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와 좌파의 재정립 - 보편주의적 복지국가를 향한 새로운 좌파 선언의 전략
사민+복지 기획위원회 엮음 / 산책자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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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 우파니, 진보와 보수니 하는 말들이 마치 태어날 때부터 썼던 말인 것처럼 사람들에게 익숙해졌지만 정작 그 뜻을 명확히 이해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스스로가 어디에 속했는지를 잘 아는 일도 그만큼 어렵다. 참 모호하다. 그러니 ‘한국 사회와 좌파의 재정립’. 참으로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 제목이었다. 좌파는 진보이고, 우파는 보수이며 대부분의 좌파는 빨갱이이고, 대부분의 우파는 보수꼴통일까? ‘중도’라는 말 꼴통들이 자신을 포장하기 위해 하는 수사이고, 중도파는 결국 변절자일 뿐일까? 각설 

정치 성향을 떠나서 말하자면, 나는 자신이 보수적이라고 여겼다. 워낙 사물이 변하는 일을 좋아하지 않으며, 남이 변하는 것도 어색해하고,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이런 따위의 말에 쾌감을 느꼈다. 봄과 여름, 가을, 겨울이 일정하게 순환해야 안심이 되고, 거기 있던 것들이 적어도 그 주변에서 찾아져야 편안함을 느낀다. 사람 중에는 예의 없는 사람을 제일 싫어라 하고, 염치 없으면서 “나 원래 그래.” 하며 자주 표정이 바뀌는 사람을 싫어라 한다. 이 모든 것이 나를 스스로 보수적이라 느끼게 했다. 그래서, 터무니 없을 수 있겠지만 정치적 성향도 다소 그랬다. 과격한 이야기를 쉽게 하는 사람, 남이 틀렸다고 단정하는 사람, 틀린 사람은 벌 받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을 다 저어했다. 대학 때 안티에 속했던 것도 단순히 그런 내 성향 때문이었다. 수업 거부에 쉽사리 동의가 안 되고, 보도블록이 깨지는 모습이 거부감스러웠고, 운동권 친구들의 한결같은 표정과 말투가 거부감스러웠다. 옳지만, 옳은 것이 모든 걸 정당화시켜 주지는 않는다고, 막연히 느꼈다. 그 많은 ‘부정’들로 무얼 이룰 것인가, 싶었다. 

그런데, 이 책은 동조하되 함께 행동해지지 않았던 오랜 내 고민을 단숨에 해결해 주었다. 이 저자들은 현실을 깨부수자고 누군가 외치면 도저히 따라가지지 않는 많은 이들에게 ‘지금, 우리가 가진 바탕 위에서 조금씩 바꿔 나가보자.’고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이념이 같아도 방법론은 시대와 사회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고, 또 그래야 한다. 그때는 그랬지만 지금도 비슷한 이야기만 되풀이하면 ‘어쩌자는 거냐.’ 싶었다, 안 그래도. 

여러 저자들의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글들을 모은 책. 말하자면 국가와 민족을 긍정하며, 법과 민주주의의 테두리 안에서 지금 우리에게 맞춤한 ‘ism'이 뭔가를 고민하는 책이다. 흔히 좌파라고 하면 북한을 옹호해야 하고, 현 정부와 체제를 강도 높게 ’비난‘하며 싹쓸이 하듯 혁명적 변화를 일궈내야 하는 것이라고 믿어왔던 구태를 벗고, 극단적 자유와 평등이 아닌 실질적 자유와 평등을 확보하자는 주장을 펼친다. 따라서 예견했던 것과는 달리 좌파의 뿌리와 단정적 개념 이야기로 깊이 들어가지 않는다. 구구절절하지 않으며 대신에 매우 실제적이고, 실천적인 이야기들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한 마디로 사민+복지국가로의 지향이다. 복지국가를 정확히 정의하고 있지는 않지만, 국가가 상당히 깊숙이 개입하여 이익을 재분배함으로써 국민 전체가 ‘생존’ 아닌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보장해 주는 정책을 펼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저 시장의 원리에 모든 것을 맡기면 ‘공평’을 찾기 힘들기 때문이라는 단순한 원리다. 시장을 극단적 시장주의자에게 맡기면 안 된다는 이야기가 매우 설득력 있다. 

