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은 저자가 집필한 산문집 세 권에서 아홉 개의 글을 선별하여 엮은 책이다. 이중 표제작인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은 1996년 어느 잡지사가 ‘카리브해 호화 크루즈 여행’을 하면서 보고 느낀 것을 써 달라는 의뢰로 쓰게 된 것이라고 한다.
저자는 이 여행을 하고 나서 사람들은 이 여행을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이라 생각해서 제목을 그렇게 지은 것 같다. 고가의 비용을 내고 일주일 동안 마음껏 사치를 누릴 수 있는 크루즈 여행에 대해 저자는 비판의 눈으로 글을 쓴다.
내가 가장 인상적으로 읽은 것 중 하나는 인간 심리를 알 수 있는 글로, 승객들이 왜 비용이 많이 드는 호화 크루즈 여행을 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는 것에 대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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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객들의 설명적 잡담에서 반복적으로 쓰이는 단어는 따로 있었다. ‘긴장을 풀다’였다. 모든 사람들이 다가올 한 주를 오래 미루었던 보상으로, 혹은 형언하기 어려운 어떤 압박의 압력솥으로부터 자신을 구출하여 제정신을 유지하기 위한 최후의 몸부림으로 (크루즈 여행을 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아니면 둘 다로, 설명적 사연들은 길고 복잡하며, 어떤 것은 좀 무섭기까지 하다.
-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 51~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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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왜 크루즈 여행을 하게 되었냐는 질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날카롭게 포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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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친지를 간병했는데 환자가 끔찍하게 오래 연명하는 바람에 몇 달이 흐른 지금에야 겨우 땅에 묻고 (크루즈 여행에) 왔다는 얘기를 서로 다른 대화에서 두 번 들었다.
-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 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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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는 호화 크루즈 여행 계획을 잡아 놓고 그걸로 지옥 같은 현실을 견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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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취색 ‘말린스 티셔츠를 입은 화훼 도매상은 완벽한 여유와 재생의 일주일을 당근으로 눈앞에 매달아 놓고서야 크리스마스에서 밸런타인데이까지 지옥 같은 성수기에 지쳐빠진 제 영혼을 건사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 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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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호화 크루즈 여행을 하는 것이니 창피한 일이 아니고 아무도 자신을 흉볼 수 없다는 말로 읽힌다.
승객들이 호화 크루즈 여행을 하는 이유에 대해 자기 합리화하여 말하는 인간 심리에 대해서 저자는 이렇게 각주를 붙여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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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현상에서 드러난 것은 자기 자신에게 허락하는 방종에 따르기 마련인 미묘한 창피함이다. 내가 스스로에게 허락한 방종이 사실은 방종이 아니라고 누구에게든 설명하고 싶은 욕구다. 내가 마사지를 받는 건 마사지를 받고 싶어서가 아니라 옛날에 무슨 운동을 하다가 다친 허리가 죽을 만큼 아파서 하는 수 없이 받는 거라는 식, 나는 담배를 피우고 ‘싶어서’ 피우는 게 아니라 담배가 ‘필요해서’ 피우는 거라는 식이다.
-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 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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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본문 하단에 ‘각주’가 백 개가 넘는 데다 꽤 길게 쓴 각주도 많아서 저자의 성실성이 돋보이는 책이다. 제멋대로 쓴 듯한 필치는 꼭 수다스러운 사람이 떠들어 대는 모습을 연상케 하여 처음부터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2. 자기만족의 기쁨
‘포르쉐’라는 자동차를 동경했다는 기타노 다케시는 돈이 생기자 바로 포르쉐를 샀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포르쉐를 타 보고 놀랐다고 한다. 포르쉐에 탔더니 포르쉐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친구를 불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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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에게) 포르쉐의 열쇠를 건네면서 부탁했다.
“이 차로 고속도로를 달려줘.”
나는 택시를 타고 그 뒤를 쫓아가며 내 포르쉐가 달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택시 조수석에 앉아서 “좋죠? 저 포르쉐, 내 거요”라고 했더니, 기사가 깜짝 놀라서 물었다.
