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병호 박사를 바라보는 시선은 나뉩니다. ‘경제 전문가’, ‘자기 계발 전문가’, ‘미래 예측 전문가’라는 숱한 ‘전문가’ 타이틀 이면에는 지나치게 성공만 부르짖는 ‘차가운 성공 지상주의자’라는 따가운 눈총도 있죠. 1년에 10권 가까운 책을 본인의 이름으로 찍어내기 때문에 책의 완성도나 깊이에 대해 회의를 품는 분들도 있습니다.
공병호 박사를 10년 전부터 알고 지낸 지인으로부터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5년 연상의 공 박사 아내가 농사를 지으면서 작은 음식점을 운영하는데, 공 박사가 그런 아내를 대신해 살림을 한다고요. 게다가 아무리 바빠도 군대 간 큰아들 면회를 한 달에 한번은 꼭 간다고 하더군요. 정말? 분, 초 단위로 시간을 재 가며 시간을 관리한다고 소문난 ‘시간 관리의 괴물’이? 그의 의외의 면면이었습니다.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월간 <톱클래스>에서 부부 인터뷰를 했습니다. 부인 서혜숙 씨는 사진을 안 찍겠다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티셔츠에 분홍 자켓을 걸쳐 입은 서혜숙 씨와 넥타이에 양복을 차려 입은 공 박사는 한 눈에도 대조적인 캐릭터였습니다. 말투도 그랬습니다. 공 박사는 정제된 말만 논리적으로 하고, 서 씨는 옆집 아주머니와 수다 떨듯 편하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서 씨가 어찌나 발랄하게 말하고 웃음이 끊이질 않던지요, 옆에 있는 사람들도 다 같이 유쾌하게 만드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서 씨는 대단한 낙관주의자였습니다. 공 박사에 대해 말할 때에는 그 수위가 특히 더 심했죠. “저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라고 생각해요. 제일 훌륭한 남자와 사니까요”, “이 사람보다 더 성실한 사람은 없을 거에요”, “어느 누구보다 이 사람이 가장 실력 있고, 훌륭한 학자라는 믿음이 있어요”라고 스스럼없이 이야기 하더군요. 압권은 이 대목이었습니다. 공 소장에 대한 따가운 시선에 대해서는 “가끔 사람들이 너무 다작한다, 다작하지 말고 대작하라는 충고를 하는데, 그럼 제가 속으로 ‘두고 보라지, 앞으로 대작이 얼마든지 나올 거다. 지금 이 노력이 결정체를 이룰 날이 분명히 올 거다’라고 생각해요”라고 말합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공 박사는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라고 제어를 하면서도 싫지 않은 눈치였습니다.
‘플라시보 효과’라는 말 있죠? 믿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둘은 공 박사가 대학 1학년 때 대학 모임에서 만났다고 합니다. 8년 연예 끝에 결혼해 23년 째 결혼생활을 해 오면서 서씨는 공 박사에게 끊임없이 주문을 걸었던 겁니다. 젊었을 때에는 ‘당신은 장차 큰 인물이 될 거다’, 경제 전문가가 된 후에는 ‘당신은 최고의 학자가 될 거다’라고요.
부부는 서로를 ‘동지’라고 표현합니다. 늘 서로에게 할 말이 넘친다고 입 모아 말합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동지가 하루에도 몇 번씩 ‘당신은 최고다’라는 말을 해 준다면, 그런 말을 몇 십 년 동안 듣는다면, 자기 확신과 자신감이 생기고, 그 힘이 어떤 역경이 닥쳐도 이겨낼 수 있는 자양분이 되지 않을까요?
