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부메랑
이십여 년이 흘렀건만 아직도 기억나는 사람이 있다. 대학시절, 미팅에서 만난 남자이다. 그는 얼굴에 뭔가 불만이 있어 보이는 의대생이었다. 인사를 나누고 나서 차를 마시며 얘기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그가 내 목을 바라보더니 뜬금없이 목걸이를 샀느냐며 사뭇 시비조로 물었다. 나는 학생 신분으로서는 좀 고급스러워 보이는 십팔금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사 주신 대학입학 선물이었다. 아버지께 선물로 받았다고 대답하자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학생이면 학생다워야지 왜 그런 사치품을 하고 다니냐고 힐난하듯 말했다.
그의 말인즉, 그런 돈이 있으면 불우 이웃을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고아원에서 간식도 없이 밥 세 끼를 단무지 조각으로 때우는 아이들을 한 번쯤 생각해 봤느냐고도 묻는다. 뒤이어 공부엔 관심이 없고 멋만 내는 여대생을 혐오한다는 둥, 내가 책을 읽지 않게 생겼다는 둥, 강의를 잘 빼먹을 것 같다는 둥 하면서 비위를 건드렸다. 나는 당혹감에 어쩔 줄 모르다가 고작, 내가 책을 얼마나 많이 읽는데요, 했다. 그는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웃기만 할 뿐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당시 나는 작은 얼굴, 깡마른 체격에 까만 긴 생머리를 늘어뜨리고 다녔다. 누가 보아도 겉멋만 부리는 여대생으로 보였을 게다. 그렇다 해도 함부로 내뱉는 그의 말이 몹시 불쾌하였다.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고 있는 가난한 학생이라고 자신을 소개할 때부터 나와 다른 부류라고 짐작은 했었다. 반면 나는 집안이 비교적 넉넉하였기에 가난을 거의 모르고 살았다. 처음엔 그를 건실한 청년으로 보았는데 곱지 않은 말투로 내 기분을 망쳐 놓는 그에게 점점 화가 나기 시작했다.
"가난하면 마음이 그렇게 삐딱해져요?"
결국 나는 그에게 이렇게 쏘아주고 헤어졌다. 서로 감정이 상했기에 다시 만날 약속 따위는 하지 않았다. 내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편견을 가지게 된 것이 그 때부터였던 것 같다. 부유한 사람들 모두를 무조건 부정적으로 보는 듯한 그들의 구겨지고 그늘진 모습이 싫어졌다.
철부지 여대생이었던 내가 드디어 결혼을 하게 되었다. 결혼하여 십 년쯤 되었을 무렵 'IMF'가 닥쳐 왔다.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우리의 가정 형편도 어려워져서 남편과 나는 한숨 짓는 일이 많아졌다. 게다가 남편이 실직까지 하게 되자 내 신경은 극도로 예민해졌다. 난생 처음 가난의 아픔을 체험하게 된 것이다. 몇 년의 세월을 보내고 나서야 형편이 회복되었는데, 그 일로 어렵게 사는 이웃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이제 내 나이 마흔이 넘었다. 여전히 여유롭지 못한 나와 달리 주변에는 큰 평수의 아파트에서 사는 친구들이 하나 둘씩 늘어났다. 그러던 어느 날이다. 나는 친구들 모임에 갔다가 불쑥 이런 말을 하게 되었다.
"난 골프 치는 사람들이 참 싫더라. 허영심 같아 한심해 보여."
무심코 던진 말이었는데 마침 그 중에 골프를 시작했다는 친구가 이 말에 기분이 상했었는지 그 다음날 전화를 걸어 왔다. 내 말이 섭섭했다며 그 친구는 다짜고짜 이렇게 말했다.
"가난해지면 그렇게 마음까지 삐딱해지니? 어쩌면 말을 그렇게 해?"
