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꽃 지다 - 강요배가 그린 제주 4.3
강요배 지음, 김종민 증언 정리 / 보리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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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학고재에서 나왔던 책이 새롭게 보리에서 선보였다. 부제는 <강요배가 그린 제주 4.3>.  

언제부턴가 4.3을 제주와 함께 떠올려 보지 않았다. 요즘처럼 봄꽃이 만개한 철, 제주는 그야말로 이국적인 풍광에 밝은 햇살이 마음을 간질이는 계절 속에 있겠다, 그런 이미지로만 제주를 생각했다. 그러나 이 책으로 정통으로 뒤통수를 얻어맞고 말았다. 핏빛 제주. 

국민학교 때던가, 중학교 때던가. 4.3이란 단어가 수업시간에 스쳐 지나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교실마다 대통령의 사진이 걸려 있고, 아이들이 흡사 도깨비처럼 생긴 빨갱이를 그려대던 그 시절. 그때 이해하기로는 북으로 넘어가지 않은 빨갱이 잔당들이 제주도에서 난을 일으켜,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갇혔고, 그 중 아직도 전향하지 않은 죄수들이 있다는 것 정도였다. 그리고 4.3은 별로 언급되지 않았다. 어디에서도. 그래서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갔던 것이다. 

대학 시절 기숙사 같은 방에 고 씨 성을 가진 제주도 후배가 살았다. "고와요~"라는 말을 자주 썼던 그 후배가 내가 만난 첫 제주도 사람이고, 다시금 4.3을 떠올렸다. 그러나 우리는 4.3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지금 간혹 만나는 오 씨 성의 어떤 청년도 제주도 사람이다. 그러나 그와도 4.3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4.3을 이야기하고 싶어 했다. 아니 그랬을 것 같다. 다만 선뜻 꺼내지 못했으리라 지금에야 속을 짐작해 본다. 겪어보지 못한 젊은 그들에게조차 4.3은 눈 감으면 선연히 떠오르는 풍경이 아닐까 싶기 때문이다.  

그 오랜 고난의 역사, 마치 거대한 감옥처럼도 느껴지는 섬이 당해온 수탈의 역사, 그리고 지난한 항쟁의 역사. 제주도.  

남로당이 주동 역할을 하기는 했으나, 항쟁에 참여한 사람들 대다수는 그저 '살기 좋은 세상'을, '평화롭게 지낼 수 있는 제주도'를 원했던 것 뿐이었을 것이다. 그 수많은 남과 여, 노와 소가 달리 무엇을 바랐을까! 찢기고 베이고 밟히며 그처럼 간절히 바랐던 것이 뭐 다른 것이었을까! 그 고립된 곳에서 민초들이 겪었을 공포와 아픔이 강요배의 그림 속으로 녹아들었다. 

강요배는 소위 뭔지 모르게 아름답지만 솔직히는 난해한 '예술'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의 그림은 아플 정도로 직설적이다. <始原>에서 할머니와 어린아이는 뒤쪽에 선 나무와 구별되지 않게 닮았지만, 말하고자 하는 바가 뚜렷하다. 태어남과 죽음의 슬픔, 그러나 그 끈의 간단없음에 대한 경외감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죽 넘기면 검은 그림 속으로 핏빛이 스며있음이 절절히 다가온다. 하나하나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들이 얼마나 숨죽여 살아왔는가가 아우성으로 흔들린다.

모든 집단학살은 철저히 정치적이다. 이데올로기라는 것, 지식인으로 자처하는 이들의 빛좋은 개살구이고, 민초들은 그저 아이들 크는 것 바라보며 평화로이 살고자 할 뿐이다. 세상 돌아가는 걸 보면 울컥거릴 때 많은 나이가 되고 보니, 그 숱한 원통한 넋들과 살아남은 제주도 사람들의 깊은 아픔을 그저 녹진녹진 어루만져주고 싶은 마음 뿐이다. 4.3. 우리 모두에게서 잊히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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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아버님께 진경문고 1
안소영 지음, 이승민 그림 / 보림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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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림의 진경문고에서 나온 책. 제목처럼 다산 정약용의 유배시기에 관한 여러 정황을, 특히 당대를 겪어냈던 다산과 그 일가의 마음 속 풍경을 아들인 학유의 입을 빌어 소설 형식으로 재구성한 이야기이다. 

