의 왕이다"(I'm king of the world)! 라고 외쳤다. 영화 속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의 대사를 인용해 수상의 기쁨을 표현한 것이었지만, 타이타닉의 미학적 빈곤이 탐탁지 않았던 영화평론가들은 '주제넘다'며 불만스러워했다.

지난해 12월 개봉한 3차원 입체(3D) 영화 '아바타'도 25일(현지시간) 타이타닉의 전세계 흥행기록을 넘어섰지만, 평론가들은 '나를 졸게 한 영화'라고 악평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아바타의 성공은 이제 단순히 영화적 완성도로만 가늠될 수 있는 수준을 뛰어넘었다는 지적이다. 미국의 경제주간지 비즈니스위크는 최신호 특집기사를 통해 캐머런 감독에게 '또다시 세상의 왕이 됐다'(King of the world, again)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가 또다시 왕이 될 수 있었던 건 새 시장을 내다 본 안목과 자신의 고집을 밀어붙인 뚝심이었다.

아바타 이전에도 3D영화는 있었다. 하지만 관객들이 굳이 불편한 3D안경과 2배나 더 비싼 영화표 값을 감수하면서까지 극장으로 달려가게 한 건 아바타가 처음이다. 심지어 타이타닉이 수 개월 걸려 세운 전세계 10억 관객 기록도 개봉 17일 만에 깼다.

 

영화산업의 지형도가 바뀔 만한 성공신화다. 덕분에 전세계 영화인들은 한껏 들떴다. 가뜩이나 불법 다운로드가 수익성을 떨어뜨리던 상황에서 3D 영화라는 새 시장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캐머런 감독은 아바타의 개봉 전까지만 해도 푸대접을 받았다. 2000년대 초, 타이타닉의 제작사인 20세기폭스는 캐머런 감독이 4억 달러(약 4,600억원ㆍ공식 순제작비는 2억3,700만 달러이지만 추정치는 3억 달러가 넘는다)의 제작비가 필요한 아바타의 시나리오를 들고 가자 "리스크가 너무 크다"며 망설였다.

2억 달러를 들인 타이타닉만 해도 엄청난 모험이었는데, 또다시 요행을 바라기는 힘든 법이었다. 당시 캐머런 감독은 "남들이 절대 무시 못할 영화를 만들겠다"는 고집으로 폭스를 설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스가 오랜 심사숙고에 빠지자, 마냥 기다릴 수 없었던 그는 직접 3D용 카메라 개발에 나섰다. 그의 1989년작 SF영화 '심연'(The Abyss) 해저용 카메라를 개발했던 사업가 빈센트 페이스를 다시 찾아 2D와 3D 이미지를 동시에 잡아낼 수 있는 카메라 장치 개발을 의뢰한 것.

여기에만 1,200만 달러(약 138억원)이 들어갔다. 대부분 캐머런 감독의 주머니에서 나온 돈이었다. 그렇게 그는 헐리우드 영화인들의 제1수칙, "자기 돈은 쏟아붓지 마라"를 과감히 무시했다.

캐머런 감독이 이처럼 과감할 수 있었던 건 자신의 경험을 통해 3D의 시장성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타이타닉의 성공 이후 엄청난 부를 거머쥐면서 "이제 좀더 재밌는 걸 해보자"고 마음먹게 됐고, 2000년대 초 '고스트 오브 어비스'(Ghosts of the abyss)를 시작으로 수 편의 해저 관련 3D 영화 또는 다큐멘터리를 찍었다.

캐머런 감독의 자기자본투자는 폭스를 설복시켰다. 2005년 폭스는 캐머런 감독에게 1,000만 달러로 '증거물'을 제출해오게 했다. '슈렉' 등 3D 애니메이션의 선두주자인 드림웍스의 제프리 카젠버그 공동사장이 캐머런 감독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덕분에 2005년 10월 캐머런 감독은 폭스의 임원 네 명에게 시험 촬영분을 보여줄 수 있었다.

캐머런 감독은 "내가 촬영해 온 필름을 보자 임원진들의 눈이 반짝 빛났다"며 "그들의 머릿속에도 내가 몇 달씩이나 말해 온 게 뭔지 그려지기 시작했던 것"이라고 전했다. 폭스는 아바타의 흥행이 신통치 않을 경우 캐머런 감독이 더 낮은 비율의 수익을 가져가게 될 것이라는 조건을 내세우며 계약에 한걸음 더 다가섰다.

하지만 엄청난 제작비용은 폭스의 임원진들이 밤잠을 뒤척이게 만들었다. 결국 캐머런 감독은 초강수를 택했다. 앞서 찍어 둔 필름을 들고 이전에 함께 해저 다큐멘터리 두 편을 찍은 적이 있는 월트디즈니를 찾은 것. 놀란 폭스는 바로 백기를 들었다.

폭스는 제작비용을 분담할 제작사를 찾아냈다. 어지간한 블록버스터 수 편을 만들 만한 금액을 배팅하라고 설득하는 과정도 만만치 않았지만, 폭스의 짐 지아노풀로스 공동사장은 "아바타를 놓칠 수는 없었다"고 밝혔다.