순간 멍하였다. 귀에 설지 않은 이 말, 이건 오래 전 내가 누군가에게 쏘아붙인 바로 그 말이 아닌가. 그 말이 부메랑이 되어 내 뒤통수를 치다니….
던지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부메랑. 그것은 원래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이 사냥하거나 전쟁할 때 사용하던 도구였다. 그들은 던진 자리로 거슬러 오리라는 것을 알고 부메랑을 사용했겠지만, 나는 돌아올 줄 몰랐던 말을 했던 것이다. 이십여 년 전의 내 말이 긴 세월을 지나 되돌아올 줄 어찌 알았겠는가. 하루아침에 내 자리가 뒤바뀐 것 같았다. 어느 새 나도 모르게 부자들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나 보다. 그들의 고급스런 취미 생활을 나는 그저 허영심으로만 몰아붙인 셈이다.
빈자가 되어보고서야 나는 목걸이로 괜한 트집을 잡았던 그 남학생을 이해하게 되었다. 지금쯤 그 학생은 의사가 되어 있을 테지. 중년에 접어들었으니 생활의 여유도 찾고 휴일이면 골프를 칠 수도 있겠다. 이런 그에게 어느 날 내가 '골프를 칠 비용이면 고아원의 아이들에게 장난감을 많이 사 줄 수 있을 텐데' 라고 말하면 그는 뭐라고 할까. 젊은 시절의 나처럼 이젠 그가 비아냥거릴 수도 있을 게다.
사람들이 돈을 버는 것은 의식주를 위해서만이 아닌, 삶의 질을 높이고자 하는 욕구에서일 것이다. 이 욕구는 삶의 활력소가 된다. 남보다 좋은 자동차를 타고 싶고 품위 있는 옷을 입으려는 마음, 그것이 금전에 대한 욕망을 더 강하게 해 주리라. 나 역시 앞으로 생활이 윤택해진다면 골프를 치지 않을 자신이 없다.
이십여 년이란 긴 시간을 사이에 두고, 이십대였던 나와 사십대인 현재의 나는 정반대의 얼굴을 하고 있다. 삶은 또 어떤 부메랑을 숨겨 두고 있는 걸까.
* 2004년 하나은행이 공모, 제9회 하나여성 글마을잔치에서 특선으로 당선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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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내 마음의 풍경
어느 전시회에서 밀레의 ‘첫 걸음마’라는 그림을 본 적이 있다. 어린아이가 첫걸음을 떼려는 순간을 그린 것이다. 엄마는 어린애를 바로 뒤에서 붙들고 있고, 맞은편에서는 아버지인 듯한 사람이 어린애를 향해 양팔을 벌리고 있다. 주변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광경이나 나는 진한 감동을 느끼며 그 그림 앞에서 한동안 떨어질 줄을 몰랐다. ‘낮잠’이란 제목의 농민화도 좋았다. 부부가 일을 마치고 풀밭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 듯한데, 남자의 어깨에 기대어 잠든 여인의 얼굴이 반쯤 보이는 것이 참으로 평화로워 보였다. 사람 사는 세상에도 그림 같은 광경이 많이 있다. 유년 시절에서부터 지금까지 보아 온 광경 중 지워지지 않는 것들을 모은다면 두꺼운 앨범 하나가 만들어질 것 같다. 그 추억의 앨범으로 지난 시절을 회상할 수 있다는 건 축복 같은 일이다. 아파트에 사는 나는 때때로 옛 친정의 마당을 그리워한다. 눈을 들면 하늘이 훤히 보이고 잠자리와 나비가 자유롭게 놀다 가는 뜰. 새들의 노랫소리가 아침을 열어주고 밤에는 달과 별이 친구가 되어 주는 곳. 어릴 적 소꿉장난을 하거나 줄넘기를 한 곳도 마당에서였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책가방을 마루에 던져 놓고 친구들을 불러다 놀곤 하였다. 