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의 법칙 메타포 9
낸시 월린 지음, 황윤영 옮김 / 메타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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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쁜 엄마>라는 책이 먼저 나왔을 때, 한 구석이 뜨끔했었다. 내 모습에서 조금 과장되게 덧칠하면 그 책의 나쁜 엄마와 별반 다르지 않을 수 있음 때문이었다. 이 책도, 슬프게도 마찬가지다. 자식을 매우 이기적인 방식으로 '사랑'하며, 실제로는 아이를 '생존' 그 자체로만 살아가게 하는 매우 불안정한 정신을 지닌 엄마. 실제로 생명의 위협을 느껴본 적이 있는 아이, 적어도 아이의 마음에 그런 생각이 떠오르게 해본 부모는 의외로 많을 것이다. 다만 그게 지속적이냐, 한 번이냐, 혹은 간헐적이냐의 차이일 뿐. 

아마 자식을 위협하는 엄마는 자신이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이미 병자이므로. 그래서 자식이 어느날 자신을 떠나 버리거나, 도리어 위해를 가하거나, 밀쳐버리면 심한 배신감에 몸을 떤다. 그리고 지독한 증오를 품는다. 

매슈와 캘리와 에미는 어떻게 하든 엄마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고 무사히 하루하루를 보내기만 간절힌 원하는 형제자매이다. 그들은 서로에 대한 신뢰로 생존해 나가므로, 결코 자신들 중 하나의 위험을 외면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다른 막내 에미에 대한 매슈와 캘리의 절박한 보호본능은 간절하고 질기다. 

그들이 어느 날 자신의 부모로부터 폭행을 당한 위기에 처한 아이를 구해내는 머독 아저씨를 보고 집착이라 할 정도로 매달리는 것, 역시 생존의 법칙이었다. 도와 줄 어른이 그들에게는 그만큼 절실했던 것이다. 머독은 이 아이들 때문에 매우 불편한 입장에 빠지고, 자신이 '남의 집' 아이들 일에 개입하는 일로 고민한다.  

실제로 아래층에 사는 이모와 친아버지, 머독의 역할은 생각보다 미미하다. 그들은 아이들의 절박함을 오랫동안 외면하고 살았으며, 그저 회피하기에 급급했다. 슬픈 일은, 그런 마지못한 원조의 손길이 아이들의 생명을 구하는 힘을 지녔다는 것이다. 세상은 아이들에게, 그처럼 가혹하고 힘들다. 약자. 

끊임 없이 회피하다 맞닥뜨리는 삶의 진실이라. 

매우 고통스러운 책이고, 현실이고, 또한 해결되지 못한 문제를 적나라하게 내보이는 통렬한 책이다. 섬세하고 날카로운 문장들이 송곳으로 찌르는 듯하다.  

얼마 전 지하철에서 난데없이 우산을 휘두르던, 제정신이 아닌 듯한 초로의 남자에게 무방비로 얻어맞던 젊은 여성이 떠올랐다. 그녀는 비명을 질렀지만 근처의 누구도 그 남자를 제지하지 않았다. 남에게 원조의 손길을 내미는 일, 혹은 적어도 자신의 가정에서 가해자가 되지 않는 일은 생각 이상으로 쉬운 일이 아니다. 늘 되돌아보고, 삶의 방침을 재정비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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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탄생 - 현상과 실재, 인식과 진리, 인간과 자연에 던지는 첫 질문과 첫 깨달음의 현장
콘스탄틴 J. 밤바카스 지음, 이재영 옮김 / 알마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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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철학이 소크라테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여기고, 그 이전의 철학자들은 자연철학자로 묶어 버려 그들의 이름은 나열식으로만 거론되곤 했다. 적어도 내 학창시절에는 그랬다. 그리하여 탈레스 - 물, 피타고라스 - 수, 헤라클레이토스 - 불 , 데모크리토스 - 원자 식으로 외는 데서 그쳤다. 그나마 그럴싸한 생각은 원자를 생각해 낸 데모크리토스 정도라고 여겼고, 그뿐이었다. ‘하여간 옛날 사람들은 참 단순했다니까.’ 이렇게까지 오만하게 생각했다.

