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몽드 디플로마티크를 읽다가 요즘 공부하는 부분의 이론적 시선이 들어있는 것 같아서 옮겨 왔다.  

원문 :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890 

서동진 선생의 글이다.

 

동성애의 게이화

언제던가 괜찮은 남자는 다 애인이 있고 멋있는 남자는 죄다 게이라던가 하는 광고가 TV에 등장한 적이 있었다. 꽤 잘나가는 시사주간지에서 내게도 동성애자 남자친구가 있었다면 하는 이성애자 여성의 수다를 큼지막하게 싣기도 했다. 최근엔 연속극의 여제, 김수현의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를 두고 시끄럽다. 일전 통화했던 어느 언론사 문화부 기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동성애자가 안방극장을 점령”했기 때문이다. 보수적인 기독교 집단은 늘 그랬듯이 동성애를 조장하는 방송 프로그램을 내보냈다고 시청거부운동을 펼치는 등 야단법석이다. 그래서 지난 10년 동안 연례행사처럼 되풀이되는 ‘동성애자는 누구인가’를 묻고 알리는 대중매체의 기사나 프로그램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여기에 잠깐 토를 달자면 거기에서 들먹이는 동성애자란 당신들의 동성애자라는 것이다. 실은 대중문화 안에서 소비되는 동성애 정체성은 이성애자 사회가 지어낸 환상과 다름없다. 그렇다고 그것이 동성애자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허위라고 말할 일은 아니다. 그 환상은 동성애자 편에서도 참조하고 또 써먹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거두절미하고 말하자면 동성애, 그리고 동성애자란 것이 무엇인지는 동성애자 스스로가 대답의 열쇠를 가진 게 아니라는 것이다. 대중매체에서 흔히 ‘그들 자신의 목소리로’ 라는 이름으로 경청하는 동성애자의 목소리라고 해서 동성애와 동성애자의 진실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동성에 이끌린다거나 정서적 친밀감을 느낀다는 사실이 곧 동성애자라는 정체성에 속하거나 혹은 동성애자에 관한 진실을 가지고 있음을 보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동성애자 역시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스스로 배우고 익힌다. 그래서 동성애자가 가장 많이 묻는 질문이 ‘동성애자란 무엇인가’라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글로벌 게이?

 동성 간의 성애적 관계나 친밀한 감정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지는 전연 분명하지 않다. 별나게 동성사회적인(Homosocial) 한국에서 동성애란 정체성이 다른 사회와 동일하게 인식될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만무하다. 이를테면 게이란 정체성을 통해 자신을 동일시하며 동성애자 사회를 구축한 한국·대만·홍콩 같은 아시아 국가의 동성애자와 오랜 동성애적 하위 문화를 가지고 있던 일본, 그리고 ‘히즈라’(Hijra)나 ‘커토이’(Kathoey) 같은 흔히 ‘제3의 성’이라 부르는 성별 체계를 가진 인도·타이 같은 사회에서, 동성애란 말이 가리키는 것이 다를뿐더러 성별·성정체성·성행동 사이에 맺는 관계도 복잡하게 뒤얽혀 있다. 
 

놀랍게도 최근까지 성행동의 공간 안에서 서로 다른 성행동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특정한 사회적 성원으로 나누는 기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적어도 일부 서구 사회를 제외하면 일반적인 현상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이른바 ‘국제 성정치적 관계’라 부를 만한 것이 급격하게 변화하며 생겨난 현상이다. 이를테면 서구 사회에서 에이즈 위기와 관련해 폭발적으로 등장한 성정체성에 따른 역학적인 인구 분류는 동성애적 성행동을 단순히 성행동의 종류가 아니라 특정한 라이프 스타일(잦은 섹스 파트너 교체, 사우나를 비롯한 다양한 퍼블릭 섹스 공간의 발달 등)에 따라 살아가는 사회집단이 나타내는 행위 성향으로 보게 했다. 이는 에이즈와 관련한 의학적 캠페인은 물론 그와 관련한 다양한 정치적·문화적 매체를 통해 전세계에 확산됐다.

다음으로 동구권 붕괴 이후 종래의 사회적·정치적 운동을 대신하게 된 인권운동 역시 동성애 정체성이란 관점을 확장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른바 국제인권운동은 성적 영역 안에서 벌어지는 차별과 박해를 적극적으로 인권 이슈로 제기했다. 당연히 그 효과는 동성애 정체성의 세계화라고 부를 수 있는 현상이었다. 이는 동성 간 성행동이 취할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정체성을 인종이나 종족과 거의 다르지 않은 특정한 성적 공동체로 정의하는 특정 서구 사회의 정체성 담론을 유포시켰다. 성정체성에 따른 인권침해란 이름으로 우리는 모든 사회를 동일하게 인식하고 평가하게 된다. 따라서 이란, 아프가니스탄에서부터 미국과 스웨덴 같은 사회에 이르기까지 어느 사회에서나 동성애 정체성, 동성애자 사회가 있었던 듯한 생각에 이르게 된다. 이는 많은 나라에서 반발을 초래했다. 더불어 지금까지 무시되거나 그를 변별할 특별한 지식을 갖지 않던 사회에서 갑자기 동성애 정체성이란 이름을 빌려 해당 사회의 동성 간 성행동을 처벌하는 일이 빈번하게 나타났다.

세 번째로 단연 우리는 다양한 문화적 매체를 통해 순환하는 성정체성에 관한 지식, 의례, 상징, 이미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여기에는 ‘퀴어 시네마’란 이름으로 소개되는 예술영화나 ‘스톤월 항쟁’이니 ‘게이·레즈비언 행진’이니 하는 미국 주류 게이운동의 유사 정치적 담론에서부터 <섹스 앤드 더 시티>나 <퀴어 애즈 포크> <퀴어 아이> 같은 TV 시리즈는 물론 마돈나 같은 게이 청중이 특별하게 숭배하는 스타를 둘러싼 팬덤이나 문화적 이벤트(클럽 파티 등), 그리고 전 지구적인 게이 관광객을 대상으로 발달된 관광지 등 다양한 것이 포함된다. 따라서 지구화 과정에서 운반되는 것은 자본과 상품, 사람이지만 성정체성과 관련한 것들이기도 하다. ‘게이 정체성의 세계화’라고 부를 수 있는 이같은 현상은 많은 사회에서 형성된 성과 관련한 사회적 분류와 위계, 이질적 정체성 담론을 동성애·동성애자 정체성 속으로 끌어모은다.

