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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 홀린 사람은 자기를 홀린 것이 그 사람의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한다. 얼굴선, 몸매, 눈빛 같은 것에 실려 있는 어떤 것, 손에 잡히지 않는 어떤 기운이지, 얼굴선이나 몸매나 눈빛 자체는 아닌 것이다. 홀림당한 사람은 이성적 판단을 할 줄 모른다. 아니, 홀림은 이성적 판단에 잡히지 않는다. (···) 따라서 설명될 수 없는 것이 매력이다.
- 이승우 저, <사랑의 생애>, 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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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달에 <사랑의 생애>를 완독했다. 위의 글을 읽다가 내가 대학 일년생이었던 과거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학교 앞 다방에서 친구들과 넷이 모여 앉아 한 가지 주제에 집중해 얘기를 나눴던 어느 시간 속이다. 우리는 그때 남학생과 미팅을 몇 번 했던 터라 남자에 대해 알고 싶은 게 많은 때였다. 우리가 가장 궁금했던 것 즉 미팅을 할 때 우리 눈에 어떤 남학생이 멋있게 보이는 건지 우린 어떤 사람에게 끌리는 건지 하는 것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하였다. 그러니까 미팅 파트너의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 하는 것에 대해 얘기를 나눈 것이다. 외모인가? 학벌인가? 성격인가? 목소리인가? 집안인가?

 

 

누군가의 입에서 처음 나온 말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이런저런 얘기 끝에 만장일치로 명쾌하게 내린 그때의 결론을 지금도 기억한다. 그것은 상대의 빼어난 외모도 아니고, 좋은 학벌도 아니고, 호감 가는 성격도 아니고, 성우와 같은 목소리도 아니고, 든든한 백이 있거나 부유한 집안도 아니고 그저 상대가 풍기는 ‘분위기’였다. 그 ‘분위기’에 따라 우리의 마음이 흔들리는 거라고 단정을 지었다. 다시 말해 남자가 풍기는 분위기가 좋으면 우리가 끌리는 것이라고 단정을 지었다. 우리 나이 고작 스물이었다. 이성에 대한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이던 풋풋한 스물.

 

 

지금 생각하면 우리를 끌리게 하는 것이 상대의 ‘분위기’인 게 맞는지 잘 모르겠다. 같은 조건의 두 사람 중에서 잘생긴 사람보다 잘생기지 않은 사람에게 끌리는 경우가 있다면 그 이유를 ‘분위기’로 설명할 땐 제법 설득력을 갖는 것 같다. 하지만 과학적으로 설명하면 사람에 따라 다르다고 할 수 있겠다. 사람에 따라 상대의 외모, 학벌, 성격, 목소리, 집안, 눈빛, 어떤 태도, 어떤 재주, 말솜씨, 지성미, 야성미 등 여러 변수 중 그 어떤 것에 유독 끌리는 게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또는 그것들의 총합이 남들보다 월등하여 끌리는 경우도 있겠다. 반대로 초라해 보이는 사람에게 연민을 느껴 끌리는 경우도 있겠다.

 

 

이런 경우는 어떤가? “그의 매력을 뭐라 설명할 수 없지만 어쩐지 그가 좋아.”라고 말할 경우다. 어쩌면 ‘어쩐지’라고 표현하는 것이야말로 제일 큰 매력을 나타내는 것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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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7-08-29 13: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분위기.
그런데 그 나이 땐 분위기를 파악하기는 어려운 것 같아요.
잘 생겼냐, 못 생겼냐부터 따지지 않나요? ㅎ
암튼 우리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는데 말이어요.
지금은 우리의 자식들이 그럴 차례니 격세지감 입니다.ㅠ

오늘은 많이 선선해졌습니다.
이불도 끌어 덮고 자고.
어떻게 날씨가 이럴 수 있는지 그 또한 신기할 정돕니다.
작년 이맘 때도 더워서 헥헥댔는데.
건강 조심하세요.^^

페크(pek0501) 2017-08-30 12:46   좋아요 2 | URL
분위기가 좋은 남자를 좋아하는 1인입니다만, 저도 미혼 시절 땐 외모 많이 따졌지요. 마치 그것이 그 사람의 가장 중요한 가치인 양. 요즘 우리 딸들이 외모 따지는 걸 보니 한심하더군요. 중요한 건 외면이 아니라 내면인데 말이죠.