이 책은 그런 말도 안 되는 무식함과 오만함에 대한 깨우침의 책이다. 읽는 내내 가슴이 두근거렸다.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 피타고라스, 크세노파네스, 파르메니데스, 엠페도클레스, 아낙사고라스, 데모크리토스의 철학을 깊이 있게 파고들며, 그들의 사상이 얼마나 대단했던 것인지를 설득적으로 일러주는데, 너무 감동적이고 흥분되었다.

익숙한 이름도, 조금은 낯선 이름도 있었지만 그들 모두는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였다. 지은이가 강조하듯이 가설을 증명할 만한 어떤 실험도구도, 기본 지식도 없던 수천 년 전에 그들은 경험과 사유를 통해 인간과 자연에 대해 심오한 질문을 던지고 그 해답을 궁구해 펼쳐보였다. 그리고 그들이 제시하는 해답 하나 하나가 어쩌면 그렇게 동감을 주는지 한 마디로 놀라웠다.

읽을 때마다 ‘맞다! 그렇구나!’ 했다. 한 철학자의 사상에 공감하고, 다음 철학자의 반박 내지 새로운 해답에 공감하며, 울컥 울컥 솟아오르는 긍정의 기분에 휩싸였다. 사실 지금도 개개 철학자의 사상에 대해서는 전혀 변별적인 지식을 얻지 못한 상태다. 책을 한 자도 빠짐없이 다 읽었음에도. 하기는 당연하다. 며칠 동안 책 한 번 읽어 어떻게 그들의 깊은 사상을 이해하랴. 지나가는 멋진 글들이 안타까워 형광펜으로 부지런히 밑줄을 그었지만 마치 바닷가 모래알처럼 그것들은 이미 내 머릿속에서 다 빠져나가버렸다.

그러나 지식이 늘어나지는 않았으나 나는 변화했다. 이제 그들 모두를 대단히 위대한 인물로 여기게 되었다. 지나간 인류의 모든 사상가들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지니게 되었다. 그리고 좀 더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게 저자의 의도였다면 백퍼센트 성공한 셈이다. 그리고 이런 책을 쓴 저자에 대해서도 존경의 감정이 생겼다. 또, 이 책을 번역한 이에 대해서도 대단하다는 심정이 되었다. 이 책이 읽기 쉬우냐 하면 그렇지 않다. 내용도, 양도 솔직히는 버겁다. 하지만 읽기가 무척이나 즐거웠던 것은 저자와 역자의 해박한 지식과 정확한 어휘, 문장의 구사 때문이었을 것이라 여긴다.

데모크리토스가, “용기는 행위의 시작을, 행운은 행위의 결과를 결정한다.”고 한 말을 이 책이 아니었던들 내가 어찌 이해할 수 있었으랴 싶다. 데모크리토스는 자연이 엄격히 인과성에 의해 지배된다고 여겼고, 인간이 이성적인 사유를 할 수 있는 자유를 지녔다는 것이 이 인과성을 해치지 않는다고 여겼다. 그는 우리의 이성으로 알 수 없는 경우, 그 원인을 모를 때 우연이라고 ‘말’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자연의 움직이지 않는 인과성에 대해, 행위를 시작하는 것은 용기이며, 행운은 지성의 자유를 이용할 줄 알았던 인간이 인과성의 비밀과 맞닥뜨린 것이라고 한 것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내 문장이 또다시 그의 심오한 사상을 왜곡시켜 버렸다는 느낌이 든다. 아마도 얕은 지식과 낮은 어휘력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더욱 이런 생각이 든다. 참, 대단한 분들. 저자는 이 위대한 철학자들이 알아낸 비밀이 지금의 과학계, 수학계 등에서도 힘을 발휘하고 있다고 하고, 그 예를 거듭 거듭 들어 준다. 다음은 그 한 예이다. 