갑작스러운 정조의 승하 이후 남인에 대한 숙청이 서학, 천주교에 대한 탄압과 맞물려 돌아가면서 정국은 혼란스러웠고, 억울한 죄인도 숱하게 생겨났던 때였다. 결국 정약용은 셋째 형님이 천주교 신자이고, 한때 서학에 관심을 가졌다는 이유로 경상도 장기에서 전라도 강진으로 옮겨다니며 유배되었고, 18년이란 세월을 유배지에서 보내야 했다. 다산의 둘째 형님인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되었다가 결국 그곳에서 삶을 마쳤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또, 딸과 사위가 천주교도로서 처형당했으나 그 자신은 철저하게 유교적 가르침을 따라 살았던 다산의 큰형님 일가에 대한 풍경도 자주 보인다.  

말하자면 이 책은 정치, 사회적 환경이 한 일가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한 가족사이기도 하고, 서양의 문물이 중국을 통해 처음으로 소개되고 실학 등을 통한 사회변혁이 서서히 급물살을 타기 시작하던 조선 후기의 혼란스러운 가치관을 보여주는 사회사이기도 하다.

그러나 문체나 이끌어나가는 방식은 지극히 서정적이다. 그저 아버지가 나라의 죄인으로 몰려 먼 타지로 유배되고 난 후 긴 세월을 아버지 없는 집을 지키며, 생활을 해결해 가며, 아버지의 해배 운동을 벌여가며 지내야 했던 아들의 회고록이다. 화자는 학유이지만, 이야기 속에 자주 등장하는 학유의 형님, 맏아들인 학연의 마음자락이 더욱 감겨왔다. 멀리 계신 아버지가 편지로 보내오는, 대가를 받고 의료행위를 하는 아들에 대한 강한 꾸지람이 그의 마음에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 아버지는 멀리서 제자를 가르치고 책을 쓰고, 남은 가족들은 먹고 살아야 하고... 지금 우리에게 귀중한 다산의 많은 책들이 그 가족들의 눈물 위에 씌어졌구나, 하는 새삼스러운 느낌에 마음이 저려왔다. 

참 많은 이야기가 들어 있다. 그리고 정갈하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시대를 살아낸 여러 사람들의 삶이 눈물겹다. 천주교 신자였던 셋째 아버님의 아들 철상 형이 끝내 자신의 아버님과 하느님을 버리지 않고 셋째 아버님이 돌아가신 자리에서 참형을 당하자, 학유는 이렇게 느낀다. 

-아, 핏줄이란 단지 몸 안으로 흐르는 붉은 액만이 아니었다. 내 뼈, 내 살갖은 내 핏줄인 그들과 함께 나눈 것이다. 그러하기에 내 핏줄의 고통은 나의 고통이기도 하다. 철상 형의 소식을 뒤늦게 듣는 순간, 내 목에도 서늘한 칼날이 와 닿는 것처럼 온몸이 다 저려왔다.- 

결국 셋째아버님의 다른 가족, 즉 새 큰어머님과 하상, 정혜 등의 다른 사촌들은 학유네 집 행랑채와 붙은 끝 방에서 몸을 의지하다가 스스로 나갔고, 끝내 처형되었다. 그게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삶의 모습이었으리라. 하지만 마음 아팠다. 또, 다산의 아내인 학연, 학유의 어머니 홍씨가 맏며느리를 언짢아하자 동서인 학유의 아내가 더 마음 불편해 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많이 공감했고, 다산이 곤장을 맞아 가며 아버지의 유배를 풀려 노력한 큰아들 학연에게 '너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을 이미 다 했다. 그것은 내가 잘 알고 있다.'고 편지해 온 대목에서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사람 사는 모습, 사람 사이의 정은 시대를 막론한다. 그게 우리네 사람 사는 모습이다. 처음으로, 그저 큰 인물로만 여겨 멀게 느꼈던 다산과 그 가족에게 가까이 간 기회가 된 책, 당시 사회를 처음으로 속부터 바라볼 수 있게 만들어준 책,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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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어, 목을 비트는 아이 메타포 3
제리 스피넬리 지음, 최지현 옮김 / 메타포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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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ringer, 목을 비트는 아이.

