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귀, 선덕 여왕을 꿈꾸다 푸른도서관 27
강숙인 지음 / 푸른책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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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생각하는 선덕여왕은 젊고 아름다우며 하늘거리는 금관 아래 영롱한 귀걸이를 한 모습이다. 그분의 예순 넘은 나이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아버지 진평왕의 재위가 53년 동안 이어졌고, 선덕여왕의 재위는 16년. 그녀가 왕위에 올랐을 때는 이미 나이가 많았다. 그랬겠구나. 그동안 선덕여왕 아닌 덕만 공주에 대해 한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던 것이 참 희한하게 느껴졌다. 오랜 세월 나이 든 공주였던 그녀. 더 희한한 것은 불과 며칠 전 지귀설화를 다시 찬찬히 읽어보았던 우연의 일치다. 이 책을 만나려고 그랬던가 싶은. 나는 순수한 지귀의 사랑이 화마(火魔)로 화할 수 밖에 없었던 비극적 결말이 늘 마음 아팠다. 과유불급이라는 걸까? 사랑도? 다정도 지나치면 병이라 하니, 시쳇말로 스토커 정도로밖에 취급되지 않은 걸까? 지귀의 사랑은? 그러나 생각컨대 상대를 괴롭혀 내 만족을 추구하지 않는 사랑은 아무리 깊어도 사랑이다. 이 책의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그런 사랑 말이다. 여왕, 지귀, 광덕..그들 각자의 사랑.  

평생을 홀로 산 선덕여왕에게는 정말 사랑이 없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이 책은 그런 개연성 있는 상상에서 출발한다. 만약 지귀 이야기가 사실과 연관되어 있다면 영묘사 화재 사건과는 어떤 고리를 지니고 있을까? 이 책은 그런 상상에서도 출발한다. 그리고 상상이 한 자리에 모인다. 예순이 넘은 여왕은 어린 화랑 가진을 사랑했고 그건 그녀 인생의 유일하고 때늦은 사랑이었다. 비밀스럽고 비밀스러워 결국 홀로 간직하고 떠날 수밖에 없었던 사랑. 열일곱의 평민인 지귀는 선덕여왕을 사랑한다. 때이르고, 가여운 사랑. 여왕의 사랑은 눈부시고 아름다운 젊음에 대한 동경과 섞였고, 지귀의 사랑은 충성과 섞였다. 그래서 사랑이 덜했느냐 하면 그렇지 않고 더 진한 핏빛을 띠었다.그들의 사랑 역시 다른 사랑과 똑같이 아름다웠다. 슬픈 아름다움. 

사랑 이야기와 더불어 책의 많은 부분은 신라가 당과 연합하여 삼국통일을 이루어내게 된 배경에 할애되어 있다. 그런 악수를 둘 수밖에 없었던 김춘추 측의 고민과 이를 저지하려는 반대쪽(비담, 염종)의 울분이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생생히 표현되어 있다. 작가는 그런 역사의 회오리가 사랑을 뒤흔들게, 그렇게 안배해 놓았다. 참 얄궂기도 한 작가의 상상력이다. 선덕여왕이 사랑한 가진은 가공의 인물이지만 이 책에서는 결국 반란을 일의는 염종의 아들이다. 역모의 끝은 비극이다. 지귀는 가진의 인품에 반하여 그의 낭도가 되고 싶어 했지만 은혜를 베푼 김유신의 사주를 물리치지 못하고 염탐을 한다. 그의 흠모의 대상은 역적이 되고 만 가진이며, 그의 사랑은 조국 또는 선덕여왕이다. 어떻게 보면 삶에는, 사랑에는 늘 저런 이율배반적인 비극이 도사리고 있다는 생각도 해본다. 그래서 모든 사랑은 아름답되, 슬픈 것이다.   

종횡무진으로 달리는 상상력과 애잔한 사랑에 쉬지 못한 채 단숨에 책을 다 읽고 생각해보니 나는 <마지막 왕자> 이래 강숙인 작가의 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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