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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을 만든 사람들 - 과학사에 빛나는 과학 발견과 그 주인공들의 이야기
존 그리빈 지음, 권루시안 옮김 / 진선북스(진선출판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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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을 만든 사람들

: 과학사에 빛나는 과학 발견과 그 주인공들의 이야기

존 그리빈(John Gribbin) 지음 | 권루시안 옮김 | [진선출판사]

 


결국 사람이 과학을 만든다


 

천문학을 전공한 과학자이면서 많은 과학 교양서를 펴낸 저술가 존 그리빈은 과학을 만든 사람들에서 방대한 서양 과학사를 촘촘한 직물처럼 엮어 냈다. 이 책에서 다루는 시기는 흔히 암흑시대로 불리며 신과 믿음을 중심으로 한 중세가 끝나고 등장한 르네상스 시대에서 20세기 말까지다. ‘과학의 범주로 보면, 신비주의가 점차 사라지며 실증적인 학문 체계를 갖추기 시작한 르네상스 시대의 자연과학에서부터 상대성이론과 양자물리학을 거쳐 20세기 말의 우주에 관한 이론에 이른다. 현대의 분류 기준으로 물리·화학·생물·지구과학/천문학 등에 해당하는 제반 과학 분야의 발전사의 큰 흐름을 한 권에 포괄적으로 담은 셈이다.


 

저자가 르네상스 시대 이전의 과학 분야를 포함하지 않은 이유는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의 자연철학 전통과 세계에 대한 신비주의적 해석이 중세에 이르도록 큰 변화 없이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의 관점에서, ‘과학적방법론이 확립된 시기는 인류가 신비주의적 해석 관행을 떨쳐버리기 시작하던 시기와 맞물린다. 그가 최초의 과학자라고 부를 수 있다고 본 인물은 윌리엄 길버트와 갈릴레오 갈릴레이다. 이 두 사람 모두 직접 관찰한 자료와 논리적 추론을 바탕으로 자연 현상을 설명하고 예측하고자 했으며, 다른 동료들로부터 검증을 받아 재확인하는 방법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과학사를 기술하면서 무엇보다 인물에 주목한 점이 큰 특징이다. 저자 역시 이런 방식의 글쓰기가 전통적인 과학사 기술 방식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이에 대한 비판을 염두에 둔 듯하다. 하지만 그의 입장은 과학 활동과학 자체를 구분하면서 인물에 주목하는 접근법이 유효함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우선 과학 활동은 과학자 각자가 이루어가는 지극히 개인적인 활동이라는 입장을 강조한다. 과학 활동의 방향은 과학자 개인의 관심사와 문제의식에 따라 크게 달라질 것이다. ‘사람이 과학을 만든다는 확고한 명제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문··철의 인문학 분야가 개인의 세계관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것처럼, 과학 역시 과학자의 철학과 개성을 반영한다. 이 책에 담긴 방대하고 다양한 서양 과학사의 장면마다 과학적 발견의 정황을 살펴보고, 당시에 활약한 이들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저자는 과학적 성취를 생생하고 입체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흥미로웠던 한 가지 사례는 현미경 제작과 이를 이용한 세포 관찰, 용수철의 탄성에 관한 훅의 법칙으로 유명한 로버트 훅과 아이작 뉴턴의 갈등 구도가 담긴 장면이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두 사람의 갈등은 주로 뉴턴이 초래한 것이다. 훅이 거둔 수많은 성취와 업적을 뉴턴이 은폐한 정황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훅은 두 개의 투명한 쐐기 모양의 용기 사이에 고리 모양의 무늬가 나타난 현상을 자신의 저서 마이크로그라피아 Micrographia에서 보고한 적이 있다. 뉴턴은 이를 대수롭지 않게 치부한 듯 했지만, 훗날 이 현상에 자신의 이름을 붙여 뉴턴 링으로 불렀다. 인류 지성사의 큰 업적으로 평가받는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프린키피아)를 써낸 사람이 욕심내기에는 크게 관심을 끌만한 현상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다. 과학은 사람이 만들어 간다는 저자의 관점대로 책에서는 뉴턴의 인간적인 면모와 성향에 주목했다. 물론 이 접근방식은 뉴턴을 비난하기 위함이 아니라 불완전한 인간의 모습을 모두 고려하여 파악하기 위함이다. 역사 속에서 이런 장면은 어디에나 존재했을 테니까.

 


로버트 훅의 현미경학 서적 <마이크로그라피아>(1664)에 실려 있는 그림. 현미경을 통해 머리카락을 붙들고 있는 이의 모습을 그린 것.



훅과 뉴턴이 보여준 갈등 국면과 관련하여 한 가지 더 흥미로운 에피소드는 두 사람 사이에 오간 서신에서 발견된다. 저자에 따르면 훅은 진실에만 관심이 있었기에 언제나 과학에 관해 (뉴턴과) 우호적 방법으로 논할 태세가 되어 있었다. 훅이 먼저 뉴턴에게 화해와 발전적인 논의를 위한 제안을 담은 서신을 보냈다. 뉴턴은 이에 대한 답변으로 훅에게 보낸 편지에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유명한 문장을 썼다.


 

데카르트가 내딛은 발걸음은 훌륭합니다. 당신은 여러 면에서 많은 것을 더했는데, 얇은 판의 색을 철학적으로 고려했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습니다. 제가 더 멀리 보았다면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서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257)

 


이 부분에 대해 저자는 다른 과학자의 해석을 곁들이고 있다. 뉴턴이 데카르트를 언급했던 것은 훅이 먼저 발견했다고 주장한 무늬에 대한 발견이 사실 데카르트가 먼저이기에 훅에게 분수를 알려 주기 위한 언급이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두 번째 문장에서 저자는 뉴턴이 거인들(Giants)’이란 단어를 대문자로 시작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뉴턴이 이 표현을 강조한 이유는 훅의 신체적인 특징(등이 굽고 키가 작은 점)을 조롱하는 숨은 의도도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결국 뉴턴이 자신의 발견이 고대인들의 발견에 기반 할 수는 있지만 훅과 같이 보잘 것 없는 이들의 생각을 훔칠 필요가 없다는 의도가 담겨 있다고 해석하고 있다. 다시 말해 난쟁이인 너는 내가 올라선 거인이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이 문장이 뉴턴 이전에도 사용되었지만, 특히 로버트 훅을 염두에 두고 거인들을 강조한 것에 주목하여 해석한다.