사실 독후감에 인용하기 위해 수많은 페이지에 밑줄을 쳐 두었으나, 장광설이 될까봐 옮기지 않으려 한다. 기존의 좌파에게서도 우파에게서도 별 인기를 끌지 못하는 이들의 글을 한 번쯤은 읽어봐야 할 것이다. 단순한 지지의 의미가 아니라, 수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장으로서의 의미이다. 내게는 제대로 된 교과서 같은 책이고 무엇보다 흥미진진하고 즐겁고 희망적이다. 밤새워 읽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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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리고 쏠리고 들끓다 - 새로운 사회와 대중의 탄생
클레이 셔키 지음, 송연석 옮김 / 갤리온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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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촛불집회의 전개 과정을 보다보면 혹자가 이야기하듯 조직적인 배경이 존재한다는 것이 터무니없음을 쉽게 관찰할 수 있다. 70년대나 80년대식의 데모를 연상하던 이들은 그처럼 구심점 없이 순수 자발로 이루어진 집회를 대하며 헛것을 보는가 싶은 기분도 느꼈을 법하다. 대중의 들끓음에 대한 기존의 관념을 지닌 이들은 촛불의 움직임을 예측하지 못해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그 거대한 움직임이 구체적, 조직적이지 않고도 이루어질 수 있음이 놀라웠던 것이다. 그들은 모종의 목적을 지닌 이들에 의해 일정 방향으로의 이끎이 먹히지 않는 강한 대중이었다. 또 용광로처럼 들끓다가 가뭄 속 소나기처럼 흔적 없이 사라지는 기민한 흩어짐을 지녔고, 그런가하면 다시 들끓었다.  

달라진 대중. 도대체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이 책은 수수께끼같은 이 질문에 어느 정도 대답이 되어 준다. 아니, 상당히 명쾌한 분석을 제공한다. "아~~~하!" 이런 감탄마저 군데군데 터져나온다. 말하자면 커뮤니케이션의 방식, 즉 참여의 양태가 뿌리에서부터 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돈'을 중심으로 '관리'되던 조직은 일정 한계 안으로 들어가 버렸고, '이득'과는 상관 없는 내적 동기들이 인터넷으로 대변되는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도구의 활성화로 인해 간단없이 폭발하는 양태를 보이게 된 것이라 한다. 

그룹 행동을 가로막던 장애물들은 대부분 사라졌으며, 그런 장애물이 제거된 만큼 이제는 함께 모여 원하는 바를 해낼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자유롭게 모색할 수 있게 되었다.-30쪽 

관리자의 지휘 없이, 이익이라는 동기를 초월해 활동하는, 구조가 느슨한 그룹들의 활동이다.-57쪽. 

모르는 사람들끼리도 서로를 위해 뭔가를 해 줄 수 있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행동을 해 보고 싶게 만들 정도로 비용도 적게 드는 세상, 작은 사랑으로 이룬 결실이 그 처음의 수준을 훌쩍 뛰어넘어 오래 지속될 수 있는 세상이 된 것이다. 우리의 사회적 도구는 사랑을 재생 가능한 건축자재로 바꾸고 있다.-154쪽. 

이처럼 이 책은 막연히 느끼고 있던 '달라진 우리의 모습'을 돋보기와 청진기와 현미경을 들이대며 요모조모 관찰하고 분석해 주는 책이다. 읽다보니 어느 모로나 가히 혁명이라 할 정도의 변화라는 걸 실감하게 된다. 그리고 사회 변화에서 '나'라고 하는 개인이 과거와 달리 구경꾼이 아니라 숱한 주인공 중 하나로 등장하게 되었음도 실감하게 된다. 그게 핵심이다. 모든 사람들이 변화의 주체로 등장하게 되었다는 점. 그러고보면 이 책, 산업화와 더불어 가속화된 수천 가지의 소외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하여 주인공 자리를 탈환하게 되었나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도 같다. 더이상 주와 객이 따로 존재하지 않게 된 사연의 사회학적 풀이라고나 할까. 