“왜 직접 안 타십니까?”
나는 이렇게 대답해주었다.
“바보군요, 내가 타면 포르쉐가 안 보이잖아요.”
- 기타노 다케시, <기타노 다케시의 생각노트>, 1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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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읽고 내가 왜 목걸이와 귀고리보다 반지와 팔찌를 좋아하는지 알았다. 목걸이와 귀고리는 거울을 보지 않고는 볼 수 없으나 반지와 팔찌는 눈에 잘 띄기 때문이다. 반지와 팔찌를 낀 내 모습에 자기만족의 기쁨을 느꼈던 것. 기타노 다케시가 포르쉐를 보기만 해도 좋은 것도 자기만족의 기쁨일 터.
인간은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강한 건 사실이다. 타인이 자신을 유능한 사람으로 봐 주면 좋겠고, 타인이 자신을 부자로 봐 주면 좋겠고, 타인이 자신을 행복한 사람으로 봐 주면 좋겠고. 반면에 타인과 무관하게 자기만족만으로도 행복해지기도 한다.
여기서 물음 하나. ‘타인이 나를 행복하다고 느끼는 게 중요한가, 내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게 중요한가?’ 나이를 먹을수록 타인의 시선보다 내가 느끼는 행복이 훨씬 중요해지는 것 같다. 생각은 시간에 따라 변하지만 지금의 생각으론 타인의 시선 따위가 하찮게 여겨진다. 타인이 나를 어떻게 보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3. 손해를 각오하는 것이 우정이고 사랑이다
자신이 친구에게 이만큼 베풀었으니 그 친구도 자신에게 그만큼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이건 우정이 아니다. 우정에 계산이 개입하는 순간 그 우정은 진정한 우정이 아니다. 자신이 손해를 보더라도 친구에게 뭔가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이 진정한 우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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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곤란하면 나는 언제든지 도와줄 수 있다. 하지만 내가 곤란할 때 나는 절대로 네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다.”
이런 자세가 옳다. 서로에게 그렇게 생각할 때 비로소 우정이 성립한다.
‘옛날에 나는 너를 도와주었는데 너는 지금 왜 날 도와주지 않는 거야’ 하고 생각한다면, 그런 건 처음부터 우정이 아니다. 자신이 정말로 곤란할 때 친구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 진짜 우정이다. (...)
애초에 우정에서 뭔가를 얻으려고 생각하는 것이 잘못이다. 손익으로 따지자면 우정은 손해만 볼 뿐인 것.
- 기타노 다케시, <기타노 다케시의 생각노트>, 1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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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 진짜 우정’이라는 것.
친구 간의 우정뿐만 아니라 연인 간의 사랑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상대가 조금이라도 힘든 시간을 보내야 한다면 그걸 말리고 싶은 마음이 사랑일 것이다. 내가 아는 사랑은 그런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상대를 위해 상대를 소유하고 싶은 마음을 버릴 줄 아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에 가까울 것 같다.
불륜 관계라면 예를 들면 이런 것.
“당신이 이혼하고 내게 와 준다면 나로선 정말 좋겠지만 이혼하면서 당신이 치러야 할 고통을 생각하면 말리고 싶소. 차라리 내가 당신을 단념하는 게 낫겠소. 당신에게 마음고생을 시키지 않는 게 내 사랑법이오.”
이혼하게 되면 자식들에게 시달려야 하고 부모님과 형제들에게 시달려야 하고 사회적 시선에 시달려야 한다. 게다가 자식을 마음껏 만날 수 없는 고통을 감내해야 될지도 모르는 일. 그걸 사랑하는 사람에게 겪게 하는 것보다 자신이 상대를 포기함으로써 그런 고통을 겪게 하지 않는 게 사랑일 것 같다. 그러니 사랑이란 자신이 이익을 보는 쪽이 아니라 손해를 보는 쪽에 가까울 것이다.
