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세월 앞에 장사 없음


이달 초 강남역 부근 한 카페에 간 적이 있다. 그 카페는 1, 2층으로 되어 있었다. ‘퍼펙트 데이즈’라는 영화를 보고 나서 그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이 있어서 간 것인데, 지인이 참여하는 모임이었다. (내가 매달 정기적으로 참여하는 ‘영화 모임’은 따로 있다.) 참석자수가 적어 참석자가 각자 한 사람씩 데리고 오기로 했다며 지인이 내게 참석해 달라고 해서 가게 되었다. 참석자들은 2층에 모여 있었는데 나까지 합해 6명이었다. 약속 시간에 늦지는 않았으나 내가 가장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다들 음료 주문을 끝낸 상태여서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에 나만 1층으로 내려가 종업원에게 커피를 주문해 놓고 기다렸다. 


내가 주문한 아이스아메리카노가 나오자 20대로 보이는 여성 종업원이 내게 친절하게 말했다. “어머님, 커피 나왔어요.”라고. 어머님, 이라는 말을 듣자 나는 순간 당황했다. 내가 그렇게 나이 들어 보이나? 하는 생각을 하며. 그런 서글픈 느낌은 30대 후반에 처음으로 아줌마라는 칭호로 불려서 내가 이제 더 이상 미혼 여성으로 보이지 않는구나 하고 느꼈던 것과 비슷하였다. 


종업원에 대해 말하면 “손님, 커피 나왔어요.”라고 말해야 할 것을 신참이라 말실수를 한 것으로 여겼고, 나도 과년한 딸이 있으니 어머니라고 부른 것이 잘못한 일은 아니라고 여겼다. 다만 20대가 나를 보고 어머니라는 호칭을 쓸 정도로 내가 늙어 보임이 증명된 게 싫었을 뿐이다. 게다가 내가 젊은이들처럼 청바지에 남방을 입었으니 옷 때문에 늙어 보였을 거라고 합리화할 수도 없었다. 나에게 젊어 보이는 동안의 얼굴이라고 했던 딸의 말을 내가 철썩같이 믿었다는 걸 깨달았고, 언제 이렇게 나이를 먹었지?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날의 경험은 세월 앞에 장사 없음을 새삼 실감하게 해 주었다. 





남자 주인공이 조카딸과 함께 찍은 사진.  



2. 퍼펙트 데이즈


그날 카페에서 ‘퍼펙트 데이즈’라는 영화에 대해 두 시간 동안 6명이 얘기를 나누었다. 시간이 많이 지나서 다른 이들이 무엇에 대해 말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내가 한 얘기는 기억이 난다. 나는 남자 주인공에게서 풍기는 품격에 대해 얘기했다. 영화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영화 속 주인공 ‘히라야마’는 도쿄에 있는 공공시설의 화장실을 청소하는 중년 남성이다. 그의 특징으로는 말수가 적다는 것을 들 수 있다. 그는 매일 출근하여 화장실 바닥은 물론이고 변기도 깨끗하게 닦는다. 그가 닦은 변기는 번들번들 광이 날 정도다. 누군가가 그를 본다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고 묻고 싶을 정도로 정성 들여 청소한다. 그는 출근하기 위해 트럭을 운전하면서 올드 팝송을 듣고,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잘된 사진만 추려서 모아 두는 취미가 있으며, 퇴근한 뒤엔 단골 식당에 가서 술 한 잔을 마신다. 서점에 들러 책을 사기도 하는데 밤잠을 자기 전엔 늘 문고판 책을 읽는다.


관객의 입장에서 그런 그를 보면 매일 반복되는 평온한 생활에 그가 만족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화장실 청소부’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그가 자신의 삶에 만족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나의 추측으로는 고통 속에서 살았던 과거의 힘든 시간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본다. 혹독한 고통에 빠져 본 사람만이 고통이 없는 일상적 삶의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또한 밤에 찾아온, 오랜만에 보는 여동생과 만나는 장면에서 반가워하기보다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던 것은 그가 가족과 관련 있는 아픈 과거를 가졌음을 짐작케 한다. 이것이 그가 가족과 단절된 채 홀로 사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에게서 품격이 느껴지는 건 신기한 일이다. 이 영화는 마치 관객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화장실 청소부로 일하는 이 남자는 하루하루의 생활에 성실히 임하면서 인생을 즐길 줄 알며 품격 있는 삶을 산다. 여러분은 왜 이렇게 살지 못하는가? 그가 할 수 있는 건 여러분도 할 수 있다.라고. 이것은 그저 나의 감상임을 밝힌다. 실제로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이 전하려는 메시지는 나의 감상과 무관할 거라는 얘기다.


 

....................

참고로 이 영화는 독일의 유명한 감독이 만든 일본 영화다. 

