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몽드 디플로마티크를 읽다가 요즘 공부하는 부분의 이론적 시선이 들어있는 것 같아서 옮겨 왔다.  

원문 :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890 

서동진 선생의 글이다.

 

동성애의 게이화

언제던가 괜찮은 남자는 다 애인이 있고 멋있는 남자는 죄다 게이라던가 하는 광고가 TV에 등장한 적이 있었다. 꽤 잘나가는 시사주간지에서 내게도 동성애자 남자친구가 있었다면 하는 이성애자 여성의 수다를 큼지막하게 싣기도 했다. 최근엔 연속극의 여제, 김수현의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를 두고 시끄럽다. 일전 통화했던 어느 언론사 문화부 기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동성애자가 안방극장을 점령”했기 때문이다. 보수적인 기독교 집단은 늘 그랬듯이 동성애를 조장하는 방송 프로그램을 내보냈다고 시청거부운동을 펼치는 등 야단법석이다. 그래서 지난 10년 동안 연례행사처럼 되풀이되는 ‘동성애자는 누구인가’를 묻고 알리는 대중매체의 기사나 프로그램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여기에 잠깐 토를 달자면 거기에서 들먹이는 동성애자란 당신들의 동성애자라는 것이다. 실은 대중문화 안에서 소비되는 동성애 정체성은 이성애자 사회가 지어낸 환상과 다름없다. 그렇다고 그것이 동성애자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허위라고 말할 일은 아니다. 그 환상은 동성애자 편에서도 참조하고 또 써먹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거두절미하고 말하자면 동성애, 그리고 동성애자란 것이 무엇인지는 동성애자 스스로가 대답의 열쇠를 가진 게 아니라는 것이다. 대중매체에서 흔히 ‘그들 자신의 목소리로’ 라는 이름으로 경청하는 동성애자의 목소리라고 해서 동성애와 동성애자의 진실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동성에 이끌린다거나 정서적 친밀감을 느낀다는 사실이 곧 동성애자라는 정체성에 속하거나 혹은 동성애자에 관한 진실을 가지고 있음을 보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동성애자 역시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스스로 배우고 익힌다. 그래서 동성애자가 가장 많이 묻는 질문이 ‘동성애자란 무엇인가’라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글로벌 게이?

 동성 간의 성애적 관계나 친밀한 감정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지는 전연 분명하지 않다. 별나게 동성사회적인(Homosocial) 한국에서 동성애란 정체성이 다른 사회와 동일하게 인식될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만무하다. 이를테면 게이란 정체성을 통해 자신을 동일시하며 동성애자 사회를 구축한 한국·대만·홍콩 같은 아시아 국가의 동성애자와 오랜 동성애적 하위 문화를 가지고 있던 일본, 그리고 ‘히즈라’(Hijra)나 ‘커토이’(Kathoey) 같은 흔히 ‘제3의 성’이라 부르는 성별 체계를 가진 인도·타이 같은 사회에서, 동성애란 말이 가리키는 것이 다를뿐더러 성별·성정체성·성행동 사이에 맺는 관계도 복잡하게 뒤얽혀 있다. 
 

놀랍게도 최근까지 성행동의 공간 안에서 서로 다른 성행동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특정한 사회적 성원으로 나누는 기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적어도 일부 서구 사회를 제외하면 일반적인 현상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이른바 ‘국제 성정치적 관계’라 부를 만한 것이 급격하게 변화하며 생겨난 현상이다. 이를테면 서구 사회에서 에이즈 위기와 관련해 폭발적으로 등장한 성정체성에 따른 역학적인 인구 분류는 동성애적 성행동을 단순히 성행동의 종류가 아니라 특정한 라이프 스타일(잦은 섹스 파트너 교체, 사우나를 비롯한 다양한 퍼블릭 섹스 공간의 발달 등)에 따라 살아가는 사회집단이 나타내는 행위 성향으로 보게 했다. 이는 에이즈와 관련한 의학적 캠페인은 물론 그와 관련한 다양한 정치적·문화적 매체를 통해 전세계에 확산됐다.