 

나는 여기에 훅이 철학적으로 고려했다는 부분에도 주목해본다. 마치 훅이 거둔 성취를 어느 정도 인정해주는 모양새이지만, ‘철학적으로 고려했다는 표현은 과학자의 입장에서 칭찬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어느 현상에 대해 정량적인 해석과 이해를 제공하는 설명이 아니라 사변적인 고찰에 그쳤다는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해석이 과장되었다고 판단하더라도, 뉴턴이 훅에게 보낸 답장은 두 사람 사이의 갈등 국면을 고려했을 때 행간에서 누구나 긴장감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평가는 다른 연구자들의 판단과 더불어 여러 자료에서 드러나는 뉴턴의 됨됨이를 기반으로 저자가 지적하고 있는 부분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 문장을 뉴턴의 겸손함에 대한 표현으로 이해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사람에 대한 일관된 행동과 정황을 고려하여 내린 결론이 보다 설득력을 갖지 않을까싶다. 존 그리빈에 따르면 뉴턴은 꽤나 악질적이며 언제나 원한을 감추고 있던 사람이었다. 이 주장은 로버트 훅이 사망한 후 뉴턴의 행동을 보면 보다 설득력을 갖는다. 17033월에 연장자였던 훅이 사망한 후, 같은 해 말에 뉴턴은 잉글랜드의 왕립학회 회장으로 선출된다. 저자의 언급에 따르면 뉴턴은 훅에 대해 품은 편집광적인 적의로 뉴턴은 자신의 주요 저서로 평가되는 광학을 훅의 사망 이후에 출간했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 뉴턴은 이 책에서 훅이 언급했던 고리 모양의 무늬뉴턴 링으로 발표했을 것이다(이 부분은 확인이 필요하다). 게다가 뉴턴이 왕립학회의 회장이 된 후 학회가 이전하게 되었는데, 학회에 걸려 있던 선배 과학자들의 초상화들 중 유독 로버트 훅의 초상화만 사라져버린 점에 저자는 주목한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뉴턴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을 테다.


 

개인적으로도 뉴턴은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프린키피아)를 출간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과학 혁명기에서 가장 중요한 과학자로 평가받을 만 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여겨지는 과학 활동에서 우리는 인간적인 요소를 잊기 쉽다. ‘과학 활동은 결국 사람에 의한, 사람의 일이기 때문이다. 뉴턴이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고 해서 우리가 기대대로 그가 선하고 겸손하기만 한 인물이라고 가정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내가 주목한 지점은 상대방이 어떤 인물인지 파악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사소한 정보로 여겨질지 몰라도 인물에 대해 이해하는 일은 그가 왜 그렇게 행동하게 됐는지 이해하는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일종의 역사 탐정의 입장에서 설득력 있는 알리바이를 얻을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은 과학 역시 사람이 만든다는 저자의 관점을 뚜렷하게 반영한 흥미로운 역사서이기도 하다.


 

과학을 만든 사람들에서 저자가 취하는 또 다른 흥미로운 관점은 과학 자체에 대한 입장이다. 그는 과학 자체가 본질적으로 비개인적이다라고 말한다. 과학이 절대적· 객관적 진실을 다룬다라고도 표현한다. 본인도 의식하고 있듯이 이런 견해에 동의하지 않고 비판하는 사람은 많을 수 있겠다. ‘절대적·객관적 진실이란 표현이 모호하게 전달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루살이에게는 이 세계는 하루 이상 존재한 적이 없다. 이것이 절대적 진실일 수 있다. 하지만 수십 년을 사는 인간에게 하루는 하루살이와 다르게 인식될 것이다. 인간이 세계 혹은 우주를 파악하고 얻은 진실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저자는 우주에서 인류가 차지하는 위치를 언급하는데, 생명 구성의 기본 원소인 C·H·O·N를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생물체가 우주 전체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과학이 다루는 지식이 보편적임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의미에서 과학이 비개인적이다라는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관점에 이어서 저자가 과학 혁명을 바라보는 관점 역시 논쟁적일 수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토마스 쿤이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주장한 패러다임 전환을 통한 혁명개념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과학이 점진적이며 단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이라고 본다. 이 두 입장 사이의 대결 구도는 진화론을 둘러싼 논쟁에서 유사하게 찾아볼 수 있다. 생물과 지구의 진화 과정에 대한 상반된 입장을 떠올리게 한다. 책에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스티븐 J. 굴드의 단속평형설과 책에 소개된 제임스 허턴·찰스 라이엘의 동일과정설및 찰스 다윈의 점진적 진화설과의 대비가 연상된다. 굴드의 단속평형설은 생물 종이 변화(또는 변이)가 거의 없는 시기가 이어지다가 어떤 우연한 계기로 갑작스러운 종분화가 이루어지며 진화가 이루어진다는 입장이다. 이에 반하여 허턴과 라이엘은 지질 과정에서 오랜 시간에 걸친 점진적인 지형의 변화를 이야기한다. 다윈은 이 견해에 영향을 받아 자연 선택에 의해 생물체에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진화 개념을 내세웠던 것이다. 저자 존 그리빈은 기본적으로 과학 발전이 이룩한 것 위에 조금씩 쌓아 올리는 작업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관점은 존·메리 그리빈 부부의 최신작 진화의 오리진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이 책에서 두 사람은 찰스 다윈의 진화론이 형성된 배경을 거슬러 추적하는데, 과학의 점진적 발전을 주장하는 관점대로 진화론이 나올 수 있었던 무수한 씨앗들을 찾아 그 가치를 확인하고 이를 연결 짓는 작업을 했다. 진화론은 한·두 명의 천재가 혜성처럼 등장하여 이룩한 업적이 아니라, 물이 끊는 과정이 보여주듯 수많은 과학자들이 각자의 환경 속에서 상호작용한 과정이 있은 후에야 가능했음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비유가 적절하지 않을 수 있지만, 저자가 주목하는 부분은 상호작용하는 과정에 있다. 라마르크의 진화론이 최종적으로 다윈의 진화론과 대결하여 승리하지는 못했지만, 다윈의 이론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며 이론의 정립에 기여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의 또 다른 대목은 진화론이 여전히 진화중인 이론이라는 점을 이야기한 부분이었다.과학을 만든 사람들에서 저자가 강조한 부분은 뉴턴과 같은 천재적인 과학자가 혜성처럼 등장하여 인류의 지성사의 나아갈 바를 결정한 것이 아니라 훅과 같은 이들과의 논쟁과 대립, 뉴턴이 프린키피아를 출판하도록 독려했던 핼리와 같은 이들의 역할 등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면서 과학 발전의 조건이 갖추어 졌다는 점이다.


 

책을 읽으면서 르네상스 시대부터 20세기 말에 이르는 방대하고 촘촘한 서양 과학사의 흐름을 따라갔고, 여기에서 과학의 원동력이 저자의 표현대로 발견에 대한 순수한 기쁨에 있다는 점을 느꼈다. 과학은 인간이 세계(우주)에 대해 갖는 기본적인 지적 호기심을 발동하여 앎을 추구한 행위다. 과학자의 시선은 주도면밀하게 외부를 향하지만, 행위의 결과는 인간, 결국 우리 자신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져다주었다. 특히 지구가 우주라는 무대의 중심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료하게 알려주었다. 마찬가지로 인류 역시 지구의 다른 동물과 다를 바 없는 존재라는 점을 깨닫게 해준 셈이다. 생물학은 모든 생명체가 동일한 유전암호와 작동규칙에 따라 형성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모두 지구의 원시생물체로부터 같은 방식으로 진화해왔음을 알려주었다. 또 인간 개개인은 이 우주에서 고유한 존재이지만, 동시에 인간만이 특별한 존재는 아니라는 인식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영국의 국보급 과학 저술가 존 그리빈이 묘사한 방대한 과학의 역사를 읽는 일은 인간이 이룩한 탁월한 업적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 인간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하는 과정이었다.



 

"나의 목표는 … 우주의 기계장치가 신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라 시계의 기계장치와 비슷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100)
- 케플러의 말

"저는 천체들이 공전하는 중심에 태양이 있으며 그 위치가 바뀌지 않는다고 굳게 믿습니다. 또 지구는 자전하면서 태양 주위를 돈다고 믿습니다. (…) 자연 현상에 관해 따질 때는 성서 구절의 권위에서 출발할 게 아니라 감각적 경험과 합당한 증명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154)
– 1614년 갈릴레이가 크리스티나 대공비에게 보낸 편지.

