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문제> 자살에 대하여
“17일 경찰청에 따르면 2009년 자살한 대학생은 249명이나 됐다. 정신적 문제가 있는 자살이 78건(31.3%)으로 가장 많았고, 경제 문제도 16건이었다. 2008년에는 전체 대학생 자살자 332명 중 175명(52.7%)이 염세․비관․낙망 등을 이유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조선일보, 2011. 2. 18.).” 이 기사에 따르면 생활고에 쫓겨 극한 상황에 몰린 대학생들의 자살이 늘고 있다고 한다. 대학을 휴학 중에, 대출 받은 학자금 700만원을 갚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원리금 납입이 여러 차례 밀리는 등 심한 경제난을 겪다가 목을 매 숨진 경우도 있다.
자살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자살은 두 가지 측면에서 자살 이유를 찾을 수 있다. 하나는 마음이 비정상적이어서 자살한다는 것으로 심리적 측면에서 찾는 것이고, 또 하나는 환경이 자살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는 것으로 사회적 측면에서 찾는 것이다. 뒤르켐(‘자살론’의 저자)은 자살의 이유를 개인의 심리적 원인에서 찾지 않고 사회적 원인에서 찾으려 하였다. 그는 사회가 문명화할수록 도덕이 붕괴된다는 생각으로, 잘못된 현대사회에서 자살 이유를 밝혀내려 했다.
뒤르켐의 시각에서 보자면, 학비로 인해 빚을 져서 경제적인 문제로 자살을 했다면 그것은 개인에게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사회에 문제가 있어서다. 가난한 대학생들이 학비 걱정을 하지 않고 학교에 다닐 수 있는 사회정책을 만들지 못한 사회 탓이기 때문이다. 또 만약 결혼까지 약속하던 상대가 더 좋은 경제적 조건을 가진 사람을 만나 변심해서 그 아픔으로 자살을 한 경우도 역시 사회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부의 축적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이 사회 분위기가 그렇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뒤르켐의 시각에서 보면 ‘사회적 자살이 아닌 것은 없다’라는 결론에 이른다.
예전에 나는 자살하기 쉬운 특이한 인간형이 따로 있는 줄 알았다. 그래서 사람을 두 가지로 나누어 ‘자살할 수 있는 사람’과 ‘자살할 수 없는 사람’으로 구분할 수 있었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극도로 불행한 상황에 처하면 누구나 자살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상황에 따라 어떻게 변모할지 모르는 불확실한 존재’라고 보기 때문이다.
자살에 대한 생각은 위로가 된다
‘트리갭의 샘물(나탈리 배비트 저)’이란 동화책에는 ‘마시면 죽지 않는 샘물’이란 게 나온다. 그 샘물을 마시고 나면 신기하게도 총을 맞아도 죽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이도 먹지 않아 현재의 몸 상태를 그대로 유지한다. 만약 스무 살 청년이 그 샘물을 마신다면 늘 스무 살 청년으로 영원히 사는 것이다. 이 동화 속 터크네 가족은 샘물을 마셔서 영원히 사는 사람들이 되었다. 하지만 위니는 영원히 사는 것을 거부하고 샘물을 마시지 않는다.
실제로 그런 샘물이 있다면 그 샘물을 마시는 게 좋을까. 사람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에 언제나 만족하며 살 수 있을까. 내 생각엔 죽고 싶을 때 죽을 수 없는 것은 오히려 큰 불행일 것 같다. 예를 들면, 위독한 암 환자는 죽는 날까지 큰 통증을 견디다가 죽는다고 하는데, 그런 최악의 경우를 상상해 보면 인간에겐 자살이란 특권이 있다는 게 오히려 위안이 된다. 그래서 “자살은 죄악이다. 그것은 삶에 대한 충성서약의 거부다(체스터턴).”라는 말보다 “자살에 대한 생각은 위로의 커다란 샘이다(니체).”라는 말에 나는 동의한다.
자살은 왜 나쁠까
자살이 나쁜 이유는 두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겠다. 첫째, 자신의 생명을 해치는 것은 타살과 마찬가지로 나쁘다는 관점이다. 칸트(독일 철학자)의 시각에서 보면 “인간은 단지 수단으로 이용되는 물건이 아니다. 내 안에 존재하는 인간성을 처분할 권리는 다른 사람은 물론이고 내게도 없다. 칸트 생각에, 자살이 잘못인 이유는 타살이 잘못인 이유와 똑같다(마이클 샌델 저, ‘정의란 무엇인가’, 172쪽).” 칸트는, 나 자신이든 타인이든 인간을 절대 단순한 ‘수단’으로 다루지 말고 언제나 ‘목적’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인간을 수단으로 생각한 자살은 나쁘다는 것이다. 그리고 칸트와 같은 생각을 한 건 아니지만 자살이 나쁘다고 주장한 다음의 명언들이 있다.
사람은 자신이 갇힌 감옥의 문을 열고 달아날 권리가 없는 죄수다. 그는 신이 부를 때까지 스스로 목숨을 끊지 말고 기다려야 한다(플라톤).
자살은 참회의 기회를 남기지 않기 때문에 가장 잔인한 살인이다(커턴 콜린스).
둘째, 자살은 주위 사람들에게 슬픔을 안겨 주는 행위이기 때문에 나쁘다는 관점이다. 본인은 삶을 마감함으로써 모든 고통으로부터 도피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의 가족을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자신은 세상을 지옥처럼 여기고 불행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어 자살하려 하는데, 이를 주위에서 말린다면, 어쩌면 그것은 잔인한 일이 될 수 있다. 그냥 지옥에서 살라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자살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죽음을 택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나는 자살하지 않고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인간에겐 있으리라고 믿고 싶다. “인간은 환경의 산물이다(R. 오언).”라는 말보다 “환경이 인간의 산물이다(디즈레일리).”라는 말을 더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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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자살에 대한 신문기사를 읽고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자살하는 사람의 심정을 헤아려 볼 때 마음이 아프다. 누구나 한 번쯤은 크거나 작은 일로 마음의 지옥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서 ‘자살’을 떠올려 봤을 것이다. 그럴 때 자살에 대한 생각은 위안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생각만으로 위안을 받아야지 실제로 자살을 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그 죽음이 주위의 많은 사람들을 슬프게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가난한 학생들이 학비 걱정 없이 편안히 공부할 수 있는 그런 사회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좋은 사회’란 소수의 사람들만 잘 사는 사회가 아니라, 누구나 잘 사는 사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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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과 관련한 책들
에밀 뒤르켐의 자살론(에밀 뒤르켐 저)
트리갭의 샘물(나탈리 배비트 저)
정의란 무엇인가(마이클 샌델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