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의 딜레마 - 거짓말,기만,사기,속임수의 심리학
클라우디아 마이어 지음, 조경수 옮김 / 열대림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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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몇 년 동안 ㅇㅇㅇ에 안 갔어." "텔레비전을 잘 안 봐서." "내일 아침 일찍 일이 있어서 이만 가봐야겠어." "이 청바지 세일할 때 산 거야." "몸무게? 60Kg은 안 넘지." "전화 연결이 안 좋네." "너와는 좀 특별해." "무슨 이메일? 못 받았는데." "그 사람은 그냥 직장 동료야." "아니, 난 네가 안젤리나 졸리보다 예쁘다고 생각해." "일주일에 두 번 운동하러 가." "와, 예쁘다. 고마워." 

저자는 이런 식으로(내 기분대로 몇 자 바꿨음) 우리가 의식조차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내뱉는 말을 거짓말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래 놓고는 이런다. 

속마음을 들킨 느낌인가? 

그리고 위로한다. 거짓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나쁘지 않으며, 오히려 진실이 '진실이라는 이름으로' 과대평가 돼 있으며, 거짓말은 '제2의 천성'이자 '어떤 면에서는 사회적 재능' 내지 '사회의 공동생활을 위해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을 죽 열거해 보여준다. 매우, 매우 공감된다. 

내가 이처럼 많은 거짓말을 하며 살아가는 줄 몰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행히도 이 책에 따르면 그게 뭐 그리 큰 죄는 아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나는 요즘 위층으로 뛰어올라가 소리 지르고 싶은 마음을 매일 누르느라 안간힘을 쓴다. 위층 네다섯 살배기 여자아이가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뛰어다니는 소리에 거의 노이로제 지경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 번은 과자를 사 들고 가서 조금만 덜 뛰게 해달라고 이야기하기도 했지만,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 할 수 없고, 또 그 나이의 아이가 자제라는 걸 하기 기대할 수도 없어서 꾹 참는다. 하지만 집에서 일하는 내게 그 일은 고역이다. 그러나 어쩌다 엘리베이터에서 그 아이와 엄마를 만나면 나는 미소를 짓는다. 그 엄마도 어쩔 수 없으리라 여겨서다. 내 경험상. 아아, 그 미소는 그러나 거짓말이다. 

말하자면, 체면, 예의, 인내, 하얀 거짓말, 배려, 역할, 혹은 착각까지도 타인이나 자기 자신에 대한 거짓말이라는 것인데, 그걸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때에 따라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고맙게도. 책은 꽤 두껍고, 실제와 이론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대공감과 '설마~'라는 느낌을 오가지만, 흥미롭고 새로운 이야기다. 그리고 지나치게 예의를 중시하는 성정을 '속 다르고 겉 다르다'고 간혹 지적받는 내게는 큰 위로가 되는 책이기도 하다. "느끼는 대로 말해!"라는 강요를 요즘 주위로부터 받고 있는데, 그걸 못하겠는 나는 뭔가 위로가 필요했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모든 거짓말이 꼭 가해자와 피해자를 낳지는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가끔은 거짓말을 편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 모두 속에서 솟는 대로 모두 표하고 살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이 책에서 예로 들었듯이, 의례적인 "안녕?"이라는 말에 어젯밤 남편과 싸운 이야기를, 상대는 원치도 않는데 곧이곧대로 늘어놓아 진심을 밝힐 필요가 있을까? 