"우주라는 책은 먼저 그 책이 쓰인 알파벳을 익히고 그 언어를 파악하는 법을 배우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다. (…) 그것이 없으면 깜깜한 미로를 헤매고 다닐 뿐이다." (159)
- 갈릴레이

"내 잘못을 버리고 저주하며 혐오한다." (168)
- 69세의 갈릴레이가 고문의 위협에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며 선언한 표현

"대부분의 경우 과학은 그 시대의 기술을 활용하면서 이전의 발견을 바탕으로 조금씩 발전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는 것이다." (398)
- 과학의 발전에 대한 저자의 점진론적 입장

"블랙, 프리스틀리, 셸레, 캐번디시 같은 과학자들은 화학의 기초가 될 발견을 통해 화학을 과학으로 만들었다." (421)

"이런 사례(쿨롱의 법칙을 입증한 실험) 역시 과학과 기술이ㅡ 상호작용을 다시 한번 잘 나타내주고 있다. 전기에 관한 연구는 전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기계가 생겨나고 전기를 저장할 수 있는 장치가 개발된 뒤에야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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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9-10 00: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빨리 과학은 그 책을 고전이라고 말한다 읽고 초란공님을 생각하며 서평쓰고 싶네요 ㅎㅎ

초란공 2021-09-10 00:26   좋아요 1 | URL
검색해보니 쟁쟁한 분들의 과학서적 서평이네요^^~ 서평 기대됩니다~

초딩 2021-09-10 00: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좋은 밤 되세요
일등! 입니다

초란공 2021-09-10 00:27   좋아요 0 | URL
편안한 밤 되시길요~!

scott 2021-09-10 00: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이책 재출간된 900페이지 짜리
초란공님이셔서 뚝딱 읽고 소화를 ~ㅎㅎ

초란공 2021-09-10 00:55   좋아요 2 | URL
이 놈 때문에 이번주 만성 피로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오늘 scott님이 올려주신 음악 듣고 쉬고 있었지요~ 저는 이번주 다크서클 작렬입니다 ㅜㅜ
 
별들은 여름에 수군대는 걸 좋아해 - 아프리카 코이산족 채록 시집
코이코이족 외 지음, 이석호 옮김, W. H. 블리크 채록 / 갈라파고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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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들은 여름에 수군대는 걸 좋아해

: 아프리카 코이산족 채록 시집

코이코이족, 산족 지음 | W.H. 블리크 채록 | 이석호 옮김 | [갈라파고스]

 



부시맨의 구술시 한 편을 이해하는 일

 


인류는 아프리카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프리카의 역사는 우리가 좀 더 익숙하게 들어본 바 있는 흑인 노예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벨기에 등등 유럽의 백인들이 아프리카에 발을 디딘 16세기 이후 이들 국가들에 의해 수탈을 당한 역사로 점철되어 있다.


 

제레미 다이아몬드의 주저 총균쇠에서 이 부시맨에 대한 설명을 읽다가 우연한 기회에 접하게 된 부시맨의 구술시집 별들은 여름에 수군대는 걸 좋아해를 알게 되었다. 이 시집은 1850년대 남아프리카에서 활동한 독일의 언어학자 W.H. 블리크(Bleek)가 이 부시맨들의 민담과 구술시를 채집하고 채록한 기록(부시먼 민담집 Specimens of Bushman Folklore (1911))에서 옮겨와 만든 시집이다. 시집은 얇고 가볍지만 이들의 입에서 흘러나온 단어와 문장들은 결코 가볍게 흘려버리기 힘든 고난의 역사가 담겨 있었다. 이 시들을 읽고 지나가기 전에 살펴볼만한 배경지식을 먼저 살펴보고 싶었다.


 

제목에 언급한 부시맨’(Bushman)은 유럽인들이 만든 인종차별적이고 경멸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부족명으로, 이들은 남아프리카 공화국 바로 북쪽 지역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수렵채집인 및 유목민을 일컫는 용어다. 가장 오래된 현생 인류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이들은 때로 호텐토트(Hottentot)라는 표현과도 섞어 쓰곤 하는데, 정식 명칭은 코이산(Khoisan)족이라고 알려져 있다. 좀 더 정확하게 이 이름은 이들이 자신의 부족을 부르는 이름인 코이(Khoi)족과 산(San)족의 이름을 합해서 부르는 말이다.


 

우선 제레미 다이아몬드가 총균쇠에서 코이산족에 대해 설명한 내용을 갈무리해본다. 이들의 기원이 명확하게 알려진 것은 없지만, 이들은 수만 년 전에 아프리카 대륙의 남쪽에 살던 수렵채집 부족이었던 것 같다. -서 방향으로 아프리카 대륙의 가운데 지역(열대우림) 이남에 주로 살았으며, 이들의 특징은 크게 언어적 특징(흡착음)과 신체적 특징(피부색, 머리카락, 둔부지방축적)으로 다른 아프리카 흑인들과 구별된다. 참고로 다이아몬드의 설명에 의하면 산(San)족은 소규모의 수렵채집인이었고, 보다 큰 규모의 코이(Khoi)족은 유목민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제레미 다이아몬드에 의하면 대략 2,000년 전에 코이족은 아프리카 북쪽에서 양과 소를 얻어 목축을 하며 유목민이 되지만, 농사를 짓지는 않았다고 한다.


 

코이산족의 언어적 특징은 흡착음(click)이라고 부르는 부족 특유의 발성음으로, 시집의 설명에 의하면 혀를 입천장에 붙여 내는 소리로, 혀를 끌끌 찰 때 나는 소리와 비슷하다고 한다. 일반적인 표기법은 흡착음이 있는 단어 앞에 느낌표(!)를 붙여서 ‘!이런 식으로 표기하곤 한다.

코이산족이 다른 아프리카계 흑인과 구별되는 신체적 특징은 피부가 좀 더 황갈색을 띠며, 머리카락이 더욱 촘촘한 고수머리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여성들은 무엇보다 엉덩이에 지방이 많이 축적되어 있는 것이 큰 특징이다. ‘둔부지방축적’(steatopygia)라는 해부학적 용어로 알려져 있는데, 이 특징은 나중에 언급할 한 코이산족 여성의 비극적인 운명에 영향을 주는 신체적 특징이었다.


 

흔히 코이족과 산족의 이름을 함께 사용하지만 제레미 다이아몬드의 설명에 따르면 영화 <부시맨 The Gods Must Be Crazy>는 수렵채집으로 살아가는 산(San)족 인물들의 이야기다. 한편 총균쇠19장 에서는 현재의 아프리카가 왜 흑인 천지가 되었는가라는 도발적인 질문에 답하고 있는데, 주요 요지는 아프리카가 원래부터 단일한 흑인만 있던 것이 아니라 다양한 흑인과 백인이 함께 있던 대륙이라고 말한다. 코이산족의 규모는 수만 년 전에 비해 규모가 크게 줄었는데, 그 이유는 유럽의 백인이 오기 전에 코이산족들이 이미 농경을 하던 반투(Bantu)족에 의해 대부분 점령되고 축출되었기 때문으로 풀이한다. 다이아몬드에 의하면 반투족이 아프리카대륙 서쪽 지역에서 동쪽과 남쪽으로 이동한 시기를 BC3000-AD500년으로 파악했다. 게다가 농사를 짓던 반투족은 이미 말라리아에 적응하여 내성을 지니고 있었지만, 코이산족은 유전적인 저항능력을 갖지 못하여 인구가 더욱 감소했을 수도 있다고 본다.


