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흐트와 아들
빌렘 얀 오텐 지음, 유동익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고백하자면 나는 오스카 와일드를 동화로밖에 알지 못한다. 그의 다른 책은 읽었으나 기억나지 않고, 오로지 아홉 편의 동화로만 이 작가를 매우 멋지게 기억한다. 동화에서 나는 그의 역설적인 비극, 까마득한 슬픔이 아름다움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신기한 눈으로 좇는다. 그래서 <스페흐트와 아들>의 표지에 '오스카 와일드의 재림!'이라 표현한 것에 일단 마음이 끌렸다. 이 말은 네덜란드에서 최고 권위의 리브리스 문학상을 받았다는 말에는 그다지 마음이 끌리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내가 모르는 상. 하지만 무언가 있겠거니 하는 호기심은 일었다. 무엇보다 표지가 마음에 들었다. 창문 뒤로 보이는 어떤 존재에 까닭 모를 친근감이 일기도 했다. 우리가 누군가를 바라보는 게 결국 창문으로 내다보는 실루엣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다.  

캔버스의 눈으로 바라보는 화가와 세상. 그들의 감추어진 욕망과 진실, 오해와 비극, 그리고 존재의 본질로 향하는 질문 등. 이런 것들이 내가 읽은 느낌이다. 그런데 잘 읽어놓고서 막상 되새기니 어떤 고갱이가 잡히지는 않는다. 너무 많은 것들을 떠올리게 된다고나 할까. 유럽 쪽의 상 받은 작품들에서 자주 느끼는 그런 느낌. 좋기도 하고 (컨디션에 따라서는) 싫기도 하고. 아무튼 드라마틱하지 않은데도 눈을 뗄 수 없게 하는 묘한 끌어당김이 있고, 추리소설을 보는 듯이 풀려나가다가 반전을 보여주는 얼개가 흥미롭다. 그리고 잘 읽힌다(잘 이해되는 것과는 별개로).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캔버스는 그야말로 백지다. 캔버스는 화가의 손길이 닿아야 무엇이 된다.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어야 꽃이 되는 존재'다. 이 백지 상태의 캔버스가 우리에게 이야기를 들려 준다. 우리 독자는 캔버스가 알아가는 것들을 함께 알아가는 수밖에 없다. 때때로 캔버스가 묘사하는 것들을 캔버스보다 더 잘 이해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독자의 앎은 캔버스 속에 갇혀 있다. 아마 조금은 답답하다 느낀 건 그런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앎이 한정된 독자에게 작가가 던지는 무수한 질문들. 캔버스가 화가 펠릭스를 끈질기게 창조자로 부르는 것에서부터 작가는 우리에게 커다란 질문을 던진다. 창조자와 피조물의 관계가 뭐란 말인가 라며. 

고민 끝에 이런 결론을 내렸다. 창조자란 근본적으로 자신밖에 만들 수밖에 없고, 화가는 자신을 그릴 수밖에 없다고. '자신'은 때로, 아버지, 아들, 친구의 얼굴을 하기도 하지만 결국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자기 자신을 창조한다는 것. 결국 스페흐트가 펠릭스에게 의뢰해 그려진 모습을 보고 싶었던 싱어는 결국 젊고 어리고 방종된 어린 스페흐트 자기 자신이 아니었을까. 어떤 형태로든 그가 싱어를 사랑한 것은 진실이겠구나..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우리 삶이란 것도 화가가 자화상을 완성해가는 과정이 아니겠나 싶다. 어느 날 뒤뜰로 가지고 나가 태워버리고 싶어질 때가 올. 그럼에도 사진을 이어붙이듯 찢어진 조각을 가슴에 안고 눈물 철철 흘리며 살아나갈 수밖에 없는. 펠릭스가 그런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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