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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안 일본 - 일본 귀족문화의 원류
모로 미야 지음, 노만수 옮김 / 일빛 / 2008년 11월
평점 :
품절
겐지 모노가타리를 처음 접한 건 중학생 때였다. 집에 있는 책장을 뒤적거리다 손에 잡힌 책이었다. 지금껏 남아 있는 기억은 참 이해가 안 됐는데도 다 읽었더라는 것. 이해 안 됐던 것은 히카루 겐지라는 주인공의 무소불위라 할 만한 여성편력과 그 모든 사랑이 진심이었더라는 것이었고, 그럼에도 다 읽었던 것은 절절한 심경이 드러난 연애 소설이라는 느낌 때문이었다. 참 절절하기도 하고, 많기도 한 사랑이라니! 나의 일본 문화에 대한 '참 오버한다'는 느낌은 거기서 비롯됐던 것이 아닐까, 지금 생각하니 그렇다.
헤이안이라는 시대를 총제적으로 다룬 이 책은 내게는, 그 막연한 겐지 모노가타리에 대한 조금은 이해가능한 해설서이다. 이 책 이전에 나는 겐지 이야기의 무대가 헤이안 시대였더라는 것도 몰랐고, 무엇이 헤이안을 관통하는 정서였던지도 무지했다. 책을 다 읽은 지금, 여전히 잘 모르겠다.(그게 이 책의 흠이다. 나름대로 한껏 친절한 어투를 하고 있는 이 책이 일본 문화에 대한 기본지식조차 없는 문외한에게는 여전히 오리무중이기 십상이라는 것을 저자가 잘 모른다는 것. 좀더 단순화, 명료화할 수는 없었을까? 물론 일본 고대의 천년을 한 숟가락에 떠먹겠다는 것 또한 무지한 독자의 과욕일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뭔가 느낌은 있다. <모노노케 히메>라는 영화에 대한 이해도 이제와서 좀 더 될 것 같은 느낌. 모노노케 즉 원령과 신도의 결합, 그것과 문학의 관계, 그리고 습속에 미친 영향. 우리 토속신앙에서도 자주 발견되는 '무엇을 해야 한다'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들이 헤이안 시대에는 그야말로 삶을 지배했었다. 과학이 스며들기 전인 천년 이전, 그들은 이해 불가능한 모든 현상을 모노노케에게로 돌렸고, 대적할 수 없는 돌연사나 자연현상을 상대로 불안함을 가시기 위한 온갖 노력을 일상에서 기울였던 것 같다. 그것이 마음 가는 대로 사랑하고, 닥쳐온 운명에 조용히 수긍하며, 속으로 쌓여가는 슬픔과 안타까움을 과장되게 드러내게 한 것이 아닐까 싶은. 그것이 또한 어느 의미로는 고립을 타고난 섬나라 사람들의 필연적 정서가 아닐까 싶기도 하고.
하도 복잡한 인맥과 정치적 상황의 설명 때문에 읽기 쉽지 않았지만 또 재미없는 것은 아니어서 결국 정리를 포기하고 느낌으로 다 읽었다. 나야 그렇지만 일본 문화나 일본 애니 혹은 일본의 그로테스크한 예술, 표리부동하다고 느끼지만 생존에 필요불가결했던 그들의 예의에 대해 관심 있거나, 공부하고 싶거나 한 이들은 모로 미야라는 이 독특한 작가의 책을 접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일본인 아버지와 타이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두 문화를 아우르는 이 여성 작가는 박학다식할 뿐 아니라 문체가 사뭇 유머러스해서 읽는 즐거움이 있다. 다만 그녀의 유머를 얼마나 만끽할지는 독자에 따라 천차만별일 것이다.(마지막으로 생뚱맞은 한 줄 소감. 나도 헤이안 사람들처럼 하루 두 끼만 먹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