 

유럽의 백인들은 16세기부터 아프리카에 상륙하기 시작했고, 네덜란드인들은 17세기(1652)에 남아공의 현 수도인 케이프타운(Cape Town)에 처음 들어왔다고 한다. 이들이 들어온 이후 코이산족들은 더 심각하고 근본적인 수난을 겪어야 했다. 일반적으로 유럽의 백인들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이나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사례처럼 코이산족 남성들을 빠르게 살해하거나 노예로 만들었고, 여성들은 노예 혹은 첩으로 만들었으며, 유럽에서 들어온 각종 전염병은 이들의 인구 감소에도 큰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코이산족의 시집 별들은 여름에 수군대는 걸 좋아해는 크게 3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이들의 시를 읽어보면 수렵채집 혹은 유목을 하는 부족답게 태양, , , 은하수와 같은 천체와 비, 구름, 나무와 같은 자연환경, 그리고 아프리카의 다양한 동물들과의 관계를 언급하고 있다. 여기에 가족에 대한 사랑과 인간의 영혼까지 언급하며,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관심사와 예민한 감각, 관찰력을 보여준다. 반면 또 많은 시들에서 백인들이 코이산족에게 가져다준 고통과 수난을 짐작해볼 수 있는 시들도 보인다. 앞서 언급했던 코이산족에 대한 배경지식은 무엇보다 침입자 유럽 백인들의 맥락과 연결 지어 이해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들이 왜 이런 시를 노래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말이다. 이 맥락에서 두 가지 사례를 떠올려 볼 수 있는데, 하나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의 백인 작가 J.M. 쿳시의 소설에 묘사된 유목민과 고생물학자 스티븐 J. 굴드의 자연사 에세이에 등장하는 어느 호텐토트(혹은 부시맨)’ 여성에 관한 에피소드다.


 

J.M. 쿳시의 소설 야만인을 기다리며의 시간적·공간적 배경은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작가의 출신과 살아온 생애는 남아프리가 공화국의 인종분리정책(아파르트헤이트, Apartheid)이 절정에 달하던 시기와 일치한다. 소설의 화자는 백인 치안판사로 사막 한가운데 세워진 제국의 요새를 지키는 임무를 맡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제국으로부터 군대가 파견되는데, 군대를 이끄는 졸 대령은 야만인을 정복하고 몰아내어 야만인들의 위협으로부터 문명을 보호하는 임무를 맡았다고 말한다. 작가의 경험과 환경 등을 고려할 때,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유목민은 무엇보다 유목민인 코이(Khoi)족을 모델로 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들은 졸 대령의 군대에 의해 아무런 이유도 모른채 볼과 손이 철사에 꿰인 상태로 끌려와 가혹한 대우를 받고, 쿠타를 당하며 죽어간다.


 

그렇게 우리는 말발굽 소리보다

더 일찍

말 우는 소리를 듣게 된단다

그렇게 우리는 발사된 총알보다

더 일찍

화약 냄새를 맡게 된단다

백인 장교가 나타나리라고

우리의 피가 피워 올린 연기는

예언을 했단다

우리 피는 그걸 안단다

바로 그날이

전쟁이 시작되는 날임을

 

(...)

 

우리는 그곳에 그렇게 남았단다

온갖 피를 탕진한 채로

그 후에도 그곳에 그렇게 남아

우리 자신의 시체를 거두었단다

우리의 피는

소진되고

탕진되었고

예언의 실현을 지켜보았단다

땅이 부상자들로 넘쳐나고

죽은 우리 편 시체가 사방을 뒤엎었단다


- 시 '연기를 피우는 피', 

-《별들은 여름에 수군대는 걸 좋아해64-65p 중에서

 


이 시에서는 소설 야만인을 기다리며의 졸 대령이 이끄는 군대가 요새 밖을 나가 처음 유목민들과 조우하고 전투를 치르는 장면을 상상해볼 수 있었다. 소설에는 이런 장면이 나오지 않지만, 코이산족 생존자들의 몸에 각인되어 기억으로 남아있는 고난의 역사를 짐작해볼 수 있었다.


 

그렇게 세 사내는

밧줄 하나에 묶인 채로

마차에 누워

치안판사에게 끌려갔다오

마차가 달리는 동안

이튿날의 폭염 속을

달리는 동안

여인들 또한

넘어지고, 나뒹굴며

마차 옆구리에 붙어 달렸다오

더 빨리

점점 더 빨리

마차는 속도를 높였고

뒤를 따르던 여인들은

온갖 용을 다 썼지만

보조를 맞출 수 없었다오

 

백인 치안판사에게 끌려온 나는

질문 세례를 받았다오

밤늦도록 취조는 이어졌다오

한밤중이 되고

어둠이 내리고 나서야

그의 부하들이

우리 식구들을 감옥에 쳐 넣고는

모두의 발을 다시

밧줄 하나로 묶었다오

우리 모두는 그렇게 누워

보두의 발이 한 밧줄에

묶인 채로 누워

백인 하나가 발 주변에 설치한

나무 가시에 발을 찔리며

고통을 견뎌야 했다오

(...)

- ‘그렇게 우리가 왔다오’, 87-88p중에서

 


이 시는 마치 소설에 나오는 한 장면을 유목민/코이산족의 관점에서 노래한 시처럼 읽었다. 백인 군대가 유목민과의 전투를 마치고 생존자들을 밧줄로 묶어 요새로 복귀하는 과정과 여전히 밧줄에 묶인 채 요새에서 하룻밤을 나는 유목민들의 모습을 이들의 관점에서 다시 쓴 것만 같다. 시집에는 코이산족의 화자가 자연을 관조하고 노래하는 시도 실려 있지만 무엇보다 내가 귀 기울이게 되는 것은 고난을 겪은 이들의 목소리가 담겨있는 시다.


 

이 시집을 이해해보기 위한 또 다른 맥락은 고생물학자 스티븐 J. 굴드의 자연사 에세이 플라밍고의 미소에 등장한다. 호텐토트의 비너스라는 제목의 에세이는 세례명이 사르키 바트만이라는 한 호텐토트 여성의 비극에 관한 글이다. 제레미 다이아몬드는 코이산족이 부시맨혹은 호텐토트라고 불리곤 했다고 언급하는데, 굴드는 이를 좀 더 엄밀하게 구분한다. 곧 부시맨족과 호텐토트족은 가까운 친척 관계로, 전통적인 부시맨은 수렵채집 부족을 가리키므로 산(San)족과 보다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반면 호텐토트족은 소를 키우는 유목민이므로 앞서 언급한 코이(Khoi)족을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사르키 바트만은 아마도 코이족 출신의 여성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케이프타운 근처에 거주하는 네덜란드 농부의 하인이었다.