지금의 공병호 박사가 있기까지 아내 서씨의 ‘플라시보 내조’가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공 박사 자신도 아내의 ‘긍정의 힘’을 인정합니다. “두 아들에게 항상 ‘인생 행복의 80%가 어떤 아내를 만나느냐에 달렸다’고 강조한다”고 하더군요. 사진을 절대 안 찍겠다던 서 씨는 아들 같은 카메라 기자의 요청에 활짝 웃으며 렌즈 앞에 섰습니다. 그러고 보니 공 박사의 분홍 넥타이와 서씨의 분홍 자켓이 세트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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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임식에서 지도력과 책임에 대해 강조한 미국의 대통령 오바마, 그가 오늘의 오바마가 된 것은 한마디로 아버지의 부재라고 생각한다. 그의 기억에 없는 아버지의 존재가 지금의 그, 미국 대통령, 책임감이 강한 리더가 되게 했다. 나 역시 어촌에서 사업을 크게 하시는 아버지를 보며 인생을 배운 것 같다. 내 고향 통영은 풍광이 아주 아름다운 곳이다. 아버지는 고향에서 제법 큰 어장을 가지고 멸치 잡는 사업을 하셨다. 잘난 아버지든 못난 아버지든 남자는 아버지의 영향을 크게 받고 이 세상의 모든 아들들은 아버지를 보고 배운다.
부지런한 어부
나는 ‘ 아버지’ 하면 두 단어가 떠오른다. 첫 번째는 책임감이고, 두 번째는 치열함이다. 나는 아버지를 보며 인생의 가장 중요한 가치를 이 두 가지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아버지에게 ‘책임감’과 ‘치열함’은 그 때 그 때 상황에 따라 변하는 변수가 아니라 언제나 변하지 않는 상수다. 아버지는 말이 아닌 삶을 통해서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기반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를 직접 보여주셨다. 새벽 일찍 일어나 장비를 준비하고 출하준비를 서두르는 모습에서 책임감을 배웠다. 연근해에서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크게 사업을 확장하며 온 힘을 쏟았던 아버지의 치열함만이 기억될 뿐이다. 그런 아버지였기에 가족들에게 살갑게 감정을 표현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내가 칠남매의 막내였어도 아버지에게 다른 형제들과 달리 귀여움을 받아본 기억은 없다.

내 기억에 아버지는 늘 바빴고 쉬는 적이 없었다. 일이 아버지였다고 할 만큼 일하는 모습만이 기억에 남아있다. 집에서 3~40분 배를 타고 들어가는 학림도라는 섬에 어선들이 정박하고 고기를 말리는 어장이 있었다. 그 곳에서 멸치어장을 운영하는 아버지와 함께 고깃배를 맞이하며 작업을 하기 위해 며칠씩 지내야 했다. 칠흑 같은 밤바다를 바라보다 별이 쏟아질 것 같은 밤하늘을 바라보던 기억, 밤늦게 조그만 어촌에 내려 차가 올 때까지 아버지와 함께 길을 걷던 기억이 스쳐간다.
아버지는 ‘남자는 늘 부지런해야 하고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서 늘 남자답게 물러서는 법없이 일어서야 한다’고 이야기 하셨다. 할아버지에게서 받았던 근면, 성실함은 막내였던 아버지에게 더 굳게 자릴 잡았고 막내였던 나 역시 그런 아버지를 제일 많이 닮았다. 아버지의 철두철미한 습관이나, 항상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일을 찾아 도전하는 기질이 아버지 그대로다.
아버지는 늘 새로운 어구를 개발하고 능률적으로 어장 관리하는 방법을 찾는데 신경을 많이 썼다. 그 당시로서는 보기 힘든 신기술이 아버지에게서 나올 때마다 아버지가 개발한 기술을 얻고자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그 일대 주변 어장에서는 아버지의 영향력이 대단했다. 아버지는 늘 엄격했고 정도에 빗겨가는 법이 없었다. 지금까지 아버지가 흐트러진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딱 한번 약주를 드시고 걸어가신 모습을 빼고는...
