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의 아이
아마두 함파테 바 지음, 이희정 옮김 / 북스코프(아카넷)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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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본문 572쪽의 이 책을 읽는 매일밤 늦은 시간은, 일종의 평화가 찾아드는 시간이었다. 마치 기교 없이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무성영화를 보는 듯, 귀나 눈의 성가신 자극 없이 편안하게 읽히는 책이었다.

아마두 함파테 바는 1900년에 태어나 1991년에 죽었으니 요즘으로 견주어도 매우 장수한 인물이다. 그가 90년 넘는 세월 동안 지켜본 아프리카의 삶과 생각, 전통이 고스란히 이 책으로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참 의미롭다. 이 책을 읽기 전과 후의 아프리카에 대한 내 생각은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다른 독자들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고.

아마두의 삶은 프랑스 식민지로서의 말리 인들의 삶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백인들은 똥조차도 남다른 별개의 종으로, 어떤 백인도 흑인을 향해 채찍을 휘두를 수 있던 시대이니 더 말할 것도 없다. 아마두 역시 차출되어 프랑스의 식민교육 대상자로서 프랑스어를 배워 흑백인, 즉 백인의 하수인으로서 토착민들에게 프랑스식 문화를 전수하는 중간자 역할을 했고, 그 일이 작가로서의 기반을 닦는 계기가 되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들판의 아이>에 등장하는 작가를 비롯한 수많은 인물들은 여전히 아프리카의 전통을 목숨처럼 귀하게 여기는 자부심의 상징들이었다. 아무도, 조상과 자신들의 땅과, 이웃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고, 밖에서 어떤 일이 벌어져도 자연과 동화되는 정신세계는 놀랄 만큼 고요했다. 그들은 그 흙먼지 요란한 길에서, 저녁마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 노래하는 공동체에서 더없이 행복했던 것이다.

그처럼 깊은 강물과도 같이 깊이 흐르는 정신세계를, 다른 문화에서는 어쭙잖은 잣대로 '야만'이라고 몰아부쳤고, 지금도 그러고 있다. 그들이, 총과 대포를 앞세우고 증기선과 기차를 앞세워 한 구석으로 몰아넣은 아프리카인들은 다만 그런 기계에 일시적으로 주눅들었을 뿐이고, 틈만 나면 이 유서 깊은 종족들은 백인을 우습게 여겼다. 이들의 전통과 관습에 대한 이야기, 그 의미를 차근차근 읽고 나면 독자인 나도 백인들이 우스워졌다. 그 하얀 벽돌 집과 은식기가!'아프리카 사람들끼리 있을 때는 식민 당국의 어떤 명령도 통하지 않았다. 특히 조그만 선물이 오갈 땐 말할 것도 없었다.'(567p.)는 문장은 서구식 합리에 길들여진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가 자못 심장하다.

이 책에서는 한 마디도 누구를 비난하는 문장이 없다. 아마두는 아프리카의 지혜에서 비롯된, '누구에게도 한 조각 착한 마음은 남아 있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기대를 결코 저버려선 안 된다는 사실'(453p.)을 잘 아는 사람이다. 그는 보이는 현상 뒤에 숨은 실낱같은 호의를 찾아내는 눈을 가졌고, 그럼에도 '상관을 받들되 신처럼 여기지는 말라.'(570p.)는 어머니의 충고를 한 시도 잊지 않는다. 그래서 이 책의 많은 등장인물들은 조금씩의 결점을 지녔으나 한결같이 인간적이다. 그들 위로 어떤 역사가 지나가며 피를 부르고, 삶의 터전을 황폐화시켰든지, 그들은 훼손되지 않았다. 적어도 이 책에서는.

아마두의 어머니 카디야의 삶은 마치 자식을 공부시키기 위해 몸뻬 바지 하나로 사철을 나며, 부엌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식구들이 남은 음식을 맛나게 먹었던 우리네 어머니의 삶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러면서도 곧은 정신 하나는 누구도 못 건드리게 했던 그 꼬장꼬장한 삶을. 그토록 잘 생겼고, 품위 있고, 강했으며, 동생을 사랑했던, 아마두의 형 함마둔이 허망하게 죽음을 맞이했을 때는 얼마나 마음이 아팠던지. 그 어머니 카디야의 마음 속이 들여다보이는 느낌이었다. 눈물을 보이지 않고 돌아설 줄 아는 강한 어머니의 마음을 나는 이제 안다.