제가 터득한 바에 따르면 못생긴 사람도 재주 없는 사람도 다 각자의 매력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걸 누가 발견하느냐에 따라 연애가 시작되지요. 이걸 실험으로 외국에서 증명한 일도 있어요. 직장에서 한쌍씩 묶어서 일을 시켰더니 몇 퍼센트의 사람들이 사랑에 빠졌다는 거예요. 정확히 생각이 안 나는데 꽤 높은 퍼센트였어요.
배우들이 남녀 주인공을 맡으면 결혼에 골인하는 것도 그래서일 거라는 추측입니다.

날씨가 어제는 춥기까지 해서 이렇게 여름이 훌쩍 떠날 수 있는 건가, 의아해 했다는...

오늘도 좋은 날씨가 될 것 같습니다. 저녁이면 시원해질 것 같아요. 고맙습니다.


2017-08-29 14: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8-30 12: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8-29 14: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현실보다는 만화에서 주로 나오는 상황인데, 상대가 불쌍하게 느껴져서 결혼해주는 동정혼이라는 게 있어요.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반 고흐가 가난하고 병든 시엔과 결혼하고 싶었던 이유를 동정혼의 의미로 봤습니다.

페크(pek0501) 2017-08-30 12:50   좋아요 1 | URL
여자의 모성애를 자극하는 남자들이 있어요. 예전에 그런 이유로 제임스딘이 인기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가 눈물을 흘리면 안아 주고 싶게 만들죠.
남자들도 여자들의 눈물에 약한 경향이 있는 것 같고...
사랑은 저마다의 빛깔이 다 있어서 다 다른 감정으로 사랑하게 되지 않나 싶어요.
그래서 사랑은 뭐다, 라고 정의 내리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qualia 2017-08-29 22: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누군가에게 홀린 사람은 자기를 홀린 것이 그 사람의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한다. 얼굴선, 몸매, 눈빛 같은 것에 실려 있는 어떤 것, 손에 잡히지 않는 어떤 기운이지, 얼굴선이나 몸매나 눈빛 자체는 아닌 것이다. 홀림당한 사람은 이성적 판단을 할 줄 모른다. 아니, 홀림은 이성적 판단에 잡히지 않는다. (···) 따라서 설명될 수 없는 것이 매력이다.
- 이승우 저, <사랑의 생애>, 72쪽.

→ 저는 pek0501 님께서 인용해주신 소설가 이승우의 윗글을 읽고, 인공지능(AI)은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전해도 궁극적으로 인공으로 만든 유사 지능 혹은 시뮬레이션 지능(simulated intelligence, simulation of intelligence)에 머물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더욱더 확신하게 됩니다. 인공지능은 결국 의식을 소유할 수는 없을 것이란 얘깁니다(적어도 근미래 2045년 안팎까지는). 기껏해야 유사 의식이나 시뮬레이션 의식(simulated consciousness, simulation of consciousness) 소유에 그치리라 봅니다. 인공지능이 의식을 지니지 못하는 한, 결국 인간을 모든 점에서 능가하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다는 것인지 소설가 이승우의 위 얘기를 중심으로 함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자, 두 사람 F와 M이 있다고 합시다. F가 M한테 홀렸어요. 근데 F가 M한테 홀리기 위해선 반드시 F와 M 사이에 어떤 감각적 자극과 반응이 오고가야만 하죠. 즉 F가 M한테 홀렸다는 사실은 F와 M 사이에 어떤 감각적 자극과 반응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반드시 함축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감각적 자극과 반응 없이는 그 어떤 의식 작용(예컨대 홀림이라는 의식 작용)도 발생할 수 없다는 인과의 기본 사실 때문입니다.

그런데 위에서 소설가 이승우는 F의 홀림이라는 의식적·심리적 변화를 초래한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F 자신은 모른다는 식으로 얘기합니다. 즉 당사자 F는 그 감각적 자극과 반응의 구체적 명세가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게 소설가 이승우가 윗글에서 얘기하는 요지인 것 같습니다. 그러면 소설가 이승우의 위 얘기를 분석적 차원에서 좀 더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F의 홀림을 야기한 감각적 자극(과 반응)의 후보로서 소설가 이승우가 윗글에서 예시한 것을 함 도식적으로 나타내 보죠.

