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흐트와 아들
빌렘 얀 오텐 지음, 유동익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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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고백하자면 나는 오스카 와일드를 동화로밖에 알지 못한다. 그의 다른 책은 읽었으나 기억나지 않고, 오로지 아홉 편의 동화로만 이 작가를 매우 멋지게 기억한다. 동화에서 나는 그의 역설적인 비극, 까마득한 슬픔이 아름다움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신기한 눈으로 좇는다. 그래서 <스페흐트와 아들>의 표지에 '오스카 와일드의 재림!'이라 표현한 것에 일단 마음이 끌렸다. 이 말은 네덜란드에서 최고 권위의 리브리스 문학상을 받았다는 말에는 그다지 마음이 끌리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내가 모르는 상. 하지만 무언가 있겠거니 하는 호기심은 일었다. 무엇보다 표지가 마음에 들었다. 창문 뒤로 보이는 어떤 존재에 까닭 모를 친근감이 일기도 했다. 우리가 누군가를 바라보는 게 결국 창문으로 내다보는 실루엣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다.  

캔버스의 눈으로 바라보는 화가와 세상. 그들의 감추어진 욕망과 진실, 오해와 비극, 그리고 존재의 본질로 향하는 질문 등. 이런 것들이 내가 읽은 느낌이다. 그런데 잘 읽어놓고서 막상 되새기니 어떤 고갱이가 잡히지는 않는다. 너무 많은 것들을 떠올리게 된다고나 할까. 유럽 쪽의 상 받은 작품들에서 자주 느끼는 그런 느낌. 좋기도 하고 (컨디션에 따라서는) 싫기도 하고. 아무튼 드라마틱하지 않은데도 눈을 뗄 수 없게 하는 묘한 끌어당김이 있고, 추리소설을 보는 듯이 풀려나가다가 반전을 보여주는 얼개가 흥미롭다. 그리고 잘 읽힌다(잘 이해되는 것과는 별개로).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캔버스는 그야말로 백지다. 캔버스는 화가의 손길이 닿아야 무엇이 된다.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어야 꽃이 되는 존재'다. 이 백지 상태의 캔버스가 우리에게 이야기를 들려 준다. 우리 독자는 캔버스가 알아가는 것들을 함께 알아가는 수밖에 없다. 때때로 캔버스가 묘사하는 것들을 캔버스보다 더 잘 이해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독자의 앎은 캔버스 속에 갇혀 있다. 아마 조금은 답답하다 느낀 건 그런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앎이 한정된 독자에게 작가가 던지는 무수한 질문들. 캔버스가 화가 펠릭스를 끈질기게 창조자로 부르는 것에서부터 작가는 우리에게 커다란 질문을 던진다. 창조자와 피조물의 관계가 뭐란 말인가 라며. 

고민 끝에 이런 결론을 내렸다. 창조자란 근본적으로 자신밖에 만들 수밖에 없고, 화가는 자신을 그릴 수밖에 없다고. '자신'은 때로, 아버지, 아들, 친구의 얼굴을 하기도 하지만 결국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자기 자신을 창조한다는 것. 결국 스페흐트가 펠릭스에게 의뢰해 그려진 모습을 보고 싶었던 싱어는 결국 젊고 어리고 방종된 어린 스페흐트 자기 자신이 아니었을까. 어떤 형태로든 그가 싱어를 사랑한 것은 진실이겠구나..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우리 삶이란 것도 화가가 자화상을 완성해가는 과정이 아니겠나 싶다. 어느 날 뒤뜰로 가지고 나가 태워버리고 싶어질 때가 올. 그럼에도 사진을 이어붙이듯 찢어진 조각을 가슴에 안고 눈물 철철 흘리며 살아나갈 수밖에 없는. 펠릭스가 그런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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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주노 디아스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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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세상에는 도덕성이 결여된 권력자가 태어난다. 그는 그 권력으로 숱한 사람을 죽인다(혹은 죽을 만큼 고통스럽게 한다). 왜 그런 인물이 길지도 않은 인간의 역사에 점점이 존재할까? 도대체 왜 그런 현상이 생길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는 그 현상은, 신(혹은 조물주)에 대한 비아냥까지 불러일으킨다. 그거 혹시 인구 팽창을 저지하기 위한 신의 디자인일까? 시험이라는 이름으로 횡행하는.  