손익으로 따지자면 우정은 손해만 볼 뿐인 것.(127쪽)것처럼.
4. 사랑에 필요한 건 총명함
카뮈는 <페스트>라는 소설에서 총명함이 없다면 진정한 ‘선’도 아름다운 ‘사랑’도 없다고 썼다. 선한 의지를 가진 선량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무지하다면 아름다운 사랑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사랑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건 총명함이라는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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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존재하는 악은 대개의 경우 무지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며, 또한 선한 의지도 풍부한 지식 없이는 악의와 거의 같은 정도로 많은 피해를 끼치는 수가 있는 법이다.
가장 구제 받을 수 없는 악덕은 스스로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믿고, 이런 생각에 입각하여 사람을 죽이는 권리를 스스로 인정하는 따위의 무지하기 짝이 없는 악덕인 것이다. 살인자의 영혼은 맹목적인 것이며, 가능한 한의 총명을 갖추지 않고서는 진정한 선도 아름다운 사랑도 존재하지 않는 법이다.
- A. 카뮈 저, <페스트>, 1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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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인간이란 총명하기보단 어리석기 일쑤여서 ‘사랑’이 어려운 모양이다.
5. 갑질 보도로 생각한 것
ㄷ항공 오너 2세들이 자신이 부리는 사람에게 큰소리로 윽박지르고 위협을 가했다는 갑질 보도를 여러 번 접하고 나서 든 생각은 두 가지였다.
첫째, 인간은 권력의 자리에 앉으면 권력을 휘두르고 싶어져서 그 충동을 이겨 내지 못한다는 것. 그들이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그렇게까지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
둘째, 그들이 보통 사람이면 참았을 상황에서 크게 화를 낸다는 것은 자신이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 다시 말해 재벌 2세로 가진 게 많다고 해서 그리고 높은 위치에 있다고 해서 행복한 건 아니라는 것. 왜냐하면 행복한 사람은 웬만한 일에 화를 내지 않을 것이고 남에게 너그러울 수 있다고 믿기 때문.(‘개인 차’가 있겠지만 이에 대해선 언급을 생략함.)
어쩌면(나의 편견일지 모르겠으나) 재벌가에서 사는 사람들은 행복하기 어려운 존재들인지 모른다. 왜냐하면 원하는 것이면 뭐든 살 수 있기 때문에 뭐 하나 사고서 누릴 수 있는 소박한 행복이 그들에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힘들게 노력해서 돈을 버는 보람을 모를 것 같기 때문이다. 또 어려움을 참고 견디는 경험이 부족해서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것 같기 때문이다.
행복은 금전에 있지 않고 행복은 지위에 있지 않고 행복은 일상의 작은 것에서 느끼는 기쁨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들의 숙명은 그런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남에게 화를 내는 사람은 그 순간에 잠깐 속이 시원할지 모르나 대체로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다. 누군가와 싸우고 나서 기분 좋게 웃는 사람이 드물듯이 말이다. 그러니 화를 내면 낼수록 그 자신은 불행해진다.
<더 나은 세상>에 따르면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행복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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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이들이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에게도 많은 관심을 갖고 윤리적으로 살아가는 성인으로 성장하도록 격려해야 한다. 자녀 양육에 대한 이런 접근은 행복과 깊은 관련이 있다. 타인에게 관대하고 친절한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더욱 만족스런 삶을 살아간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많은 증거가 나와 있다. 또한 그러한 삶의 태도는 그 자체로 중요한 목표이기도 하다.
- 피터 싱어, <더 나은 세상>, 3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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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삶을 살면서 걱정이 있고 불쾌한 일을 겪고 불만이 생기기 마련이고, 자신이 바라는 바가 이뤄지지 않기 십상이다. 완전히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조건을 가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면 더 불행하거나 덜 불행한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우리의 최선은 덜 불행해지려고 노력하기 위해서라도 작은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일인 것 같다.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면 겸손해지는 법. 재벌 2세들에게서 알 수 있듯이 오만한 사람일수록 행복은 멀어져 간다.