이 책, 마치 어릴 적 내 삶의 일부와도 겹쳐지는 듯한 아마두의 어린 시절은 낯설면서도 친숙한 느낌이다. 한 번쯤, 지나치게 비장하거나, 끔찍하지 않은 그냥 아프리카 이야기를 듣고 싶은 모두에게 권한다. 눈꼽만큼 남은 우월의식 따위 집어던져 버릴 자세가 된 모든 사람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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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속의 거울 메타포 1
미하엘 엔데 지음, 에드가 엔데 그림, 이병서 옮김 / 메타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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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보물창고에서 본격 문학 브랜드가 나왔고, <거울 속의 거울>은 그 첫 번째 책이다. 미하엘 엔데. 누구나 그렇듯이 그의 <모모>에서 폐부를 찌르는  감동을 받은 독자로서는 여러모로 기대가 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책을 읽어내려가는 동안 적잖이 당황했다. 내가 제대로 읽고 있는 걸까? 엔데가 전하려 한 메시지를 내가, 이해하기는 하는 건가? 이런 생각이 자꾸만 솟구쳤다. 앞으로 넘겨 다시 읽어보기를 여러 차례, 결국 생전 처음으로 메모를 해 가며 뭔가를 맞춰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다 맞춰보기에 지친 나머지 그냥 죽 읽어내려가기로 하고 나니,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 '들어오는 대로 받아들이자. 세세히 이해하려 하지 말고 그저 느낌으로 읽자.'

그랬더니, 이 책은 어두운 자화상으로, 세상의 보이지 않는 곳을 비추는 거울로, 그 속에서 그저 막연히 꾸물거리는 인간군상에 대한 연민으로, 그리고 그럼에도 끝없이 갈구하는 진정한 삶, 자유 그런 것들로 '느껴졌다.'

언젠가 그런 꿈을 꾼 일이 있다. 길다란 복도 끝, 거울을 바라보고 서 있었는데, 그 속에 또 거울이 있고 거기에 비친 나의 모습. 얼마나 무서웠던지, 이후 한동안 내 방에 거울을 두지 않고 지낸 적 있다. 어쩌면, 엔데도 그런 꿈을 한 번쯤 꾸었던 것일까. 그래서 그 경험을 이토록 깊고 넓게, 상상력을 동원해 펼쳐놓았던 것일까. 지독히 난해한데도 묘한 동질성이 자꾸만 스며드는 느낌.

이야기 1에서 호르는 생겨나는 모든 소리들이 끝없는 메아리가 되어 버리는 건물 안에 살고 있다. 그는 오래 전 자신이 내뱉었던 외침의 잔향, 즉 자신의 과거와 마주치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 목소리를 지워 버린다. 그는 공간에 갇혀 있는데도, 공간의 끝에 다다르지 못하고, 늘 낯섬을 느낀다. 그리고 호르는 다시 등장한다. 이야기 30에서. 평원 한가운데 폐허가 된 구조물이 있고, 문이 하나 달려 있고, 두 보초병이 언제 누가 시킨 건지 모르는 채로 그 문을 지키고 있다. 아가씨 하나가 한남자를 데리고 와 그 문으로 들여보낸 뒤 말한다.

"난 저 문 뒤에 있는 내 동생 생각을 했어요. 가엾은 내 동생 호르를요." 

이런 식이다. 서른 개의 이야기가 저마다 개별로 존재하면서 연결고리를 지니고, 되돌아갔다 다시 나오며, 그 연결고리는 단선적이 아니라 매우 복잡하다. 그리고 생각할 수록 미궁으로 빠져드는 느낌 때문에 불편하기까지 하다.

또한 어디서 본 듯한 이야기들이 새로운 색깔로 이야기 군데군데에 섞여 든다. 보초병 이야기나 미노타우루스의 미로나, 이카로스의 날개나, 뭐 그런 이야기들. 그리고 끝이라는 의미를 가진 엔데 자신의 이름을 가진 이도 등장한다. 뭐라 할까. 그야말로 요지경 속을 들여다보다가 현실을 잊어버리는 아이의 느낌. 세상이 이토록 낯설구나.

호르가 존재하는 공간, 그의 삶의 방식, 문, 미로, 미로를 빠져나오게 돕는 실몽당이의 부재 그리고 거울. 이 외 이 책에 등장하는 숱한 사물과 상황은 그야말로 고도의 메타포를 이루고 있어 낱낱이 풀어내기가 불가능할 정도다. 그러나 거울이라는 사물. 그것이 모든 메타포를 아우르고 있다는 생각을 억지로 해 보았다.