아무튼 독특한 책. '거짓말, 윈윈으로 하기'를 위한 재미있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교양서이다. 독일의 심리학자가 썼단다. 클라우디아라고 하니 여자인 듯. 심리학자일 뿐만 아니라 칼럼니스트도 겸하는 저자여서 다행이다. 심리학자이기만 한 사람의 글은 경우에 따라 재미없을 수도 있는데, 이 책은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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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 마우로의 세계 지도
제임스 코완 지음, 강은슬 옮김 / 푸른길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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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제작자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여행가? 한비야씨같은? 아닐 것이다. 많이 다니고 견문을 넓히는 일과 지도제작은 아무래도 다른 일일 테다. 프톨레마이오스나 메르카토르가 여행가였던가? 지도를 한 번 그려보자. 세계지도를. 인공위성에 올라 세상을 한눈에 바라보면 지도가 그려질까? 산과 바다와 평야을 그려넣으면 될까? 혹은 있지도 않은 국경을 선으로 그려넣는다? 있지도 않은 위도와 경도를 그려넣고 둥근 지구를 이리저리 펴서 끼워맞추면 지도가 될까? 그렇다면 테크롤러지가 고도로 발달한 지금, 지도는 그릴 이유가 없는 철지난 무엇으로 전락해버린 것일 지 모른다. 하늘에서 빤히 바라다보이는 지구. 하지만 희한하게도 지도는 끝없이 그려진다. 보이지 않는 곳을 향해 무한히 확장되면서. 어쩌면, 지도는 그런 것일 테다. 상상의 산물.  

르네상스 후반, 베네치아의 산라차로데글리아르메니,라는 긴 이름을 가진 섬에 한 수도사가 있다. 아마 그는 그 섬을, 수도원을 그리 자주 벗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지도제작자이다. 그는 세상을 다닌 사람들을 맞아들여 이야기를 듣고, 지도를 채워 나간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은 그야말로 천차만별이다. 나라도 출신도 종교도 다른 숱한 사람들이, 그런 수도사가 있다더라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온다. 들어주는 사람을 찾아서, 똑같이 고독하고, 미지의 세계에 똑같이 가슴을 두근거리며, 보이는 것 너머에 시선을 두고 사는 닮은 사람을 찾아오는 것이다. 발로 다니는 사람과 이야기 속으로 다니는 사람이 서로 조우하는 수도사의 방. 그곳에서 지도가 조금씩 그려진다. 수도사의 이름은 프라 마우로. 

제임스 코완이라는 오스트레일리아 작가의 철학 소설이라는데, 읽기 녹록치 않다. 하지만 이상하게 끌린다. 여기 이곳에서 태어나 살다 벗어나지 못한 공간에서 죽는 미물 같은 삶, 그 너머를 꿈꾸는 이들에게 깊숙한 내면으로, 무한한 우주로 넘나드는 삶과 죽음의 비밀을 열어보여주는 느낌 때문이다. 현실과 소설의 경계가 혼란스럽고, 작가와 화자의 관계가 혼란스럽고, 그래서 더욱 실감 나는 책.  

익숙한 사고의 바깥 쪽에는 지금까지 내가 경험한 적 없는 인식의 층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사실 말이다.-122쪽.

내 지도는 거기에 그려져 있지 않은 사실로 나를 열중하게 만든다. 지도를 응시할 때마다 그 여백에 아직 기록되지 않은 사실이 나를 사로잡는다. 나는 더 많이 알기를. 새로운 나라와 사람들과 그들의 관습을 찾아내기를 갈망한다. -1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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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올레 여행 - 놀멍 쉬멍 걸으멍
서명숙 지음 / 북하우스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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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 짧지 않은 날을 살아오며(이 말은 자못 서글픈 어조이다) 온갖 것들과 어울리고 함께 뒹굴고 속에 품게 되었으나 나름대로 굽이굽이 많은 이야기가 깃든 모진 세월의 와중에도 결국 친해지지 못한 것이 있다면 바로, 걷기일 것이다. 나는 걸을 여유가 없이 살아왔다.  걷기에 여유가 무슨 필요 있나, 돈 드는 일도 아닌데,라고 흉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여유가 없었다. 걸을 여유. 누가 나더러 걷자고 하면 나는 깊은 고민에 빠진다. 그래 왔다. 걷자고 들면, 마음이 바쁘고, 몸이 초조하고, 숨이 가빠지기부터 시작하니 여유 없는 인생에 걷기는 힘든 결정일 수, 있다. 