6. 책은 아무 때나 읽기
책을 읽으면서 안 사실은 독서는 때가 있다는 것이다. 젊은 날에는 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 책을 읽어도 몇 시간만 잠자고 나면 하루를 지내는 데 지장이 없었다. 이제 나이를 먹고 나니 밤새워 책을 읽으면 컨디션이 나빠져서 하루를 지내는 데 지장이 있다. 그래서 잠 잘 시간에 책을 읽는 걸 삼간다.
예전엔 하루에 책 한 권을 뚝딱 읽기도 했지만 이젠 긴 시간을 읽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무 때나 시간이 날 때 매일 30분 이상 책을 읽기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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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기 좋을 때는 아무 때나다. 아무 도구도 필요 없고 시간과 장소를 지정할 필요도 없다. 책 읽기는 낮이든 밤이든 어느 시간에든 즐길 수 있는 유일한 예술이다. 책 읽을 시간이 있고, 책을 읽고 싶을 때가 바로 책 읽기 좋은 시간이다.
하지만 기회를 기다리는 것은 어리석다. 책 읽기 좋은 때는 나중이 아니라 지금이다. 시간을 만들어서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분명 즐거움을 놓치고 말 것이다.
- <천천히, 스미는>, 홀브룩 잭슨이 쓴 ‘애서가는 어떻게 시간을 정복하는가’, 220쪽~2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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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기를 재미없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건 아직 책을 읽는 즐거움을 모르기 때문이다. 바이올린을 켜는 즐거움을 알려면 훈련의 시간이 필요하듯 독서도 마찬가지다. 많이 읽어 본 사람만이 독서의 즐거움을 안다. 그러니 책 읽기에 재미를 붙이고 싶은 사람들은 많이 읽되 지루하게 읽힐 책 말고 자신이 흥미를 느낄 책을 찾아 읽는 게 요령이다.
늙어서 이제 책을 읽지 못하겠다고 생각하지 말자.
명심할 건 이것이다. 앞으로 사는 동안 내가 가장 젊은 게 오늘이라는 것.
7. 잘라 내는 작업이 중요하다
옷 쇼핑을 하다 보면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된다. 여러 옷 중 맘에 드는 몇 개를 골라 놓고 그중에서 단점이 있는 옷을 마음에서 잘라 내야 한다는 것을. 예를 들면 이러하다. ‘A란 옷은 색상이 맘에 드나 디자인이 맘에 안 들고, B란 옷은 디자인이 맘에 드나 색상이 맘에 들지 않고, C란 옷은 가격이 비싸서 안 되고 그러니 D란 옷으로 사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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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흘러가는 시간의 저장고일 뿐만 아니라 변화하는 것들의 저장고다. 세상 많은 것들 중 한 곳에 초점을 두고 나머지는 잘라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포커스! 그 대상만 커지고 또렷해지고 성큼 다가온다. 이것으로 왜곡이 일어난다 해도 사람을 마음에 담는 일은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담는다는 것은 보태는 게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과감히 잘라내는 작업이다.
- 배혜경, <고마워 영화>, 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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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서만 잘라 내는 작업이 필요한 게 아니라 인생에서도 잘라 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돌아보니 나도 살면서 마음에서 잘라 낸 것들이 많다. 두 가지를 다 하려면 에너지와 시간이 많이 들기 때문에 발레를 배우기 위해 (한때 재밌게 배웠던) 현대 무용을 잘라 내고, 글쓰기를 하기 위해 (한때 취미였던) 그림 그리기를 잘라 냈다. 독서에 있어서도 에세이를 잘 쓰기 위해 추리 소설 같은 재밌는 책을 잘라 내고 에세이를 많이 읽었다.
또 글을 쓰면서 잘라 내는 작업이 중요함을 알았다. 전체 사진을 망치는 부분을 잘라 내야 더 나은 사진이 되듯이 전체 글을 망치는 부분을 잘라 내야 더 나은 글이 된다. 이때 잘라 내는 것의 아까움은 응당 치러야 할 대가이다.