① 얼굴선, 몸매, 눈빛 같은 것에 실려 있는 어떤 것
② 손에 잡히지 않는 어떤 기운
③ 얼굴선이나 몸매나 눈빛 자체

윗글에서 소설가 이승우는 홀림을 야기한 것은, 좀 더 정확히 말해 홀림을 야기한 감각적 인과 요소는 ①과 ②이지 ③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①, ②, ③ 각각이 정확히 무엇인지 다시 더 세밀하게 분석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①은 홀림을 야기한 것이 얼굴선, 몸매, 눈빛 같은 시각적 자극(물)에 ‘실려 있는’ 어떤 것이라는 얘기인데요. 이게 과연 무엇일까요? 시각적 자극에 실려 있는 것은 더 고차적인 시각적 자극일까요? 즉 더 미묘하고 더 섬세하고 고차적인 통합적 유형의 시각일까요? 그런 유형의 시각이 있을까요? 아니면 시각적 자극에 실려 있는 것은 시각적 자극 이외의 다른 유형의 자극인 것일까요? 위 짧은 인용문만 가지고는 확실하게 파악할 수 없을 듯합니다. 다만 시각적 자극에 실려 있는 어떤 것이라고 했으니까, 시각적 자극이 아닌 다른 유형의 자극이라고까진 할 수 없을 듯합니다. 이걸 부정하면 위 문장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모순의 악순환에 빠지는 무의미한 문장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시각 자극과 다른 여러 유형의 자극이 융합되거나 통합된 형태의 복합 자극일 가능성은 있다고 봅니다. 해서 우리가 논의를 명료하게 진행하기 위해 일단은 ①을 얼굴선, 몸매, 눈빛 같은 일차적이고 개별적인 시각 자극을 중심으로 하지만 다른 여러 유형의 자극들과 융합되거나 통합된 형태의 복합적 시각 자극, 즉 좀 더 미묘하고 섬세하고 고차적인 통합적인 유형의 시각 자극이라고 합의해 보죠. 다음으로 ② ‘손에 잡히지 않는 어떤 기운’은 더욱더 애매모호하고 불확실한 감각적 자극 유형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러나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해서 촉각으로는 느껴지지 않는다는 직설적 의미로 말한 것은 아닌 것 같고요. 일종의 문학적 표현이랄 수 있는데요. 그래도 감각적 자극의 측면에서 분석을 해보면 단순히 일차적인 시·청·촉·후·미각 자체가 아니라 그것들에 묻어서 함께 느껴져오는 어떤 감각의 총체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즉 뭐라고 딱 꼬집어 한 가지로 규정할 수 없는 감각의 총체를 기운이라고 한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죠. 여기에서도 기운이라는 말에 현혹돼 감각이라는 근본적 인과 요소를 배제하면 애초에 말이 성립되지 않는 무한퇴행에 빠진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다음으로 ③은 말 그대로 ‘얼굴선이나 몸매나 눈빛 자체’라고 했으니까 일차적인 시각 자극을 직접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겁니다. 이건 우리가 혼란스러움 없이 곧바로 동의할 수 있는 사항이라고 봅니다. 이제까지의 분석을 종합·정리·요약해 말하자면, 소설가 이승우의 얘기는 결국 홀림이라는 의식적 변화 즉 심리적 사건을 야기한 것은 일차적인 감각으로서의 개별적 시·청·촉·후·미각 자체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대신 그것은 개별적 시·청·촉·후·미각들이 전체적으로 어우러져 좀 더 고차적인 것으로 통합된 감각의 총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설가 이승우는 나아가 “홀림은 이성적 판단에 잡히지 않는다. (···) 따라서 설명될 수 없는 것이 매력이다”라는 말도 합니다. 홀림에 대한 이런 명제를 다음과 같이 도식화해 보죠.