동성애자, 좋은 게이 시민

이는 한국 사회에서 동성애자 사회의 형성을 살펴볼 때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다. 1990년대 중반을 전후해 본격적으로 활동을 개시한 한국 사회의 동성애자 운동은 무엇보다 동성애자를 특정한 생활양식이나 문화적 관습을 공유하는 공동체로 정의하고, 이에 근거한 특수한 사회집단으로 규정하는 구실을 했다. 동성에 대한 친밀감이나 동성과의 성행동은 자신이 동성애자이기에 그런 것이라는 생각은 얼핏 성과 무관해 보이는 폭넓은 삶의 영역을 성정체성이란 것을 통해 이야기하고 표현하게 한다. 이를테면 자신의 성장과 가족관계 등을 묘사하는 방식은 이제 동성애자라는 정체성을 통해 재구성된다. 자신의 특별한 버릇이나 습관, 외상적 사건은 모두 동성애자로서의 성장 이야기 속에 스며드는 것이다. 따라서 동성애자는 주어가 되어 수많은 사건과 행위를 술어로 거느리게 된다. 이처럼 인생 서사가 성정체성 서사로 각색될 때, 동성애자는 그런 사회적 체험과 관습, 생활양식 등을 공유하는 사회로서 자신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동성과의 성행동이나 친밀한 관계는 동성애자이기에 있었던 혹은 일어날 일일 뿐 동성애 정체성을 구성하는 결정적 준거가 되지 않는다. 동성애자 수영 동호회에 나가 동성애자끼리의 사회 활동을 즐기며 더욱 안정적이고 일관된 동성애자로서의 자아를 체험하는 것이 우연적인 성행동을 통해 동성과 섹스를 하는 것보다 더 동성애적인 것이 되었다 말할 수 있다. 청소년 동성애자를 지원·보호하는 것이 동성애자운동이 가장 관심을 기울여야 할 문제로 집착하는 것 역시 이해할 만한 일이다.


그렇지만 이런 변화가 당연한 것도 또 유일한 방향인 것도 아니다. 동성애자를 둘러싼 사회적 관용이 늘어나고, 동성애 이야기가 공론화되고, 동성애자 권리에 대한 관심이 적극적으로 제기돼왔다고 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이야기 속에는 이미 특정한 성정치적 관점이 스며들어 있다. 물론 그것의 두 가지 큰 뼈대는 ‘인권 정치’와 ‘정체성 정치’라는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비롯된 성정치다. 서구에서 1980년대 초반을 전후해 사회주의적·급진적 사회운동이 쇠퇴하면서 성정치 역시 보수화돼왔다. 이성애적 규범이 지배하는 성의 체계를 거부하고 이를 변형하려던 급진적 성정치를 대신해 ‘좋은 동성애자 시민’이 됨으로써 이성애자와 다양한 성적 소수자가 공존하며 살아가는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을 목표로 삼은 새로운 동성애자 사회운동의 물결이 등장했다. 이는 앞서 말한 조건 속에서 많은 비서구 사회로 확산됐고, 한국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그리고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성애적 규범을 은밀하게 지지하는 역할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가운데 하나가 동성애를 탈성애화함으로써 건전한 시민 주체로 길들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9금’으로 대표되는 청소년에 대한 성적 규제 강화, 성매매의 불법화, 성폭력이나 아동 성폭력에 대한 집단적 패닉 등은 중산층 이성애자 가족이 우리 시대의 성정치 모델이 되었음을 역력히 보여준다. 따라서 기존 동성애자의 주된 세계였던 동성애적 하위 문화는 ‘음지’ 혹은 ‘불행한 과거’로 망각되거나 거부되고, 세련된 클럽이나 바 같은 상업적인 유흥 공간, 아니면 스포츠나 다른 취미를 통해 매개된 사교적 모임이 건전한 동성애자를 위한 공간이 돼버린다. 감정적 헌신에 터 잡은 장기적인 친밀한 관계가 정상적·규범적 관계가 되고, 물론 이는 TV 드라마에서 보이는 것처럼 함께 마트에서 장을 보고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여행을 다니는 유족한 삶을 사는 고학력 중산층 동성애자 남성을 특권화한다.

이는 정서적 교류와 헌신에 기반한 관계로 부부관계를 그려내는 보수적 중산층 이성애자 부부의 이데올로기를 반복한다. 이때 이성애적 규범에 동화될 수 없는 동성애자는 더욱 주변화되고 자신의 삶에 관해 발언할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다. 그래서 정작 우리 사회에서 성적 위계로 볼 때 가장 열등한 성적 소수자는 ‘중년 노동자계급 이성애자 남성’처럼 보이는 것도 착각은 아니다. 사회적 재생산을 가족화하는 신자유주의적 가족 경제 내에서 노동자계급 이성애자 남성 가장은 생계부양자라기보다는 가정의 재무적 활동의 책임자라는 역할을 요구받는다. 이들은 정작 현실에서는 가장 취약한 생존 조건에 놓였다. 게다가 정서적 교감과 만족이 가장 큰 역할을 해야 하는 새로운 친밀성의 세계로 가족 생활에 참여하도록 강요받는다. 그러나 그들이 할 줄 아는 것은 권위적인 남편과 가장의 역할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대딸방’으로, ‘키스방’으로 전전한다. 그들은 좋게 보아 ‘재수 없는 꼰대’고 더 나쁘게는 ‘잠재적인 치한’이다. 그들이 한국 사회에서 가장 비천한 성적 소수자가 아니라면 누가 그것이겠는가. 다양한 취향과 문화를 존중하는 것을 ‘예의’와 ‘미덕’으로 간주하는 다문화주의적 사회에서 게이는 이미 좋은 친구이자 시민으로 융숭한 대접을 받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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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윤리적 소비에 대한 연구를 하는 중이다. 덕분에 화장품 가게나 커피숍 등에 걸린 윤리적 소비에 관련된 카피 / 이미지들을 유심히 보는 버릇이 생겼다. 윤리적 소비에 관한 서적이 국내에도 꽤 출간되었다. 대부분 윤리적 소비란 무엇인가에 초점을 맞춘 책들이기 때문에, 개념 '설명', 관련된 현상 설명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그러나 천규석 씨처럼 윤리적 소비를 비판적으로 보는 서적 또한 있다.  