-저명한 이론물리학자이며 노벨상 수상자인 리처드 파인먼은 이렇게 묻는다. “대홍수가 일어나 모든 과학적 인식들이 파괴되고 오로지 하나의 문장만이 우리의 후대에게 전달될 수 있는 상황이 온다면, 어떤 착상이 가장 짧은 말 안에 가장 많은 정보를 담고 있을까?” 그의 대답은 이렇다. “나는 그것이 원자가설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것들이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문장....... 약간의 상상력고 사고력을 발휘한다면, 이 하나의 문장으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세계에 대한 정보량은 실로 엄청나다.”-(459쪽)

공감, 공감. 이 책, 철학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분들에게는 필독서가 될 것으로 보인다. 나처럼 생판 문외한인 사람이 읽어도 아주 조금, 생각의 틀을 넓힐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철학의 깊은 즐거움을 슬쩍 열어 보여주는 책,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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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와 미얀마 사이 - 미소의 나라 버마와 군사정권 미얀마 양극단의 두 세계를 위태위태하게 걷는 여행
세가와 마사히토 지음, 정금이 옮김 / 푸른길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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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이 우리집에 온 지 여러 날. 나는 버마 또는 미얀마에 관한 골치 아픈 이야기들이 들어 있으리라 짐작하고 지레 겁을 내며 펴보지 않았다. 이러저러한 일로 심사가 복잡하여 더 이상 마음 쓰기 싫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버마와 미얀마 사이>를 펼쳐 들었으니 골치 아픈 일이 조금은 해소된 걸까. 

아무튼, 자칫 아예 들춰보지 않았으면 어쩔 뻔 했나, 하는 아찔한 기분이 책을 읽으며 들었다. 너무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재미라고 하면 무슨 우스갯소리가 적혔나 오해할지도 모르지만, 여기서 재미란 지적, 감성적 호기심의 충족의 의미에 가깝다. 아니, 아시아 혹은 지구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부쩍 일었다고 해야 하나.  

그간 버마가 미얀마로 이름을 바꿨다는 걸 아는 것 정도 외에 이 나라에 대한 관심은 거의 없었다. 최근 뉴스에 오르내리기는 했지만 '그렇구나.'하는 조금의 안타까움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저자인 세가와 마사히토와 함께 이라와디 강을 따라 버마의 이곳 저곳을 다니는 듯한 느낌에 휩싸였다. 

마치 우리나라와도 같이 서구 열강의 손아귀에 놀아나고, 일본의 군국주의에 휘둘리고, 이어 군정의 폭압 아래 <1948년>의 그것과도 같은 감시 하에 신음하는 그곳. 숱한 소수민족의 항쟁과 굴복과 아픔이 서린 곳. 맨발로 버마의 온갖 곳을 헤집고 다니며 듣고 기록하고 찍어 온 저자의 필사의 노력 덕분에 나는 마치 버마를 다녀온 듯한 기분이 되었다. 

그러나 저자는 매서운 역사의식과 국제감각을 곳곳에서 펼쳐 보이면서도, 버마 사람들의 순박함과 관대함과 미소를 끊임없이 상기시킴으로써 미지의 독자로 하여금 버마에 대한 호의를 듬뿍 심어주었다. 그가 일본과 한국과 중국에 대해 드문드문 이야기하는 걸 읽으며 움찔 움찔했다면 뭔가 내 속에 알면서 행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저자는 버마에 대해 다루면 '문제점'만 나열하거나 '아름다운 풍광'만 소개하기 쉬움을 지적하면서 매력과 문제점을 동시에 드러낼 책을 쓰고 싶었다고 하는데, 읽은 이의 소감을 말하자면 그의 의도는 대성공이다. 그저 여행서인 것 같은 분위기로 글을 이끌어가면서 군데 군데 문제점을 찔러넣는 저자의 노련미가 진정성을 더욱 빛내주고 있다. 