④ 홀림은 이성적 판단에 잡히지 않는 것이다.
⑤ 홀림은 설명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홀림의 의식적 속성을 얘기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봅니다. 즉 홀림을 야기한 것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고차적인 통합적 감각의 총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홀림 자체의 의식적·감정적 측면까지 이성적 접근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란 얘기죠. 다시 말해 소설가 이승우는 홀림의 감각적 인과 관계는 파악할 수 있지만, 그 감각적 인과 관계에 따라 발생한 홀림이라는 의식적 사건의 본질은 이성적(과학적)으론 파악할 수 없는 것이라는 얘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죠. 우리는 그저 홀림이라는 독특한 느낌이나 감각질(qualia)을 느낄 수 있을 뿐이란 것이죠. 이것은 pek0501 님께서 위에서 얘기한 분위기(일종의 mood)라는 개념에도 거의 동일하게 해당되는 얘기랄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이 제가 위에서 말한 인공지능의 한계와 직결되는 사항이라는 것입니다. 즉 인공지능(AI)은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전하더라도 최종적으로는 인공으로 만든 유사 지능 혹은 시뮬레이션 지능(simulated intelligence, simulation of intelligence)에 그치고 말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나아가 의식과 관련해선 기껏해야 유사 의식이나 시뮬레이션 의식(simulated consciousness, simulation of consciousness) 소유에 그칠 것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인공지능은 근본적으로 계산(computation, 연산, 전산)을 기반으로 하는 전기전자전산적 체계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알고리즘으로 움직이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의식의 본질에는 다다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계산은 궁극적으로 의식을 실현(realization, implementation, instantiation, 구현, 예화)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해서 홀림이라는 본질적으로 의식적인 사건을 인공지능은 파악할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으리라고 결론 내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pek0501 님의 윗글 중 맨 마지막 단락을 인용하면서 이 글을 끝맺도록 하죠.

《이런 경우는 어떤가? “그의 매력을 뭐라 설명할 수 없지만 어쩐지 그가 좋아.”라고 말할 경우다. 어쩌면 ‘어쩐지’라고 표현하는 것이야말로 제일 큰 매력을 나타내는 것인지 모른다.》

과연 인공지능 AI가 위와 같은 의식적 느낌을 느낄 수 있을까요? 물론 제가 판단하기에도 근미래(적어도 2045년까지)의 인공지능 로봇은 완벽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이 어떤 느낌을 느끼고 있는지를 완벽한 말솜씨로 우리한테 설명해줄 수 있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것의 본질은 유사 지능 혹은 시뮬레이션 지능(simulated intelligence, simulation of intelligence)이거나 유사 의식 혹은 시뮬레이션 의식(simulated consciousness, simulation of consciousness)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인공지능 로봇은 튜링 테스트를 충분히 통과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튜링 테스트로는 근본적으로 의식의 소유 여부를 판별할 수 없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뇌의 내부 나아가 의식의 내부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대해선 튜링 테스트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고 애초에 의식 내부에 대해선 관심조차 없는 것으로 설정한 테스트에 불과한 것이니까요.)

페크(pek0501) 2017-08-30 12:56   좋아요 1 | URL
qualia 님, 안녕하세요?
이렇게 좋은 글은 댓글로 남기기 아깝지 않나요? 저 같으면 쓰다가 길어지면 페이퍼로 올리게 될 때가 있어요. 님도 페이퍼로 올려 보시길 강추합니다.
님의 댓글을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저는 엉뚱한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우리가 스마트폰을 하나씩 가지고 다니듯이 언젠가는 로봇을 하나씩 갖고 살게 되지 않을까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어서 로봇에게 감정을 심게 됩니다. 그랬더니 나의 로봇과 내 딸의 로봇이 사랑에 빠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왜 인간을 위해 복종하며 살아야 하나?‘그러면서 가출을 합니다. 그리고 돈을 버는 방법도 알고 있어서 다른 데에 취직을 합니다.
나중엔 로봇이 반란을 일으키며 인간들과 싸우는 전쟁이 일어납니다.

하하~~ 제 상상입니다. 님의 댓글을 읽다가 생각난 걸 써 봤어요.
긴 댓글, 소중히 간직하겠습니다.

요즘 날씨가 좋아서(특히 저녁에) 걷는 걸 좋아합니다.
님도 좋은 늦여름을 만끽하시길...
댓글 감사합니다.

