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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평점 :
‘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는 이 책의 처음에 나오는 단편이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처음 만나는 글. 9쪽. ‘그후로 십삼 년이 지나는 동안, 나는 여러 번 어린 케이케이가 수영을 했다던 그 냇물을 상상했다.’로 시작되는 문단을 처음 만나던 순간은, 빈방에서 무슨 일로 눈물을 글썽거리던 순간이었고, 이 글이 툭하고 건드리자 나는 참지 못하고 좀 울었다. 김연수의 소설과 나 사이에는 무수한 간격이 있고, 우리는 서로를 알지 못하고, 더구나 이해하는 일은 별과 별 사이만큼 멀고 연관 없지만, 그래도 나는 작중 화자의 심경이 읽혔다. 김연수도 읽혔다.
이 작가가 말하자면 나와 같은 시기에 머물러 있구나 하는 느낌. 지나간 순간, 지나가버리고, 스쳐 가버린 숱한 순간들을 되새기고 곱씹고 있구나. 그 모든 순간들이 어쩌면 그렇게나 우연스럽고, 내 것이면서 또한 아닐까 싶은 느낌을 절감하고 있구나. ‘세계의 끝 여자친구’라는 서로 무관할 것 같은 말들의 나열도 이해보다는 그저 앎의 느낌으로 다가왔다. 우리가 사랑하는 이와 함께 가고 싶은 곳은 항상 세계의 끝이라는 것. 그건 결국 시간을 삼키고 과거와 미래와 현재를 품은 메타세쿼이아가 늘어선 길 끝이라는 것. 우리는 줄곧 죽고 싶어 한다는 것들을.
마흔세 살이란 이런 나이야. 반환점을 돌아서 얼마간 그 동안 그랬듯이 열심히 뛰어가다가 문득 깨닫는 거야. 이 길이 언젠가 한번 와본 길이라는 걸. 지금까지 온 만큼 다시 달려가야 이 모든 게 끝나리라는 걸. 그 사람도 그런 게 지겨워서 자살했을 거야.-68쪽.
우리가 노인이 될 때까지 살아야만 하는 이유는 어쩌면 우리 모두가 일생에 단 한 번은 35미터에 달하는 신의 나무를 마주한 나무학자 왕잔의 처지가 되어야만 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공룡과 함께 살았다는, 화석으로만 남은, 하지만 우리 눈앞에서 기적처럼 살아 숨쉬는 그 나무.-82쪽
책 읽는 취미를 어지간히 자랑거리로 여기며 한동안을 지냈으나 갑자기, 그 모든 것에 눌리고 부질없고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시기를 통과하는 내게는 ‘내겐 휴가가 필요해’는 그저 책읽기에 대한 이야기로 읽혔다. 그래서 매우, 의미심장했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더 불행해지는’, 형사였던 노인의 이야기는 무언가 선언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는 절망했다. 절망의 끝은 죽음이다.
어떤 책을 들춰봐도 거기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또 노인이 다시 젊어져 새로운 인생을 살아갔다는 이야기도 나오지 않았다. 어이없게도 삶은 단 한 번만 이뤄질 뿐이며, 지나간 순간은 두 번 다시 되풀이되지 않는다고, 그 도서관에 있는 모든 책들은 말하고 있었다.169-170쪽.
정말 당연하고, 무서운 사실.
‘달로 간 코미디언’은 최근 읽은 어떤 이야기보다 슬프고, 무섭고, 우스웠다. 눈물 끝에 웃음이 나오고, 다시 눈물이 나오고, 콧물까지 줄줄 흘리다가 그게 웃겨서 또 웃게 되는 이야기. 한 번쯤은, 한 번쯤은 별볼일 없는 인생의 끝에서 뜻하지 않은 일로 만신창이가 되고, 눈이 먼 채로 차가 뒤집혀 안경마저 잃어버린 채 사막을 향해 끝없이 걸어가 보아야, 거기 인생이 놓여있음을 절감하리라 싶게 만드는 이야기.
종합하건대, 이 책, 내게는 소통되지 않음과 유한함, 지극히 짧음에 대한 중간 보고이고, 그럼에도 사랑함에 대한 애절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