외국의 경우 예전부터 윤리적 소비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회학자, 경제학자, 문화연구자 들의 견해들이 흥미롭게 펼쳐지고 있다. 특히 푸코의 '통치성'이론을 바탕으로, 윤리적 소비가 '자유의지'를 가장한 새로운 통치의 형식으로 시민들의 삶에 다가가고 있다는 견해가 제법 눈에 띈다. (그러나, 역시 '통치성'론의 현대적 개입은, 사람들로부터 "뭘 이런 것까지 까고 있소?"라는 멘트, "너무 과장된 음모론의 일환이 아니오?"라는 의심을 받기 좋은 것이 사실이다) 비단 통치성론의 한계라고만 한정지을 수 없겠지만, 통치성론을 적용함으로써 생기는 부작용은 바로 기업을 '선과 악'의 틀에 종속시키는 것이다(국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악에 대한 부정적이고 선험적인 규정으로 인해 윤리는 상황들의 개별성을 사고할 수 없다"는 알랭 바디우의 지적을 떠올려본다면,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사고는 '윤리적 소비' 안에서 윤리를 이해한다는 것이 보다 입체적이어야 함을 알 수 있다. 고로 윤리적 소비를 이야기할 때, 우리가 이해해야 할 윤리는 소비 행위를 통해 지향하는 '선을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로만 이해될 수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물론 이 문제는 어렵다. 좋은 일 하고 있는 것 아니오?라고 하는 질문에 화려한 비판으로 대응한다고 하더라도, 윤리적 소비가 그렇게 친밀하게 다가오지 않은 듯한 현실에서, 비판은 이른 음모론이 될 수 있는 한계 또한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할 것 같기 때문이다.  

국내의 논의를 보면, 윤리적 소비가 개인의 일상에 그리 친밀하게 뿌리내리지 않은 것 같은 상황에서, 윤리적 소비 확산론과 비판론이 거의 동시에 늘어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보통 확산론의 점진적 증대가 있은 후, 그것에 뒤따르는 비판론과 회의론이 시차를 두고 나오기 마련인데, 흥미롭게도 윤리적 소비에 대한 비판론 또한 동시에 쑥쑥 커 가고 있다. 이건 문화연구 같은 문화이론과 정치적 의지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는 학문을 수행하는 사람들의 소위 학습효과 같은 것도 영향을 주는 것 같다. 대표적으로 이동연 선생의 견해를 살펴보면 그런 느낌을 받는다. 윤리적 소비가 하나의 독창적인 문화 실천이라곤 그는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그의 주장을 보면 그것이 가져다 줄 영향에 대한 비판과 회의는 사뭇 소비의 긍정성과 주체성에 비판적 입장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는 문화연구의 한 경향과 흡사해 보인다.  즉 그런 비판론이 나오게 된 이전의 사례들에서 학습된 성과를 윤리적 소비에도 적용시킬 수 있다는 그런 사고틀이 보이는 것이다 

(다들 알다시피, 문화연구는 소비자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냄으로써, 기업과 공명하고 있다는 의심을 주위로부터 많이 받아왔다. 그리고 그런 의심들을 떨쳐내기 위한 반성론이 국외를 시작으로 국내에도 꽤 오랫동안 논의되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소비자의 능동적 수용에 대한 회의를 드러내는 견해들이 꽤 나타나는가 싶더니, 올해 관련 논문들을 보니 다시 이런 회의적 질문들에 대한 재반박이 이루어지고 있는 듯하다. 김수정과 같은 문화연구자는, 문화에 정치를 기입하려는 문화연구자들의 이데올로기를 깨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며, 의도적으로 논쟁을 펼치기 위해 도발적인 논문을 썼다. 그리고 여기에 조금은 연한 응대로 이희은 같은 연구자가 '문화적 시민권'이란 개념을 통해 김수정의 논의와 유사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학문 사회의 이 비겁하고 소심한 '동료 의식'은 김수정 선생의 도발을 외면하고 있다. 딱한 현실이다) 

2 

윤리적 소비에 비판적 메스를 가하는 대표적 견해 중 하나는, 기업이 노동 과정에 대한 '진정성'을 표출함으로써 나타나는 그 영향이 과연 노동자의 현실 자체를 좋은 쪽으로 인도하고 있는가라는 문제다. 즉 노동 과정의 열악함, 특히 국제 정세를 볼 때, 열국의 위치에 있다고 간주되는 국가 내부의 노동 현실을 '피해자'의 입장으로만 인식한 나머지, 그런 입장의 강화가 오히려, 노동 현실의 세부적인 모순을 은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란 주장이 있다. 특히 소비 행위와 연관될 수밖에 없는 개념인 '상품화'를 떠올려보면, 이런 '진정성의 상품화'가 주는 감정 구조의 딜레마는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깊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기업이 노동 과정을 드러내고 그 과정 안에서 나타나고 있는 부정적 현실을 소비자에게 '떳떳하게'보여주겠다는 건, 예전과는 다른 문제다. 물론 여기엔 소비자들 스스로 현대 사회의 위험 요소 안에서 안전망을 확보하기 위한 실천도 가미되어 있을지도 모른다.윤리적 소비가 웰빙과도 연관되어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리고 이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비판론이 계급에 대한 시각이다. 윤리적 소비는 정녕 노동자 스스로 실천할 수 있는 문화 개념인가?라고 묻는다면, 여기에 대해서도 비판론자들은 할 말이 많다. 기업이 소비자에게 손을 건네고, 함께 노동자에게 허그를 합시다,라는 광경이 윤리적 소비의 한 축이라고 한다면, 비판론자들은 여기서 소비자의 계급을 물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랬을 때, 아직 윤리적 소비는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자기 만족의 문화적 실천'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비판적 견해는 강화된다. 이처럼 기업이 노동 과정에 대한 성찰을 드러냄으로써 시도하는 투명성과  비판론자들의 불투명성이란 대립 관계는 견고하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기업 나쁜 놈!'하고 규정해버린다면, 앞에서 설명했듯이 우리의 단순한 윤리에 대한 이해가, 윤리적 소비의 긍정적 가능성과 열린 비판에 대한 잠재성 모두를 폐쇄시킨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3   

