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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가의 아틀리에 - 장욱진 그림산문집
장욱진 지음 / 열화당 / 2017년 5월
평점 :
《강가의 아틀리에》
: 그림산문집
장욱진 지음 | [열화당]
온 몸으로 생을 ‘사랑’했던 예술가의 고백
“사라지려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연민의 정으로써 나는 생(生)을 사랑한다.”(33) 장욱진 화백의 그림 산문집 《강가의 아틀리에》를 읽고 남는 인상을 떠올리자면 나는 주저 없이 이 문장을 꼽겠다.
책을 펼치고 읽을 때 화백이 그림을 곁들여서 창작론, 인생론, 예술관을 조곤조곤 전해주는 것처럼 느껴진다. 저자는 진정으로 그림과 술을 ‘사랑’한 화가였다. 그가 보여주었던 ‘사랑’은 범인(凡人)의 정의로는 제대로 설명되지도, 이해되지도 않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누군가에겐 화백의 그림 사랑과 술사랑은 괴벽에 가까운, 혹은 자기를 혹사하는 행위 내지는 집착의 행위가 아닐까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절제와 균형이 선이라는 태도에 익숙한 이들에게 그가 보여주는 그림 사랑, 술사랑은 지나침 혹은 과잉의 한계 너머의 무모함에 가까워 보일 수 있겠다. 하지만 이렇게 사랑하는 방식이야말로 저자에게는 자연스러운 본성과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산다는 것은 소모하는 것, 나는 내 몸과 마음과 모든 것을 죽는 날까지 그림을 위해 다 써버려야겠다. 남는 시간은 술로 휴식하면서.”(59)
“취한다는 것은 의식의 마비를 위한 도피가 아니라 모든 것을 근본에서 사랑한다는 것이다.”(46)
장욱진 화백의 담담하고 명료한 믿음의 고백을 읽다보면 그가 말하는 ‘사랑’의 강도와 깊이가 어느 정도 일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말을 통해 역설적으로 그가 자신의 생(生)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조금은 느낄 수 있겠다. 문명이 개개인에게 둘러친 관습 혹은 규범의 ‘벽’을 넘어보지 않은 사람은 당최 이해할 수 없는 선문답 같은 문구일 테다. 모든 것이 잘 갖추어진 환경, 잘 ‘만들어지고 관리 받은’ 모범생 같은 이들이 양산되는 오늘날의 분위기에서 장욱진 화백과 같은 분들은 점점 보기 힘들어지는 인물의 유형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 아이들이 그린 낙서처럼 보이는 화백의 그림을 보다가 스위스 태생의 독일 화가 폴 클레(Paul Klee)의 드로잉하고도 닮은 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동굴 벽화에 담겨있는 시원의 삶을 보여주는 듯 군더더기 없는 묘사 때문이었다. 일종의 상징 기호처럼 보일 정도로 간결한 선들만으로 표현한 사람과 산, 해와 달 등이 어우러진 배경을 보고서 말이다. 혹은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뼈대만 남아 있는 조각상을 보는 듯한 인상을 준다. 마치 문명이 인간에게 덧칠한 모든 흔적을 제거해버리려는 듯 본질만 남은 선, 간신히 인간임을 알아보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선만 남은 모습들에서 묘한 연대 의식 같은 것들을 느꼈다고 한다면 나만의 착각일까. 그럼에도 장욱진 화백의 그림에는 인물의 표정이 보이고 이야기가 들리는 듯하다. 어떤 인물 그림에선 의지와 인격, 그리고 역동이 느껴지기도 한다.