 

굴드가 기록하는 이 비극은 바트만의 주인의 형제였던 헨드릭 세자르라는 사람이 유럽에 그녀를 소개해보고자 그녀에게 영국행을 제안한 상황부터 시작되었다. 그녀를 부자로 만들어주겠다고 말이다. 백인 집안의 하인으로 일했던 바트만은 기억력이 좋았고, 네덜란드어를 잘했으며, 영어를 약간 구사할 수 있었고, 프랑스어를 공부하고 있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그녀에게 영국행을 제안한 남자는 앞서 언급했던 호텐토트족 여성의 신체적 특징(‘둔부지방축적이라 불린 특징)을 전시하여 돈을 벌 궁리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호텐토트족 여인 바트만은 백인의 말에 동의하고 1810년 영국 런던에 도착한다. 백인 주인은 그녀를 전시할 때 우리 안에 있는 동물처럼 우리 안에서 명령을 하며 우리 안을 움직이고 들락거리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여기서 유럽 백인들의 주목을 받은 것은 무엇보다 앞서 언급했던 둔부 지방축적으로 풍성한 둔부가 성적 대상으로 인기를 얻게 되었기 때문이다. 바트만이 18개월 머물렀던 파리에서 기록된 그녀의 모습은 무엇보다 지적인 인간이 아닌 백인들의 동물적인 호기심에 기대었다는 점이다. 바트만은 5년간 런던과 파리 등 유럽을 떠돌며 사람들(백인 남녀)의 성적인 대상으로, ‘호텐토트의 비너스로 전시되며 지내다가 1815년 말에 파리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더 충격적이고 가슴 아픈 것은 프랑스의 해부학자 조르주 귀비에가 그녀의 생식기를 절제하여 유리병에 보관해두었다는 점이다. 스티븐 J. 굴드는 호텐토트의 비너스라는 제목의 에세이에서 같은 유치원에 다녔던 친구 칼 세이건과 파리 인류학박물관을 방문했을 때의 일화로 시작한다. 그는 해부학 표본 보관실에서 이 호텐토트의 비너스라벨이 붙은 유리병을 발견하고 이 에세이를 쓰게 되었던 것이다. 이 에세이에서 주목하고 있는 점은 호텐토트족 여성 바트만의 비극뿐만이 아니라, 유럽 백인 사회가 아프리카 원주민 여성을 바라본 시선이다. 그는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체계화된 백인우월주의적 시선과 인종차별적 관행을 이 에세이에서 고발했다.


 

여기까지는 줄곧 비극적인 이야기만 늘어놓았는데, 이는 코이산족이 겪은 수난의 사례와 문학작품에 묘사된 이들의 역사 중 일부에 불과할 뿐이다. 굴드의 설명에 따르면 (유럽의) 초기 과학자들은 코이산족을 하등한 영장류에 가까운 존재로 보았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코이산족이 이제는 현대 사회운동의 선구자로 여겨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자연을 착취하지 않고 이해하는 균형 잡힌 접근법을 가진 사람들로서 이들은 현대 생태 운동가들에게 모범이 된다고 언급한다.


 

여기까지가 코이산족의 시에 담긴 정황을 이해해보고자 수집한 자료들을 갈무리한 것이다. 별들은 여름에 수군대는 걸 좋아해는 코이산족이 겪은 수난의 경험과 기억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상상하며 공감한 뒤에야 비로소 이해가 되는 부분이 있다. 물론 다른 시에서는 모든 사물에 깃든 생명과 영혼을 노래하고, 자연과 교감하는 시들도 보인다. 100여 년 전에 채록된 이 시를 통해 백인들에 의해 왜곡되고 조작된 시선과 고난의 역사, 그리고 보편적인 인간성의 모습을 시 한 줄 한 줄에서 느낄 수 있었던 읽기 경험이었다.


스티븐 J. 굴드 플라밍고의 미소에 수록된 삽화. 1812년 프랑스에서 발표된 풍자화로, '전시'되고 있는 호텐토트의 비너스를 바라보는 영국인들 비판하는 그림. 

   

그렇게 우리는 말발굽 소리보다
더 일찍
말 우는 소리를 듣게 된단다
그렇게 우리는 발사된 총알보다
더 일찍
화약 냄새를 맡게 된단다
백인 장교가 나타나리라고
우리의 피가 피워 올린 연기는
예언을 했단다
우리 피는 그걸 안단다
바로 그날이
전쟁이 시작되는 날임을

- 시 ‘연기를 피우는 피‘,
- 《별들은 여름에 수군대는 걸 좋아해》 (64p)

우리는 그곳에 그렇게 남았단다
온갖 피를 탕진한 채로
그 후에도 그곳에 그렇게 남아
우리 자신의 시체를 거두었단다
우리의 피는
소진되고
탕진되었고
예언의 실현을 지켜보았단다
땅이 부상자들로 넘쳐나고
죽은 우리 편 시체가 사방을 뒤엎었단다

- 시 ‘연기를 피우는 피‘,
- 《별들은 여름에 수군대는 걸 좋아해》 (65p)

그렇게 세 사내는
밧줄 하나에 묶인 채로
마차에 누워
치안판사에게 끌려갔다오
마차가 달리는 동안
이튿날의 폭염 속을
달리는 동안
여인들 또한
넘어지고, 나뒹굴며
마차 옆구리에 붙어 달렸다오
더 빨리
점점 더 빨리
마차는 속도를 높였고
뒤를 따르던 여인들은
온갖 용을 다 썼지만
보조를 맞출 수 없었다오

- 시 ‘그렇게 우리가 왔다오’ (87p)

백인 치안판사에게 끌려온 나는
질문 세례를 받았다오
밤늦도록 취조는 이어졌다오
한밤중이 되고
어둠이 내리고 나서야
그의 부하들이
우리 식구들을 감옥에 쳐 넣고는
모두의 발을 다시
밧줄 하나로 묶었다오
우리 모두는 그렇게 누워
보두의 발이 한 밧줄에
묶인 채로 누워
백인 하나가 발 주변에 설치한
나무 가시에 발을 찔리며
고통을 견뎌야 했다오

- 시 ‘그렇게 우리가 왔다오’ (8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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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09-07 08: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나마 바트만의 시신은 2002년에나 고향에 돌아갈 수 있다고 들었어요. 인종동물원이야기도 생각나고. 시가 처절하고 슬퍼요 ㅠ

초란공 2021-09-07 09:05   좋아요 1 | URL
거의 두 세기가 지나서 귀향한 셈이네요 ㅜㅜ 모든 시가 슬프지는 않지만 유독 이미지가 남아있는 시들이 있네요. 가슴 아픈 역사입니다.

페크pek0501 2021-09-07 12: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별들은 여름에 수군대는 걸 좋아해. 제목이 참 좋네요.

여러 작가를 언급하며 쓰신 글을 읽으니 이런 말이 생각납니다. ‘글은 자기가 아는 만큼 쓴다.‘
멋지십니당^^

초란공 2021-09-07 12:17   좋아요 3 | URL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제 경우는 ‘쓰고 나서 알게 되었다‘가 더 맞을 듯 합니다~ ^^;;

초딩 2021-09-07 19:1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책입니다요 ㅎㅎㅎ
부시맨 한글로는 안 와닿았는데
Bush man 이라고 하니 덤블 사람 이니 비하했군요
영국인들이 타민족을 제대로 대한적이 있는지 참 애휴

초란공 2021-09-07 23:09   좋아요 3 | URL
저도 그동안 사회에서 당연하게 쓰이는 표현들에 당연하지 않은 사연이 잇다는 걸 생각해본 기회가 되었네요.. 시 한편 읽어보면서요~

그레이스 2021-09-08 00:1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호텐토트의 비너스 전시에 대한 기록 읽었었습니다. 그때도 사람들의 무지와 잔인함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그러고도 문명인으로 자처하는 ...
에스키모가 겪었던 일들도 생각나네요.