 

 

 

 

 

 

 

 

요즘 내가 윤리적 소비와 관련하여 고민하는 것은 '기업은 정치를 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다. 포르셍연구소에서 발간된 <도덕적 명령>이란 책을 보면 윤리적 소비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이 책에선 '도덕 사업'을 펼치는 기업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고 있는데, 특히 '도덕욕'이란 개념을 통해, 도덕 자체가 기업의 미래 준칙이 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그랬을 때, 기업에게 상품 자체를 파는 것은 중요한 게 아니다. 상품과 함께 따라오는 도덕의 의미와 언어들이 소비자에게 전달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을 통해 기업은 과거 국가가 하던 도덕의 의미 부여를 스스로 하게 된다.  

제품 판매가 더 이상 유일한 종극 목적이 아니며, 기업은 동등하게 도덕과 국민의 주체이어야 한다.자신의 환경 안에서 기업은 점차 자신의 불투명성을 버리고,점점 더 국민과 책임자로서 위치하게 되고, 국가에 대한 책임을 가진다고 선언하며,사회적 사명(예를 들어 다논)(43)(과 건강을 위한 다논재단)을 이어받는다. - 43,44쪽  

과거에 우리는 국가를 통해 도덕의 의미를 부여받고, 우리의 선배들은 이러한 삶에 익숙했다. 여기서 기업은 국가의 성취를 전시하는 기능을 맡았다. 기술 국가주의를 통해 기업의 기술적 성과가 세계에 도드라지면, 그러한 성과는 국가 내 위치한 개인의 내면을 고취시키고, 이것에 맞는 건전한 생활과 '일등 시민'으로서의 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선전이 국가와 언론의 합작을 통해 나타났다는 건 이미 알고 있는 측면일 것이다.  국가와 기업의 관계에서, 국가의 힘이 우세하던 시절을 지나, 이제 국가는 기업에서만 통용되던 '경영'이란 표현을 정치에 기입하게 되었다. 그리고 기업의 이러한 경영 개념이 국가의 정치 전술로 채택되면서, 기업은 자연스럽게 국가 내부에 종속된 기구가 아니라, 기업 스스로의 강화된 입지를 펼칠 수 있는 통로를 확장시키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윤리적 소비의 등장 이후, 이제 기업은 개인을 소비자의 범주에만 넣지 않고, '시민'에게 윤리를 부여함으로써, 국가와 사회에 위치한 개인의 내면에 더 깊이 개입하길 원한다. 기업은 특히 윤리적 소비를 통해 세계-시민으로서의 역할, 권리를 소비자에게 강조하면서, 그들에게 세계-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누려보지 않겠느냐라는 정치적 조언을 한다. 시민의 역사적 형성 과정엔 물론 자본의 기여도 있었으나, 현대 사회에서, 기업이 윤리적 소비를 통해 선보이는 개인의 '시민-되기'현상은 나에게 제법 신선해 보인다. 여기엔 과거와 달리 내가 윤리적 소비를 한다고 해서 어느 국가보다 앞선 일류 국가의 시민이라는 집단적 우월의식의 문제가 아니라는 시선 또한 있음을 알아야 한다. 다만 내가 윤리적 소비를 한다는 그 실천의 '개인성' 그것과 관련된 개인화된 시민의식의 발현은 그 어떤 집단적 의지에 구속되지 않은 채 개인 스스로 자족하며 윤리를 체화하려는 현대 시민의 속성과 더 깊게 연결되어 있는 듯하다.  (통치성론을 통해 윤리적 소비를 비판하는 자들은 이 지점에서 주체의 자유 의지를 노리는 국가와 기업의 의도를 직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통치성론은 이런 통치 방식의 연성화가 가져다 주는 무시무시한 부정적 효과를 강조하는 데는 적절한 개념이지만, 정작 그것의 무시무시함을 수용하는 주체의 개별적 실천에 대한 고려와 그 실천을 둘러싼 갈등에는 취약한 것 같다. 그 무시무시한 통치의 부정적 효과를 서술하는 데만 신경을 쓰다보니, 수용자 또한 그 효과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다 잠식되어 있다는 섣부른 가정이 숨어있다는 말이다.) 

4 

과연 기업은 정치를 하고 있는가, 기업은 정치를 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윤리적 소비가 던지는 흥미로운 질문이다. '경영'이란 말과 찰싹 달라붙은 기업에게 정치란 말이 함께 배치됨으로써 발생하는 예견된 미래, 그것에 대해 과장된 함의를 설파할 필요는 아직 없을 듯하다. 다만, 기업이 윤리적 소비를 통해 선보인 소비자의 '시민-되기'는, 기업이 단순하게 상품을 파는 것이 아니라는 일차적 이해에서 더 깊은 고민을 하게 만든다.  