개봉일은 2024.07.03.’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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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24-08-29 15: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호. 영화 퍼펙트 데이즈에 대한 글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페크pek0501 2024-08-29 16:13   좋아요 0 | URL
오호! 곰곰 님, 첫 댓글에 감사드립니다.
너무 주관적인 영화 감상인 점을 고려해 주십시오. 저만 그렇게 느꼈을 것 같거든요.^^

2024-08-29 19: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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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30 11: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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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9 22: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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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30 11: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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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4-08-30 03: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화는 보지 않았지만, 이 영화 이야기는 조금 보기도 했어요 자기 일을 하고 밤엔 자신이 좋아하는 가게에 들르고 집에서는 책을 보는 생활, 멋지기도 하네요 혼자 산다고 쓸쓸할 거다 생각하면 안 될 듯합니다 자기 나름의 생활이 좋지요 이 영화 이야기를 두 시간이나 다른 분과 함께 나누셨군요 그렇게 해서 더 오래 기억하시겠습니다


희선

페크pek0501 2024-08-30 11:57   좋아요 1 | URL
독일의 유명한 감독이 만든 일본 영화라고 하네요. 지옥에 한번 빠져 보면 일상생활의 소중함을 알게 되지요.
우리가 며칠이라도 전쟁을 겪고 나면 아마 평온이 주는 행복을 절실히 느낄 듯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2024-08-30 18: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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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4-08-31 12:53   좋아요 1 | URL
어제 저녁 운동하고 집에 오는데 시원한 바람이 불었어요. 늦여름 같았어요. 제가 좋아하는 계절 늦여름이죠.
폭염의 고생을 끝냈다며 숨을 돌리고 시원함을 느낄 수 있는 계절이죠. 낮에만 폭염, 아침과 저녁으론 덜 더우니 확실히 여름이 가고 있는 듯합니다. 우리 모두 폭염을 견디느라 고생했어요. 조금만 더 고생하면 될 듯합니다. 벌써 내일은 9월입니다.^^

2024-09-03 14: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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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3 15: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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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3 15: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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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3 15: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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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3 15: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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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3 16: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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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24-09-04 15: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음...저는 할머니 소리도 들었는걸요..
우리 아이들과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귀여운 유치원생 아이 두명이 있어, ˝둘이 친구야?˝ 했거든요. 답변도 들었고요.
화기애애했는데 갑자기 ˝할머니는 몇층 가세요?˝ 하더라구요. 당황해서 내리는데 ˝감기 조심하세요˝ 까지....
우리 아이들은 키득거리고....
생각해보니. 이 아이도 나에게 말을 걸고 싶었는데 아줌마는 아이 입장에서는 엄마 친구니 아닐듯하고...자연스럽게 나온듯 합니다. 많이 슬프기는 했지만요^^

퍼팩트 데이즈 이런 내용이었군요. 알찬 요약 감사합니다^^

페크pek0501 2024-09-04 22:21   좋아요 1 | URL
하긴 저도 손주 본 친구가 있긴 해요. 그래도 친구가 열 명이 넘는데 그중 두 명만 그래요. 요즘 결혼을 늦게 하는 추세다 보니 할머니 되는 게 오래걸릴 모양이에요. 세실 님은 젊으실 것 같은데요... 저는 그저께 대학원생으로 보인다는 립서비스를 받았는데 그게 립서비스인 줄 알면서도 기분이 괜찮더라고요. 아직 젊어 보이는 게 좋은 걸 보면 마음은 늙지 않았나 봐요.
퍼펙트 데이즈, 혹시 나중에 넷플에 뜨면 꼭 보시어요. 품격 있는 삶을 보는 재미가 있어요. 세실 님 반가웠습니당~~

댄스는 맨홀 2024-09-05 11: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직원분이 저보다 나이 많으신데 어머님이라는 말을 들었어요. 속으로 이건 뭔가 했습니다. 마트에서는 보통 어머님이라는 호칭을 즐겨 사용하나 봅니다. 하지만 불편하더라구요. 영화는 보지 않았지만 훈훈한 느낌이 전해졌습니다. 그래도 할머니라고 부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답니다. ㅎㅎㅎ / 품격있는 삶이라, 나이들면서 점점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페크pek0501 2024-09-05 12:38   좋아요 1 | URL
앞으로 저는 어머님, 이라는 호칭에 익숙해져야겠단 생각을 했어요. 점점 나이 들어 갈 테니까요.ㅋㅋ
퍼펙트 데이즈는 잔잔한 호수 같은 영화였어요. 평범 속에 행복이 있다는 이 낡은 문구에 저절로 공감하게 만들어요. 품격 있게 보이려면 일단 말이 별로 없어야 할 것 같고(촐랑대면 안 되니까) 화를 잘 안 내는 성격이어야 할 것 같고(따뜻함이 느껴져야 하니까) 자기 직업에 충실하고 성실한 생활인의 모습을 보여 줘야 할 것 같습니다. 성공한 삶만큼이나 품격 있는 삶을 사는 것도 어렵겠지요.^^

2024-09-08 21: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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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1 17: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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