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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어 없어? ㅣ 무서운 그림책 2
교고쿠 나츠히코 지음, 이기웅 옮김, 마치다 나오코 그림, 히가시 마사오 감수 / 박하 / 2015년 8월
평점 :
절판
책을 떨어뜨릴 뻔 했다.
무섭다.
그림이라기 보다 영상을 보고 있는 듯하다.
깊이와 폭이 느껴지게끔 그렸다.
그래서일까 어둠이 수없는 겹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것 같다.
있는 ‘무엇’이라도 아는 척을 하면 ‘무엇’이 현실로
다가오는 힘이 생기는 걸까?
고양이들이 점점 많아지고
할머니 얼굴은 쉽게 보여주지 않고
나는 어둠 깊이에 점점 빠져들고...
그렇게 ‘무엇’이라는 것을 보았다! 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할머니는 “ 봤니? 그럼 있나 보구나!”
할머니도 알지만 굳이 알려고 하지 않고 같이 살아가는건가?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 알고 있는 건지, 알아서 좋을 게 없다는 것을 아는 건지, ‘무엇’이 뭔지 아는 건지..아니면 뒤에 일어날 일에 대한 암시일지..함정일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무서운 이야기 중에서
나이 들어 곧 죽을 것 같다는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아이들을 어두운 골방 같은 곳으로 유혹해서 삶의 에너지를
흡수하는 이야기가 떠올랐다.그래서 다시 젊어지는 모습으로 씨익 웃는 모습이 떠올랐다.
의자에 앉아 기다랗고 강인한 철사 같은 손가락들이 의자손잡이를 꽉 잡고 앉아 아이한테 집중하고 있는 어둑어둑하고 찐득찐득한 눈빛.
이 책에 있는 할머니는 늘 뒷모습이다.
일상을 꾸려가면서 차분하게 답을 한다.
아주 차분해서 오싹하다.
끝끝내 할머니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함박 웃음을 웃는단다..
단지 고양이들이 많아지고 그 고양이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
정면으로 나를 바라보는 고양이 눈빛이 반짝이는 것 같다.
그리고..오줌이 찔금하는? 아니 책을 손에서 툭 떨어뜨리게 하는 장면이 나온다.
비명을 지르는 아이도 있을 수 있겠다.
밤엔 악몽을 꿀 수도.
왜? 이리 무서운 책을 만들었을까?
이런 기획은 왜 했을까?
캠핑가서‘여우누이’라는 책을 읽어준 적이 있다. 아이들 10명 넘게 모여 앉아 읽어 주었다. 혼자도 무섭지만 작은 랜턴불빛아래 모닥모닥 모여앉아 같이 읽으니 더 무서웠다. 아주 오래 기억에 남아 있는 추억이다.
선악의 구분이 있었고 선이 승리한 이야기로 끝나는 무서운 이야기와
이처럼 선악이라는 구분이 없이 애매하고, 무섬증이 생기는 무서운 이야기가 갖는 차이는 무엇일까?
아이들 대상으로 무서운그림책 많지 않다.
무서운 그림책이라는 시리즈이지만 3권으로 더 이상 만들지 않고 있다. 무서운 그림책은 '금기' 사항같다.
하지만 큰 아이들에게는 무서운 이야기가 굉장히 인기가 있다.
그래서 그림책이든 동화든 찾고 싶지만 찾기가 어렵다. 대부분 문학적인 수준이 높지 않고 단순 무서움을 반복하고 있는 책이 많다.
고등학생인 아들에게 “한번 읽어봐”
아들 “ 무서운 거야? 안 읽어!”
어릴적에 해님달님이야기를 잠자리에서 오래 해준 영향이다.
호랑이가 먹은 떡이 3개로 끝나지 않고 수도 없이 계속 먹으면서 결국 고개를 넘지 못했다. 아이들이 위험을 벗어나지 못하고 중간에서 멈춰버려서 그런가 싶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이 그림책을 읽어주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하다.
덧붙임.
일본풍? 이라는 느낌이 많이 드는 무서운 그림책.
우리와 차이가 있는데..그러면서도 동양적이라고 말해지는.
생각해봤다. 우리가 알고 있는 무서운 이야기에 주인공들은
특별한 공간 -서낭당이나 무덤가에서 나타나는,
나타날 수 밖 에 없는 이야기들을 갖고 있어서.
선과 악의 이분법적인 옛이야기 구조..
알고 보면 공감이 가서 눈물이 날 수 있는.
그런 사람이야기라서 일까?
그럼 일본에 무서운이야기들은...특징이 뭐지?
바로 옆에 일상 안 공간에서 나타나고
나타날 수 밖에 없는 이야기는 보이지 않고
선과 악으로 그려지는 구도도 아닌듯하고
마무리는 '계속'이라는 느낌.
그래서 다른 무서움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