최고의 가치 그리고 비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의 일기장을 본 적이 있었는데 애정 표현은 전혀 못하셨던 것 같다. 그 당시 지위나 경제력을 생각했을 때 여자문제가 있었을 만도 한데 아버지의 사생활은 같은 남자인 내가 봐도 참 단순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께서 “너희 아버지가 술이나 여자 문제로 사업이 어려워졌다면 견디기 힘들었겠지만 아버지가 늘 새로운 사업을 위해 일하다 어려움을 겪은 것이니 우리가족이 힘을 합쳐 열심히 이겨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존경하셨지만 사업가로서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남편의 뒤치다꺼리로 아내로선 좀 힘든 삶을 사셨다.
아버지의 인생을 생각해보면 성실하고 진지하셨지만 가족들과 함께 할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빴고 삶을 즐길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 덕에 더 많이 공부할 수 있는 혜택을 받았고 삶을 즐길 줄 아는 여유도 허락되었다. 어느새 나도 아버지가 되어 군에 가 있는 큰 아들과 고등학교 2학년인 작은 아들을 두게 되었다. 사실 아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한정적이고 놓치고 나면 되돌릴 수 없기 때문에 바쁜 와중에도 아들들과 시간 보내는 것을 우선으로 하고 있다. 아들과 아버지로서 사회적인 이슈를 놓고 동등하게 토론한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 우리 삼부자는 유난히 말하기를 즐겨 토론을 많이 하는 편이다.
세월이 가면서 아이들이 나를 볼 때 아버지가 직책이나 지위에 연연하지 않고 자유롭게 일한다는 것을 상당히 높이 평가해주는 것 같다. 아버지가 집에서 강의 준비하는 것이나 원고 쓰는 것을 보면서 자연스레 아버지의 일을 접하고 경제나 경영을 보고 배우는 것 같다. 첫째는 감성적이고 점점 더 멋져지는 부분이 있다. 사내 아이지만 더욱 정이 들고 마음이 간다. 둘째는 꿈이 크고 항상 도전하는 면이 나를 많이 닮았다. 아들과 삶의 참다운 가치를 공유할 수 있어 정신적인 유대감이 더 깊어지니 비교적 잘 키웠다고 자부한다.


3대 프로젝트
아들들이 결혼에 대해 궁금해 할 때 난 아들들에게 며느리가 될 사람은 ‘교육이나 미래에 관심이 많아 정신적인 가치를 축적하는데 가치를 두는 여자’였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아버지의 희망일 뿐, 연연해하지 말라고 이야기 하는데, 아내와 나를 보면서 미래의 신부감을 잘 선택할 안목을 가졌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내는 내가 스물 두 살에 만나 6년 정도 연애했는데 따뜻하고 적극적인 아내로 인해 나의 감성적인 부분이 많이 보강된 것 같다. 아들들과 친근하게 친구 같은 아버지로 지내는 데에는 아내의 역할이 컸다. 아내는 둥글둥글 윤활유 역할을 잘 해주었고 아들들은 열심히 사는 엄마를 자랑스러워하고 존경한다. 아내의 따뜻한 성격이 언제나 가장인 나를 세워주었고 의견 충돌 없이 잘 지내왔다. ‘서로 바빠 친밀감이 떨어지지 않느냐?’고 질문하는 지인들이 있지만 언제나 사소한 일이라도 의견을 나누었고 내가 결정 하도록 하는 아내를 생각하면 사랑이 더 깊어가는 것 같다. 이런 부모를 보며 우리 아이들은 사춘기도 무난히 넘긴 것 같다.
아이들에게 자주 해주는 이야기가 있다. ‘아버지가 너희들에게 최고의 교육기회를 제공했지만 너도 살다보면 몇 번의 위기를 만날 수 있다. 만일 네가 넘어지게 되면 그 때마다 네 아버지가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그리고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기억해라. 그렇다면 어떤 어려움이 와도 이겨낼 수 있다.’라고 이야기한다.