초란공 2021-09-08 08:25   좋아요 3 | URL
최근에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를 읽어보니까 사람이 대상에 대해 ‘무지‘해서 잔인해질 수 있었던게 아닐까 싶습니다. 에스키모나 이누이트 등의 경우도 한 편으로는 환경 오염의 가장 큰 피해자가 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구요. 영문도 모르고 말이지요.

scott 2021-10-08 15: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이달의 당선 축하!!
별들은 10월에도 수근~수근~ㅎ
주말 행복하게 보내세요. ^ㅅ^

mini74 2021-10-08 16: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도 좋고 글도 좋고. 당선도 좋고 ~~~축하드려요 *^^*

그레이스 2021-10-08 17: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을엔 시, 별,,,,
축하합니다 ~^^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 친화력으로 세상을 바꾸는 인류의 진화에 관하여
브라이언 헤어.버네사 우즈 지음, 이민아 옮김, 박한선 감수 / 디플롯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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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 Survival of the Friendliest

브라이언 헤어(Brian Hare)·버네사 우즈(Vanessa Woods) 지음

이민아 옮김 | [디플롯] (2021)

 



가 곧 가 될 수 있을 때 우리의 삶은 바뀔 수 있다

 


천일야화의 셰에라자드는 여성에 대한 불신으로 잔혹해진 술탄에게 매일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살아남는다. 이 소설에 대한 해석은 다양할 수 있지만, 지구상에서 가장 관대하며 동시에 가장 무자비한 인간의 본성을 전제로 한 작품으로 볼 수도 있다.

 

  과학자이자 작가인 브라이언 헤어와 버네사 우즈는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에서 인간의 본성을 신경과학, 인류학, 심리학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시한다. 저자는 사람 자기가축화 가설(이하 가설’)에 기반을 둔 친화력 개념을 중심으로 인간의 본성을 파헤친다. 가설에서 바라보는 인간은 천일야화의 술탄처럼 다정하면서도 언제든 잔혹해질 수 있는 존재다.


  ‘가설에 따르면 인간은 친화력과 함께 타인의 마음과 연결 짓는 협력적 의사소통 능력을 갖게 되었다. 이 능력은 인간이 가장 탁월하지만 개와 여우의 가축화에서도 발견된다. 가축화된 동물의 친화력은 호르몬 농도변화 같은 생리적 변화와 신체의 외형 변화를 동반한다. 저자는 이와 유사한 변화를 사람의 경우에서도 찾아 제시하며, 여러 인간 종 가운데 호모 사피엔스만 살아남은 비결이 친화력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인류사의 중요한 전환점은 인간 집단의 규모가 구성원의 협력과 소통 능력을 기반으로 증가한 사건이다. 사회적 관계망이 확장된 것이다. 인간은 친화력과 남다른 자제력으로 집단을 키우고 이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로써 인간 집단은 기술 혁신과 문화 전수가 가능해져 강력하고 성공적인 종이 된 것이다. 이 때 새로 형성된 집단 정체성은 집단 내 타인에 대한 유대감을 바탕으로 한다.

 

  문제는 인간 집단이 위협을 받을 때다. 다정함이 집단 외부의 타인에게 공격적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가설에 의하면 공격성은 친화력이 강화된 우리 종에게 새로 주어진 부산물이다. 인간의 공격성은 비인간화 개념으로 설명된다. 비인간화 기작은 상대방에 대한 편견과 타인에 대한 공감의 소멸이 더해져 작동한다. 르완다 대학살 당시 후투족은 투치족을 비인간화함으로써 이들을 잔인하게 공격했다. ‘가설은 신경망 활동의 둔화로 인간(투치족)에 대한 공감이 사라졌기 때문으로 설명한다.


  저자는 인간의 비인간화 본성을 다스리는 방안으로 접촉의 중요성에 주목한다.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 딕에서 화자 이슈메일은 식인종 출신의 작살 잡이와 우정을 쌓으며 인종적, 문화적 편견을 극복한다. 동료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접촉을 통해 유대감과 동료의 생각에 대한 감수성으로 바뀐 것이다.천일야화에서 셰에라자드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매일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던 술탄의 마음속에 인간적인 유대감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저자는 인간을 선과 악의 이분법적, 절대적 기준이 아니라, 다정함과 잔인함을 함께 지닌 잠재적이고 조건적인 존재로 보았다. 집단의 정체성이 만든 경계에 따라 비인간화의 대상과 정도가 정해지는 것이다. 사람 자기가축화 가설은 모든인간이 타인을 비인간화할 수 있다고 본다. 이 본성은 인간이 등장하고 거의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인간이 이런 존재라면, 우리는 타인과 접촉을 늘리고 인간적인 경험을 통해 형성된 유대감을 모든 인종으로 확장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현대인의 환경이 그리 녹록하지는 않다. 첨단 개인기기와 인터넷의 발달로 각자의 삶에 침잠하기 쉬워졌기 때문이다. 여기에 코로나19와 같은 전염병이 유행하여 사회적 접촉은 더욱 어려워졌다. 혐오와 타인을 비하하는 표현도 흔히 발견된다. 타인에 대한 공감과 유대감이 옅어지기 쉬운 조건이다. 이 책을 읽고 세대, 계층, 인종 사이의 분리 현상에 저항해야 할 이유가 분명해졌다. 이해와 공감을 통한 연결됨이 중요한 이유를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저자는 친화력이 우리 종의 생존비결이라고 단언한다. 이 책은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인류 생존의 비결을 담은 매뉴얼인 셈이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할 것은 친화력 이면에 우리를 소멸케 할 수 있는 공격성도 있다는 사실이다. 타인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절실한 이유다. 우리가 타인에 대한 혐오 표현을 사용했다면 이는 우리가 상대방에 대해 무지했다는 징후일 수 있다. 우리가 얼굴을 마주하고 앎과 지혜를 나누며 가 곧 가 될 수 있을 때, 우리의 삶도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을 책에서 발견한다.