저자는 ‘고요와 고독’ 속에서만 그림을 그려야 했다. 경기도 덕소, 수안보, 신갈 등 현재는 관광지 내지는 도시 개발로 번잡해진 장소가 되었지만, 그가 작업하던 시기에는 외지고 한적한 곳이었다. 작업장 주변이 개발되어 그림 작업에 집중하기 힘들어지게 되면 그는 미련 없이 떠나 새로운 곳을 물색했다. 역설적으로 작가의 아틀리에 장소를 찾아나서는 과정은 대한민국의 변화상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셈이었다. 무엇보다 화백이 그림을 그릴 때면 아무것도 방해하는 것 없이 스스로를 고립시킨 후에라야 집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자신을 한 곳에 몰아세워 놓고 감각을 다스려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 그림 그릴 때의 나는 이 우주 가운데 홀로 고립되어 서 있는 것이다.”(47)
저자에게 그림은 무엇이었을까.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는 어떤 의미였을까. 무엇보다 이 행위는 자기 자신과의 대면을 전제하는 일이었을 테다. 그는 ‘그림에 나를 고백하고, 나를 드러내며 나를 발산한다’(181)라고 자신의 그림그리기를 정리했다. 예술에 대한 나의 부족한 감수성과 이해력으로 주목한 작가의 예술관은 다음에 인용한 문장에 잘 정리가 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인상파 이후의 그림은 한 마디로 말하면 그 자아의 발견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자기에 대한 사고방식이, 이것이 오늘의 그림을 옛날의 그림과 구별 짓는 키포인트다. 한 작가의 개성적인 발상과 방법만이 그림의 기준이 된다. 그러나 지금까지 있었던 질서의 파괴는 단지 파괴로서 결말을 지어서는 안 된다. 개성적인 동시에 그것은 또한 보편성을 가진 것이 아니어서는 안 된다. 즉 있었던 질서의 파괴는 다시 그 위에 이루어지는 새로운 질서일 때만 의의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항상 자기의 언어를 가지는 동시에 동시대인의 공동한 언어를 또한 망각해서는 아니 된다.”(133)
이 표현에는 알듯 하면서도 쉽지 않은 뜻이 담겨 있다. 작가의 생각은 무엇보다 현대 미술의 접근 방식을 말하고 있는 듯하며, 그 본질로 자기와의 대면을 언급한다. 결국 예술가는 ‘나는 어떤 존재인가. 나는 무엇인가’ 라는 근원적인 질문과 마주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내 기억에 의하면 기존의 질서 파괴 행위는 미술 대학교 졸업 전시회에 가보면 고민의 결과물로 흔히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화백의 표현대로 공유되는 전달 수단으로서의 언어를 자기화한 작품은 과연 얼마나 될까? 4년에 걸친 미술대학 시절에 자기만의 언어를 획득하는 일은 정말 어려울 것이라 생각한다.
나아가 자기만의 언어 뿐 아니라 동시에 ‘공동한 언어’를 잊지 않고 반영되려면 나와 마주하는 것에서 끝나서는 안 될 것 같다. 자신에 대한 관심을 외부로 향하여 사회와 공동체, 타인에 대한 주도면밀하고 집요한 관찰과 이해가 수반되어야 하지 않을까. 예술가들이 사회 문제와 사람들의 고통에 예민하게 감지하고 반응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바로 자신만의 언어를 소통의 언어, 공동의 언어로 ‘코딩’하는 작업을 몸소 해야 하니까 말이다. ‘언어’는 소통을 위해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원초적인 인간의 약속이자 기호가 아닌가. 그러므로 아무리 저자처럼 홀로 고립되어 작업을 한다고 해도, 예술가가 타자와 사회에 무관심하다면 그 또한 예술가의 기본적인 책임을 방기하는 것일 테다. 여기에 예술행위의 기본적인 정치성이 깃들어 있는 것이기도 하겠다. 그러므로 장욱진 화백이 언급한 ‘자아의 발견’은 거울에 비친 내 모습만을 바라보라는 주문도 아니고, 그래서도 안 될 것이다. 타인을 통해서도 자기를 발견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주문이 아닐까. 결국 예술가의 작업이란 자기에 대한 ‘사랑’, 생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알곡 없는 쭉정이에 불과한 요식행위에 불과한 것이 될 것이다. 이 한 가지 과정만 해도 상당한 수련이 필요할 듯하다. 알 듯 모를 듯한 장욱진 화백의 예술관에 대해 나는 이렇게 읽었다.
한 가지 더 책을 읽고 기억에 남는 사연은 아동문학가 마해송 선생과의 만남과 인연이었다. 마해송 선생은 일본 유학시절 홍난파 등과 교제하고 1924년에 방정환 선생 등과 함께 색동회를 조직한 분이었다. 장욱진 화백이 아침마다 마주치는 노인 한 분의 외모가 심상치 않았던 모양이다. 선글라스에 지팡이를 짚고 잠바를 입은 모습을 보던 화백이 마해송 선생에게 가서 통성명을 했다고 한다. 그렇게 새벽 산책길에서 만난 인연은 가족으로 이어지고, 마해송 선생의 동화집 작업에 화백이 그림을 그리기도 하는 관계로 발전했다. 그리고 선생의 아들인 마종기 선생은 시인으로도 활동했던 것 같다. 훗날 마종기 선생이 본인의 시집을 낼 때, 장욱진 화백에게 부탁하여 표지 그림을 얻어냈다고 한다.