우리에게 버마는 그저 동남아시아의 빈국으로서, 어디까지나 관심 밖인 걸까? 아마 그렇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간명한 구성에 참 많은 것들이 담겨 있어 뭐라 소개하기 힘들지만 그저 재미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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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12 10: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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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16 18: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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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16 18: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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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16 18: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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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도쿄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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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고백부터. 오쿠다 히데오를 이 책으로 처음 만났다. <남쪽으로 튀어>나 <공중그네>가 인터넷 서점의 각종 메뉴를 화려하게 장식할 때, 마치 이 책의 주인공 히사오 다무라가 존 레논의 죽음 앞에서 일부러  외면했던 것처럼, 롤링스톤스의 일본 공연 때 무심한 척 해보였던 것처럼 나도 히데오의 작품을 건너뛰었다. 남들이 와~ 하면 나는 칫, 한다. 마치 히사오처럼. 

먼 과거로 돌아가 보니(이 책이 그렇게 이끌었다.) 히사오는 바로 나였다.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고 싶다, 조그만 항구도시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열망으로 상경했던 나. 재수를 했거나 대학 중퇴를 하지는 않았지만 굳이 잡지사행을 선택해 밤을 밥 먹듯이 새우며 선배 기자들 밑을 기어다녔던 일, 어느 날 프리랜서로 나서 온갖 클라이언트의 뒤를 따라다니며 허접스러운 뒤치다꺼리까지 도맡아 했던 일 등등. 다르다면 그는 상당히 잘 나갔고, 나는 그렇지 못했다는 정도. 

책의 배경이 되는 80년대. 내 청춘도 80년대 중후반에 맞이하고 보냈다. 저자의 자서전적인 느낌도 상당히 풍기는 이 책은 그래서 더욱 내게 공감되었다. 히사오의 청춘을 스쳐 지나간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꼭 어제 일인 것만 같이 느껴졌다. 그래,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었다! 그래, 나고야와 경합하여 서울이 이겼었다. 88 올림픽. 아, 이제 고색창연해져 버린 쌍팔년도 식. 그 무겁고도 가벼웠던 시절. 스무살, 서울 

역자 후기에서 옮긴이는 이 책의 최고 조연이 누굴까, 하는 질문을 던지는데 나는 히사오의 클라이언트 중 하나인 고다가 떠올랐다. 그런 이런 말을 한다. 

"남자라는 건 말이지, 개인 요리사를 고용했을 때 비로소 일류가 되는 거야. 영국 귀족들도 다 그렇잖아? 그놈들 아예 소믈리에까지 거느리고 있어. 그에 비하면 내 호사는 아직 멀었어." 

고다는 부동산으로 갑자기 떼돈을 번 전형적 80년대식 부자다. 큰소리 탕탕 치던 그는 포장마차에서 눈물을 흘리며 주정을 한다.  

"친구들을 잃어버렸어. 물론 옛날이 좋았다고는 전혀 생각 안 해. 쥐꼬리만한 월급에 실컷 부려먹고, 무능한 상사는 잘난 척 위세나 부리고, 좁은 집안에서 복닥거리며 살고, 그런 생활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절대로 없어. 하지만 말이야. 그때가 그립기는 하더라고." 

나도 그때가 그립다. 

1979년에서 89년까지의 10년 동안을 여섯 개 장으로 나누어 각각이 하나의 완결을 이루도록 하면서 전체가 장편소설이 되게 독특하게 구성되어 있다. 그게 우리 인생을 닮았다고도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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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06-07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역시 글쓰기의 저력이 이해됩니다.^^
오쿠다 히데오~~~ 책따세 책으로 만났지요.
이 책은 아직...인터공원 서평단 신청했는데 될려는지...