그런 뒤틀린 권력자의 세상에는 희한하게도 너무 순수해서 어찌해 볼 재간이 없는 낙오자가 늘 존재하여, 권력의 오물을 옴팡 뒤집어쓴다. 그런 순수한 인간들은 마치 오크족이 우글거리는 모르도르에 존재하는 정상적인 인간이나 마찬가지 신세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홀든 같은 이들, 흔히 미쳤거나 그에 버금가는 단어로 표현되는 인물들. 다른 사람처럼 쉽게 때묻지 못하는 고집쟁이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순수한 존재들은? 진실로 미친 세상에 휩쓸려 함께 광기를 내놓지 못하는 아웃사이더들은? 죽을 때까지 적응하지 못해 겉도는 그런 사람들에게 삶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오스카 와오에게 삶은! 

오스카 와오, 그 아이의 삶은 대를 이어 내려온 불운(푸쿠, 즉 유럽인들이 신세계에 끌어다 놓은 저주, 파멸. 결국 그것은 전 세계를 뒤덮었다.)의 소산이었다. 그리고 그 가족의 불운의 한가운데에 독재자 트루히요(푸쿠 그 자체)가 존재한다. 미국을 뒷배로 도미니카공화국 전체를 지옥으로 만들어 버린 진정한 광인. 그에게 딸을 선뜻 내놓지 않았던 오스카의 할아버지 아벨라르는 쥐도새도 모르게 어딘가로 끌려가고, 그가 온 가족을 제물로 하여 지키려 했던 딸들은 저마다의 나락으로 떨어져 내린다. 가족은 그야말로 산산이 부서진다. 그는 무엇을 위해 무엇을 지킨 것일까?  

아벨라르는, 힘이 없어서 독재에 항거하지 못한, 혹은 이미 나라를 잃은지 오래 돼서 내선일체라는 말에 현혹된 지식인들을 향해 정면으로 던지는 화살이다. 비록 산산이 부서질지라도 내버리면 안 되는 '단 하나'에 대한 실마리가 여기에 있다. 참혹한 결과를 그도 예견했으나 그는 차마 딸을 내놓지 못했다. 그건 그가 그 미친 세상에서 지키고 싶었던 마지막 무엇이었을 것이다. 아비가 딸을 들어 독재자의 침대에 바치는 일은 그저 '트루히요의 엽기적인 성욕의 희생양'이라는 말로만 치부해 버릴 수 없는, 종말의 상징이었을 것이다. 아벨라르는 깊숙한 곳에서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다. 가족 모두를 죽음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으며 지킬 수밖에 없는 슬픈 진실을. 

가족 와해의 와중에 버려졌던 오스카의 어머니, 아벨라르의 어린 세째딸 벨리는 평생토록 속에 암덩어리를 키우며 살아가고, 그로 인해 죽는다. 그리고 오스카. 도저히 봐 줄 수 없을 정도로 뚱뚱하고, 게임이나 판타지에 빠져 현실 따위는 멀리 던져버린 오타쿠. 그 가족의 불운의 결과물로 찬란하게 빛나는 외톨이. 그가 반지의 제왕의 어느 지점이거나 게임 속 한 곳에서 미친 듯이 내달린 건, 오로지 방에 처박혀서만 지내는 외롭고 불운한 젊은 아이로서는 필연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꿈을 꿀 수 있는 단 하나의 자유가 거기에 있었으므로. 