참 묘한 제목이라고만 생각했다. 검은 하늘을 이루고 있는 수많은 비둘기둘. <향수> 류의 책일까, 그러고보니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비둘기>라는 책도 썼다. 

몇 살 때였던가. 개를 나무에 매달아 때려 죽이는 광경을 본 일이 있다. 나는 집으로 달려와 구역질을 하며 눈물을 흘렸고, 며칠 동안 음식을 먹지도 못했다. 그들은 웃으며 그 일을 했는데, 어렸던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그 개가 그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 왜 누군가가 누군가의 즐거움의 희생물이 돼야 하는지. 세상이 그런 것들로 가득차 있을 거라는 무언의 암시와도 같았던 그 일은 내 삶의 많은 부분을 지배해 왔다. 심지어 나는 어떤 경우에도 다수에 끼어 소수를 향해 소리쳐 본 적이 없다.

파머의 심경이 나는 참 이해되었다. 사람들이 5천 마리의 비둘기를 잡아 상자에 담아와서 축구장에서 풀어준 뒤 총을 쏘고, 미처 죽지 않은 비둘기들의 목을 비틀어 고통을 덜어준답시고 하는 그따위 축제가 파머에게 어떤 느낌을 주었을지 알 수 있었다. 10살이 되면 링어, 즉 비둘기 목 비트는 아이가 될 수 있고, 남자아이라면 당연히 자랑스럽게 여기는 링어 되기가 남몰래 고통스러운 아이 파머.

니퍼는 그런 파머의 방문 앞에 날아든 비둘기다. 파머는 또래 집단에 속해야 했고, 그 일은 인생이 걸린 문제지만, 아홉살 열살 또래집단에서는 비둘기를 사랑하는 아이를 용납하지 않는 분위기다. 마치 좀비 세상에서 홀로 정상인 것을 숨기고 살아야 하는 기분으로, 파머는 고통스러워한다.

니퍼를 안고 축구장 한가운데 선 파머.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을 이기는 순간 파머는 성장할 것이다. 삶은, 남은 삶 역시 수많은 그런 굴곡을 지나는 것이겠지만 그렇게 파머는 성장해낼 것이다. 그러나 그 아이는 비둘기를 죽이지 않는 어른으로 성장할 것이다. 잘 잘못으로 가려지지 않는 불온한 인생를 견디는.

"왜 걔네들은 니퍼를 내버려 두지 않는 거지?"
"니퍼가 걔네들에게 무슨 짓을 했는데?"
"비둘기로 태어난 것, 그게 니퍼가 한 짓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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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엄마 메타포 2
클라라 비달 지음, 이효숙 옮김 / 메타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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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엄마라... 내 이야기군. 이런 느낌이다. 내가 아주 악질 엄마는 아닐까? 이런 생각을 이따금 해 보는 건 나뿐일까? 갖가지 생각을 새삼 불러일으키는 책이다. 특히, 첫 아이를 키우면서 나는 스스로 자제하지 못하고 아이를 상대로 포악하게 굴었던 기억이 여러 차례 있다. 돌이켜 생각해 볼 때는 처음으로 주어진 여러 자리, 며느리, 아내, 엄마라는 자리가 힘들고 버거울 때 그만 약한 속내를 드러내고 말았던 것이 아닐까 싶지만, 그땐 그랬던 것 같다.

    그러고도 미진한 부분. 아이를 혼낼 때, 따끔하게 해서 잘못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핑계로 지나치게 냉혹하게 하면서, 되지도 않는 완전함을 요구하고, 그러면서 뭔가 가학적 쾌감을 느낀 적은 없었나 하는 것이다. 절대 아니라고는 말 못하겠다. 도대체, 왜 그렇게 되는 걸까? 내 살과 피 같은 아이에 대해. 어쩌면 그건 자식을 그야말로 분신으로 여겨, 자신의 삶을 투영시키는 잘못된 관념에서 비롯되는 것일 수도 있으려니... 그런 혼란을 둘째 낳으면서 많이 극복했다. 자식을 떼어놓고 그 아이만의 삶을 따로 들여다보는 여유를 가지게 된 것도 둘째를 기르면서였다. 성숙하지 못한 엄마 슬하에서 자란 큰아이에게는 이래저래 미안한 마음.