한수철 2017-08-29 23: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승우의 ‘사랑의 생애‘는 제 기준에는 실패한 소설이라는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끝까지 읽지 않은 유일한 이승우의 소설이니까요.ㅎㅎㅎ 고루했어연.
농담입니다.
그나저나

이 소설은 남녀의 연애를 뭔가 ‘의고적‘으로 다뤘지요. 즉, 실망스러웠습니다. 제 기준에는 그렇습니다. 예컨대 한국의 이십 대 남녀가 이 소설을 읽는다면 몇 페이지 읽다가 집어던질 거라는 데 전재산을 걸고자 합니다.

아무튼

stellak 님의 댓글을 제외한 나머지 분들의 댓글은

약간 기상천외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왜 소설 외적인 이야기를 아무 전제도 없이 하는 건지 모르겠군요.
저라면 댓글을 달아 주기 너무나 어려울 것 같은데요. 오지랖이라면 실례했습니다. 어쨌거나

이승우의 장편소설 ‘사랑의 생애‘는 좀 별로였다는 생각입니다. 뭐,

그냥 그렇다고요.^^

qualia 2017-08-30 20:47   좋아요 1 | URL
아무튼

stellak 님의 댓글을 제외한 나머지 분들의 댓글은

약간 기상천외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왜 소설 외적인 이야기를 아무 전제도 없이 하는 건지 모르겠군요.
저라면 댓글을 달아 주기 너무나 어려울 것 같은데요. 오지랖이라면 실례했습니다. 어쨌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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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맞아요. ‘기상천외’는 너무 과한 칭찬의 말씀의 말씀인 것 같고요. 약간 맥락이 벗어난 느낌은 들 수도 있겠습니다.

근데 저는 pek0501 님의 윗글을 읽으면서 우리 인간의 의식(consciousness)이나 감정(emotion, feeling, affect)의 가장 핵심적인 속성을 아주 잘 보여주는 글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요즈음, 인공지능의 의식 소유 여부 논제에 많은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알라딘 블로그 동네에서뿐만 아니라 페이스북 동네에서도 인공지능의 의식 소유 여부 논제에 대한 (댓)글들을 꽤 많이 써올리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관심이 아주 고조돼 있던 참이었죠. 근데 딱 pek0501 님의 윗글을 읽게 된 거예요.

pek0501 님의 윗글은 우리 인간 의식의 핵심적인 속성들을 너무나 잘 보여주는 글입니다. pek0501 님께서 인용해주신 소설가 이승우의 ‘홀림’에 대한 단상뿐만 아니라 pek0501 님의 ‘분위기’에 대한 사유는 인간 의식 혹은 감정의 고유한 속성(property, attribute)이 어떤 것인지, 그런 속성들의 본질은 무엇인지, 그것들이 어떤 독자적 실체인지, 과연 인공지능이나 미래의 앤드로이드 로봇들은 그런 의식이나 감정을 소유할 수 있을 것인지, 의식/감정은 지능(intelligence)과 어떤 점에서 다르고 같은 것인지... 등등 여러 가지 흥미로운 논제들을 논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고 안성맞춤인 글이라는 것이죠.

함 생각해보세요. 과연 인공지능이, 그 인공지능을 탑재한 로봇이, 앤드로이드가 저런 홀림과 분위기라는 미묘하고도 독특한, 그 신비로운 의식의 풍요로운 스펙트럼을 느낄 수 있을까요? 단지 기계에 불과하고, 단지 계산이라는 디지털 연산으로 모든 걸 처리하는 인공지능과 로봇들이 저런 인간 고유의 감정과 느낌들을 생생하게 느끼고 체험할 수 있을까요? 그런 인공지능과 로봇들이 자신의 내적 의식 세계의 풍경을, 감정의 섬세한 갈피갈피를 다채로운 의미를 지닌 언어로써 표현해낼 수 있을까요? 그래서 pek0501 님께서 이야기한 것처럼 학교 앞 다방에서 친구들과 옛 추억에 대해 즐겁게 얘기를 나누면서, 미팅 상대 남학생들한테 느꼈던 첫인상을 재미있게 풀어놓으면서 품평회를 할 수 있을까요? 인공지능과 로봇이 ‘이성에 대한 호기심’을 느낄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에게 끌리는’ 감정을 느끼고 ‘마음이 흔들리는’ 경험을 할 수 있을까요? 인공지능이나 로봇이 과연 ‘초라해 보이는 사람에게 연민을 느껴 끌리는 경우’가 있을 수 있을까요?