윤리적 소비를 통해 우리가 가장 쉽게 접하는 문구는 '착한 소비', '착한 기업', '착한 경영' 같은 것이다. 나는 궁금하다. 왜 하필 '착한'이란 수식어가 붙었을까. 기업은 정녕 과오를 깨닫고, 자신의 성찰을 몸소 보이기 위해 시민들에게 고해성사를 하려는 것일까? 비판론자들은 묻는다. 이 고해성사는 정녕 진실한 것일까? 기업이 윤리적 소비를 통해 들고 온 개념은 진실성과 투명성이다. 노동과정이란 옷의 단추를 풀고, 자신의 몸을 보여주려고 한다. 사람들은 이것에 '양심'의 문제를 가지고 온다. 혹은 만족의 문제이기도 하다. 가장 기본적으로 윤리적 소비는 내가 스스로 사고 싶은 물건에 대한 만족과 더불어 따라오는 '옵션 형태의 나눔'정도라고 간단하게 요약할 수도 있을 것이다. 깊은 회의론자들은 말한다. 이런 옵션 형태의 나눔은 결국 중산층의 자기 만족에만 그칠 것이며, 정작 수혜자들은 없을 것이라고.  

다시 정치의 이야기로 돌아왔을 때, 윤리적 소비를 통해 우리는 기업이 국가보다 더 나은 정치의 언어를 시민들에게 부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기업은 더 나아가,  소비자를 세계-시민으로 만들기 위한 정치의 언어 발명에 실제로 깊은 고민을 하고 있는가?  

이건희 회장이 일전에 "모든 국민이 정직해졌으면 좋겠다"라고 말을 한 적이 있다. 사람들은 당시 '정직'이란 표현에 쏠려, 이건희를 비판했지만, 내가 보기에 더욱 더 크게 보고 비판해야 할 지점은 그가 '모든 국민'이라는 표현을 자연스럽게 썼다는 말이다. 한 기업의 총수가 한 국가 내 시민들의 도덕의식을 짚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냥 싱거운 언사라고 치부할 수 있겠지만, 내게 이 발언은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 기업이 도덕과 윤리라는 개념을 제시함으로써 그들은 윤리적 소비 등을 통한 도덕 사업을 통해, 때 아닌 '인간미'를 과시하는 듯하다. 시민 되기의 과정에서 우리가 정치를 통해 학습하는 중요한 부분 하나가 바로 인권 등으로 비롯된 인간미를 상실하지 않기일 것이다. 그들은 그리고 상품이란 형식을 통해 우리에게 인간미를 함께 판매하고 있다. 우리가 동물이 아닌 인간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해주는 실천이 '소비'라는 건 재미있는 측면인 것 같다.  

그런데 이런 걱정은 있다. 인권위원회 같은 기구가 생겨, 우리의 인권을 직제화된 곳을 통해 인식하고, 사회를 생각하는 인간의 최저선을 확인받아야 하는 이 마당에, 인간미를 판매하는 기업을 통해 소비라는 실천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그 메시지가 "그래도 당신은 인간이군요"하는 그 섬뜩한 과정 말이다. 기업이 윤리적 소비를 통해 들고 온 인간미, 그리고 좀 과장되게 표현해서 인권을 판매하는 상황을 뒤돌다보면, 이것은 우리가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확신시키보다는, 이 사회에서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음 자체의 의지가 계속해서 나약해지고 있음을 나타내는 현상은 아닌가의 문제가 내 안에 들어오는 듯하다.  나의 인간미를 사물을 소비함으로써 확인받아야 하는 그 상황에서  깊은 고민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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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0-07-23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윤리적인 소비를 지지합니다. 단순히 상품을 소비하는 피동성에서 벗어나 능동적인 상품 소비를 통하여 기업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 소비자의 최소한의 권리고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전에 동생이 매일 안암동 쪽에 있는 스타벅스에 가서 공정무역 커피 판매하냐고 물었습니다. 뭘 그러냐는 제 물음에 분명 공정 무역 커피를 본사에서는 판매하는데 지점에서는 모른다고 하면서 이래야 가져다 놓는다는 말에 피식 웃었습니다. 그런데 두 달을 그러니 다음에 가져다 놓더라고요. 분명 윤리적인 소비에는 부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더해도 장점이 더 크다고 할 수 있겠죠. 아직 초창기인 한국에서 단점을 내세우면서 비판하는 것은 아직 학교도 안들어간 아이들에게 성적이 떨어졌다고 혼내는 것과 같은 상황이 아닐까요?

얼그레이효과 2010-07-23 23:17   좋아요 0 | URL
윤리적 소비에 대한 비판론을 한국 사회에 적용했을 때 무리가 있긴 한 듯 해요. 님 말씀처럼, 또 제 글에서 강조했듯이 윤리적 소비라는 것이 한국 사회에서 보편화된 현상은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기업의 윤리적 소비 전략과 시민사회가 실천하는 윤리적 소비에 대한 접점, 혹은 배치, 그리고 절합 등 그 세부적인 관계 들을 더 크게 보아야 하겠지요. 제 글은 일단 기업의 전술로 제한되게 본 점은 있습니다만, 일단 제 입장은 윤리적 소비의 긍정성을 무한 찬양하고싶진 않다는 신중론으로 정리하고 싶습니다. 이게 더 확산되어야 한다, 혹은 제재를 받아야 한다의 차원은 또 논의를 해봐야겠지요. (뭐 어떤 정치진영의 일반화된 전술 채택 / 시민사회가 강조하려는 전술이라든지 같은 이야기가 포함된다면 말이죠)

무해한모리군 2010-07-23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문명이 너무 지나친 소비를 하고 있고 '소비'를 줄여가는 방향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윤리적 소비품들이 산넘고 물건너 오면서 많은 에너지를 소모했고 하는 이런저런 논란외에 제게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은 많은 윤리적 소비를 말하는 기업들이 여전히 '소비'를 부추기고 있다는 점입니다. 요즘 제가 결혼을 준비하고 있으면서 이런 고민이 더 커졌습니다. 가능하면 환경을 많이 훼손하지 않는 방향으로 하려고 하는데, 여기서도 여전히 고민이 되는 것은 제가 이런저런 것들을 시장에 내맡기고 소비 한다는 것이지요. 그 간편함에 불필요한 것들까지 너무 많이 사용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내가 내 몸에 좋은 것과 이웃에 좋은 것, 환경에 좋은 것이 마구 같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가 하는 고민도 듭니다.