참 오래 걸려 읽었다. 재미없어서, 지루해서가 아니라 잘 읽어야 할 것 같아서다. 워낙 다각적 분석과 다양한 사례들이 들고나므로 핵심을 잡아 읽기가 쉽지는 않지만 독서 자체는 무척 즐겁고, 뿌연 안개를 걷어가주는 명쾌한 즐거움이 가득하다. 요즘 세상에서 '나'의 위상과 한계, 가능성을 타진해보고 싶거나, 요즘 대중을 상대로 뭘 해보고 싶은 사람 모두가 읽어보면 좋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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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라벌 사람들
심윤경 지음 / 실천문학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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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묘한 책이다. 묘하다고 한 것은 책을 읽는 내내 이 책의 느낌이 극과 극으로 달라졌다가 또 달라지기를 반복했기 때문이다. 첫 인상은 제목만 보고서 <원미동 사람들>과 닮은 내용일까 싶었다가, 첫 몇 장을 읽고서는 '오호~ 색달라, 색달라. 작가의 상상력이 대단해.' 이랬다가, 다시 '이분이 신라 사람들을 희화화한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가, 중후반으로 접어들면서는 책이 매우 진지하다고 느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희화화'가 맞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면 말이다. 특히 연작소설의 마지막 이야기 '천관사'에서 원효대사의 법회를 묘사하는 대목에서 희화화의 느낌은 더욱 강해졌다. 그의 법석이 마치 약장수를 방불케했기 때문이다. 혹세무민의 현장에 선 느낌. 

어느 분이 이 책의 평가가 갈린다는 귀띔을 해주셨는데, 이해가 됐다. 갈리기도 하겠구나 싶은.

하기는 "지증왕의 양물이 한 자 다섯 치였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굳이 왕권 강화에 대한 상징으로 볼 것이 무언인가, 신라의 성골들은 정말로 보통 사람 몇을 합친 것만한 거구였을 거라고 볼 만한 기록이 여럿 있다."고 주장하는 작가의 말도 일리가 있다. 그리고 다산이나 풍요로움을 남녀의 교합과 연관지어 공개된 교합의식을 신성시하는 풍속이 있었으리라는 작가의 상상력이 수많은 자료를 검토한 결과라고 하면 무조건 희화화로 몰아부칠 수 없는 무언가가 분명히 있다. 더구나 작가가 그렇지 않다고 하는데. 

일단 매우 대담한 작가의 상상력 아래 이 책은 신라, 즉 신국의 성골 황족들이 거대한 몸으로 교합의식을 통해 비와 바람을 부르고, 화랑과 낭주들이 호탕하며 질펀하게 삶을 즐기는 이야기들이 정말 새로운 문체로 전개된다. 

그리고 그 모든 이야기는 불교와 당나라로 대표되는 새로문 문물이 신국의 전통 종교와 생활방식과 맞닥뜨리며 일으키는 엄청난 회오리와 연관되어 있다. 그 과정에서 성골들은 거대한 몸을 끌고 서서히 자취를 감추며, 성골이 아니었던 김춘추는 성골 황족의 마지막 옷자락을 붙들고 기어이 쓰러져 가며, 절과 신궁이 한 장소에서 다투다 결국 기복이나 우리 특유의 신명 또는 눈물어린 정서와 결합한 독특한 불교만이 남아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가는 과정이 거대한 물결처럼 들썩인다.  

어쩌면, 신라에 성골의 자취가 사라지고, 이 나라가 더이상 신국이 아닐 때 신라는 잦아들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도 싶다.  

우리 옛 이야기가 아니고 근대화의 물결이 휘몰아치던 상하이나 사막에 급속도로 세워진 도시 라스베가스를 배경으로 한 것같은 소설. 그러나 문체는 얼마나 또 예스러우면서 빠른지. 아무튼 독자를 새로운 경지로 이끄는 것만은 틀림없다. 아마 심윤경 작가에게 익숙해지기란, 소설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힘들지 않을까 싶은 어이없는 생각도 해보았다. 