오스카는 결국 사랑(혹은 유일한 자유) 때문에 목숨을 잃는다. 진정한 싸구려로 여겨지기 십상인 연상의 몸 파는 여자 이본은 마침내 오스카의 사랑에 굴복하여 울고 웃으며 묻는다. "나 싸구려 같아 보이지 않아?" "당신과 싸구려는 어울리지 않아요, 이본." 진실로 사랑에 싸구려란 없다. 아니, 싸구려가 존재하지 않는 유일한 것이 있다면 그건 사랑일 것이다. 

그리하여, 사랑을 한 오스카는 죽는다. 그건 정말 오스카다운 최후였다. 사랑으로 죽는 것. 사실 트루히요나 히틀러나 또는 누구, 누구, 누구... 또 그들에게 사로잡혀 온갖 짓을 저지르는 영혼들, 그 수많은 푸쿠를 제압할 수 있는 건, 그 반대의 주문, 사파밖에 없다. 그건 사랑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은 죽일 수 있지만 사랑을 없애버릴 수는 없다.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희망이다. 우리 모두가 깨닫기 힘들어하고, 차마 모른 채 죽어가는 그것, 사랑을 오스카는 해낸 것이다. 마지막 순간 그 사탕수수밭에서 오스카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으며, 그건 위대한 사랑을 세상에서 없애는 짓이라고. 사랑은 드문 것으로, 백만 가지 다른 것들과 자주 혼동되곤 한다고. 이것이 진실임을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자신이라고. 

오스카로부터 되짚어 올라가는 이 기막힌 사연의 가족사를 읽으며, 그들이 살았던 기막힌 세상 이야기를 들으며, 숨이 턱턱 막혀왔다. 남들은 다 재미있다 하는데(물론 재미의 종류는 여러 가지이다.), 나는 그저 답답하고 힘들었다. 혹자는 가르시아 마르케스 이후 최고의 마술적 리얼리즘이(그 몽구스의 출현이 큰 역할을 했으리라.)라 하는데, 마술적을 떼어내고 그저 리얼리얼리즘이라 부르고 싶은 마음만 치솟았다. 이토록 지독히 사실적이라니! 이토록 지독히 사실적이라니! 

그러나, 오스카. 네가 불러다 놓은 사파는 지금도 힘겹게 세상을 서성거리고 있다. 사랑은 네가 섰던 사탕수수밭에서부터 은근한 바람으로 불어 그나마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안간힘을 쓴다. 그래서, 고맙다. 진심으로 네게 손을 내밀어 고마운 인사를 보낸다. 그곳, '달의 청색 구역'이거나 '더 강력하고 따뜻한 세상'에서 지금 너는 행복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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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9-02-19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재밌나요?
전 이제 중간쯤 읽었는데
자유롭게 쓴거 같긴한데 딱히 제 취향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끝까지 읽을 수 있을까? 의문도나고 그러면서 읽고 있습니다. 흐~

파란흙 2009-02-20 22:03   좋아요 0 | URL
취향이 아니실 수 있어요. 저도 재미보다는 다른 느낌이 더 컸어요. 색다르고, 신선하달까. 그리고 가볍게 던지는 듯하면서도 깊이가 좀 있는 듯한. 퓰리처상 수상작인 값은 합니다.^^
 
헤이안 일본 - 일본 귀족문화의 원류
모로 미야 지음, 노만수 옮김 / 일빛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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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지 모노가타리를 처음 접한 건 중학생 때였다. 집에 있는 책장을 뒤적거리다 손에 잡힌 책이었다. 지금껏 남아 있는 기억은 참 이해가 안 됐는데도 다 읽었더라는 것. 이해 안 됐던 것은 히카루 겐지라는 주인공의 무소불위라 할 만한 여성편력과 그 모든 사랑이 진심이었더라는 것이었고, 그럼에도 다 읽었던 것은 절절한 심경이 드러난 연애 소설이라는 느낌 때문이었다. 참 절절하기도 하고, 많기도 한 사랑이라니! 나의 일본 문화에 대한 '참 오버한다'는 느낌은 거기서 비롯됐던 것이 아닐까, 지금 생각하니 그렇다. 