얼마 전 불쑥 찾아온 친구가 8시에 집을 나서 걷다가 바로 강화도까지 냅다 걸었다고 이야기할 때 내 입에서는 이런 말이 나왔다. "너, 미쳤구나." 친구는 발톱이 빠졌지만 좋았다며 웃었다. 하필, 그짓을 해야 했던 이유가 뭐냐니까. 그저 털어내고 품고 그러기 위해서였단다. 친구는 내처 산티아고를 꿈꾸고 있었다. 덕분에 나도 잠깐 산티아고를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한다 하는 여행가들이 다 걸어보고 왔다는 곳. 내겐, 아무래도 무리다. 

하지만 슬며시,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움텄다. 사십몇 해를 도통 걸어본 적 없는 내 다리에 다른 기운을 불어넣고, 서명숙 대장처럼 진하게 살도 빼보고 싶다는 생각이, 아주 슬며시 들었다. 튼튼해지고 살이 빠진다고? 마치 세월이 살로만 쌓이는 듯, 쉴 새 없이 불어난 몸이 이제는 온갖 병을 몰고 올 정도가 되어 가끔 서글픔을 되씹는 내게도, 혹시 가망이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끝나지 않는 꿈처럼 길게만 느껴지는 먼 산티아고보다도, 제주가 그걸 내게 보여줄 수 있다면, 모처럼 운동화 한 번 신어 볼까나? 

아마, 2001년이었을 거다. 친정엄마와 둘이서만 여행을 떠난 것은. 웃음보다는 싸움으로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한 엄마는 어느새 늙었고, 나도 눈에 띄게 늙어가고 있던 무렵. 모녀는 제주로 떠났다. 그때 처음으로, 자연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외돌개에서 하염없이 내려다보며 나는 좀 울었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거다. 죽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죽어 이런 땅, 이런 물 속으로 간다면, 어쩌면 죽음이라는 건 생각보다 괜찮은 쉼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것. 자연이 아름다웠다. 제주도에서는. 그렇지만 내게 제주는 활기보다는 약간의 울먹임으로 남아 있다. 제주 올레는 내게 활기를 줄까? 다시 가 볼까?  

책을 천천히 그야말로 놀멍 쉬멍 읽었다. '간세다리'가 되어 읽어야지 이 책이 맛있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누워 읽다가, 쭈그리고 앉아 읽다가, 엎드려 읽다가, 화장실 변기에 앉아 읽다가, 지하철에서도 읽었다. 이맛살 찌푸려가며 앞뒤 맞춰 읽어야 할 필요도 없고, 심지어 순서대로 꼭 읽을 필요도 없다고 여겼다. 편안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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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주나무 2008-11-02 1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보고 추천 꾹 누릅니다. '그날' 서명숙 대장 바로 옆에 앉혀 드릴게요 ^^

파란흙 2008-11-03 07:59   좋아요 0 | URL
하하, 알라딘에서 주목받아보기가 얼마만인지. 이웃집과의 교류가 없어 제겐 거의 대도시 아파트 주민 그 자체거든요. 알라딘에서의 삶이.^^ 바로 옆은 더 잘 안보입니다.^^
 
밤은 노래한다
김연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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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저 황폐한 남자가 누굴까, 하고 표지를 뒤적거리니 에곤 쉴레라는 화가가 나온다. 잘 모르지만, 자학적 느낌의 그로테스크한 그림을 주로 그린 남자. 책을 다 읽고 나니 표지 그림이 딱 맞춤하다는 생각. 작가가 권한 컨셉트일까? 저렇게 삶에 지쳤으되, 눈빛이 형형한 남자의 그림은? 그런데 여전히, 제목이 십분 이해되지 않는다. 밤은, 노래한다...밤은, 노래한다. 노래란, 즐겁거나 슬플 때 저도 모르게 먼지 낀 목구멍을 비집고 새어 나온다. 삶은 노래한다...세상은 노래한다. 즐겁거나 혹은 슬퍼서. 