  <나쁜 엄마>는 그런 것들을 확대해 돋보기로 들여다보여 주는 책이다. 미성숙된 인간으로서의 엄마에 대한 해부학이다. 어찌나 날카로운지 마치 칼날 위에 선 기분이고, 소설보다는 정신분석학 사례처럼 읽히기도 한다. 제목만 보고 재미있겠다고 달려들었던 5학년 둘째는 첫 부분에서 손을 들었지만, 그래도 공감한단다. 분홍 엄마와 검은 엄마의 존재에 대해. 가슴이 서늘해진다. "너도 분홍 딸일 때가 있고, 검은 딸일 때가 있단다. 사람은 모두 두 가지 면이 있지 않니?"하고 너스레를 떨었지만, 핵심은 정도의 문제이고 자제력의 문제일 것이다. 그저 예뻐라하기만 한 것 같은 둘째의 반응이 저렇다면, 큰아이에게는 읽히고 싶지 않다. 

  갑자기 두 아이를 차례로 불러 살짝 물어보았다. "행복해?"
  아이들은 "응!"이라고 확신에 찬 대답을 돌려주었다.
  "엄마는 어떤 엄마니?"
  "친구 같을 때도 있고, 무서울 때도 있고."
  "그게 싫어? 늘 친구 같았으면 좋겠니?"
  "그렇지는 않아. 에이, 엄마 나쁜 엄마 읽고서 찔리는 구나."
  "책, 처음만 조금 읽고서 아는 척하기는."

  때 아니게 이런 대화까지 주고받았다. 엄마는 얼마나 아이를 이해하며 살아갈까? 하루 중 아이의 진정한 바람을 충족시켜 주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엄마도 인간이라, 때로 비겁하고 두려워하고, 나약하며 극도로 이기적일 때가 있다는 걸 아이가 충분히 이해하기 전까지 어떻게 하면 좋은 엄마의 모습을 지켜나갈 수 있을까? 쉬운 노릇은 아닐 것이다. 이렇게 작정해 본다. 검정보다 더 나쁜 건 분홍과 검정을 오가는 양극화일 수 있으니, 나는 연하늘색으로 주욱 가 보는 연습을 하자고. 기복 많은 삶을 자식에게 그대로 드러내는 우를 범하지 말자고. 아, 고해성사를 강제하는 이런 소설을 읽으면 더 어렵게 느껴진다. 좋은 엄마 노릇. 좋은 엄마이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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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아, 평화를 믿어라 - 엄마의 전쟁 일기 33일, Reading Asia
림 하다드 지음, 박민희 옮김 / 아시아네트워크(asia network)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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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이 뭔가에 대해, 그것이 지역의 이름인지, 민족의 이름인지, 혹은 종교적 공동체의 이름인지에 대해서조차 정확히 알지 못하는 채로 그저 막연한 상식만 가지고 있던 내게 최근 <유대인>, <이슬람>, <팔레스타인>에 관한 책을 한꺼번에 읽을 기회가 생겼다. 이 책을 받아 하루만에 읽고도 선뜻 리뷰 쓰기 버튼을 누르지 못한 것은 나머지 세 권의 책이 충분히 읽히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 <아이들아, 평화를 믿어라>까지 네 권의 관련 책을 다 읽고 난 지금도 내 머릿속은 부옇다. 명확한 갈피가 잡히지 않는다.

그간 숱한 책에서 이유 없이 끔찍한 살육의 대상이 되어온 저 안네의 민족, 유대인은 이 책 <아이들아~>에서는 잔인한 살인자로 묘사된다. 이스라엘 북쪽에 위치한 레바논을 자신들의 욕심만 위해 공격해대는 반인도주의적 집단으로 묘사된다. 저자는 마지막에 가서야 평화를 운운하지만,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스라엘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차 있다. 그건, 그들이 자본과 무력을 앞세워 몸밖에 가진 것이 없는 아랍인들을 탄압하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들이 그 전에 당했던 것처럼.

