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12월23일.  크리스마스 이브를 하루 앞두고 논산훈련소에 입소를 했습니다.

 

군대가 힘들다고는 들었고 고통스러울 것이라는 각오는 했지만 민간인의 옷을 벗고 훈련복을 입은 제 모습은 참 어울리지 않았습니다.제 마음을 알지도 못하고 창밖의 내리는 저 첫눈을 보노라니 정말 감옥에 온 기분이었습니다.

내가 다시는 이곳에서 나가는 날이 있을까? 다시 세상을 볼 수가 있을까?   하는 두려움에 몸서리는 치는 입소의 첫날 밤에 그녀를 생각하며 이겨냈습니다.

 저에게 희망의 등불이자 마음 따스한 난로같은 그녀의 편지가 있으매 그 힘든 훈련병 생활을 이겨냈나 봅니다.

1월의 매서운 칼바람과 혹독한 훈련들, 추위와 싸우는 하루 하루는 견디기 힘든 나날의 연속이었습니다. 누구나 다하는 군생활이지만 한가지 더 식당배식과 청소보직을 맡은 지라 남들 쉬는 그 작은 틈을 한 번 도 누릴 수가 없었습니다.
손과 입술은 항상 텄지만 저에게는 누구에게나 기다리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저녁8시면 편지를 나누어주는 그 시간이 저에게 단 하나의 살아가는 이유와 견디는 저만의 무기였습니다.

그녀는 2틀에 꼭 한통씩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그녀의 편지를 읽고 읽고 또 읽고 군복 상의에 접고 접어서 시간만 나면 읽고 또 읽었습니다.
웃기도 참 많이 웃고,울기도 참 많이 울었습니다. 어느날은 그녀가 너무 보고싶어 가슴이 터져버릴 것도 같았습니다.
편지는 그녀와 저를 이어주는 끈이었습니다. 사회와 군대라는 곳의 거대한 벽을 뚫는 따스함이었습니다. 그녀는 저에게 인간난로였습니다. 훈훈함과 살아가는 분명한 목표를 주는 사랑의 난로 말입니다.
항상 감사한 마음을 잊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그녀와 내가 같은 하늘아래 숨쉬고 있다는 사실에 말입니다.

 그 힘들었던 훈련을 마친 후 이등병계급장을 달고 논산훈련소를 퇴소하고 광주에서 후반기교육을 3개월 받았습니다.
훈련소와 다른 여러 힘겨움과 제재들이 많음속에서도 이겨내는 힘은 그녀의 편지였습니다.
그녀의 편지는 항상 꾸준합니다.
어느날은 기쁨의 편지이고 어떤 날은 힘겨움과 아픔의 눈물의 편지이고 어떤날은 그리움과 사랑의 아름다움을 담은 편지였습니다.
저는 그 어떤 편지라도 좋았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아프고 힘들고 눈물나면 저는 몇배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간절히 잘 지켜주시라고 말입니다.
입대후 5개월간의 모든 훈련이 끝난후 드디어 파주금촌으로 자대배치를 받았습니다.

 
훈련소와 다른 그 엄청난 고참과 후임의 상하관계의 기운과 낯선 곳에서의 자대생활은 긴장과 두려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저는 사람이 사람을 계급으로 이렇게 무섭게도 힘들게도 할 수가 있음에 놀랐습니다.
거대한 산이 제 앞에 서있는 그 기분, 참 낯설고 견디기 힘든 또 하나의 사회에 힘들었습니다.
항상 이병 이경상를 고래고래 지르며 여기저기 뛰어다녔습니다. 새벽 경계근무, 훈련, 작업, 부대 막내로써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많았지만 정말 가장 힘들었던 것은 그녀에게 편지를 쓸 수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너무 너무 바쁜 시간을 쪼개서 정말 한 글자라도 쓰고 싶은데 그 시간마저 없었습니다. 훈련소 때가 정말 그리워졌습니다. 그때는 정말 편지라도 실컷 썼는데...
그래서 제가 생각한 방법은 구막사 냄새나는 화장실에서 편지를 쓰는 것이었습니다.
단 몇줄이라도 쓰고 싶어 미칠 것 같아 어떻게든 써서 그녀에게 편지를 부쳤습니다.
그렇게 1통을 보냈는데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답장이 왔습니다.
자대배치를 받고 그녀에게 받은 첫 편지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고참들 눈을 피해서 역시 구막사 화장실에서 읽었는데 자꾸만 눈물이 나와서 한참을 울어야 했습니다. 선생님에게 매맞은 아픔을 엄마가 위로해줘 서러움에 눈물이 나듯 자대배치후 힘들었던 순간의 힘겨움이 그녀의 편지 한통으로 봇물터지듯 흘렀습니다. 기쁨과 힘겨움의 눈물이었겠지요...

 
자대배치후 20여일이 지난 어느날, 지금도 정확히 기억이 납니다.

1993년 5월23일 토요일 늦은 오후 5시를 넘어선 시각이었습니다.

역시나 힘든 이등병인 저는 이리 저리 아직도 부대생활을 적응하지 못하고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는데 소대 고참에게 호출이 왔습니다. 지금 위병소에 면회가 왔으니 복장 갖추고 위병소로 가라고 합니다.
솔직히 면회 올 사람도 없지만 면회왔다는 자체도 웬지 너무 큰 부담이었고 눈치가 보였습니다. 통상 일병휴가를 다녀온 후 면회나 외박이 되는 걸로 알아 왔습니다.
 먼 지방 고참들이 많아서 주말에도 몇명 면회도 오지 않는데 이제 갓 자대배치온 이등병이 면회라는 말에 기쁨보다는 두려움이 일었습니다.

 
복장을 갖추고 위병소에 도착했습니다.
위병근무를 서고 있는 고참에게 경례를 하니 "면회소에 네 애인 왔다. 야! 겁나게 이쁘다야! "  사투리로 부러움이 섞인 목소리였지만 웬지 마음이 편하지않은 목소리였습니다. 이등병이 무슨 면회냐는 말 같았습니다.
면회소에 들어간 순간 저는 꿈을 꾸는 것 같았습니다.
세상에 꿈에서도 그렇게 보기힘들었던 그녀였습니다.
제가 꿈에도 그리던 그녀. 제가 2년을 넘게 단 하루처럼 사랑해온 사랑하는 그녀였습니다.

입대하는 날 논산훈련소까지 마중온다던 그녀를 전주터미널에서 버스 창문사이로 얼굴을 마주한채 떠나온 그녀.사랑하고 사랑한 가슴아프도록 사랑한 저의 그녀.
(논산훈련소까지따라오면 고무신 거꾸러 신는 다는 말에 논산훈련소에 못오게 했습니다.) 그날 입대한 날 첫눈이 오던 그 밤에 그렇게 후회를 했는데 그녀가 지금 제앞에 서있습니다.
태어나서 그렇게 감동적으로 사람을 보았던 적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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