 

 


 

"친화력은 자기가축화 Self-domestication를 통해서 진화했다." (31)

"개는 사람이 길들이지 않았다. 친화력이 높은 늑대들이 스스로 가축화한 것이다." (80)

"사람 자기가축화 가설이 옳다면, 우리 종이 번성한 것은 우리가 똑똑했기 때문이 아니라 친화적으로 진화했기 때문이다." (123)

"사람은 같은 낯선 사람이라도 이왕이면 자신과 같은 집단 정체성을 가진 사람을 돕고 싶어 한다." (159)

"낯선 사람과 쉽게 친해지고 그들과 협력할 줄 아는 우리 종 고유의 능력을 갖춘 혁신가가 수백 명, 더 나아가 수백만 명으로 확산되면서 문화적 혁신이 한층 더 강화된 것처럼 말이다." (163)

"자신이 속한 집단을 향한 사랑이 정체성이 다른 타인에 대해서는 두려움과 공격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187)

"우리의 본성을 길들이고 협력적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것도, 우리 내면에 최악의 속성의 씨앗을 뿌린 것도 동일한 뇌 부위에서 모두 일어나는 일이다." (195)

"사람 자기가축화 가설은 타인을 비인간화하는 능력이 인간의 보편적 특성이며 정치 성향을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서 두루 나타나는 것으로 본다." (251)

"우리는 내집단의 구성원들이 위협받을 때, 평소에는 타인이나 외집단에게도 무리 없이 잘 느끼던 공감능력을 차단시킨다. 이에 외부자들도 위협받는다고 느껴 상대 집단을 비인간화하고, 여기에서 보복성 비인간화의 피드백 순환 고리가 만들어진다. " (263)

"유년기 동물학대는 사이코패스의 유년기 징후 중 하나다." (292)
- 저자의 경고

"사람을 동물과 다르다고 여기는 태도나 동물보다 우월하다고 여기는 태도가 이민자나 흑인, 소수민족 등 사람 외집단을 동물로 비유하는 비인간화에 주된 역할을 한다." (293)
- 심리학자 고든 호드슨과 크리스토프 돈트의 연구 결론

"우리의 삶은 얼마나 많은 적을 정복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친구를 만들었느냐로 평가해야 함을. 그것이 우리 종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이다." (300)
- 마지막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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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에 반대합니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지음, 스티나 비르센 그림, 이유진 옮김 / 위고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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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그림: 스티나 비르센(Stina Wirsen)



폭력에 반대합니다

: 1978년 독일 출판서점협회 평화상 수상 연설문

아스트리드 린드그렌(Astrid Lindgren) 지음 | 이유진 옮김 | [위고]

 



짧지만 큰 울림을 주는 연설문 - ‘폭력에 반대합니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평전을 인상 깊게 읽은 기억이 난다. 이후 그에 관한 영화를 보았고 오늘은 그가 남긴 연설문을 읽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최근 국내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던 일부 어린이집 교사의 아동 폭력, 부모 혹은 보호자에 의한 아동 학대와 사망 사건을 함께 떠올려 보았다.


   아동 폭력 유엔 사무총장 마르타 산토스 파이스의 기고문(2018)에는 전 세계의 어린이가 5분마다 한 명이 폭력으로 숨진다는 통계를 언급한다. 해마다 세계어린이의 절반에 달하는 아이들이 자신이 알고, 신뢰하며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해 정신적, 신체적, 혹은 성적 폭력을 당한다라고 일러준다. 그리고 신체적, 성적 학대 이력이 있는 어린이들이 다른 어린이들보다 반응적 공격성과 언어적 공격성의 수준이 훨씬 더 높다는 사실을 제시하며 피해자가 다시 가해자가 되는 악순환의 현실을 지적한다.

   

   아동 폭력, 아동 학대 문제는 무엇보다 인권에 관한 문제다. 스웨덴 최초로 아동 체벌금지를 지지하고 관련법을 제정하는데 기여한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주장은 무엇보다 사랑상호존중의 맥락에 있다. 아동에 대한 체벌이 없다면 버릇없는 인간으로 성장한다고 우려하는 사람들에게 체벌 없는 방식이 무규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라며 이를 구분한다.


 

물론 아이들은 부모를 존중해야 하나, 부모 또한 아이를 존중해야 하며 아이보다 언제나 우위에 있기 마련인 상황을 잘못 이용해서는 안 됩니다. 모두가 바라는 것은 이 세상 모든 부모와 아이들에게 서로에 대한 애정 어린 존중이 함께하는 것입니다.”(39)


 

   여기에 더하여 린드그렌은 어느 여인이 자신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연설문에 담았다. 그 여인의 아이가 잘못을 했을 때, 아아 자신이 맞을 회초리를 구해오라고 했다. 한참 후 아이가 구해온 것은 회초리가 아니라 작은 돌멩이였다. 회초리는 구하지 못했지만 아마도 자신이 벌을 받아야 한다면 돌멩이를 사용하라는 의미였을 듯싶다. 그 여인은 아이의 두려움과 고통을 읽고 깨달은 바가 있었던 모양이다. 여인은 그 돌멩이를 부엌 선반에 놓아두고 그 돌멩이를 볼 때마다 폭력에 반대한다는 약속을 되새기고 상기하고자 했다.


   린드그렌은 자신의 연설문을 마치면서 이 돌멩이 하나가 마침내 세상의 평화에 작은 보탬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그녀는 부모의 존중과 사랑, 관용 속에서 자라난 아이가 성장했을 때 이들이 자신의 주변에 다정한 태도를 견지하고 이러한 태도를 평생 이어간다는 믿음을 가졌다. 린드그렌의 삶을 떠올릴 때마다 큰 감동을 받곤 하는데, 이 짧은 연설문은 아이들에 대한 그녀의 흔들림 없는 신념과 사랑을 전하는 울림이 있다.




"5분마다 어린이 한 명이 폭력으로 숨집니다. 해마다 전 세계적으로 10억 명의 어린이들이 자신이 알고, 신뢰하고, 사랑하는 사람에 의해 정신적, 신체적 또는 성적 폭력을 당합니다. 이는 세계 어린이의 절반에 달하는 수치입니다." (17)
- 아동 폭력 유엔 사무총장 마르타 산토스 파이스의 기고문(2018년)

"폭력 속의 삶은 삶이 아닙니다." (20)
- 어느 소년의 말 재인용

"요컨대 사람들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만 배우는 법이다." (32)
- 괴테의 말을 린드그렌이 재인용 한 문장

"부모를 사랑하며 사랑으로 둘러싸인 아이는 부모로부터 자신의 주변을 향한 다정한 태도를 배우고 이런 태도를 평생 이어갑니다." (32)

"모두가 바라는 것은 이 세상 모든 부모와 아이들에게 서로에 대한 애정 어린 존중이 함께하는 것입니다." (39)

"이 돌멩이 하나가 마침내 세상의 평화에 작은 보탬이 될 것입니다."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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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08-23 10: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좋아하는 작가님인데 이런 멋진 연설문도 쓰셨군요. 아이 사랑하는 진심이 가득. 큰 손과 작은 손의 그림이 참 따뜻해 보여요.
 
미루고 짜증 내도 괜찮아 - D. H. 로런스와 씨름한 날들
제프 다이어 지음, 이한이 옮김 / 주영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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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고 짜증내도 괜찮아

: Out of Sheer Rage

제프 다이어(Geoff Dyer) 지음 | 이한이 옮김 | [주영사]

 



끊임없이 방랑하고 방황하며 로런스에 다가가는 작가의 고백

 


몇 년 전에 우연히 꼼짝도 하기 싫은 사람들을 위한 요가를 읽고 나서 단번에 제프 다이어(Geoff Dyer)라는 작가가 마음에 들었다. 이 에세이에 나오는 한 장면인 고대 유적지의 한 복판에서 폐허를 응시하는 작가의 시선에 매료되었더랬다. 그리고 묘사가 무척이나 사진적인 느낌을 준다고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니 제프 다이어는 지속의 순간들에서처럼 본격적으로 사진에 대해 글을 썼던 작가였다. 이후 지속의 순간들를 비롯하여 제프 다이어의 책을 더 찾아보았고, 재즈에 관한 글을 파격적인 형식으로 써내려간 그러나 아름다운과 같은 책도 만났다. 다만 내가 널 파리에서 사랑했을 때와 같은 소설은 인상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문학에 대한 감수성이 아직 부족해서이리라 생각한다. 어쨌든 나는 영국 문학의 르네상스인’, ‘국가적인 보물이라고 불리는 이 작가의 지적이고 자유분방한 에세이를 좋아하게 되었고 기회가 될 때마다 다이어의 책이 나오길 계속 기다린다.


