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다니엘 글라타우어 지음, 김라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매우 문학적이거나, 매우 깊거나, 매우 넓거나, 감동적이거나, 교훈적이거나! 그렇지, 않다. 그런데 매우 매력적이다. 마치 봄바람 속에 포플란 치맛자락 나부끼며 골목길을 걷던, 소녀 적의 그 간질간질함 같은 것들이 알알이 배어 있다. 이처럼 첨단적인 소재로, 이처럼 오래 된 이야기를, 이처럼 감각적으로 할 수 있다는 건 결코 쉽지 않을 거다. 조금만 더 이야기하면 스포일이 되어 버릴 수 있어서, 더 이상의 코멘트를 하지 않고. 그저 이 책을 읽으면 잠이 잘 오지 않을 수 있다는 부작용만 경고하고 싶다. 그렇다. 사랑 이야기. 이 시대에만 가능하며 온 시대에 다 가능한 진부하고, 새로운 사랑 이야기다. 게다가 피부 뽀얗고 야들야들한 어린 것들의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조금은 나이 있는 이들의 사랑 이야기. 인내가 필요하기도 하지만 재미있다. 아마 시작하면 속편까지 다 읽어야 직성이 풀릴 것이다. 그러나 또 하나의 경고. 속편의 마지막은 신파 느낌이다. 신파를 매우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짜증일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독자에게 그 신파는 용인할 수 있을 정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는 이 책의 처음에 나오는 단편이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처음 만나는 글. 9쪽. ‘그후로 십삼 년이 지나는 동안, 나는 여러 번 어린 케이케이가 수영을 했다던 그 냇물을 상상했다.’로 시작되는 문단을 처음 만나던 순간은, 빈방에서 무슨 일로 눈물을 글썽거리던 순간이었고, 이 글이 툭하고 건드리자 나는 참지 못하고 좀 울었다. 김연수의 소설과 나 사이에는 무수한 간격이 있고, 우리는 서로를 알지 못하고, 더구나 이해하는 일은 별과 별 사이만큼 멀고 연관 없지만, 그래도 나는 작중 화자의 심경이 읽혔다. 김연수도 읽혔다. 

이 작가가 말하자면 나와 같은 시기에 머물러 있구나 하는 느낌. 지나간 순간, 지나가버리고, 스쳐 가버린 숱한 순간들을 되새기고 곱씹고 있구나. 그 모든 순간들이 어쩌면 그렇게나 우연스럽고, 내 것이면서 또한 아닐까 싶은 느낌을 절감하고 있구나. ‘세계의 끝 여자친구’라는 서로 무관할 것 같은 말들의 나열도 이해보다는 그저 앎의 느낌으로 다가왔다. 우리가 사랑하는 이와 함께 가고 싶은 곳은 항상 세계의 끝이라는 것. 그건 결국 시간을 삼키고 과거와 미래와 현재를 품은 메타세쿼이아가 늘어선 길 끝이라는 것. 우리는 줄곧 죽고 싶어 한다는 것들을.

마흔세 살이란 이런 나이야. 반환점을 돌아서 얼마간 그 동안 그랬듯이 열심히 뛰어가다가 문득 깨닫는 거야. 이 길이 언젠가 한번 와본 길이라는 걸. 지금까지 온 만큼 다시 달려가야 이 모든 게 끝나리라는 걸. 그 사람도 그런 게 지겨워서 자살했을 거야.-68쪽.

우리가 노인이 될 때까지 살아야만 하는 이유는 어쩌면 우리 모두가 일생에 단 한 번은 35미터에 달하는 신의 나무를 마주한 나무학자 왕잔의 처지가 되어야만 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공룡과 함께 살았다는, 화석으로만 남은, 하지만 우리 눈앞에서 기적처럼 살아 숨쉬는 그 나무.-82쪽 

책 읽는 취미를 어지간히 자랑거리로 여기며 한동안을 지냈으나 갑자기, 그 모든 것에 눌리고 부질없고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시기를 통과하는 내게는 ‘내겐 휴가가 필요해’는 그저 책읽기에 대한 이야기로 읽혔다. 그래서 매우, 의미심장했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더 불행해지는’, 형사였던 노인의 이야기는 무언가 선언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는 절망했다. 절망의 끝은 죽음이다.