거울 속에는 세상이 존재하고, 그것은 실재이면서도 그저 비치는 상일 뿐이고, 거울 속에 비친 거울 속으로 들어갈 수록 삶은 모호해지고, 모든 것이 혼재된다. 거울 속 세상은 그저 꿈일 수 있지만, 반대로 내가 사는 세상이 거울 속에 비친 허상일 수 있다. 도대체 우리는 어디에 갇혀 사는 것일까? 혹, 살기는 하는 걸까? 그런, 유치한 존재론적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겨우 한 번을 읽고서 한숨을 내쉬었다. 몇 번을 읽어야 이 책 내용이 체화될까 싶은 암담함 때문이다. 옮긴이는 3년이라 했는데, 옮기지 않고 그러려면 두 배는 걸리겠다. 재미로 읽을 책이 아니어서, 폭넓게 권하기는 힘들겠고, 엔데를 좋아하는 이라면 일독이 통과의례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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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하라 사막 횡단기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도 슬픈 땅
윌리엄 랑게비쉐 지음, 박미영 옮김 / 크림슨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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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숱한 이들이 사하라를 꿈꾼다. 그러나 정작 사하라와 맞닥뜨릴 간담을 지닌 이는 많지 않다. 사하라는, 말하자면 모든 허울을 벗기는 극한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사하라, 사하라... 노래를 부르는 내게 남편은, 하루만 사하라에서 무서운 열기와 냉기를 견디고, 지독한 외로움, 모래 섞인 음식을 견디면 상을 주겠다고 큰소리친다. 근거 있는 큰소리이리라. 비행기 타고 휙 날아가, 에어컨 빵빵 켜진 관광버스를 타고 사하라 입구에 내려서, 단 몇 시간 광대무변을 뒹구는 것, 그게 내가 꿈꾸는 사하라의 한계일 가능성, 크다. 그럼에도 나는 사하라를 꿈꾼다. 사는 일이 팍팍해 일상을 아무리 짜 보아도 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느낌일 때, 오히려 더 사하라를 꿈꾼다. 거기서는 누구나 투아레그의 전사로 화할 것만 같은 낭만을 어쭙잖게 꿈꾼다. 

  사하라는 왜 많은 사람들에게 현실이 아니고 꿈일까. 이 책은 그 꿈을 깨고, 또 꿈을 주는 책이다. 사하라가 사하라인들에게 척박한 현실임을 일깨우고, 외지인이 왜 사하라를 뼛속 깊이 느낄 수 없는지 착각에서 벗어나게 하고, 그러면서도 삶에서 한 번은 사하라인으로 살아보고 싶다는 꿈을 새로이 꾸게 한다.

  이 책에서 보는 사하라는 그저 제국주의 침탈의 역사에서 온갖 오물을 뒤집어쓰고, 내전이 끊이지 않으며, 무질서와 무법이 난무하며, 가난과 체념, 죽음이 일상인 '버려진 땅, desert'이다. 그곳이 사하라가 아니었더라면, 벌써 어떤 식으로든 결론지어졌을 지루한 싸움들. 그러나 사하라이기에, 그곳의 삶은 느리고도 느리게 흘러간다. 사하라는 그 누구도 자기 위를 빠른 속도로 지나가도록 용납하지 않는 제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하라인들은 사하라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사하라에서 태어나고 살고 죽는다. 일 때문에, 구경하고 싶어 찾아간 사람들에게, 사하라가 지옥을 보여주는 것은 그 얄팍한 호기심과 오만에 내리는 징벌일지 모르겠다. 

  사하라인이 아닌 사람으로서 사하라를 가장 깊이 이해하는 사람 중 하나일 이 저자는 그야말로 사하라를 발로 걸으며 횡단해냈다.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하지만, 그 일로 펄쩍 뛰며 사하라 간 일을 후회하는 따위의 유치함을 보이지 않는다. 잘 사는 미국의 백인이라는 사실에서 우러날 법한 어쭙잖은 우월의식도 '거의' 없고, 편한 자리를 찾아 몸을 뉠 생각 없이 그저 사하라를 건너간다. 아마, 사하라를 느끼는 진정한 태도가 아닐까 싶고, '아, 나는 안 되겠구나.'싶은 자조도 전해 준다. 사하라라는 이름은 치기 어린 구경을 용납하지 않는 곳이란 느낌. 그래도 저 사막 가운데, 장대하게 자리한 암벽화를 한 번쯤 보고 싶은 마음이 여전히 꿈틀거리기는 한다. 

