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나뭇잎 하나가 – 나희덕
그간 괴로움을 덮어보려고
너무 많은 나뭇잎을 가져다 썼습니다
나무의 헐벗음은 그래서입니다
새소리가 드물어진 것도 그래서입니다
허나 시멘트 바닥의 이 비천함을
어찌 마른 나뭇잎으로 다 가릴 수 있겠습니까
새소리 몇 줌으로
저 소음의 거리를 잠재울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내 입술은 자꾸만 달싹여
나뭇잎들을, 새소리들을 데려오려 합니다
또 나뭇잎 하나가 내 발등에 떨어집니다
목소리 잃은 새가 저만치 날아갑니다(94쪽)
북향집 - 나희덕
겨울 햇살 비껴가는
북향집에 그가 앉아 있었다
전등도 켜지 않고
저녁을 맞고 있는 그의 침묵 속으로
우리는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어둠이 혼자 그의 맨발을 씻기고 있었다
발등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는
우리가 둘러앉은 후에도
물기 어린 어둠에 자주 눈을 주었다
올 겨울은 매화盆도 꽃을 맺지 않았다고,
개가 새끼를 세 마리 낳았다고,
드문드문 이어지는 말소리 사이로
늙은 고양이가 어슬렁거리다 잠이 들고
우리는 외로움을 배우러 온 그의 제자들이 되어
온기 없는 거실에 오래 앉아 있었다
북향집 식어가는 아궁이,
그의 마음에서 천천히 걸어나왔을 때
마당에는 눈이 서걱거렸다
대문 앞에 그가 오래 서 있었다(59쪽)
상수리나무 아래 – 나희덕
누군가 맵찬 손으로
귀싸대기를 후려쳐주었으면 싶은
잘 마른 싸릿대를 꺾어
어깨를 내리쳐주었으면 싶은
가을날 오후
언덕의 상수리나무 아래
하염없이 서 있었다
저물녘 바람이 한바탕 지나며
잘 여문 상수리들을
머리에, 얼굴에, 어깨에, 발등에 퍼부어주었다
무슨 회초리처럼, 무슨 위로처럼(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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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서울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눈이 오고 있었다.
추운 마음에 이불을 덮어 주듯 무슨 위로처럼 내리는 눈.
나희덕, <사라진 손바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