어떤 책을 들춰봐도 거기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또 노인이 다시 젊어져 새로운 인생을 살아갔다는 이야기도 나오지 않았다. 어이없게도 삶은 단 한 번만 이뤄질 뿐이며, 지나간 순간은 두 번 다시 되풀이되지 않는다고, 그 도서관에 있는 모든 책들은 말하고 있었다.169-170쪽.  

정말 당연하고, 무서운 사실.

‘달로 간 코미디언’은 최근 읽은 어떤 이야기보다 슬프고, 무섭고, 우스웠다. 눈물 끝에 웃음이 나오고, 다시 눈물이 나오고, 콧물까지 줄줄 흘리다가 그게 웃겨서 또 웃게 되는 이야기. 한 번쯤은, 한 번쯤은 별볼일 없는 인생의 끝에서 뜻하지 않은 일로 만신창이가 되고, 눈이 먼 채로 차가 뒤집혀 안경마저 잃어버린 채 사막을 향해 끝없이 걸어가 보아야, 거기 인생이 놓여있음을 절감하리라 싶게 만드는 이야기.

종합하건대, 이 책, 내게는 소통되지 않음과 유한함, 지극히 짧음에 대한 중간 보고이고, 그럼에도 사랑함에 대한 애절함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란 2009-10-21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많이 남아 있게 되는 책인가 보네여.

파란흙 2009-10-21 22:56   좋아요 0 | URL
제가 워낙 김연수 글 스타일이나 세계관을 좋아합니다. 김연수를 좋아하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접한 책 두 권은 매우 좋았어요. 그 전 책들을 찾아읽을 정도는 아니지만 앞으로 나올 책을 다 볼 예정이에요. 동질감 같은 것이 느껴져요.^^

도서관 2009-10-21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땡스투! 자유~~~

파란흙 2009-10-22 08:49   좋아요 0 | URL
ㅋ 취향이시려나. 암튼 행복하게 읽으시기를.
 
세 잔의 차 - 히말라야 오지의 희망 이야기
그레그 모텐슨 외 지음, 사라 톰슨 개작, 김한청 옮김 / 다른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자네가 발티족과 함께 처음으로 차를 마신다면 자네는 이방인이네. 두 번째로 차를 마신다면 자네는 환대받는 손님이 된 거지. 세 번째로 차를 함께 마시면 가족이 된 것이네. 그러면 우리는 자네를 위해 죽음도 무릅쓰고 무슨 일이든 할 거라네."-123쪽. 

제목인 세 잔의 차의 의미를 드러낸 책 속 대목이다. 세 잔의 차를 함께 마시면 죽음을 무릅쓰는 가족이 되는 사람들이라니. 뭔가 가슴이 뭉클하다. 그레그 모텐슨은 그런 사람들을 위해 살아가기로 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다. 2009년 그레그는 노벨평화상 후보로 선정되었다. 그레그가 해오고 있는 일은 히말라야 오지를 누비며 여자 아이들에게 학교를 세워주는 일이다. 그건 몸과 마음을 바칠 뿐 아니라 때로 목숨까지 내놓아야 하는 일이다. 미국인인 그가 그 일을 하는 동안 9.11 테러사건이 있었고, 이라크전쟁이 있었다. 실제로 그는 납치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그 일을 멈추지 않는다. 

처음에 그레그가 히말라야 등반가에서 히말라야 오지인들의 친구가 된 것은 조난 덕분이었다. 죽을 고비를 넘기며 그가 발견한 것은 귀한 설탕을 탄 차를 여러 잔 그에게 내놓은 하지 알리과 그 아내, 그리고 그 마을 사람들의 사랑이었다. 그 좋은 사람들이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사는 것이 그레그의 마음을 때렸다. 젊어 죽은 여동생의 혼을 위로하고자 시작한 히말라야 등정과 조난, 발티족과의 만남은 그레그라는 사람의 인생을 바꿔 놓았다. 