  1996년에 저자가 쓴, 꽤 오래된 이야기다. 10년이 더 지난 셈. 어디나 경찰, 군인이 나그네를 세워, 하루나 이틀을 잡아두고 뇌물을 받고서야 보내주는 모습인데, 지금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궁금하다. 좀 더 최근의, 사진이 보태진 책이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아마 내용으로 보아 당시에는 사진 촬영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던 듯하기는 하다. 그냥, 그처럼 긍지 높다는 약탈자, 지금은 더러 비참한 모습으로 전락한 투아레그 족의 모습이 하도 궁금해 인터넷을 뒤져보며 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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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권리를 말한다 - 살아가면서 읽는 사회 교과서
전대원 지음 / 뜨인돌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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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이 되도록 권리며 의무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막연히 억울하다거나 혜택을 입는다는 느낌을 가져보기는 했지만 그저 두루뭉술하게 살았다. 그러다 이 책을 접하게 되었다. 그야말로 고등학교로 돌아가, 혹은 대학 시절로 돌아가 선생님께 차근차근 배우는 느낌. 그것도 말 통하는 선생님과 편하게 이야기 주고받으며 토론하는 느낌이 되었다. 이야~ 그래서 선생님이구나. 

  어찌나 쉽고도 깊게 이야기해주는지, 그 동안 사회에서 일어난 여러 일들을 바라보면서 오고갔던 얽힌 생각들이 잘 정돈되는 느낌이었다. 이런 비판적 시각을 많은 이들이 어린 나이부터 가질 수 있다면 사회가 조금은 더 투명해질텐데 하는 생각도 했다. 

  전대원 저자는 고등학교 사회 선생님이다. 책을 통해 파악한 바로는 하남시에서 아파트에 전세로 살고 있고, 비싸지 않은 차를 몰며, 아내의 임신과 출산에 함께 하고자 법에 의해 주어진 권리를 주변의 이목에 신경쓰지 않고 챙긴다. 그의 아버지는 고물상이며, 어머니는 살림의 묘를 체득한 현명한 소비자다. 소시민으로서의 이기성을 많이 벗어버리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바르게 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며, 남편으로서 이 비판적인 저자는 건건이 바른 말 하다 아내에게 조금은 구박을 받기도 하는 듯. 

  책으로 처음 접하는 저자를 이 정도로 파악할 수 있다는 건, 말하자면 저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섞어서 이런저런 사례를 들어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의 모든 사례들은 먼 이야기가 아니고, 꼭 내 이야기 같다. 특히 주거권 부분에서는 공감이 하도 커서 감탄사를 연발했다. 주거권이란 사람이 살 만한 집에 살 권리로서 딱히 정해진 법은 없지만 기본적 인권으로 간주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집 가지고 장난 치는 사람에게 분노한다는 문장을 써 가며 아파트 광고를 비난했다.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 줍니다.' '브라운스톤에 산다는 것은 명예를 지키며 산다는 자부심입니다.' 등등의 광고문구는 그야말로 돈 없어 반지하에 사는 사람들에게 슬픔과 분노를 일으키는 범죄라는 생각을 나도 했기 때문이다. 저자 또한 이런 행태를 '막말보다 더한 폭력'이라고 적어 놓아 참다운 기본권에 대한 환기를 불러일으켰다. 

  체 게바라의 사진을 찍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게 사용하도록 한 사진가 코르다의 이야기는 지적재산권에 대한 또 다른 관점을 가지게도 했다. 그는 딱 한 번 러시아 술 회사가 이 사진을 영리를 위해 쓰자 소송을 걸어 거액을 받아냈는데, 전액을 쿠바의 의료기관에 기부했다고 한다. 무조건 끌어안고 내놓지 않겠다는 것보다는 지식이나 예술을 공유하는 것에도 의미가 있으리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자기들만 저자 사후 70년이라는 법을 정해 놓고 더 많은 로열티를 거둬가고자 한 미국의 미키마우스 보호 법안은 그야말로 웃기는 행태였다. 그러고보면 나는 카피라이트보다는 카피레프트 쪽인가? 