이런 질문들은 인공지능과 로봇의 의식 소유 여부에 대한 논제를 다루는 데 아주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질문들입니다. 위와 같은 질문들로부터 인공지능과 로봇의 의식 소유 여부에 대한 논의와 탐구가 시작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위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의식과 지능 개념에 대한 논자들의 철학적·과학적 입장이 갈린다는 것입니다. 요즘 한국 사회 일반이나 지식인 사회에 인공지능에 대한 논제가 가장 핵심적이고 가장 흥미를 끄는 논제의 하나로 떠올랐다고 할 수 있는데요. 그러나 그런 무성한 논의들이 있음에도 위와 같은 기본적·본질적인 물음들에 대한 논의와 천착은 그닥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런 아쉬움을 느끼고 있던 차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를 제공해주는 pek0501 님의 윗글을 읽고 제 의견을 써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저는 pek0501 님께 속으로 아주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아주 짧게 소설가 이승우의 ‘홀림’에 대한 단상을 비판적으로 분석해 올리려고 했던 것이었죠. 사실 소설가 이승우의 윗글은 매우 애매모호하고 매우 비일관적인 논리의 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학가의 단상이니까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더구나 문학가의 저런 문학적인 글을 논리적 분석의 잣대로 평가하고 분석한다는 것 자체가 격에 맞지 않는 ‘우물에 숭늉’이나 연목구어적인 일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역으로 소설가 이승우의 위 단상은 pek0501 님의 윗글이 그렇듯이 우리 인간 의식의 고유성을 너무나 깊고도 적실하게 드러내는 아주 훌륭한 사례의 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공지능의 인간 추월을 확실한 미래 사실로 맹신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런 확신 혹은 맹신 중 지식(knowledge)이나 지능(intelligence) 분야의 인간 추월 주장은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사안이라 봅니다. 하지만 의식에 관한 한 인공지능은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고 봅니다. 해서 인공지능이 모든 분야에서 인간을 완전 추월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느냐, 적어도 최소한 특이점 도래 예측 시점인 2045년 이전까지는 전혀 불가능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 제 주장입니다. 이런 근미래를 넘어 중미래 2099년까지도 인공지능·로봇·앤드로이드 등의 의식 소유는 불가능할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21세기 초 현대 인간의 기대수명을 편의상 100년이라고 한다면, 이 기대수명을 훨씬 넘어서는 150년 이상의 원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실효적·실질적·현실적 의미가 그닥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이런 구체적 시간 설정에 대한 고려를 전혀 하지 않고 SF 영화적 공상과 환상을 펼치는 것은 미래 예측으로서의 의미와 가치가 더욱더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해서 구체적 미래 시점을 밝히지 않고 인공지능·로봇·앤드로이드가 인류한테 반란을 일으켜 인류를 멸종시킬 것이라는 식으로 막연한 AI 종말론, AI 비관론을 아무런 논거도 없이 주장하는 것은 그 의미나 가치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에 대한 논증은 그럴 듯하게 제시하지 못하는/않는 것 같습니다. 대체로 근거 없는 억측과 강변이 대세인 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전문 철학자·과학자들 중에는 아주 설득력 있는 논증을 제시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할 수 있죠. 해서 저는 인공지능의 완전 인간 추월을 주장하시는 분들한테 위와 같은 질문들에 대해 어떻게 답할 수 있겠는가 하고 묻고 싶다는 것입니다. 인공지능이 인류한테 반란을 일으키고 심할 경우 인류를 멸종시키고 지구 종말을 불러올 것이라고 주장하시는 분들은 과연 저런 기본적·근본적 물음엔 어떻게 답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저런 물음에 설득력 있게 답할 수 없다면 그들의 AI 종말론, AI 비관론 주장은 허구에 불과할 수밖에 없는 결론으로 추락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충 이런 생각에서 제가 위 댓글을 써올렸다는 것이죠. 해서 (앞뒤 맥락을 모르는) 어떤 분들한테는 한수철 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약간 기상천외하다는 느낌’이 들 수도 있으리라 봅니다. 이번에도 쓰다 보니까 또 이렇게 글이 쓸데없이 길어졌네요. 아무튼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처음 올린 시각 : 2017-08-30 11:47]
[수정해 올린 시각 : 2017-08-30 12:53]
[다시 일부 수정 증보해 올린 시각 : 2017-08-30 20:46]