남을 위해 자신을 아낌없이 내놓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늘 읽어도 놀랍지만, 사실 그들은 모종의 계기가 되는 사건을 겪기 전까지는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언젠가 번역했던 <국경 없는 의사회>에서도 분쟁 지역에 맨몸으로 뛰어드는 봉사자들이 얼마나 평범한 사람들이며, 그 일을 하게 된 계기 역시 얼마나 일상적인지 그게 더 놀라웠던 기억이 있다. 우리는 그들이 뭔가 다른 피를 타고났거나, 매우 다른 탄생, 두드러지는 성장과정을 지녔을 것이라고 오해한다. 아니, 그렇게 믿으며 자신이 그러지 못하는 것에 대해 변명을 한다. '난 그저 평범한 사람이에요.'라고.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다시 느낀 건, 그들도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똑같이 자신의 몸이 귀하고, 가족이 안타깝고, 먹고 살 걱정도 하고, 겁도 나지만, 그럼에도 그 일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남을 위해 자신의 많은 부분을 내놓는 일. 모든 엄마들이 자식을 위해 하는 일의 반만 내놓아도 충분하다. 그런데 하지 않는다. 조금 부끄러웠다. 자식을 위한 일은 나를 위한 일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않는 일인데, 그걸 대수롭게 여기며 살아가는 일상이 말이다. 

사실 상반된 많은 생각들이 오갔지만, 각설하고자 한다. 그레그에게 박수를 보내고, 동전 한 잎이라도 모아보내는 일이 개중 가치로울 것이라 여기기에. 그레그가 한 말 중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라 느낀 것을 옮겨 본다. 

"내가 파키스탄의 아이들을 왜 도우려 하는지 어른들에게는 설명하기 힘들었어요. 그러나 아이들은 당장 이해했어요. 아이들은 사진을 보았을 때 추운 날씨에 바깥에 앉아서 선생님 없이 공부하는 곳이 있다니 쉽게 믿지 못했어요. 그리고 아이들은 파키스탄의 아이들을 위해 무언가를 하겠다고 결심했어요."-55쪽   

"파키스탄이나 아프가니스탄 같은 지역의 사람들이 단지 우리를 미워하기 때문에 테러를 일으킨다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어요. 죽음 대신 삶을 선택할 만큼 밝은 미래를 아이들에게 주지 못하기 때문에 테러가 생기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204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불을 먹는 남자 올 에이지 클래식
데이비드 알몬드 지음, 황윤영 옮김 / 보물창고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어린 시절 무심코 이모 손을 잡고 따라간 곳은 서커스였다. 몸을 거꾸로 꺾으며, 장대 꼭대기에 서며, 사자의 아가리 속으로 얼굴을 들이밀며 그들은 내내 웃고 있었고, 짙은 화장을 하고 있었다. 뭔지 알 수 없었지만 눈물이 왈칵 솟구쳤다. 그게 무엇이었는지, 어린 내게 전해진 그들의 비애가 어떤 느낌이었는지는 지금도 명확히 잡히지 않는다. 그저, 그 일을 하는 그들에게는 우리가 상상하기 힘든 아픈 곡절이 있었으리라는 막연한 느낌이었을지 모르겠다. 혹은 세상의 회오리 속에서 누구도 자신의 삶을 살고 싶은 대로 살지 못한다는 깨달음 같은 것이었을까.

말하자면 그들은 온몸을 불길에 던지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이 책에 나오는 맥널티 아저씨처럼. 전쟁에 끌려나갔던 어린 맥널티는 그때도 다른 소년(혹은 청년)병들 사이에서 부적응자의 티를 냈던 모양인지, 책의 화자인 중학생 로버트의 아버지는 그가 괴롭힘을 당하던 모습을 기억한다. 남을 찌르거나 죽이거나 총질을 해대는 일을, 다른 이들이 태연히 해낼 때 죽어도 못하겠는 사람들이 있다. 아마 맥널티는 그런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는 전쟁 후에 자기 몸에 꼬챙이를 관통시키거나 불을 먹거나 쇠사슬을 묶어서 빠져나오는 자학적인 행동을 보여주며 돈을 버는 길거리 차력사가 되었다.

길에서 맥널티의 쇼를 구경하던 로버트는 탄광촌의 소년이다. 외지고, 세상에서 잊혀진 곳, 조금이라도 미래가 있는 아이라면 자라면서 벗어나야 할 곳. 그러기 위해 로버트는 억압적인 선생님들이 포진한 중학교에 진학해야 한다. 로버트의 친구들은 아예 포기한 진학의 꿈. 그러나 로버트는 점차로 인생의 참 의미가 대처로 나가거나, 대학에 진학하거나 하여, 결국 전쟁을 방치하거나 부추기는 저들 틈에 끼이는 것에 있지 않다는 걸 몸으로 깨닫는다. 그 아이의 바람은 그저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것, 아버지가 건강한 것, 맥널티 아저씨가 광기로 인해 함몰되어 버리지 않는 것 정도이다. 왜냐하면 전쟁은 저런 힘없는 사람들에게만 내려덮이기 때문이다.