연작 중 세 번째 이야기 '변신'에서 거대하고 아름다운 선덕황제를 보고 백성들이 뭐라 표현할 말이 없고 그저 우러르는 마음이 복받쳐 "이상하다. 이상하다." 했다는데 우러를 것까지는 아니지만 뭐라 표현할 말이 없다는 면에서 이 책은 '이상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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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클베리 핀의 모험 푸른숲 징검다리 클래식 21
마크 트웨인 지음, 김욱동 옮김 / 푸른숲주니어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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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트웨인이라는 이름은 톰 소여와 함께 내 뇌리에 깊숙히 박힌 이름이다. 중학교 때 영어 교과서에 톰 소여가 울타리를 칠하면서 동네 아이들을 곯려주는 장면이 실렸었는데, 이미 초등학교 때부터 톰 소여에 열광했던 나는 영어 책의 해당 챕터를 몽땅 외워버리는 기염을 토했던 적이 있을 정도였다. 이후에 읽은 <왕자와 거지>도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어쩌면 그처럼 드라마틱하고 유머러스한지!  

그런데 정작 헤밍웨이가 미국 현대문학이 이 책에서 비롯됐다고 극찬한 <허클베리핀의 모험>은 읽어보지 못한 채로 세월이 흘러갔다. 어린이용으로 다이제스트된 책은 내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못했고, 미처 하지 못한 숙제처럼 남아 있던 책이 마침내 손에 들어왔다. 청소년 용이기는 해도, 매우 알찬 책. 

<톰 소여>를 읽으면 톰은 골목대장이고, 헉(허크가 익숙하지만 이 책에서 나오는 이름으로 부르기로 함)은 졸병 쯤으로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톰의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받쳐주는 행동대원. 그러나 예민한 독자는 톰이 기존의 틀 안에서 움직이는 캐릭터라면 헉이야말로 진정한 자유, 미래지향적인 열린 생각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눈치챈다. 그 아이는 백인이면서 부랑자의 아들로 사회의 최하층에 속해 있고, 제 몸 하나 밖에는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어서 기득권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남의 재산으로밖에 여겨지지 않는 노예와는 또 다르다.  

그는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 중 사회의 틀 밖에서 사회를 바라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렇다. 헉은 돈이 가져다주는 구속을 어린 나이에도 간파하며, 노예제도의 어이없음을 몸으로 깨달으며, 종교의 위선도 꿰뚫어본다. 헉은 참으로 자유롭다. 그리고 매우 '인간적'이다. 헉의 인간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는 결정적 대목은 이렇다. (이 책의 뒤쪽 해설편에 실린 예문을 나도 밑줄을 그으며 읽었다.) 

  나는 종이를 집어 들었다.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짐을 다시 노예로 만드느냐, 아니면 펠프스의 집에서 구출해 자유를 맛보게 하느냐, 이 둘 중 한쪽을 결정해야 했다. 나는 내가 어느 쪽을 택할지 알고 있었다. 나는 숨을 죽이고 잠시 망설인 끝에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좋아, 난 지옥게 가겠어."
  나는 편지를 북북 찢어 버렸다.
 

헉은 도망친 노예를 도와주는 일은 지옥에 가는 일이라고 배웠던 아이다. 그러나 그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짐을 자유롭게 해주는 일이 옳다는 걸 스스로 알았다. 마치 칸트가 옳고 그른 것은 이미 우리 몸에 들어 있으며, 그걸 끄집어내기만 하면 된다고 이야기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양심의 소리를 들었다고 해도 헉처럼 행동하기 쉬울까? 노예제도라는 것이 마치 자연법처럼 존재했던 시대에? 

  늘 이렇다. 옳은 일을 하든 그른 일을 하든 마찬가지다. 인간의 양심이란 사물의 이치를 깨달으려 하기보다는 무조건 남을 탓할 뿐이다. 인간의 양심만큼이나 사물의 이치를 깨닫지 못하는 똥개가 있다면, 나는 그놈을 당장 잡아 죽일 테다. 양심은 인간의 내장 모두를 함한 것보다 더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그 크기에 비해 그다지 쓸모가 없는 듯하다. 

이 대목을 읽으며 나는 한참 웃었다. 헉이 너무 예리해서, 그리고 너무 착해서. 다른 모든 기준보다도 양심의 소리에 귀기울이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아이. 차마 인간을 어쩌지는 못하고, 똥개가 그렇다면 죽여 버리겠다는 아이. <허클베리핀>은 <톰소여>보다 두 배쯤 진지한 책이다. 그러나 못지 않게 유머러스하고, 통쾌하다.  