다음으로 동구권 붕괴 이후 종래의 사회적·정치적 운동을 대신하게 된 인권운동 역시 동성애 정체성이란 관점을 확장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른바 국제인권운동은 성적 영역 안에서 벌어지는 차별과 박해를 적극적으로 인권 이슈로 제기했다. 당연히 그 효과는 동성애 정체성의 세계화라고 부를 수 있는 현상이었다. 이는 동성 간 성행동이 취할 수 있는 다양한 형태의 정체성을 인종이나 종족과 거의 다르지 않은 특정한 성적 공동체로 정의하는 특정 서구 사회의 정체성 담론을 유포시켰다. 성정체성에 따른 인권침해란 이름으로 우리는 모든 사회를 동일하게 인식하고 평가하게 된다. 따라서 이란, 아프가니스탄에서부터 미국과 스웨덴 같은 사회에 이르기까지 어느 사회에서나 동성애 정체성, 동성애자 사회가 있었던 듯한 생각에 이르게 된다. 이는 많은 나라에서 반발을 초래했다. 더불어 지금까지 무시되거나 그를 변별할 특별한 지식을 갖지 않던 사회에서 갑자기 동성애 정체성이란 이름을 빌려 해당 사회의 동성 간 성행동을 처벌하는 일이 빈번하게 나타났다.

세 번째로 단연 우리는 다양한 문화적 매체를 통해 순환하는 성정체성에 관한 지식, 의례, 상징, 이미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여기에는 ‘퀴어 시네마’란 이름으로 소개되는 예술영화나 ‘스톤월 항쟁’이니 ‘게이·레즈비언 행진’이니 하는 미국 주류 게이운동의 유사 정치적 담론에서부터 <섹스 앤드 더 시티>나 <퀴어 애즈 포크> <퀴어 아이> 같은 TV 시리즈는 물론 마돈나 같은 게이 청중이 특별하게 숭배하는 스타를 둘러싼 팬덤이나 문화적 이벤트(클럽 파티 등), 그리고 전 지구적인 게이 관광객을 대상으로 발달된 관광지 등 다양한 것이 포함된다. 따라서 지구화 과정에서 운반되는 것은 자본과 상품, 사람이지만 성정체성과 관련한 것들이기도 하다. ‘게이 정체성의 세계화’라고 부를 수 있는 이같은 현상은 많은 사회에서 형성된 성과 관련한 사회적 분류와 위계, 이질적 정체성 담론을 동성애·동성애자 정체성 속으로 끌어모은다.

동성애자, 좋은 게이 시민

이는 한국 사회에서 동성애자 사회의 형성을 살펴볼 때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다. 1990년대 중반을 전후해 본격적으로 활동을 개시한 한국 사회의 동성애자 운동은 무엇보다 동성애자를 특정한 생활양식이나 문화적 관습을 공유하는 공동체로 정의하고, 이에 근거한 특수한 사회집단으로 규정하는 구실을 했다. 동성에 대한 친밀감이나 동성과의 성행동은 자신이 동성애자이기에 그런 것이라는 생각은 얼핏 성과 무관해 보이는 폭넓은 삶의 영역을 성정체성이란 것을 통해 이야기하고 표현하게 한다. 이를테면 자신의 성장과 가족관계 등을 묘사하는 방식은 이제 동성애자라는 정체성을 통해 재구성된다. 자신의 특별한 버릇이나 습관, 외상적 사건은 모두 동성애자로서의 성장 이야기 속에 스며드는 것이다. 따라서 동성애자는 주어가 되어 수많은 사건과 행위를 술어로 거느리게 된다. 이처럼 인생 서사가 성정체성 서사로 각색될 때, 동성애자는 그런 사회적 체험과 관습, 생활양식 등을 공유하는 사회로서 자신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동성과의 성행동이나 친밀한 관계는 동성애자이기에 있었던 혹은 일어날 일일 뿐 동성애 정체성을 구성하는 결정적 준거가 되지 않는다. 동성애자 수영 동호회에 나가 동성애자끼리의 사회 활동을 즐기며 더욱 안정적이고 일관된 동성애자로서의 자아를 체험하는 것이 우연적인 성행동을 통해 동성과 섹스를 하는 것보다 더 동성애적인 것이 되었다 말할 수 있다. 청소년 동성애자를 지원·보호하는 것이 동성애자운동이 가장 관심을 기울여야 할 문제로 집착하는 것 역시 이해할 만한 일이다.