헤이안이라는 시대를 총제적으로 다룬 이 책은 내게는, 그 막연한 겐지 모노가타리에 대한 조금은 이해가능한 해설서이다. 이 책 이전에 나는 겐지 이야기의 무대가 헤이안 시대였더라는 것도 몰랐고, 무엇이 헤이안을 관통하는 정서였던지도 무지했다. 책을 다 읽은 지금, 여전히 잘 모르겠다.(그게 이 책의 흠이다. 나름대로 한껏 친절한 어투를 하고 있는 이 책이 일본 문화에 대한 기본지식조차 없는 문외한에게는 여전히 오리무중이기 십상이라는 것을 저자가 잘 모른다는 것. 좀더 단순화, 명료화할 수는 없었을까? 물론 일본 고대의 천년을 한 숟가락에 떠먹겠다는 것 또한 무지한 독자의 과욕일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뭔가 느낌은 있다. <모노노케 히메>라는 영화에 대한 이해도 이제와서 좀 더 될 것 같은 느낌. 모노노케 즉 원령과 신도의 결합, 그것과 문학의 관계, 그리고 습속에 미친 영향. 우리 토속신앙에서도 자주 발견되는 '무엇을 해야 한다'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들이 헤이안 시대에는 그야말로 삶을 지배했었다. 과학이 스며들기 전인 천년 이전, 그들은 이해 불가능한 모든 현상을 모노노케에게로 돌렸고, 대적할 수 없는 돌연사나 자연현상을 상대로 불안함을 가시기 위한 온갖 노력을 일상에서 기울였던 것 같다. 그것이 마음 가는 대로 사랑하고, 닥쳐온 운명에 조용히 수긍하며, 속으로 쌓여가는 슬픔과 안타까움을 과장되게 드러내게 한 것이 아닐까 싶은. 그것이 또한 어느 의미로는 고립을 타고난 섬나라 사람들의 필연적 정서가 아닐까 싶기도 하고. 

하도 복잡한 인맥과 정치적 상황의 설명 때문에 읽기 쉽지 않았지만 또 재미없는 것은 아니어서 결국 정리를 포기하고 느낌으로 다 읽었다. 나야 그렇지만 일본 문화나 일본 애니 혹은 일본의 그로테스크한 예술, 표리부동하다고 느끼지만 생존에 필요불가결했던 그들의 예의에 대해 관심 있거나, 공부하고 싶거나 한 이들은 모로 미야라는 이 독특한 작가의 책을 접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일본인 아버지와 타이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두 문화를 아우르는 이 여성 작가는 박학다식할 뿐 아니라 문체가 사뭇 유머러스해서 읽는 즐거움이 있다. 다만 그녀의 유머를 얼마나 만끽할지는 독자에 따라 천차만별일 것이다.(마지막으로 생뚱맞은 한 줄 소감. 나도 헤이안 사람들처럼 하루 두 끼만 먹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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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2009-01-06 0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구였는지..기억이 안나는데 세계의 전쟁을 없애려면 민족주의를 없애야 한다고. 민족주의가 전쟁 대부분의 시발이라고 하는 말이 공감이 갔어요. 반감이라 해야 하나 편견이라 해야 하나 일본에 대해 느끼는..개인적으로 일본에 대해 어떤 느낌을 받는 기회가 없었는데두요. 책도 한발짝 물러서게 만들게 해요. 넘 편협한 시선에 제 안에도 있다는게. 껄끄럽네요

파란흙 2009-01-07 13:38   좋아요 0 | URL
황석영님도 그런 말씀 했어요. 민족주의 국가주의가 조금은 시대착오적이라는 취지의. 하지만 우리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그걸 벗어나기가 힘들죠. 일본에 대한 복잡한 감정도 해소하기가 쉽지 않고. 실은 저도 마찬가지랍니다^^

순오기 2009-01-07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본은 몇 편의 소설로 기억된 게 전부~~
마지막 생뚱맞는 한 줄 소감처럼, 요즘 아침은 안 먹고 점심에 두끼 양을 먹는다니까요.ㅜㅜ

파란흙 2009-01-09 10:34   좋아요 0 | URL
ㅎㅎ. 저와 비슷하신 생활 패턴. 기껏 건너뛰면 꼭 두배로 보충하죠. 일본... 영화 두 편 권해 드려요. <카모메식당>과 <안경>. 같은 감독의 작품인데 아이들과 함께 보셔도 좋을 듯.