이 책, 참 슬프다. 언젠가 <이벤트 호라이즌>이라는 영화에서 지옥이 바로 자신의 밑바닥에 있음을 발견하는 갖가지 상황들이 너무 무섭고 슬퍼 영화를 본 날 밤 밤새, 혹은 그 후로로 한참 뒤척거린 적이 있는데 이 책은 그런 느낌을 주었다. 무섭고 슬프다. <혹성탈출>에서 바닷가에 쓰러진 자유의 여신 상을 발견한 주인공의 그런 느낌. 달아날 데가 없어서, 그렇게 살아야만 할 때, 그렇게 죽어야만 하는 자신의 운명을 유리구슬에서 들여다보는 안네의 느낌. 비극이 자신의 내부에서 끝없이 새어나오는 걸 알아버린 오셀로의 느낌.

1930년대의 민생단 사건은 이 책을 통해 생생한 역사로 전달되지 않았다. 적어도 내게는. 그들의 실체가 무엇이었던가는 결국 밝혀지지 않았거니와 밝혀질 수도 없으며, 그것은 어떻게 보면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음이다. 오히려, 그 시퍼렇게 날섰던 슬픈 일은 그저 반복되는 삶의 사슬처럼 다가왔다. 어쩌면, 아마, 세상 끝나는 날까지 그럴 것이다. 사람들은. 무언가 두려워하며, 그 두려움의 실체가 보이지 않으면 마침내 자신의 살을 잘라먹는 지옥을 연출하며. 작가가 연변에서 혹은 간도 혹은 동만에서 보고 느낀 것은 어떤 일련의 사건이기보다는 거기도 존재하는 슬픈 삶의 곡절들이었을 거라, 그런 생각이 들었다. 

1933년 여름. 유격구에 있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은 누구인가? 하지만 이 물음의 정답은 없다. 그들은 조선혁명을 이루기 위해 중국혁명에 나선 이중 임무의 소유자들이었다. 그들은 중국 구국군이 일본군에 패퇴한 뒤에도 끝까지 투쟁한 가장 견결하고 용맹스런 공산주의자이자 국제주의자였던 동시에, 한편으로 일단 민생단으로 몰리게 되면 제아무리 고문해도 절대로 자신의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던 일제의 앞잡이들이었다. 

그들이 죽어가면서도 절대로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았던 이유. 자신도 자신이 누구인지를 몰랐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그들은 죽어갔다. 마치 우리처럼. 하나의 질문이 떠오른다. 내가 누구인가. 

사랑하고자 하나 그러지 못하고, 살고자 하나 그러지 못하고, 죽고자 하나 그러지 못하고, 혁명을 하고자 하나 그러지 못하고, 민족주의자로 살고자 하나 그러지 못하고. 그런 사람들이 이책에는 가득 차있다. 좌경과 진보, 마르크시즘과 톨스토이즘, 민족주의와 국가주의, 그리고 보수 등이 뒤얽혀진 지금 이곳처럼, 사람들은 자신이 궁극적으로 무얼 바라는지 모르고, 그 무지는 두려움을 낳으며, 옆 사람을 노려본다. 