소중한 글 잘 읽고, 제 고민도 조금 깊어집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7-23 23:16   좋아요 0 | URL
제가 '고민'이란 표현을 쓴 것 또한, 어떤 복잡다단함이 섞여있는 듯 한 것 같습니다. 소비라는 것 자체에 너무 큰 부담감을 가질 필요는 없을 듯 하지만, 휘모리님처럼 긴장감 혹은 거리두기라는 생각을 갖고 내가 하고 있는 행위에 대한 자각이라고 할까요, 삶에 대한 의식이라고 할까요. 그런 것을 늘 가까이하는 게 소중하지 않나 싶습니다(너무 원론적이라 죄송하네요) 한 살 한 살 먹어가면서, 이런 고민들이 하나, 둘 늘어나는 게 한편으론 삶에 대한 건강성을 잃지 않은 것 같아 좋지만, 삶을 뭐 이렇게 피곤하게 사나, 하는 자조감 같은 것도 사실 들어오는 요즘이네요. 솔직한 고민 고맙습니다.

Alicia 2010-07-23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그레이효과님,블로그같은 공간에서 공짜로 무심히 읽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글이네요.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7-23 23:18   좋아요 0 | URL
친구가 요즘 이 주제로 고민이 깊어, 덩달아 관련 자료를 읽다가 생각을 정리해봤는데요. 온라인이다보니 뭔가 또 제한적인 생각으로 나오는 것 같아 아쉽네요.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앞으로 좀 이런 두터운 글을 자주 올려보려고 합니다. 함께 고민 부탁드려요.

쉽싸리 2010-07-24 0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뵙겠습니다.

기업쪽에서 내세우는 윤리적 소비는 한계가 분명히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기업의 본질로부터 그러하다고 봅니다.
기업말고 협동조합(생협 등)에서 얘기하는 윤리적 소비는 또 다른 측면이 있다고 봅니다. 그 측면도 자세히 들여다 보아야 할 필요는 있겠지요. 예를 들어 천규석 선생님은 협동조합쪽의 윤리적 소비니,공정무역에 대해서 강하게 비판하고 계시지요. 자급자족을 하자는 데에 개인적으로 참으로 찬성합니다만 이건 맨땅에 헤딩도 이만한 게 없는 판국이라 그야말로 숨이 턱 막힐 지경입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7-24 14:45   좋아요 0 | URL
쉽싸리님 반갑습니다. 아직은 언론 쪽에서 '기획성'으로 윤리적 소비에 대한 실천을 장려하던데요. 여기에 대한 검토가 좀 꼼꼼하게 되었으면 하네요. 너무 미화되어 '선을 향한 소비'같은 식으로 가다보면, 오히려 우리가 놓친 그런 것들로 점철되지 않을까 싶어요.

미지 2010-07-26 0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네 편의점에 관한 얼그레이님 얘기를 먼저 읽었습니다만, 이 부분도 딜레마죠. 저는 생협회원이라 야채를 주문해서 먹는데요 동네 다니다 길가에 앉아 야채 몇 포기 열어놓고 파시는 할머니들 만나면 그냥 막막한 게 마음도 아프고 해서 어떨 땐 집에 있는데도 사게 되는... 그러면서 생각해 보게 됩니다.. 윤리적 소비에 대해서... 생혐의 유기농 야채를 사먹는 것과 노점상 할머니의 비유기농 또는 중국산 야채를 사먹는 것에 대해서... 결론이 쉽게 안 나더군요... 윤리적 소비 문제도 논의가 정리되긴 해얄 것 같습니다.

얼그레이효과 2010-07-26 23:29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세상 일이 갈수록 입체적인 부분이 늘어나는 것 같아요. 고민도 더 세밀하게 하게 되는군요.고맙습니다.
 

최근 <시민과 세계>를 통해 재점화된 '민주적 애국주의'논쟁을 살펴봤다. '민주적 애국주의'를 주창했던 장은주 선생이 가장 격분하고 있는 상대는 서동진 선생인데, 서동진 선생이 '공화국으로만은 안된다'라는 입장을 내비쳤기 때문이다. 장은주 선생의 견해를 볼 때, 요약해볼 수 있는 몇 개의 단어들이 떠올랐다. 그중에서도 '안착'이라는 것이 떠오른다. '안착'은 특히 현실정치에서 진보진영을 담당하고 있는 측에게 지식인들이 계속해서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장은주 선생이 설명하는 '애국적 민주주의'와 서영표 선생이 주장하는 '진보진영의 풀뿌리 지역화에 대한 접근'이 진보진영 틀 안에서 유사한 목적을 갖고 있다 생각한다. 쉽게 말해서, 추상적인 모토로만 일관하지 말고, 구체적 현실에 입각해서, 그 현실에 맞는 요인들을 진보 진영의 '가시적 성과'로 생산해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랬을 때, 지역적 기반이 없는 진보진영의 지역 현실에 대한 접근(서영표)이나, 장은주 선생이 논하는 '애국'이란 개념의 전환을 통한, 국가와 시민의 새로운 관계 설정을 진보진영이 고민하는 것은 그 의의 자체까진 무시할 수 없다고 본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나도 장은주 선생의 그 유의미한 고민과 더불어 그 고민이 놓치고 있는 부분에 대해 '우려'를 표하는 바이다.  장은주 선생이 자신의 의견에 반박하는 사람들에게 내놓은 재반박문을 읽어보면, 반박자들이 걱정하는 '애국'이란 개념의 오용에 대한 우려를 장은주 선생도 개념을 만들면서 이미 인식하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예로 들어, '애국의 오용'을 통해 우파들이 자랑처럼 끌고 다니는 반공정신이나 경제발전주의 같은 것에서 오는 은폐된 현실을 놓치고 마는 전략은 아니냐라는 우려에 대해 장은주 선생은 이미 그런 우려를 알고서 출발하는 개념이 '민주적 애국주의'라고 주장한다. 