그렇지만 이런 변화가 당연한 것도 또 유일한 방향인 것도 아니다. 동성애자를 둘러싼 사회적 관용이 늘어나고, 동성애 이야기가 공론화되고, 동성애자 권리에 대한 관심이 적극적으로 제기돼왔다고 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이야기 속에는 이미 특정한 성정치적 관점이 스며들어 있다. 물론 그것의 두 가지 큰 뼈대는 ‘인권 정치’와 ‘정체성 정치’라는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비롯된 성정치다. 서구에서 1980년대 초반을 전후해 사회주의적·급진적 사회운동이 쇠퇴하면서 성정치 역시 보수화돼왔다. 이성애적 규범이 지배하는 성의 체계를 거부하고 이를 변형하려던 급진적 성정치를 대신해 ‘좋은 동성애자 시민’이 됨으로써 이성애자와 다양한 성적 소수자가 공존하며 살아가는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을 목표로 삼은 새로운 동성애자 사회운동의 물결이 등장했다. 이는 앞서 말한 조건 속에서 많은 비서구 사회로 확산됐고, 한국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그리고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성애적 규범을 은밀하게 지지하는 역할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가운데 하나가 동성애를 탈성애화함으로써 건전한 시민 주체로 길들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9금’으로 대표되는 청소년에 대한 성적 규제 강화, 성매매의 불법화, 성폭력이나 아동 성폭력에 대한 집단적 패닉 등은 중산층 이성애자 가족이 우리 시대의 성정치 모델이 되었음을 역력히 보여준다. 따라서 기존 동성애자의 주된 세계였던 동성애적 하위 문화는 ‘음지’ 혹은 ‘불행한 과거’로 망각되거나 거부되고, 세련된 클럽이나 바 같은 상업적인 유흥 공간, 아니면 스포츠나 다른 취미를 통해 매개된 사교적 모임이 건전한 동성애자를 위한 공간이 돼버린다. 감정적 헌신에 터 잡은 장기적인 친밀한 관계가 정상적·규범적 관계가 되고, 물론 이는 TV 드라마에서 보이는 것처럼 함께 마트에서 장을 보고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여행을 다니는 유족한 삶을 사는 고학력 중산층 동성애자 남성을 특권화한다.

이는 정서적 교류와 헌신에 기반한 관계로 부부관계를 그려내는 보수적 중산층 이성애자 부부의 이데올로기를 반복한다. 이때 이성애적 규범에 동화될 수 없는 동성애자는 더욱 주변화되고 자신의 삶에 관해 발언할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다. 그래서 정작 우리 사회에서 성적 위계로 볼 때 가장 열등한 성적 소수자는 ‘중년 노동자계급 이성애자 남성’처럼 보이는 것도 착각은 아니다. 사회적 재생산을 가족화하는 신자유주의적 가족 경제 내에서 노동자계급 이성애자 남성 가장은 생계부양자라기보다는 가정의 재무적 활동의 책임자라는 역할을 요구받는다. 이들은 정작 현실에서는 가장 취약한 생존 조건에 놓였다. 게다가 정서적 교감과 만족이 가장 큰 역할을 해야 하는 새로운 친밀성의 세계로 가족 생활에 참여하도록 강요받는다. 그러나 그들이 할 줄 아는 것은 권위적인 남편과 가장의 역할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대딸방’으로, ‘키스방’으로 전전한다. 그들은 좋게 보아 ‘재수 없는 꼰대’고 더 나쁘게는 ‘잠재적인 치한’이다. 그들이 한국 사회에서 가장 비천한 성적 소수자가 아니라면 누가 그것이겠는가. 다양한 취향과 문화를 존중하는 것을 ‘예의’와 ‘미덕’으로 간주하는 다문화주의적 사회에서 게이는 이미 좋은 친구이자 시민으로 융숭한 대접을 받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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