헉의 자유를 구속하는 것은 두 가지였다. 폭력과 욕심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가는 아버지, 그리고 늘 헉을 교양인으로 만들려고 하는 친절한 이웃들이다. 그들은 이른바 '사회'의 구성원들이다. 그러나 헉은 늘 한발 떨어져 그들을 바라본다. 미시시피 강을 따라 떠내려가는 뗏목 위가 헉에게 사회로부터 이따금 자신을 떼어놓을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해주는 공간이다. 자유의 땅을 찾아가는 부랑자의 아들 헉과 도망친 노예 짐. 이 책 내내 헉은 자유가 뭔지를 알고 있는 아이로서, 그걸 몸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그들의 모습이 진정으로 아름답다. 아직도 헉을 만나보지 않은 분들, 얼른 서두르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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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 카프카 대표 단편선 클래식 보물창고 8
프란츠 카프카 지음, 이옥용 옮김 / 보물창고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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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리 벌레로 변해버린 그레고르 잠자는 현대인들의 표상이다. 숨겨진 자아의 표출이다. 어느 날 깊은 잠에 빠져들다가 문득 머리 한쪽으로 스쳐지나가는 벌레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는 날은 누구에게나 있으리라. 벌레라고 하지만 그런 느낌을 가장 잘 드러내는 말은 '버러지'이다.

기력이 쇠한 부모의 아들로서, 하나뿐인 착한 누이동생의 오빠로서 최선을 다해 가장의 역할을 해온 그레고르는 어느 날 새벽 출근을 앞두고 자기가 벌레로 변해버린 걸 깨닫는다. 그처럼 자신을 믿고 사랑하고 의지해온 가족에게, 혹은 전도유망한 세일즈맨으로서 더 빨리 달릴 것을 요구하는 사회에게 자신이 사실은 그저 부지런히 발을 놀리는 벌레 한 마리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기라도 했다는 듯.

그는 벌레가 되어 주변을 관찰한다. 한때 자신의 가장 사랑하는 이들이었던 그들이 자신의 무엇을 사랑했는지, 왜 사랑했는지, 혹은 언제까지, 어느 부분을 사랑했는지를 관찰한다. 그것이 과연 사랑인지 아니면 그냥 필요인지. 필요에 의한 인간의 관계의 원죄는 어디에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파헤쳐본다. 그는 결국 절망한다. 키르케고르가 말한 것처럼 절망의 끝은 자기상실, 죽음이다. 

이 책은 <변신>으로 대표되는 카프카의 대표작품선이다. <프로메테우스> <포세이돈> 등의 마치 잠언과도 같은 짧은 이야기들,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나 <선고> 같은 본격적인 단편들이 실려 있어, 오로지 <변신>만 읽어왔던 이들에게 카프카에 대한 조그만 이해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 중 <포세이돈>은 이런 내용이다. 태초부터 바다의 신이라 정해진 포세이돈은 한 시도 쉬지 않고 깊은 바다 속에서 물에 관한 모든 계산을 한다. 그는 어떤 바다로도 나가보지 못했다. 바빠서. 하지만 물에 관한 일이 아닌 것은 생각만 해도 메스꺼워지는 그는, 세상이 몰락하기 직전에 세계의 바다를 둘러보는 것이 소망이다.

도대체 바다를 여행한 적 없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실존은 뭘까? 

이처럼 실존에 대한 깊은 고뇌, 세상을 비틀어 봄으로써 깊은 진실에 도달하는 그의 시니컬함, 통찰력을 맛보기에 부족함이 없다. 아버지에게서 사형을 선고 받는 어이없는 남자의 불행을 다룬 <선고>도 마찬가지다. 사람살이의 가장 근본, 무언가 붙들고 지탱해야 할 뿌리는 도대체 무엇인 걸까? 

카프카의 글은 전혀 생뚱맞지 않다. 이처럼 기괴함에도 그의 작품은 판타지가 아니다. 개인적으로 사실주의에 가깝다고 느낀다. 어떤 면으로는 가르시아 마르케스나 귄터 그라스가 카프카에 뿌리를 둔 것이 아닌가 싶다. 마술적 사실주의. 정말 현실감 있게 다가온다. 마치 내 이야기 같기도 하다. 또는 너의 이야기.

책 표지를 장식하는 카프카의 눈빛이 가슴에 아로새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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