3대 프로젝트랄까? 한 집안이 일어서는데 3대의 시간이 소요되는데 1세대인 아버지 세대는 가장 기본적인 것을 제공했고 2세대인 나는 한 단계 더 올라가 아들들에게 더 완벽한 교육기회를 제공했다. 한 가족이 세계속에 완전히 자리 잡을 수 있는 시간이다. 1세대와 2세대 그리고 3 세대, 교육과 환경이 모두 잘 어우러져서 꽃을 피우고 결실을 보는 시간을 아들들에게서 기대한다. 부모는 갔지만 자식들이 살아가면서 부모가 열심히 살았다는 기억이 용기와 위로가 될 것이다.
아버지는 자식에게 영원히 함께 하는 삶의 모델이다. 자식을 보기 이전에 나를 돌아봐야 할 것이다. 아버지가 몇 번의 사업실패와 위기를 겪으면서도 꿋꿋하게 일어섰던 모습이 지금의 내가 있게 했다. 나를 돌아보면서 결핍이 없는 삶이 자식들에게는 결코 좋은 영향력을 줄 수 없음을 깨닫는다.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닥친 어려움이 나에게는 분발할 수 있는 힘이 되었기 때문이다. 부족한 점들은 배워서라도 가르쳐야 하는 게 아버지의 의무다. 자식들에게 삶을 통해 새로운 세계관을 열어주는 사람이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출처: 두란노 아버지학교 - 글 송현영(편집부) 사진 이창영(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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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마그리트 전이 열리던 어느 토요일 오후에 집 사람과 못처럼 시내 나들이를 하였습니다. 두 사람이 만난 지 어느 새 27년의 세월이 흘렀네요. 아이들을 낳고 두 사람이 힘을 힘껏 모아서 미래를 만들어 온 세월이 어느 새 그렇게 흘러가 버렸네요.

세상의 정말 많은 것들이 변화하고 

스러져 가더라도 아내는
연인으로 만나서 점점
절친한 친구로 변화해 간다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세월이 흘러갈수록 아내에게 늘 고맙다는 그런 마음 뿐이네요.
누군가 다시 태어나도 그 사람을 선택하겠는가라고 묻는다면, 저는 단호하게
'그렇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언젠가 최인호 선생의 글을 읽으면서 깊이 동감한 한 문장이 이런
것이었습니다.

"나는 아내에게서 내가 평생을 통해 사귄 단 하나의 친구와 같은
우정을 느끼고 있다"

최 선생님은 이런 유머도 더하시더군요.
"부부는 20대에는 서로 사랑으로 살고, 30대에는 서로 정신없이 살고,
40대에는 서로 미워 살고, 50대에는 서로 불쌍해서 살고, 60대에는
서로 감사하고 살다가, 70대에 이르러서는 서로 등을 긁어주면 산다.'
저에겐 절반만 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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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추석 연휴에 모교(Rice University, Houston, Taxas)를 방문하였습니다. 그곳에서도 Baker College는 점심을 먹기 위해서 자주 방문하던 곳이었지요. 그곳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는 큰 아이와 함께 사진을 찍었습니다.
아버지가 머리를 잔뜩 기르고 오고 가던 곳에서 큰 아이와 함께 사진을 찍으면서 기분이 '상큼 시큼' 하였습니다. 세월은 벌써 25년 정도가 흘러가 버린 셈이지요. 정말 세월은 전광석화처럼 흘러갑니다. 정말 열심히 살았는데 무엇을 하였는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진: 큰 아들과 함께(2007년 9월), 글: 2008. 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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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 배경으로 나오는 곳이 통영 앞 바다입니다. 집이 사업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집은 시내의 외곽으로 밀려나게 됩니다. 최인호 씨의 <어머니>라는 소설을 읽으면서 그 당시에 어머니의 심경을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대학을 마치고 유학을 떠나기 전에 옥상에서 찍은 어머니의 사진입니다.
당시에 다른 분들의 삶도 그러하였겠지만 정말 어머니는 일을 많이 하시다 가셨습니다. 밀알이 되었던 삶이었습니다. 오늘 자신과 아이들이 누리고 있는 삶이 결국 어머니의 헌신과 희생의 대가라는 생각을 늘 하게 됩니다. [사진: 집의 옥상에서(1983년 초 봄), 글: 200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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