그랬을 때, 우리는 장은주 선생이 말하려는 '애국'의 개념이 단순히 국가에 대한 과시욕이나 강요된 충정이 아니라는 것 까진 이해할 수 있다. 장은주 선생은 애국의 개념을 보다 유연하게 발전시켜보자고 권유하는데, 즉 이것은 국가와 시민간의 관계에서 시민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하는 국가의 존재를 사유하자는 것이다. 그 안에서 공화주의는 시민의 활발한 의사소통과 인권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논의의 토대를 만드는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고, 시민 스스로가 국가의 정체성을 구성할 수 있는 면모를 발휘하게 하는 것, 그것을 추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의 포괄이 '민주적 애국주의'의 기본 토대임을 그는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애국'을 통해 그가 강조하려는 건, 국가에 휘둘리지 않고, 국가의 정체성을 시민 스스로가 주체적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던 역사의 흔적들을 제대로 각인하며, 그 각인의 과정을 통해 무시할 수 없는 시민의 정체성들을 계속해서 누적해나가자고 하는 듯하다. 

여기서 '애'의 핵심은 그의 논의를 비판하려는 사람들이 들이대는 '민족주의', '종족주의'와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이다. 여기서 '애'의 역할 혹은 기능은 시민의 자발성과 능동성으로 구성된 시민으로서의 능력이 국가보다 우위에 서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장은주 선생이 반박론자들에게 기분 나빠했던 것은, 첫째, 자신이 이런 개념을 만들었을 때 반박론자들이 우려하고 있던 부분들을 이미 알고, 그 개념 자체를 만들었다는 것, 즉, 자신이 개념을 만들 때 그 정도도 고려하지 않고 만들어겠냐는 것에 대한 서운함인 듯하다. 둘째, '민주적 애국주의'를 추상화된 개념으로 치부하는 것이다. 그는 서동진 선생의 견해를 반박하며, 자신의 의견이 마냥 추상적인 어떤 것으로 몰아가는 것에 대해 격노했다.  

근데, 내가 보기엔 서동진 선생의 견해는 장은주 선생이 내놓은 전략의 추상화에 대한 우려보다는, 장은주 선생이 내놓은 무슨무슨주의가 과연 당대의 포인트를 제대로 조준하고 있는가,의 문제를 비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서동진 선생이 늘 강조해왔던 한국 사회의 구체적 현실과 변화 과정에 대한 꾸준한 지식인의 개입과 관심이란 그 태도를 인식한다면, 장은주 선생의 견해가 갖고 있는 사회적 현실 감각에 대한 우려를 나타낸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사실 나도 '민주적 애국주의'가 갖는 우려는 여기서 출발하는 듯하다. 이건 비단 장은주 선생의 견해가 무슨무슨주의로 시작하는 거시적 개념이라는데서 오는 반발심이 아니라, 지금 진보진영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그것(애국)'이냐라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더 나아가 장은주 선생이 주창하는 '민주적 애국주의'라는 것이 과연 '~주의'로까지 격상될 수 있을만한 것인가 자체도 의문이다. 차라리 우리 안에서 국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 않고, 시민들이 국가의 존재를 구성해나갈 수 있는 토대를 만들기, 이 정도로 요약가능한 지극히 원론적이고 상식적인 시선이 진보진영에게 당장 필요한 '실용 전략'인지 의문스러운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애국개념의 전환'에 있어, 그가 강조하는 그 애국의 차원에서 시민들의 자율성과 능동성을 강조한 나머지, 시민의 이중성을 간과하고 있는 것은 더욱 더 우려스럽다. 그가 민주적 애국주의를 통해 논하려는 시민의 자율성과 능동성의 강화, 이를 통해 학습할 수 있는 세계-시민으로서의 능력 확장 등등. 이런 긍정적인 부분들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는 '시민의 능력'은 사회 현실 속에서 시민이 갖는 그 변화무쌍한 의견 배치와 대립 그리고 대중의 오용을 간과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그는 애국의 개념이 오용될 것을 우려하는 데서 나타나는 그 적대의 대상을 비단 뉴라이트 같은 곳에서만 찾을 것이 아니라, 장은주 선생 스스로가 민주적 애국주의의 건전한 주체로 상정되고 있는 시민에 대한 비판과도 연계해봐야 할 것이다. 그는 시민을 너무나 건전한 도덕적 주체로만 상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시민의 권리를 능동적이고 자율적인 차원에서 논하고, 국가보다 우위에 둔다고 해서, 시민이 갖는 정치력의 향상이 바로 선행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는 외려 정치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인권과 시민으로서의 의사소통이란 정치적 표피를 쓴 윤리에 종속된 공동체를 논하는 것이 아닐까. 나의 우려는 이것이다. 그리고 이런 우려는 최근 윤리에 종속되어버린 정치에 대한 우려와도 직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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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는 '착한 사람'과 '좋은 사람'에 대해 고민중이다. 살면서 늘 착하면 좋은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했는데, 그 생각을 조금 고치는 중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웃으면서 적을 안 만들려는 자세, 그 특유의 겸손함으로 사람들에게 두터운 신의를 갖고 있는 것 같은 사람이 주는 '은근한 개인주의'라고 할까. 그런 사람에게서 배출되는 '겸손함'이 내겐 세상을 향한 또 다른 냉소로 느껴지곤 한다. 

그런 사람들일수록 속에 많이 쌓아두고, 타인을 평가하면서 한꺼번에 '폭발 모드'를 보이는데, 그 모드가 끝나면 그들은 신기하게  고양이 눈웃음을 치며 누군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길 원하는 '범생이'로 돌아간다.  

고등학교 때 영화를  만든다면, 이런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삼고 싶었던 예전 기억이 떠오른다. 난 이 때부터 이런 류의 사람이 가장 위험하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나보다.  

근데 식스센스급 반전은 가끔 내가 그런 캐릭터로 살아왔다는 느낌이다.  

나야말로 '나쁜'남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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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7-22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력있는 남자겠죠!