타인의 간섭에 거부감을 느끼고 이웃하고도 통성명을 하지 않는 요즘 도시 생활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서로 알게 되면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 옅어지고 관계에 대한 경계가 쉽게 허물어지기에 관계가 불편해지기도 한다. 물론 여기에 정답은 없다. 하지만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지키며 사람들과의 인연을 만들어가는 일은 요즘 현실에서 아쉬운 지점이기도 하다. 상대방에 대한 이해가 조금 더해진다면 타인의 실수와 처지에 공감하기가 더 쉬워질 테니까. 그래서 나는 저자가 자기 이야기만 늘어놓는 에세이보다는 우연한 인연이 등장하고, 그 관계의 발전이 있는 그런 에세이를 좋아하게 되었다. 장욱진 화백의 산문에는 화가 본인의 그림과 예술관, 내면세계가 담겨있지만 여기에 사람과의 새로운 인연이 소개되는 이야기들이 더해져 다채로웠다.
저자의 연보를 보다가 특이한 이력에 눈길이 간다. 그는 1944년 겨울, 29세의 나이에 일제의 비행장 만드는 징용에 끌려갔던 경험이 있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그는 곧바로 일본 관동군 해군본부 경리요원으로 배속된 후 9개월 만에 해방을 맞아 돌아올 수 있었다. 저자는 1918년생이므로 출생 후 30세까지 나라 없는 식민지 상태에서 성장하고 공부한 셈이다. 이런 엄혹한 상황에서 어떻게 그토록 생을 ‘사랑’할 수 있었고, 예술에서 자신의 언어, 자신의 목소리를 찾을 수 있었을까. 연보를 통해 청년 장욱진의 시절을 상상만 해볼 뿐이다. 이렇듯 산문집 《강가의 아틀리에》는 삶을 온 몸으로 ‘사랑’했던 한 예술가의 담담한 고백이다.
[1] "검은 것과 흰 것, 그게 제일 힘든 거예요. 색에 대해서는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그 중에서 흰 건, 이 빛에서 가장 단순하다는 게 아주 교묘한 거거든. (...) 우린 은연중에 흰 것에 대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다, 그건 행복한 거예요. 내 환쟁이 바탕이 바로 여기에 있어요." (25)
[2] "아기자기하게 닳고 닳은 조약돌에서 읽을 수 있는 세월의 엄청난 흔적과 자연의 기나긴 역사. 그 자연의 줄기찬 흐름 속에서 잠깐, 아주 잠깐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인생의 덧없음. 이런 것들은 나에게 무한(無限)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준다. 하지만 인생은 덧없기 때문에 더욱 아름다울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닐까. 사라지려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연민의 정으로써 나는 생(生)을 사랑한다." (33)
[3] "강가에 앉아서 물과 어린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영상은 어느새 막걸리를 사랑하는 장면으로 바뀐다. 취한다는 것은 의식의 마비를 위한 도피가 아니라 모든 것을 근본에서 사랑한다는 것이다." (46)
[4] "나는 고요와 고독 속에서 그림을 그린다. 자신을 한곳에 몰아세워 놓고 감각을 다스려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아무것도 나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 그림 그릴 때의 나는 이 우주 가운데 홀로 고립되어 서 있는 것이다." (47)
[5] "인상파 이후의 그림은 한 마디로 말하면 그 자아의 발견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자기에 대한 사고방식이, 이것이 오늘의 그림을 옛날의 그림과 구별 짓는 키포인트다. 한 작가의 개성적인 발상과 방법만이 그림의 기준이 된다. 그러나 지금까지 있었던 질서의 파괴는 단지 파괴로서 결말을 지어서는 안 된다. 개성적인 동시에 그것은 또한 보편성을 가진 것이 아니어서는 안 된다. 즉 있었던 질서의 파괴는 다시 그 위에 이루어지는 새로운 질서일 때만 의의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항상 자기의 언어를 가지는 동시에 동시대인의 공동한 언어를 또한 망각해서는 아니 된다."(133)
[6] "분만될 시기를 꿋꿋이 기다리는 일, 이것만이 예술가의 삶" (146)
-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
[7] "난 그림에 나를 고백하고, 다 나를 드러내고 나를 발산한다." (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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