그리 넓지는 않았으나 우리가 놀기엔 충분했다. 엄마가 부엌에서 간식거리를 만들면 풍겨 오는 음식 냄새를 맡으며 노는 게 즐거웠다. 찐 고구마나 감자, 옥수수 따위를 함께 놀던 아이들과 경쟁하듯 앞다투어 먹으면 참 맛있었다. 흥겨웠던 그 시절을 좋은 그림으로 기억한다. 내가 열세 살쯤에 넋을 잃고 바라본 풍경이 있다. 우리 집 근처의 허름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게 마치 훌륭한 예술작품처럼 보였다. 나는 이런 풍경을 보고 있으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담벼락에 있는 흠집과 낙서를 보면 정겨웠다. 그 지붕 아래 어디선가 아이를 부르는 어느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오면 왠지 포근한 느낌마저 들었다. 어른이 되어서는 산책을 좋아하게 되었다. 집들을 끼고 도는 골목길은 나에게 좋은 산책로가 된다. 천천히 걸으면서 여러 가옥들을 만난다. 푸른 나무들이 햇볕을 받으며 하늘을 가득히 맞이하고 있는 집, 옷들이 빨랫줄에 평화롭게 널려 있는 집, 꽃밭의 꽃들이 고운 빛깔로 사람의 시선을 끄는 집, 앙증맞게 생긴 아이의 신발이 보이는 집 ···. 이것들은 마음의 사진이 되어 가슴에 새겨진다. 내가 여행을 갈 때 설렘을 느끼는 것도 멋진 경치에 대한 기대 때문일지 모른다. 빨간 감이 주렁주렁 달려 있는 나무는 늦가을의 운치를 느끼게 하고, 설경은 언제 보아도 설렌다. 산 그림자를 품은 호수는 명상적인 분위기로 나를 이끈다.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촌가나 먼지가 뽀얗게 이는 시골길이 눈에 띄면 마음의 고향을 보는 듯하다. 기적을 울리며 사라지는 기차의 마지막 모습은 나를 버리고 떠나는 연인처럼 어떤 아쉬움을 남겨 놓는다. 철새들의 행렬, 해질녘 바람 부는 숲, 어둠에 서서히 묻히어 가는 마을을 보면 나도 모르게 시선이 멈춘다. 그러나 이보다 더 내 마음을 끄는 것은 사랑과 사람이 함께하는 풍경이다. 사랑을 담은 얼굴이 있을 때 가장 아름답다. 얼굴은 그 사람의 심경과 같아서, 온화한 표정을 짓는 이를 보면 어떤 인생을 사는지를 짐작하게 된다. 어느 날 동네에서 본 두 노인의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다. 할아버지가 휠체어를 탄 할머니에게 과자를 조금씩 떼어 먹이며 웃음 띤 얼굴을 하고 있었다. 따뜻한 사랑이 느껴졌다. 서로를 바라보고 웃기도 하는 두 사람은 행복해 보였다. 어쩌면 할머니보다 할아버지가 더 행복한지 모른다. 사랑을 받는 이보다 주는 이에게서 더 흐뭇한 기쁨이 엿보였다. 행복이란 자신의 처지에 있지 않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에 있음을 보여 주는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목욕탕에서 노인의 등을 밀어주던 젊은 새댁, 리어카를 힘겹게 끄는 이를 위해 뒤에서 밀어주던 어떤 이, 병원에 진찰 받을 시어른을 모시고 온 며느리, 가족을 위해 푸짐하게 장을 봐 오는 주부. 이들의 모습도 모두 한 폭의 그림 같다. 내가 아름다운 풍경을 떠올리며 미소 지었듯이, 이젠 남들이 간직하고 싶은 풍경을 만들고 싶다. 밀레의 작품같이 진한 감동을 주지는 못하더라도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아름답게 기억되는 그림을 만들고 싶다. 앞으로 나는 사는 날까지 몇 점의 그림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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