파란흙 2008-06-07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공원 서평단 꼭 되시기 바랍니다. 젊은이들보다 우리들에게 더 재미있을 이야기.^^
 
셰익스피어, 그림으로 읽기 아트가이드 (Art Guide) 6
권오숙 지음 / 예경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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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을 때 흔히 곁들여지는 그림들은 두고두고 신화의 이미지로 뇌리에 남는다. 어느 날 새하얀 대리석의 彫像들을 대하며 문득 그리스 로마 신화의 페르세우스를 떠올리듯이. 그런데 셰익스피어, 하면 그림보다는 영화의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 올리비아 핫세가 주인공으로 나왔던 <로미오와 줄리엣> 그리고 이년 전쯤 더스틴 호프만이 샤일록으로 나왔던 <베니스의 상인> 등이 그렇다. 셰익스피어와 그림을 그리 연관지어 생각해보지 않았기에 이 대가의 작품들과 그림의 조합은 읽기 전 흥미를 더욱 불러일으켰다. 셰익스피어를 그림으로 읽다!

우선, 이토록 많은 셰익스피어 작품의 그림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이 많은 그림들을 찾아내고, 각각의 그림에 간단하나마 그림 사조별 특징까지 짚어가며 설명해주려면 정말 많은 노력을 기울였겠다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림 중에는 연극무대의 배경그림이나 배우를 그린 그림들도 상당수 있어, 원작이 희곡이라는 실감을 새삼 했다.

작품마다 일일이 원전을 찾아내 표기해 준 것도 좋았다. 거의 모든 작품에 원전이 있는 것을 확인하면서 과연 셰익스피어는 설정이나 줄거리보다 대사 하나하나가 압권이라는 느낌도 더 강해졌다.

이 책의 특장점 중 하나는 본문의 바깥 부분에 배치한 '감상 포인트'이다. 작품마다 적어 놓은 '감상 포인트'에서는 다른 데서 쉽게 접하지 못할 내용도 꽤 많이 알려주고 있다. 죽음까지 불사한 로미오와 줄리엣의 뜨거운 사랑이 단 7일간이었다는 건 미처 생각해 보지 못했던 일이다. 또 셰익스피어 시대에는 여성이 무대에 서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변성기 이전의 소년들이 여장을 하고 여자 역을 했다는 것도 어렴풋이 다시 떠올랐으며, 셰익스피어가 그런 연극사적 제약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여주인공들이 남장을 하는 테크닉을 취했다는  대목은 무릎을 탁 치게 하는 감상 포인트였다. 

무척 잘 만들어진 책. 그러나 셰익스피어를 그림으로 읽는 일은 생각보다 녹록치 않았다. 원래 플롯 자체가 복잡하고 이중, 삼중으로 겹쳐져 있기 십상인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줄거리만으로 소개하는 부분이, 작품을 처음 대하는 사람이 이해하기에는 좀 어려워 보였다. 4대 비극이나 유명한 희극들을 제외하고 <헨리 4세> <리처드 3세> 등은 내용 숙지가 쉽지 않아 그림을 감상할 충분한 여유를 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림 위주로 감상하자니, 알맹이가 빠진 듯해 뭔가 아쉽고!

결국 이 책을 잘 보려면 여기에 소개된 수많은 작품을 미리 좀 읽은 상태에서 천천히 시간을 두고 넘기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전체를 소설 읽듯이 읽어내려가기보다는 띄엄 띄엄 오래 곁에 두고 읽는 것이 좋겠다 싶다. 볼 때는 책에 소개된 줄거리를 다시 훑은 다음, 그림과 그림 설명, 감상 포인트를 꼼꼼히 짚어가며 읽고, 별도로 소개된 명대사들은 원문을 찾아보는 것이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소리내어 읽기 정도는 한번씩 해보는 것이 어떨까 싶다. 말하자면 셰익스피어 작품에 대한 사전처럼 활용하는 것이다. 필요할 때마다. 찾아보고 싶을 때마다. 아쉬운 점 하나. 그림이 좀더 크고 선명했더라면 더 좋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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