팔레스타인은 땅을 중심으로 한 아랍 민족의 연합체이고, 지금은 살던 땅에서 쫓겨나 몇몇 지역에 나뉘어 존재하거나 인근의 나라들에서 난민 거주지를 형성해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으며, 임시정부 형태로 대표기관(PLO)을 가졌다. 한 마디로 독립국가가 아니며, 이스라엘에 의해 음으로 양으로 지배당하는 삶을 산다. 따라서 마치 우리가 일제에 대해 그랬듯이 끊임없이 소규모 무력투쟁을 하거나 테러를 하는 집단들이 존재한다.

헤즈볼라는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많이 거주하는 나라, 레바논의 정당 중 하나이며, 이슬람의 기치 아래 이스라엘에 대항하는 무장단체이기도 한데, 반 이스라엘 및 이슬람주의가 팔레스타인과 동질성을 형성하며, 이스라엘 레바논 침공의 빌미를 제공하기도 한다.

저자인 림 하다드는 레바논의 부유한 기독교도 집안에서 태어난 여성이다. 아버지가 의사여서 레바논이 이스라엘 침공 때문에 전쟁을 겪자 한 동안 미국으로 건너가 살며 교육받고, 다시 레바논에 돌아와 기자로 일한다. 그녀는 동료인 영국인 닉과 결혼해 두 아이를 데리고 살다가 다시 이스라엘의 침공으로 불바다로 변하는 베이루트를 떠나 산 속 저택을 빌려 3주간 피신해 살며 전쟁터를 누비는 남편을 기다린다. 그리고 그 33일간의 악몽을 이 책으로 펴냈다. 그녀의 눈에 비친 수많은 민간인 사상자와 희생된 어린아이들 그리고 자식과 남편, 친척들을 잃은 피눈물 흘리는 어머니들의 모습이 이 책을 쓰게 한 동기이다. 전쟁이 사람들의 삶을 얼마나 피폐하게 하는지에 대한 경종을 울리고 다음 세대에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바람으로 이 책을 썼다.

나는 한 어미로서, 그리고 일제 강점기에 대해 비교적 상세히 들은 성인으로서 이 책의 모든 내용에 참으로 공감한다. 그 어떤 이유도 무고한 생명의 살상에 대한 이유가 될 수 없음에 통감한다. 그러나 저자에 대해서는 조금 실망스러웠다. 아니, 사실은 평화를 논하는 책의 저자에 대한 내 기대치가 너무 커서 그럴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읽히는 림은 그저 이기적이고 소시민적인 한 어머니, 아내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자신이 누리는 자의 위치에서 살아가고 있을 때는 무관심하다가, 피해자의 입장이 되니 흥분하는 모습. 미국을 통해 많은 것을 얻으며 미국 스타일로 살아가다가 가까이에서 대포 소리가 들리니까 그제서야 팔레스타인에 대해, 이스라엘과 그 뒷배가 되어 주는 미국에 대해 적개심을 불태우는 모습이 그랬다. 어쩌면 자신이 끔찍한 일을 당하고도, 더 큰 의미의 용서를 보여주는 <내 이름은 임마꿀레> 같은 책에 너무 익숙해서일지도 모르겠지만, 이 책은 말하자면 '엄마의 전쟁일기'라고는 하지만 저자 자신이 '목격자'에 머물고 있으므로 솔직히 말하면 깊은 감동은 주지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이 지역에 대한 깊은 관심을 불러일으킨다는 면에서 매우 의미롭다. 그리고 어떤 명분이 폭력이나 전쟁을 정당화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폭력은 가하는 자나 당하는 자 모두를 차츰 무디어지게 한다. 폭력에 대한 갚음은 폭력밖에 없다고 여기게 만든다. 어린 아이들이 총을 들고 이스라엘로 몰려들게 만든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게 만든다. 결국 모두에게 미래는 없다. 따지고 보면 지금 중동의 모든 비극적 상황도 유럽열강의 식민지 지배의 잔해들이다. 그리고 전쟁을 통해 성장한 신흥강국 미국의 욕심의 배설물이다. 이스라엘의 팽창주의를 막을 자는 그들이다. 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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