얼그레이효과 2010-07-22 23:49   좋아요 0 | URL
그렇게 살아야 할 터인데요.ㅎ

비로그인 2010-07-23 0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폭발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지 않습니까. 허허 :)

얼그레이효과 2010-07-23 23:19   좋아요 0 | URL
그렇겠죠^^; 그래서 사실 저도 가끔은 폭발하는데. 그냥 혼자 집에서 폭발하곤 맙니다.ㅋ

Lusy 2010-08-19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지금은 착한남자
 
윤리학 - 악에 대한 의식에 관한 에세이 ㅣ 동문선 현대신서 40
알랭 바디우 지음, 이종영 옮김 / 동문선 / 2001년 11월
절판


사전들과 아카데믹한 글들 속에 오랫동안 갇혀 있던 특정한 학문적 용어들이,마치 영문도 모른 채 갑작스레 살롱의 총애를 받게 되는 노처녀처럼 갑자기 시대의 너른 들판으로 뛰쳐 나와 공론에 부쳐지고,광고와 텔레비전,신문 등에 실리고,심지어 정부의 담화에까지 언급되기에 이르는 행운 또는 불행을 갖는다.희랍어 냄새를 강하게 풍기는 윤리라는 용어,또는 아리스토텔레스(유명한 베스트셀러인 <니코마코스 윤리학>!)를 언급하는 철학에서의 윤리학 강의는 오늘날 무대의 조명을 한몸에 받고 있다.-7쪽

윤리는 개인적이건 집합적이건 간에 한 주체의 실천들에 대한 판단 원리이다.-8쪽

오늘날 '윤리로의 회귀'-물론 윤리라는 단어의 의미가 거기에서 엄격하게 사용되지는 않지만 - 는 헤겔(결정의 윤리)보다는 칸트(판단의 윤리)쪽에 더 가깝다. 사실상 오늘의 윤리는 '벌어지고 있는 것'에 관계하는 원리,즉 역사적 상황들(인권의 윤리),기술-과학적 상황들(생명체의 윤리,생명 윤리),'사회적'상황들(함께 모여 있음의 윤리),매체적 상황들(의사 소통의 윤리)등에 관계하는 우리의 논평들에 대한 어렴풋한 조절이다. 논평등과 의견들의 이러한 규범은 제도들에 기대어 있고,자기 고유한 권위를 갖는다. 즉 국가에 의해 임명되는 '국립윤리위원회들'이 존재한다. 심지어 '인권의 윤리'라는 이름하에 해외 파병을 행하기도 한다. -8쪽

사실상 '인간의 죽음'이라는 테마 체계가 반란,기존 질서에 대한 근본적 불만족,상황들의 현실 속으로의 완전한 개입과 부합하는 반면,윤리와 인권이라는 테마는 서양 부자들의 만족에 찬 이기주의,위력의 행사,광고에 부합한다는 것이 입증되었다.사실이 바로 그러하다.이러한 사실들에 대한 해명은 '윤리적'정향의 토대들에 대한 검토를 거칠 것을 요구한다.-14쪽

이때 윤리란 악을 구분할 수 있는 선험적 능력(왜냐하면 윤리의 현대적 용법에 있어서는 악-또는 부정적인 것-이 우선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야만적인 것에 대한 합의를 전제한다)이자 동시에 판단의 궁극적 원리, 특히 정치적 판단의 궁극적 원리로 간주한다.이때 판단의 궁극적 원리란, 선험적으로 식별 가능한 악에 대항하여 명시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선이라는 원리이다.-15쪽

정치는 윤리에 종속된다. 사물을 이처럼 바라보는 시각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유일한 것은,정황들에 대한 구경꾼의 동정적이며 분노에 찬 판단이기 때문이다.-16쪽

윤리적 '합의'가 악에 대한 식별에 기초한다면,선의 정립적 관념 주위에 사람들을 모으려는 모든 시도는,게다가 더욱이 인간을 그러한 프로젝트를 통해 규정하려는 모든 시도는 사실상 악 그 자체의 진정한 원천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21쪽

악에 대한 부정적이고 선험적인 규정으로 인해 윤리는 상황들의 개별성을 사고할 수 없다.-22쪽

사실상 윤리적 이데올로기하의 관료적 의학은 무차별적 또는 통계적 피해자로서 '환자들'을 필요로 하지만, 실질적이고 개별적인 요구 상황에 의해 곧장 포화된다.그 결과 '행정적이고''책임 있으며''윤리적인'의학은,'프랑스 의료 체계'가 어떠한 환자들을 치료해야 하고,또 재정과 여론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어떠한 환자들을 킨샤사의 빈민굴 속에서 죽어가도록 돌려보내야 하는지를 결정해야 하는 타락 상태로 환원된다.-24쪽

문제는 '차이의 존중'과 인권의 윤리가 하나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그리하여 차이들에 대한 존중은, 그 차이들이 그러한 정체성(결국은 부유한,그러나 명확히 기울어져 가는 '서양'의 정체성에 불과한)에 제법 동질적인 경우에 한해서만 적용된다는 것이다. -34쪽

우리는 '윤리'이데올로기와 그 사회화된 변이들에 대한 근본적 비판으로부터 출발했다. '윤리'의 이데올로기의 사회화된 변이들이란 인권의 교리, 인간에 대한 피해자적 관점, 인도주의적 개입,생명 윤리,일정한 형태가 없는 '민주주의주의',차이의 윤리, 문화적 상대주의, 도덕적인 이국 취향 등이다. 우리는 우리 시대의 이러한 지적 경향들이 기껏해야 고대적인 도덕적,종교적 강론들일 뿐이고, 최악의 경우 보수주의와 죽음의 충동의 위협적인 혼합이라는 것을 드러냈다.-107쪽

진리들의 윤리학은 세계를 권리의 추상적 지배하에 예속시키려고 하지도 않으며, 외적이고 근본적인 악에 대해 투쟁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반대로 진리들의 윤리학은 진리들에 대한 자신의 고유한 충실성을 통해 악-진리들의 이면 또는 어두운 면으로 파악된 악-을 피하고자 하는 것이다.-1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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