순오기 2009-01-09 20:13   좋아요 0 | URL
알라디너들이 '카모메식당'과'안경' 많이 얘기하던데 다 못 본 작품이예요.
비디오가게에 있나 알아봐야겠군요. 아니면 케이블에서 볼 수 있으려나~ 추천 고맙습니다.^^
 
누가 말을 죽였을까 - 이시백 연작소설집
이시백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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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잘 쓴 연작소설. 이야기들 하나 하나가 어쩌면 이리 날카롭고, 둥글둥글하면서도, 구수하고, 웃음이 나고, 그리고 아플까! 충청도 어느 곳의 몇 동네에서 벌어지는 온갖 이야기들이 감칠맛나게 그려져 있다. 재미있다. 농촌의 현실을 이야기하되, 어느 쪽으로 지나치게 굴러가 빤히 끝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모서리마다 작가가 지키고 섰다가 이야기의 바퀴가 진창으로 빠지지 않게 살짝 밀어주어서 모든 이야기들이 살살 알맞게 굴러다니는 느낌이다. 오호, 모르고 지나갔으면 한참 아쉬웠을 작가와 작품. 

다만 앞부분 작가의 말이나 뒷부분 작품 해설이 지나치게 친절하다는 느낌이 있다. 작가가 이 작품에 대한 세평을 미리 이야기해놓아서 생각을 더 나아가지 않게 하는 느낌, 뒷부분의 해설에서 이미 독자가 느끼는 걸 '다 안다'는 듯이 써놓은 부분이 좀 섭섭하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해버려서.(사실 이건 그냥 투정이다. 마음이 딱 맞는 이들을 만나 선수를 빼앗긴 느낌인.) 

-돈이 되지 않는 농촌을 돈이 되는 도시로 바꾼다 하니, 조만간 만나기 어렵게 될 농촌과 농민들의 풍경을 나라도 적어 두려고 했다.

-앞으로 나갈 수도,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농촌의 현실을 우스개감으로 만들었다는 소리를 들을까 적잖이 걱정된다.

-오래전의 이야기같다는 평도 있다. 유감스럽게도 요즘 내가 사는 마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엮은 글이다.(작가의 말에서. 7쪽) 

이런 염려와 변명은 작가 입장에서 할 만하나, 작품의 질이 그 모든 걸 상쇄한다. 임진택 씨가 해설해 놓았듯이 마침내 이문구 선생의 계보를 잇는 수준 높은 작품이 나왔음을 기쁘게 여기는 독자 입장에서 보건대. 독자 누구라도 소리 내어 읽어볼 수밖에 없게 하는 맛깔나는 문장들. 읽으며 간단 없이 키득거려야 하는 보기 드문 이야기들. 개중에는 눈물 한 방울 똑 떨어뜨리는 페이소스까지. 정말 작가가 써놓았듯이 도시 사람들이 시골 가서 그네들은 맛 없어 밀쳐놓은 음식을 시골의 맛이네 뭐네 하며 심취하는 그런 웃긴 느낌이긴 하지만 시골음식처럼 간이 깊고 알맞다. 2008년 마지막에 발견한 보석같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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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2009-01-02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문구 선생님 계보라니 .. 흥미가 생기네요. 전 새해를 맛깔나는 책으로 시작할수 있겠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셔요

파란흙 2009-01-05 11:27   좋아요 0 | URL
이 책 읽으며 간만에 흥분됐어요. 순전히 제 느낌만일수도 있지만 이문구 선생을 떠올렸더랬죠. 좋은 책으로 새해 시작하시고, 파란님과 주변에 좋은 일 많이 생기기 기원합니다.
 