진정 미쳐 있는 것이 누구인가, 맥널티인가 혹은 핵무기를 적재한 로케트를 세상을 향해 겨누고 있는 이들인가. 전쟁은 왜, 누구에 의해 일어나며 누가 전쟁을 치르는가. 배움이나 앎은 무엇에 쓰일 때 진정 가치로운 것인가. 권력이 늘 빠지는 함정을 우리 민초들은 어떻게 감당해 낼 것인가... 다양한 걱정거리를 안겨주는 소설. 그럼에도 분명히 이 책에 등장하는 킬리 만의 아이들은 아름다웠다. 그것이 희망이라면 희망일 터이다. 맥널티가 온 세상의 불을 모두 삼켜 버린 것이었으면, 그나마 그의 죽음이 조금은 위로가 될까? 온 몸으로 불을 먹어치우는 그들에게 바치는 장송곡같은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연극배우 추송웅 - 말과 몸짓으로 이야기하다 예술가 이야기 1
안치운 지음 / 나무숲 / 2008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의 초판 제1판 인쇄는 2004년이었다. 그리고 2008년 12월에 제2판이 나왔다. 추송웅이라는 배우는 내가 젊었던 시절 연극을 통해, TV를 통해 자주 접하던 사람이니 나와 그리 연대가 멀지 않은데, 책으로 만나니 감회가 새롭다. <빠알간 피터의 고백>이라는 연극 제목을 보면서, '그래, 이분이 이 연극을 오래 오래 했었다!'는 추억도 떠올랐다. 마침 얼마 전 카프카의 <변신>을 읽으며 같은 책 속에 실려 있는 '어느 학술원에 제출된 보고서'를 읽은 터라, 이 작품이 그 연극의 원작이라는 사실에 새삼 묘한 느낌을 가지기도 했다. 

'어느 학술원에 제출된 보고서'는 인간을 따라하는 일 끝에 지치고 소외된 어느 원숭이의 수다로 이루어진 단편,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사실 우리가 사는 일이 그런 것 아니겠느냐고도 생각했는데, 연극 자체는 참 아스라하다. 그때, 젊었을 때 나는 어떤 느낌으로 연극을 보았던가! 말하자면 이 책은 어린이들에게 예술에 몸을 던지고, 불꽃처럼 스스로를 태운 한 인물을 소개하는 책인데, 나같은 연배의 사람에게는 추억과도 같은 느낌이라는 것. 

그의 딸 추상미 씨를 드라마 등으로 볼 때마다 떠올랐던 사람. 마흔 다섯에 죽음의 길로 떠났고, 그 때문에 더 가끔씩 생각나는 사람. 어린 시절 사시로 인해 놀림감이 되었을 줄은 몰랐다. 그렇게까지 어려운 살림을 꾸려갔는지도 몰랐다. 한 달 최저생활비를 아내에게서 적어받아 출연 의뢰에 그걸 내보였다는 대목에서 콧등이 시큰해졌다. 27,750원이 적힌 쪽지를 내민 그의 마음 속이 헤아려져서다. 하지만 솔직히 가난이 그를 더 불타오르게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다른 많은 예술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 책, 아이들에게 어떤 느낌으로 읽힐까.. 참 재미있게 생긴 아저씨가 연극을 매우 열심히 하다가 이르게 생을 마쳤구나, 그 정도일까? 솔직히 초등학생인 딸은 큰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나만 감회에 잠겨 만지작거렸다. 책으로 씌어지는 인물은 더 큰 업적을 가시적으로 남겨야 하는 걸지, 혹은 판타지처럼 드라마틱하고 신기한 일을 겪어야 하는 걸지. 예술가 이야기 시리즈 중에 이응노 화백 이야기도 있었는데, 아는 분이 감명 깊게 읽었다고 했다. 독특하고 의미로운 시리즈구나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