페크(pek0501) 2017-08-30 13:03   좋아요 1 | URL
한수철 님.
‘사랑의 생애‘는 저도 실패작이라고 봅니다. 사서 본 것을 후회할 정도예요.
오래전에 읽었던 <생의 이면>이 훨씬 좋았어요. 팬이라서 너무 큰 기대를 갖고 읽어서인지 실망하며 읽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독한 것은 술술 읽혀서이고 끝에가서 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문장 반복과 의미 반복이 많은 것도 흠입니다.
왜 같은 저자의 소설인데 어떤 것은 매력적으로 읽히고 어떤 것은 시시하게 읽힐까요?
저는 저자가 매력적인 사람은 글도 매력적으로 쓸 것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이번에 보니 제 생각이 틀렸지 뭡니까.

하지만 이 책을 이십대 초반의 젊은이들이 읽는다면 유익한 소설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한 작가의 연애 또는 사랑에 대한 분석이니까, 한 사람의 관점을 구경할 수 있다는 점에서요. 물론 이것만 읽으면 안 되고 여러 책을 두루 봐야 제대로 연애 또는 사랑에 대해서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댓글 고맙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페크(pek0501) 2017-08-30 13:13   좋아요 0 | URL
qualia 님,

˝근데 저는 pek0501 님의 윗글을 읽으면서 우리 인간의 의식(consciousness)이나 감정(emotion, feeling, affect)의 가장 핵심적인 속성을 아주 잘 보여주는 글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단지 기계에 불과하고, 단지 계산이라는 디지털 연산으로 모든 걸 처리하는 인공지능과 로봇들이 저런 인간 고유의 감정과 느낌들을 생생하게 느끼고 체험할 수 있을까요? 그런 인공지능과 로봇들이 자신의 내적 의식 세계의 풍경을, 감정의 섬세한 갈피갈피를 다채로운 의미를 지닌 언어로써 표현해낼 수 있을까요?˝
- 이것에 희망을 겁니다. 로봇이 바둑에서 인간을 이길 순 있어도 인간을 못 따라오는 영역이 있으니 그것은 감정의 영역.

좋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이렇게 긴 댓글을 쉽게 쓰시는 분들은 저로선 존경스러울 따름입니다.)

자주 뵙기를 바랍니다.
좋은 댓글 남겨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qualia 2017-08-31 21:16   좋아요 1 | URL
pek0501 님, 한수철 님, 촌평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설가 이승우의 작품은 아주 오래전에 읽어본 것 같은데요. 좀 철학적인 취향이 있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그런지 프랑스에서 이승우의 소설이 꽤 읽힌다는 보도도 있었죠. 사실 위에 pek0501 님께서 위에 인용해주신 이승우의 ‘홀림/홀림당함’에 대한 단상은 분석적 잣대로 봤을 때는 매우 불투명한 문장이라고 봅니다. 제가 위 댓글들에서 나름대로 분석은 해봤습니다만, 어떤 일관적 논리성을 포착하기가 무척 어려웠습니다. 대체로 우리나라 소설가, 시인들의 단상 혹은 에세이에 그런 점들이 많이 나타나는 것 같더라고요. 하지만 소설가나 시인들은 더욱더 그런 논리적 일관성을 벗어나 달아나야겠지요. 혹은 넘어서거나 추월해야 할 겁니다. 저 자신 또한 너무 했던 얘기 또 하고 중언부언하고 동어반복하고 다람쥐 쳇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한 단계 더 올라서거나 한 단계 더 파고들어야 할 텐데요. 아무튼 그런 (미래의) 계기를 주신 pek0501 님과 한수철 님께 정말 고맙게 생각합니다.

페크(pek0501) 2017-09-04 15:31   좋아요 0 | URL
qualia 님, 감사합니다.

청명한 하늘을 만끽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