지귀, 선덕 여왕을 꿈꾸다 푸른도서관 27
강숙인 지음 / 푸른책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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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생각하는 선덕여왕은 젊고 아름다우며 하늘거리는 금관 아래 영롱한 귀걸이를 한 모습이다. 그분의 예순 넘은 나이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아버지 진평왕의 재위가 53년 동안 이어졌고, 선덕여왕의 재위는 16년. 그녀가 왕위에 올랐을 때는 이미 나이가 많았다. 그랬겠구나. 그동안 선덕여왕 아닌 덕만 공주에 대해 한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던 것이 참 희한하게 느껴졌다. 오랜 세월 나이 든 공주였던 그녀. 더 희한한 것은 불과 며칠 전 지귀설화를 다시 찬찬히 읽어보았던 우연의 일치다. 이 책을 만나려고 그랬던가 싶은. 나는 순수한 지귀의 사랑이 화마(火魔)로 화할 수 밖에 없었던 비극적 결말이 늘 마음 아팠다. 과유불급이라는 걸까? 사랑도? 다정도 지나치면 병이라 하니, 시쳇말로 스토커 정도로밖에 취급되지 않은 걸까? 지귀의 사랑은? 그러나 생각컨대 상대를 괴롭혀 내 만족을 추구하지 않는 사랑은 아무리 깊어도 사랑이다. 이 책의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그런 사랑 말이다. 여왕, 지귀, 광덕..그들 각자의 사랑.  

평생을 홀로 산 선덕여왕에게는 정말 사랑이 없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이 책은 그런 개연성 있는 상상에서 출발한다. 만약 지귀 이야기가 사실과 연관되어 있다면 영묘사 화재 사건과는 어떤 고리를 지니고 있을까? 이 책은 그런 상상에서도 출발한다. 그리고 상상이 한 자리에 모인다. 예순이 넘은 여왕은 어린 화랑 가진을 사랑했고 그건 그녀 인생의 유일하고 때늦은 사랑이었다. 비밀스럽고 비밀스러워 결국 홀로 간직하고 떠날 수밖에 없었던 사랑. 열일곱의 평민인 지귀는 선덕여왕을 사랑한다. 때이르고, 가여운 사랑. 여왕의 사랑은 눈부시고 아름다운 젊음에 대한 동경과 섞였고, 지귀의 사랑은 충성과 섞였다. 그래서 사랑이 덜했느냐 하면 그렇지 않고 더 진한 핏빛을 띠었다.그들의 사랑 역시 다른 사랑과 똑같이 아름다웠다. 슬픈 아름다움. 

사랑 이야기와 더불어 책의 많은 부분은 신라가 당과 연합하여 삼국통일을 이루어내게 된 배경에 할애되어 있다. 그런 악수를 둘 수밖에 없었던 김춘추 측의 고민과 이를 저지하려는 반대쪽(비담, 염종)의 울분이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생생히 표현되어 있다. 작가는 그런 역사의 회오리가 사랑을 뒤흔들게, 그렇게 안배해 놓았다. 참 얄궂기도 한 작가의 상상력이다. 선덕여왕이 사랑한 가진은 가공의 인물이지만 이 책에서는 결국 반란을 일의는 염종의 아들이다. 역모의 끝은 비극이다. 지귀는 가진의 인품에 반하여 그의 낭도가 되고 싶어 했지만 은혜를 베푼 김유신의 사주를 물리치지 못하고 염탐을 한다. 그의 흠모의 대상은 역적이 되고 만 가진이며, 그의 사랑은 조국 또는 선덕여왕이다. 어떻게 보면 삶에는, 사랑에는 늘 저런 이율배반적인 비극이 도사리고 있다는 생각도 해본다. 그래서 모든 사랑은 아름답되, 슬픈 것이다.   

종횡무진으로 달리는 상상력과 애잔한 사랑에 쉬지 못한 채 단숨에 책을 다 읽고 생각해보니 나는 <마지막 왕자> 이래 강숙인 작가의 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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