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시민과 세계>를 통해 재점화된 '민주적 애국주의'논쟁을 살펴봤다. '민주적 애국주의'를 주창했던 장은주 선생이 가장 격분하고 있는 상대는 서동진 선생인데, 서동진 선생이 '공화국으로만은 안된다'라는 입장을 내비쳤기 때문이다. 장은주 선생의 견해를 볼 때, 요약해볼 수 있는 몇 개의 단어들이 떠올랐다. 그중에서도 '안착'이라는 것이 떠오른다. '안착'은 특히 현실정치에서 진보진영을 담당하고 있는 측에게 지식인들이 계속해서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장은주 선생이 설명하는 '애국적 민주주의'와 서영표 선생이 주장하는 '진보진영의 풀뿌리 지역화에 대한 접근'이 진보진영 틀 안에서 유사한 목적을 갖고 있다 생각한다. 쉽게 말해서, 추상적인 모토로만 일관하지 말고, 구체적 현실에 입각해서, 그 현실에 맞는 요인들을 진보 진영의 '가시적 성과'로 생산해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랬을 때, 지역적 기반이 없는 진보진영의 지역 현실에 대한 접근(서영표)이나, 장은주 선생이 논하는 '애국'이란 개념의 전환을 통한, 국가와 시민의 새로운 관계 설정을 진보진영이 고민하는 것은 그 의의 자체까진 무시할 수 없다고 본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나도 장은주 선생의 그 유의미한 고민과 더불어 그 고민이 놓치고 있는 부분에 대해 '우려'를 표하는 바이다.  장은주 선생이 자신의 의견에 반박하는 사람들에게 내놓은 재반박문을 읽어보면, 반박자들이 걱정하는 '애국'이란 개념의 오용에 대한 우려를 장은주 선생도 개념을 만들면서 이미 인식하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예로 들어, '애국의 오용'을 통해 우파들이 자랑처럼 끌고 다니는 반공정신이나 경제발전주의 같은 것에서 오는 은폐된 현실을 놓치고 마는 전략은 아니냐라는 우려에 대해 장은주 선생은 이미 그런 우려를 알고서 출발하는 개념이 '민주적 애국주의'라고 주장한다. 

그랬을 때, 우리는 장은주 선생이 말하려는 '애국'의 개념이 단순히 국가에 대한 과시욕이나 강요된 충정이 아니라는 것 까진 이해할 수 있다. 장은주 선생은 애국의 개념을 보다 유연하게 발전시켜보자고 권유하는데, 즉 이것은 국가와 시민간의 관계에서 시민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하는 국가의 존재를 사유하자는 것이다. 그 안에서 공화주의는 시민의 활발한 의사소통과 인권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논의의 토대를 만드는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고, 시민 스스로가 국가의 정체성을 구성할 수 있는 면모를 발휘하게 하는 것, 그것을 추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의 포괄이 '민주적 애국주의'의 기본 토대임을 그는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애국'을 통해 그가 강조하려는 건, 국가에 휘둘리지 않고, 국가의 정체성을 시민 스스로가 주체적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던 역사의 흔적들을 제대로 각인하며, 그 각인의 과정을 통해 무시할 수 없는 시민의 정체성들을 계속해서 누적해나가자고 하는 듯하다. 

여기서 '애'의 핵심은 그의 논의를 비판하려는 사람들이 들이대는 '민족주의', '종족주의'와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이다. 여기서 '애'의 역할 혹은 기능은 시민의 자발성과 능동성으로 구성된 시민으로서의 능력이 국가보다 우위에 서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장은주 선생이 반박론자들에게 기분 나빠했던 것은, 첫째, 자신이 이런 개념을 만들었을 때 반박론자들이 우려하고 있던 부분들을 이미 알고, 그 개념 자체를 만들었다는 것, 즉, 자신이 개념을 만들 때 그 정도도 고려하지 않고 만들어겠냐는 것에 대한 서운함인 듯하다. 둘째, '민주적 애국주의'를 추상화된 개념으로 치부하는 것이다. 그는 서동진 선생의 견해를 반박하며, 자신의 의견이 마냥 추상적인 어떤 것으로 몰아가는 것에 대해 격노했다.  

근데, 내가 보기엔 서동진 선생의 견해는 장은주 선생이 내놓은 전략의 추상화에 대한 우려보다는, 장은주 선생이 내놓은 무슨무슨주의가 과연 당대의 포인트를 제대로 조준하고 있는가,의 문제를 비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서동진 선생이 늘 강조해왔던 한국 사회의 구체적 현실과 변화 과정에 대한 꾸준한 지식인의 개입과 관심이란 그 태도를 인식한다면, 장은주 선생의 견해가 갖고 있는 사회적 현실 감각에 대한 우려를 나타낸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사실 나도 '민주적 애국주의'가 갖는 우려는 여기서 출발하는 듯하다. 이건 비단 장은주 선생의 견해가 무슨무슨주의로 시작하는 거시적 개념이라는데서 오는 반발심이 아니라, 지금 진보진영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그것(애국)'이냐라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더 나아가 장은주 선생이 주창하는 '민주적 애국주의'라는 것이 과연 '~주의'로까지 격상될 수 있을만한 것인가 자체도 의문이다. 차라리 우리 안에서 국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 않고, 시민들이 국가의 존재를 구성해나갈 수 있는 토대를 만들기, 이 정도로 요약가능한 지극히 원론적이고 상식적인 시선이 진보진영에게 당장 필요한 '실용 전략'인지 의문스러운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애국개념의 전환'에 있어, 그가 강조하는 그 애국의 차원에서 시민들의 자율성과 능동성을 강조한 나머지, 시민의 이중성을 간과하고 있는 것은 더욱 더 우려스럽다. 그가 민주적 애국주의를 통해 논하려는 시민의 자율성과 능동성의 강화, 이를 통해 학습할 수 있는 세계-시민으로서의 능력 확장 등등. 이런 긍정적인 부분들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는 '시민의 능력'은 사회 현실 속에서 시민이 갖는 그 변화무쌍한 의견 배치와 대립 그리고 대중의 오용을 간과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그는 애국의 개념이 오용될 것을 우려하는 데서 나타나는 그 적대의 대상을 비단 뉴라이트 같은 곳에서만 찾을 것이 아니라, 장은주 선생 스스로가 민주적 애국주의의 건전한 주체로 상정되고 있는 시민에 대한 비판과도 연계해봐야 할 것이다. 그는 시민을 너무나 건전한 도덕적 주체로만 상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시민의 권리를 능동적이고 자율적인 차원에서 논하고, 국가보다 우위에 둔다고 해서, 시민이 갖는 정치력의 향상이 바로 선행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는 외려 정치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인권과 시민으로서의 의사소통이란 정치적 표피를 쓴 윤리에 종속된 공동체를 논하는 것이 아닐까. 나의 우려는 이것이다. 그리고 이런 우려는 최근 윤리에 종속되어버린 정치에 대한 우려와도 직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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