2006년 10월, 캐머런 감독은 폭스와 계약을 맺었다. 폭스 측은 "꼬리 달린 파란 거인들이 아직 와 닿진 않지만 당신을 믿는다"며 캐머런 감독을 격려했다. 촬영은 캘리포니아 주 플라야 비스타의 오래된 비행기 격납고에서 진행됐다.

촬영장에선 피터 잭슨 감독의 '반지의 제왕' 시리즈에 등장하는 골룸을 탄생시킨 모션캡처 수트(motion-capture suits)를 입은 배우들이 연기를 했고, 작업실에선 스탭들이 독자적으로 개발한 프로그램을 통해 카메라로 찍은 배우들의 얼굴과 눈동자 움직임을 디지털화했다.

곧 "캐머런 감독이 플라야 비스타에서 대단한 걸 찍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스티븐 스필버그, 리들리 스콧, 고어 버빈스키('캐리비안의 해적' 감독) 등 내로라 하는 유명 감독들이 '성지순례'를 하러 들를 정도였다.

마침내 "영화는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놓는다"며 "3D 영화의 가능성을 업계에 보여주고 싶다"던 캐머런 감독의 의도가 적중했다. 그는 '흥행이 안될 경우의 적은 수익'을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을 뿐 아니라, 3D 붐을 일으켰다.

윌 스미스 주연의 '아이로봇'을 제작한 존 데이비스는 1963년작인 '아르고 황금 탐험대'(Jason and the Argonauts)를 3D로 리메이크하고 싶다고 밝혔다. 마이클 베이와 J.J 에이브럼스 감독도 각각 자신들의 전작인'트랜스포머'와 '스타트렉'을 3D로 다시 찍고 싶다며 욕심을 감추지 않았다.

캐머런 감독과 3D 카메라를 만들었던 사업가 페이스는 "아바타의 개봉 이후 카메라 대여 의뢰 요청이 꾸준히 늘고 있다"고 밝혔다. 카메라 대여에는 영화 한 편당 140만~300만 달러(약 34억원)에 이를 정도로 고가다. 페이스에 따르면 광고업계에서도 3D 카메라에 관심을 표시하고 있다.

그는 "10년 전만 해도 상상도 못했지만 이제 사람들이 3D를 '상업적인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며 감격했다. 3D 영화 스크린을 제작하는 리얼디(RealD)의 마이클 루이스 최고경영자(CEO)는 "앞으로 1년 반 동안 5,000개의 3D 스크린을 더 팔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미국 내 스크린 수는 3만8,000개로, 이중 3,600개만이 3D 상영관이다.



전직 트럭운전수에서 '완벽주의' 영화감독으로





제임스 캐머런 감독은 독학으로 영화를 배웠다. 전 직업은 트럭운전수였다.

캐머런 감독은 1954년 캐나다 온타리오 주에서 태어났다. 1970년대 초 미국 캘리포니아 주로 이주, 서던캘리포니아대학(USC)의 영화도서관에서 혼자 영화를 공부했다. 그는 특히 특수효과에 관심이 많아 USC 도서관에서 졸업생들이 쓴 논문들을 탐독하곤 했다.

영화에 빠진 캐머런은 대학을 그만두고 트럭 운전 등을 하면서 틈틈이 시나리오를 썼다. 이런 그에게 1977년 개봉된 조지 루카스 감독의 '스타워즈'는 충격이었고, 아예 영화계에 입문하는 계기를 마련해줬다.

캐머런은 곧 두 명의 친구와 돈을 모아 10분짜리 공상과학영화 '제노제네시스'(Xenogenesis)를 찍기 시작했다. 하지만 처음 카메라를 잡아 본 그는 카메라를 분해해서 살펴보는 등 반나절간 씨름해야 했다.

이후 한 영화제작소의 미니어처 모델 제작자로 취업해 커리어를 쌓아나갔고, 마침내 1981년 '피라냐 2'에서 처음으로 영화감독이 됐다.

캐머런은 촬영현장에서 혹독하기로 유명하다. '타이타닉'의 주연을 맡았던 배우 케이트 윈슬릿은 "출연료가 엄청난 수준이 아니면 다시는 캐머런과 일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을 정도다.

영국 인디펜던트 지의 한 기자도 "철야와 예산 초과는 다반사"라며 "독재자 같은 태도로 악명이 높다"고 전했다. 반면 '에일리언'의 여전사 시고니 위버 등은 이 같은 캐머런의 성격에 대해 "완벽주의자"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네 번 이혼했다. 영화감독 캐서린 비글로, '터미네이터'의 '사라'역 배우 린다 해밀튼 등과 결혼한 경력이 있다. 현재 부인은 '타이타닉'에서 여주인공 로즈(케이트 윈슬릿)의 손녀로 출연했던 배우 수지 에이미스다.

 

[출처] 캐머런의 '뚝심' 영화산업 지형을 바꾸다 |작성자 빛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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