8. 세상에는 확실한 기준도 원칙도 없다
무엇에 대한 해석은 시간에 따라 달라진다. 이 사실을 내가 경험한 것 중에서 하나를 소개함으로써 증명해 보고자 한다.
둘째 아이의 백일잔치를 하는 날이었다. 우리집에 손님들을 초대해 놓고 상차림을 하느라 아침부터 무척 바빴다. 이렇게 바쁜 와중에 작은 형님(남편의 작은누나)이 새우튀김을 많이 해 와서는 바삭바삭해야 맛있다며 한 번 더 튀겨 내야 한다고 튀김을 튀기기 시작했다.
그때 난 작은 형님에 대해 하나도 고맙게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잡채, 불고기, 갈비찜 등 음식을 푸짐하게 만들어 놓았는데 새우튀김까지 있을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뿐 고마운 줄 몰랐다. 5월에 태어난 아이라 백일인 그날은 여름 더위가 가시지 않은 더운 날이었다. 안 그래도 더워 죽겠는데,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그걸 왜 해 왔냐고 말하고 싶은 걸 억지로 참고 있었다. 작은 형님이 그렇게 새우튀김을 손수 해 온 것은 먼길 오는 나의 친정어머니와 친정아버지에게 대접하고 싶어서였다는 걸 알고는 있었다. 그런데도 내가 고마워하지 않았다는 게 지금 생각하면 이상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난 뒤 고마움을 느끼게 되었고 지금까지도 그때 일을 떠올리면 두고두고 고맙게 생각한다. 이처럼 무엇에 대한 해석은 시간에 따라 달라지므로 속단은 금물임을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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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무엇이 허락되고 무엇이 허락되지 않는지 나는 모른다. 찬사를 보내지도 비난을 퍼붓지도 못한다. 세상에는 확실한 기준도 원칙도 없다.
- 에밀 시오랑,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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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땐 하나도 고맙지 않은 일이 지금 와서는 두고두고 고마운 일이 되는 걸 경험하고 나니 에밀 시오랑이 말한 ‘세상에는 확실한 기준도 원칙도 없다.’라는 말에 공감이 간다.
9. 관심을 끌기 위해서였다는 솔직함
글쓰기의 가장 어려운 점은 보편성과 특수성을 동시에 갖는 글을 써야 한다는 점이다. 보편성이란 글의 내용을 독자가 공감해야 함을 뜻하는 것이고, 특수성이란 독자가 다 알고 있는 뻔한 얘기가 아닌 독특함을 갖고 있는 내용이어야 함을 뜻하겠다. 글을 쓸 적마다 보편성과 특수성 사이에서 나는 헤맨다.
그러나 보편성과 특수성과 무관하게 나를 감동시키는 글이 있다. 바로 솔직한 글이다. 솔직함 앞에는 어떤 평가도 부질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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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글 안 쓴다고 군대에 가서는, 한참 뜨고 있는 여류 시인에게 오밤중에 전화를 했다. 그녀가 정중히 전화를 끊었을 때, 그때도 참 부끄러웠다. 그러나 두고두고 창피한 것은 회사에 들어가 처음 만난 여자 앞에서 노동자들이 불쌍하다고 울음을 터뜨린 것이다. 관심을 끌기 위해서였다.
- 이성복,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 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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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면서 사실은 상대가 달이 아닌 자신의 손가락을 봐 주길 바랐던 것. 그것은 상대에게 관심을 끌기 위해서였다는 것. 누구나 한 번쯤 경험했을 것 같은, 그러나 부끄러운 일이라 글로 쓰기 쉽지 않은 일이다.
위의 32쪽의 글을 글쓰기에 솔직함이 필요한 이유를 잘 보여 주는 전범으로 삼으려 한다.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8/0430/pimg_7179641831896722.jpg)
보기만 해도 배부른 나의 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