김해연은 다름 아닌 나다. 빛과 어둠의 세계가 완벽하게 오버랩되는 걸 어느 날 깨달아버린, 순진하기 이를 데 없으며, 그만큼 대단한 신념도 없지만 어느 날은 사랑을 위해 죽을 수도 있는 사람. 살아가며 저도 모르게 헤세의 신봉자가 되어 버리는 그저 어떤 사람. 어찌나 동화되던지, 책을 손에서 뗄 수가 없었다. 마치 눈 떼지 말고 다 읽으라는 주문이 걸린 듯한 빨간 표지. 표지의 남자는 김해연도 같고, 헤세 같기도 하고, 또 못박힌 예수 같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매력적이다. 이 책. 분명 장편소설인데, 문장 하나하나가 시로 된 듯한 아름다움이 있고, 그 시는 또 戀歌이며, 悲歌로도 읽힌다. '여름 매미들이 부르는 가을 노래'. 해연이 사랑하는 정희의 죽음을 전해듣고 받은 느낌을 작가는 이렇게 묘사했다. 어찌나 슬픈지 눈물이 왈칵 솟구쳤다. 여름 매미들이 가을 노래를 부르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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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멀리서도 보이는 풍경
나태주 지음 / 푸른길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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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주 선생이 쓰고 그린 시집 <이야기가 있는 詩集>을 접하며 나 스스로 맑게 정화되는 느낌을 가졌던 기억이 있다. 참 좋았던 기억. 마치 내 오랜 꿈이 거기 펼쳐져 있는 듯한 느낌. 그리고 두 번째로 선생의 이 책을 접했다. <公州 멀리서도 보이는 풍경>. 멀리서도 보이려면 그 대상을 마음에 품고 있어야 가능하리라 싶다. 언제든 마음자락에 감고 있어야 멀리 있어도, 아무리 멀리 있어도 보이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이 시인은 공주를 얼마나 사랑하기에 이런 제목을 붙인 걸까. 

과연 읽으면 공주에 대한 이분의 지극한 사랑이 전해온다. 마치 짝사랑을 하는 젊은이같다고 느낄 만큼. 반면에 공주는 이분을 적당히 사랑하는 듯하다. 아주 냉정하게 대접하면 가버릴까봐 일정 거리에 두고 계속 사랑하도록 종용하는 듯한 여인네. 

이 책은 십대이래 선생의 삶의 터전이 되어 온 공주에 대한 소개책이다. 그리고 나태주의 공주에 대한 세레나데이다. 선생의 수필과 시와 여러 글이 어울려 있으니, 테마가 있는 문집이랄 수 있을 테고, 그저 공주를 지극히 사랑하는 어떤 작가의 여행안내서쯤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책을 다 읽고 나면 공주로 문학기행을 다녀온 듯한 느낌이 든다. 그저 오래된 식당, 나무 한 그루, 골목길 하나가 마치 시처럼, 소설처럼 펼쳐지며, 군데군데 공주와 이런저런 인연을 맺었던, 혹은 선생 자신과 인연을 맺었던 문인들 이야기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정제된 언어의 극치인 시를 쓰는 사람이 운치 있고 정갈한 산문(주로 에세이)를 쓰는 것은 당연할 수 있겠지만, 이 책 역시 낱말이나 문장이 모두 정갈하고 맑아서 읽는 내내 잔잔하고 흐뭇한 기분이었다. 이분이 이토록 사랑하시는 공주에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 가서 책 중에 소개하신 여여당이나 새이학식당이나 경북식당, 상록원 중 어디 한 곳에 앉아 밥, 차, 또는 술 한잔 마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와락 들었다. 그때 나태주 선생이 마주 앉아 계셔주시면 좋겠지만 그건 독자의 욕심일 테고. 그분의 시 한 수를 옮겨본다.

지금도 내 마음 속에는 

지금도 내 마음 속에는 열여섯 / 열일곱 살 먹은 소년이 살고 있다 / 그 소년은 옛 공주사범학교 2층 건물 / 유리창 가에 붙어 서서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 금학동 수원지 쪽으로 열려진 산들, 굼실굼실 / 파도, 파도처럼 물결쳐 간 크고 작은 산들 / 가까이서부터 멀어질수록 더욱 짙어져 가는 / 초록에서 군청색 짙은 바다 물빛까지 / 가을 햇빛 아래 밝고 환한 가을 햇빛 아래서면 / 더욱 산들은 멀리 아득하게 보이곤 했다. // 그 때부터다, 가 본 일 없는 알프스가 떠오르고 / 머언 나라가 못내 그리워 꿈꾸게 된 것은 / 그 때부터다, 동경의 모가지가 가늘고 길고 / 또한 애달픈 보랏빛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가슴이 지긋이 아려 온다. 

글 중간중간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위험한 고비를 겪고 건강을 회복하신 듯한 선생이 건강하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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