  저자가 다뤄 놓은 행복추구권, 천부인권, 모성권, 교육권, 건강권, 양심적 병역거부, 주거권, 피의자 인권, 노동기본권, 환경권, 소비자 권리, 지적재산권, 종교의 자유와 한국의 기독교, 안락사 등등은 모두 우리 생활의 초미의 관심사이고 알아두어야 할 기본이다. 매우 쉬운 예로 이해하기 쉽게 소개되어 있고, 저자의 생각도 분명히 드러나 있으니, 저자 의견에 찬성하느냐 그렇지 않으냐는 책을 읽은 후에 생각해 볼 문제이고, 우선 고등학생 이상 많은 사람들이 읽어 보았으면 좋겠다. 물론 일반인으로서는 나처럼 약간은 우매한 사람들에게 더 좋은 교과서가 되겠다. 혹시 몰라서 못 누리는 권리가 있을까봐 두려운 사람들은 특히 보면 좋겠다. 삽화로 보는 저자는 느끼한데, 책은 무지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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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사무소 김앤장 - 신자유주의를 성공 사업으로 만든 변호사 집단의 이야기 우리시대의 논리 10
임종인.장화식 지음 / 후마니타스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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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같은 민초는, 정권 바뀔 때 혹은 무엇이 어떻게 바뀌었다고 뉴스에 나올 때 '나와 상관 없다'고 생각한다. 자기들끼리 하는 일로 치부해 버린다. 늘 살기 어렵기 때문에. 먹고살기 바쁘기 때문에. 그리고는 관심을 꺼버린다. 특히 무슨 어려운 말로 서로 공방하는 것을 보면 '잘~한다'고 욕이나 한다.  

그래도, 책 읽으면서 욕이 나오기는 처음이다. 거기가 워낙 있는 것들끼리 디저트가지고 싸우는 곳이라(밥그릇이라고 하면 안 된다. 먹고사는 문제는 이미 멀리 안드로메다로 떠난 사람들인데!) 누가 옳으니, 그르니 소리를 거의 하지 않고 살았는데, 드디어 욕이 나와 버렸다. 어느 누구를 향해서가 아니라 나라꼴을 향해서. 

권력의 중심이나 하다못해 변두리에 있는 자들 중 단 한 명도 '이기'를 버리거나 자제라도 하는 사람이 없다는 말인가. 사욕보다 나라의 꼴을 더 생각하는 사람이 이렇게까지 없다는 말인가. 김앤장의 문제는 한 마디로 권력층의 갈 데 까지 간 모럴 헤저드에 다름 아니었다. 이 책에 따르면. 이게 다 그 몹쓸 이기적 유전자 때문인 걸까? 

책에서 오고가는 돈의 액수는 비현실적이기까지 하다. 고발 당사자인 두 저자들에게도 의혹의 눈초리가 갈 만큼. 우리는 이런 액수를 한 번도 입에 담지 않고 살아왔는데, 이 사람들은 참 잘 안다 싶다. 이 사람들은 민초가 아니구나 싶고.  

어쨌든, 그 돈이 다 어디서 나왔나. 궁극적으로 저들이 주고받는 그 천문학적 숫자들이 근본적으로는 어디서 왔나. 굶어죽거나 몸을 파는 숱한 사람들이 그들의 뇌리에는 한 번도 떠오르지 않을 것인데, 그런 자들이 이 사회의 꼭대기에 포진하고 있구나. <세계의 절반은 왜 굶주리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진로, 외환은행, 제일은행, 한미은행 등등의 사례을 읽으며 하마터면 눈물이 나올 뻔했다. 우리들, 소위 국가의 주권자인 우리들은 이토록, 다른 모든 것에서와 마찬가지로 철저히 소외되고 이용당하고 버림받는다는 사실에 대한 새삼스러운 절감 때문이다.   

숱한 최고위 공직자가 나랏일을 하다가, 김앤장에 취직했다가, 다시 나랏일을 한단다. 그건 정권이 아무리 바꿔도 변하지 않는다. 무슨 놈의 법이 이따위가 있지? 어째서 그런 게 가능한 걸까? 고위 공직자는 죽을 때까지 온갖 곳에서 한 달에 수천 만원에서 억대의 돈을 받아도 된다고? 누가 그런 권리를 준 것일까. 자기가 한 달에 가만 앉아서 받는 돈의 액수가 많은 사람들이 일 년을 뼈빠지게 일해야 버는 돈이라는 걸 알기는 하는 걸까? 자기가 그 사람보다 그만큼 가치 있는 인물이라는 확신이 있기는 한 걸까? 순전히 자기가 잘나서 그렇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무튼, 달리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알던 이야기도 정리해 보면 새삼스럽게 배신감에 휩싸인다. 가히 초법적 존재인 김앤장은 건재할 것이고, 다른 모든 초법적 존재들도 길이 영원할 것인데. 이를 우리 민초들은 어떻게 견뎌내고 짊어져야 할지. 막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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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마니타스 2008-03-11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법률사무소 김앤장』 저자 간담회가 3월 15일(토요일) 오후 2시 서교동에서 있습니다. 관심 있으시면 블로그에 들려서 신청해주세요. 광고성 댓글을 남겨서 죄송합니다.

http://blog.naver.com/humanitas1/30028666122

파란흙 2008-03-15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죄송은요.^^ 좋은 책 기획 감사합니다. 급한 일로 간담회 참석을 못해서 제가 송구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