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추석을 보내기 위해 2박 3일의 일정으로 시집에 갔다 왔다. 화장실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마음이 다르듯이, 시집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내 마음이 다르다. 들어갈 땐 ‘명절 음식을 만들기 위해 고단하겠구나.’ 하는 마음이고, 나올 땐 ‘시집 식구들과 헤어지기가 섭섭하구나.’ 하는 마음이다. 그래서 이번엔 미리, 2박 3일 뒤에 헤어질 때의 마음을 헤아려 보기로 했다. 시집에 들어갈 때 ‘시집 식구들과 헤어질 땐 섭섭하겠구나.’ 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마음가짐에 따라서 기분이 얼마나 다른지...

 

 

 

 

 

 

2.
2박 3일은 시집에서, 어제 하루는 친정에서 보냈다. 서울과 대구를 오가며 딸 노릇하랴, 며느리 노릇하랴 바빴다. 명절이 일 년에 두 번밖에 없는 걸 다행으로 여겼다. 두 번이니까 할 만한 거지. 어제로 추석 연휴가 끝났다. 힘든 숙제 하나 끝낸 기분이랄까. 일상으로 돌아온 오늘, 행복하다. 행복해 죽겠다.

 

 

 

 

 

 

3.
어울리지 않게 내가 맏며느리다. 내가 생각하기에 나는 딱 철없는 막내며느리가 어울리는데... 내가 맏며느리라고 하면 친구들이 웃는다. 그 웃음이 무얼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다.

 

아랫동서가 시집온 그해, 부엌일에 서툴러 내게 가장 많이 한 말은 이렇다.

 

“형님, 저는 뭐 할까요?”

 

만약 동서가 미웠다면 “안 가르쳐 줘.”라고 내가 답했겠지만 심성이 고운 예쁜 동서라서 친절히 답해 줬다.

 

“자넨 나물이나 다듬고 있어.”

 

그런데 말이다. “형님, 저는 뭐 할까요?”라는 대사를 내가 읊어야 하는 건데,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랫동서 자리가 나는 부럽다.

 

나는 맏며느리보단 막내며느리가 좋고, 대장보단 졸병이 좋고, 회장보단 비서가 좋은 사람이다. 재력가 회장은 결정해야 할 일이 많아 휴식 시간에도 머리가 복잡하지만, 유능한 비서는 회장이 시킨 일만 하면 되니까 머리가 복잡할 리 없다. 재력가 회장은 회사가 망하면 하루아침에 거지가 되기도 하지만, 유능한 비서는 회사가 망하면 다른 데 취직해 버리면 되는 사람이다. 모든 것의 책임을 져야 하는 윗자리보다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운 아랫자리가 좋다. 부담 없는 자리, 안전한 자리가 좋다. 그게 내게 맞는다. 옛날 왕의 가족으로 예를 들면 나는 왕이 되기보단 왕의 형이나 동생으로 살고 싶은 사람이다. 뭐하러 스트레스 받으며 살아야 하는 왕의 자리를 탐내나, 하는 생각이다. 왕의 형이나 동생으로 살면서 술이나 마시고 시나 읊으며 사는 게 좋지, 하는 생각이다. 권력이 좋은 건 알겠는데 그것을 가지기 위해 흘려야 하는 피땀이 싫다.

 

 

 

 

 

 

4.
추석 전날, 남자 셋이 당구를 친다. 한 남자가 먼저 집에 가야겠다고 말한다.


남자 1 : 미안한데 나 먼저 가 봐야겠다. 마누라는 집에서 일만 하는데 늦게 들어가면 화내지 싶다. 그리고 자형들이 와 있대.


남자 2 : 니는 마누라도 있노? (남자 2는 이혼했음.)


남자 3 : 니는 자형도 있노? (남자 3의 누나는 이혼했음.)


남자 2 : 먼저 갈 거면 마누라도 있고 자형도 있는 행복한 놈이 돈 내고 가라.


남자 1 : 하하~~ 알았다.

 

여기서 ‘남자 1’이 내 남편이다. 남편이 집에 들어와 들려준 이 얘기에 우리 시집 식구들 모두 웃었다. (근데 이거 웃어도 되는 일인가?)

 

 

 

 

 

 

5.
이번 늦여름은 유난히 길다.
낮엔 덥고 아침저녁으론 선선한 늦여름. 
낮의 더움이 저녁엔 물러나는 이 계절이 나는 좋다.
곧 ‘기다리고 섰는 가을’이 ‘아직 남아 있는 여름’을 완전히 밀어내리라.
‘아직 남아 있는 여름’이 꼼짝 못하리라.
그러면 우리는 늦여름과 작별해야 한다.
아마 작별할 시간을 갖지 못하고 어느새 우린 가을 속에 있겠다.
곧 그런 날이 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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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4-09-10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모님의 입장에서는 자녀의 가족끼리도 유대감을 갖기 바랍니다. 이런 바람은 자신의 아들은 누구의 사위가 됨을, 자신의 딸은 누구의 며느리가 됨을 이성적으로 알지만 감정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순적인 상황이 발생하죠. '시누이 가족이 곧 도착하니, 만나고 가라는 ...'

