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사촌 언니의 남편, 그러니까 내게 형부가 되는 분이 돌아가셔서 장례식장에 다녀왔다. 고인은 63세밖에 안 됐으니 죽기엔 아까운 나이다. ‘간경화’라는 병이 있음에도 술을 마셔대는 환자였고, 자신의 병이 고칠 수 없는 병임을 알고 비관하는 환자였고, 우울증까지 있는 환자였기에 사촌 언니도 조카도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가출하여 연락이 끊긴 채 사흘이 지나 귀가한 적도 있다니 가족으로서 그런 환자를 보며 사는 게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이 간다.
장례식장에서 사촌 언니와 조카를 보자 안쓰러운 마음부터 들었다. 그리고 불행한 삶을 잘 견디어 낸 그들에게 축하라도 해 주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죽음은 본인에게도 가족에게도 분명 슬픈 일이지만 고통을 받으며 살았던 환자도, 환자의 고통을 지켜보며 살았던 그들도 불행한 삶으로부터 해방된 것이 다행스럽게 생각되었다.
불치병 앞에서 우리는 삶을 변화시킬 힘 같은 건 없다. 이럴 때 삶이란 그저 견디며 사는 것. 견디다 보면 끝은 있는 것. 병이 낫든지 병으로 죽든지 그 끝이 올 때까지 우리는 죄를 짓지 않으며 최선을 다해야 할 뿐이다. 묵묵히 시간을 흘려보내야 할 뿐이다. 그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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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일상은 얼다가 녹다가 하는 일의 반복이에요. 이 지루한 아름다움! 우리가 결정하고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얼마 되지 않아요. 오직 견디는 것뿐. 위로 안 받기 위해, 좀더 강해지기 위해 우리는 시를 쓰는 거예요.
이성복, <무한화서>, 1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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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부터 저녁까지 무엇을 하십니까?
- 내 자신을 견딥니다.
에밀 시오랑, <지금 이 순간, 나는 아프다>, 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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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그저 견디기만 해야 하던 때가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의 시간들과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의 시간들. 2013년 8월의 시간들이었다. 잠에서 깨어난 아침부터 잠이 드는 밤까지 그저 견디기만 했다. 그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돌아가고 싶은 평범한 일상은 아름다웠고 너무 멀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