이번 여름에 만난 다이어의 책은 미루고 짜증내도 괜찮아. 제프 다이어는 영국 소설가 D.H. 로런스에 관한 연구서를 쓰기로 마음먹지만 도대체 언제 시작은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무튼 다이어의 글쓰기 과정을 보여주는 일종의 에세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내가 이 책에 끌렸던 이유는, 로런스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언젠가 읽다가 멈추었던 무지개의 처음 몇 페이지를 읽으면서 대단한 작가라는 인상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이후에 제대로 로런스를 읽어본 적은 없는데, 허먼 멜빌의 모비 딕을 읽을 때 로런스가 쓴 미국 고전문학 강의라는 책에 수록한 모비 딕 서평을 읽어본 것이 다였다. 로런스의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견해가 강하게 배어 있는 모비 딕비평을 읽으면서, 이 책에 대해 비판하기도 하면서도 그가 모비 딕과 멜빌을 얼마나 대단하게 생각하고 주목했는지도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제프 다이어는 로런스가 미국 고전문학 강의에 쓴 비평문에서 상상력 있는 문장을 썼다고 극찬하기도 한다.


코로나 유행만 아니었다면 여름 휴가지에 미루고 짜증내도 괜찮아을 들고 갔어도 무척 재미있게 읽지 않았을까 싶은데, 그 이유는 다이어가 로런스 연구서를 쓰는 과정이 독자에게 큰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무척 재미있고 때론 인간적이기 때문이다. 이 남자는 무척이나 산만하고 한 곳에 진득하니 머물러 있질 못한다. 끊임없이 연구서를 쓰기 위한 완벽한 장소를 찾아다니지만, 지금 살고 있고 단지 거쳐 가는아파트를 나갈지 말지도 결정하지 못하는 지독한 결정 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지인이 자신의 별장에 다이어를 초대하지만, 풍경이 너무나 완벽해서 글쓰기에 좋지 않다고 불평한다. 그래서 결국은 멍 때리다가 산책하면서 시간을 보내거나, 애인과 차를 타고 다니다가 차 사고를 내기도 하면서 결국은 회복하느라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이 책은 장의 구분 없이 끊임없이 이어지는데, 마치 다이어의 산만한 머릿속 상태를 그대로 글로 옮겨놓은 것 같다. 연구서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지만, 또 끊임없이 시간을 낭비하고, 글을 쓰는 대신 다른 일로 그 시간을 채우면서 정작 해야 할 일을 미루는데 선수다. 휴가지에서 혹은 집에서 여름을 보내면서 제프 다이어가 어떻게 시간을 낭비하고 소일하는지를 마치 옆에서 보는 듯 재미가 있다. 여기에 끊임없이 이어지는, 다소 수다스럽다고 느껴지는 작가의 변명과 엉뚱한 생각들이 쉬지 않고 지면으로 침투한다. 이것이 영국식 유머인지는 모르겠지만, 빌 브라이슨이나 마이클 부스가 보여주는 식의 유머도 보이긴 한다. 무엇보다 읽는 데 크게 부담이 없어서 좋다.


또 다이어의 독특한 로런스 연구서 쓰기 프로젝트에 관한 기록이 참신하게 다가오는 것은 다이어가 로런스의 작품들을 바탕으로 접근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는 태리 이글턴 같은 문학 비평가들의 이론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기도 한다. 이들의 문학 이론을 쓰레기라고 말할 정도로 다이어는 문학에서 이론을 앞세우는 행태에 거부감을 갖는 듯하다. 대신 그는 로런스의 서간문을 무척이나 좋아하기에 여기에서 상당한 문장을 인용한다. 따라서 다이어는 작품에 대한 분석을 기반으로 로런스 연구서를 쓰는 것이 아니라 로런스라는 인물에 대한 공감과 이해를 기반으로 사람에게 점차 다가가는 방식을 취한다.


로런스 역시 끊임없이 살 곳을 옮겨 다녔다는 점, 가구는 살 곳에 맞춰 매번 새롭게 고치거나 만들어 썼다는 점도 언급한다. 다이어는 로런스의 생가와 이탈리아에서 잠시 살았던 집 등을 방문하면서 로런스라는 인물에 조금씩 다가간다. 어떤 면에서는 다이어가 심지어 로런스를 점차 닮아가는 것이 아닌가하는 인상마저 준다. 아니면 다이어과 로런스에는 공통점이 많았거나. “나는 어디서든 이방인이고, 오직 모든 곳이 내집이다.”라고 했던 로런스처럼 말이다. 특히 다이어나 로런스 모두 노동자 가족의 자녀로 다이어는 아마도 귀족 출신의 작가들보다 더 동질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다이어와 로런스 모두 노동자 집안 배경에서 나온데다, 끊임없이 글쓰기를 미루고, 살 곳을 찾아 부단히 옮겨 다닌 것을 보면 오히려 지극히 인간적인 면모가 느껴진다. 극심한 결정 장애가 있는데다 부단히글쓰기를 미루면서도 로런스 연구서를 쓰기주변을 방황하듯 맴도는 모습에다 불쑥 밀고 들어오는 생각들을 새로운 기대와 함께 따라가는 재미가 있다. 그러면 어느 순간 로런스라는 인물에 좀 더 가까이 가게 되어 그를 보다 친근하게 느낄 수 있게 된다. 어쩌면 이게 다이어의 글쓰기가 지닌 장점이 아닐까 싶다. 내가 다이어의 에세이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게다가 이렇게 산만한 와중에도 그가 어쩌다 던지는 한 마디에 주목하게 되기도 한다.



 

타오르미나에 앉아 있는 것, 이것이 내가 사랑하는 내 인생이었다.” (84)


 

인생은 사실 자신이 좋아하는 따뜻한 음료를 찾는 것이다.”(98)


 

코로나로 여행 가기 힘들어졌지만 로런스 연구를 위해 끊임없이 방랑하고 방황하며 좌충우돌하는 제프 다이어. 그의 발자국을 따라가며 아쉬움을 대신해본다.



"타오르미나에 앉아 있는 것, 이것이 내가 사랑하는 내 인생이었다." (84)

"인생은 사실 자신이 좋아하는 따뜻한 음료를 찾는 것이다." (98)

"글쓰기란 그런 장면에 흠뻑 잠기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거리를 두는 일이다." (125)

"나는 어디서든 이방인이고, 오직 ‘모든 곳이 내집‘이다." (129)
- D.H. 로런스의 말

"읽을 만한 로런스의 편지가 더 있기를 바라는 진짜 이유는 그것들이 로런스 연구서를 쓰고 있지 않는 것에 대한 완벽한 핑계가 되어서였다." (144)

"이 문제를 생각하면 할수록, 이 책의 진짜 주제, 내가 쓰는걸 회피하고 있는 그 주제는, 바로 절망이라는 생각이 든다." (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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