페크pek0501 2014-09-10 16:44   좋아요 0 | URL
하하~~ 딸이 온다며 며느리를 잡아 둔다... 그 며느리도 친정에선 딸인데 말이죠.
사위가 집안일을 하면 흐뭇하고 아들이 집안일을 하면 속상한 어머니들의 심리도 재밌지 않습니까?

hnine 2014-09-10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석 전날 음식 만드느라 앉지도 못하고 있는데 남편이 와서 묻더라고요. "나는 뭘 하면 되나?"
남편 얼굴 쳐다보지도 않고 목소리 깔고 대답했지요. "찾아서 해" ㅋㅋ
숙제를 마친 기분이라는 말, 딱 그 기분이예요. 전 힘들고 길 막힌다고 친정에도 안갔어요. 다음주 일요일에 간답니다. 이해해주시는 친정 부모님이 고맙지요.
저도 막내며느리가 되고 싶었던 맏며느리랍니다 ^^

페크pek0501 2014-09-11 11:22   좋아요 0 | URL
아, 남편 님이 참 좋은 남편이시네요.
숙제를 마친 기분... 님도 공감하시는군요. 속이 다 시원해지더라고요.ㅋㅋ
아마 우리 시어머니도 그러실 거예요. 며느리들보다 더 힘든 사람이 시어머니들일 것 같아요. 며느리가 오기 전까지 장을 다 봐 놓고 웬만한 것은 다 손질해 놓으시니까 명절 때마다 일이 얼마나 많겠어요.

정말 어깨가 가벼운 막내며느리이고 싶어요. ^^

노이에자이트 2014-09-11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남과 맏며느리는 아무래도 권리보단 책임이 더 무겁죠.사장이나 왕은 책임보다 권리가 더 많고요.그래서 맏며느리 하겠다고 경쟁이 치열하진 않지만 사장이나 왕은 서로 하려고 박터지게 싸우지 않습니까.

페크pek0501 2014-09-11 11:25   좋아요 0 | URL
하하~~ 재밌게 쓰셨습니다. 맞는 말씀 같네요.
맏며느리들은 어깨가 무겁답니다. 그래서 맏며느리가 아닌 사람을 부러워하죠.
제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기분으로 일하고 왔습니다.^^
저는 맏며느리 스타일이 아니거든요.

세실 2014-09-11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장남이 싫어 둘째랑 결혼했는데 시댁 옆집에 사는 덕분에 장남 역할을 하고 있어요. 신랑이 집에 고장난거 고쳐드리기, 벌초할때 진두지휘하기. 저는 일주일에 한번 찾아 뵙기, 명절에 수시로 들락거리기....
다행히 아직은 두분 건강하셔서 제가 도움을 많이 받는 편이긴 합니다.
시골 도서관장은.....좋은걸요^^ ㅎㅎㅎ

페크pek0501 2014-09-12 15:05   좋아요 0 | URL
으음~ 세실 님은 착한 며느님일 듯...
저랑 반대네요. 님은 둘째면서 맏며느리처럼 사시고
저는 맏며느리인데 둘째처럼 살고... 동서와 나는 서울에 살기 때문에 지방에 사시는 어머님을 자주 찾아 뵙지 못해요. 어머님과 가까이 사는 두 누나들이 어머님을 보살피고 있는 형편이죠.
병원에 갈 일이 있을 때도 누나들이 수고를 한답니다. 그래서 미안하죠.

도서관장님 자리는 제가 보기에도 좋아 보여요. 오너는 아니니까 망할 염려가 없고 권위와 명예는 님의 손에 쥐고 있는 것 같고... ㅋㅋ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제가 회장직보단 비서직을 좋아하지만 비서보단 회장과 친하게 지내길 좋아한답니다. 큭큭 ...

오늘 꼭 참석하라는 세미나가 있어서 아침부터 서둘러 갔다 왔는데 어찌나 멀던지 올 땐 화가 났어요.
그런데 집에 와 씻고 나니 상쾌해지네요. 세실 님을 보니 더욱... ^^

마태우스 2014-09-16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랫사람으로 사는 게 좋아요 윗사람의 자질이 제겐 없더라고요. 시댁식구와 헤어지는 게 서운할 수도 있구나, 싶습니다. 전 남자라서 그런 걸 완전히 이해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시댁은 힘든 거 아닌가요. 음식 안하고 같이 있기만 해도 피곤한... 제가 너무 극단적인 생각을 하는 걸까요. 암튼 힘 내셨다니 저도 좋습니다 화이팅.

페크pek0501 2014-09-17 10:32   좋아요 0 | URL
으음~~ 언제부턴가 제가 친구들을 만나면 쫄병이 되어 있더라고요.
뭐든 하자는 대로 하고요, 좀처럼 의견을 잘 내지 않아요. 분명히 예전엔 안 그랬는데 말이죠.
저는 시댁 식구들을 좋아하는 편에 속해요. 며느리들을 잘 배려해 주는 시댁인데, 그것에 비해 며느리 역할을 잘하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있어요.
아, 님은 여자 세계를 많이 아시는 것 같아염...
저도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