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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역사 2
힐러리 로댐 클린턴 지음, 김석희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꽤나 힘들게 1권을 읽었다
1권이 376페이지인데 원본은 1,2 권 통합본이었다고 하니, 정말 길고 긴 회고록인 셈이다
힐러리는 글을 무척 잘 쓴다 (대필이 아니라는 전제 하에)
그녀 자신이 상원 의원으로 변신할만큼, 빌을 단지 내조했다기 보다는 대통령의 책임과 권력을 함께 나눈 사람임이 분명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자세한 정치 보고서를 쓸 수 있겠는가
그녀의 책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말은 성에 대한 고정관념이 여성의 다양한 삶을 하나의 범주 속으로 집어 넣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힐러리는 언론의 보도처럼, 급진적인 페미니스트이고 정치욕이 강한 여자였다
그러나 회고록에 생생하게 드러나는 힐러리라는 여자는 여성의 권리를 옹호하고, 법률을 전공한 변사이며, 딸을 걱정하는 어머니이고,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이며, 미국이라는 거대한 제국의 정책 기획에 관여하는 퍼스트 레이디이기도 한, 매우 다양한 역할을 수행해 낸다
우리 모두가 그렇듯 말이다
언론은 늘 한 인물을 글쓰기 좋은 (혹은 비판하기 좋은) 특정 이미지로 고착시킨다
그리고 그 이미지에 적합한 사건들만 크게 보도하므로써 단순화 시킨다
유명인들의 사생활을 쫓는 수많은 파파라치들과 그것을 보도하는 타블로이드판 황색 저널들의 존재 이유가 갑자기 궁금해진다
우리가 정말 원하는 것은 특정 인물 그 자체가 아니라, 어쩌면 시간을 때울 수 있는 스포츠 신문류의 기사거리인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남편 빌을 무척 사랑하는 듯 하다
미국 대통령이라는 놀라운 직책을 차치해 두고서라도 빌 클린턴은 무척 매력적이 남자임이 분명하다
주한 미군 부대를 방문해서 섹스폰을 멋지게 불던 클린턴을 뉴스에서 본 적이 있다
그녀는 잘생기고 낙천적인, 거기다 정치력까지 갖춘 이 멋진 남자를 마음 속으로부터 사모하고 있는 것 같다
폴라 존스나 르윈스키 사건이 터지고, 그것 때문에 대통령 자리까지 위험하게 됐을 때 그녀가 받았을 상처가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간다
섹스에 대한 욕구는 대통령직을 포기할 수도 있는 위험과 거래할 만큼 대단한 것일까?
(물론 빌은 설마 그렇게까지 확대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겠지만)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부분을 읽으면서 세상 모든 부녀 관계는 결국 다 비슷비슷 하다는 생각을 했다
자수성가한 그녀의 아버지는 골수 공화당 지지자로, 동성애와 유태인, 흑인, 카톨릭 교도, 민주당원을 대단히 싫어하는 보수적인 사람이었다
딸이 커 가면서 그녀를 무척 사랑했으나, 세대차이에서 오는 문화적, 정치적 갈등을 피하지 못해 언제나 서먹한 거리를 유지했다
결국 민주당원인 딸의 남자 친구를 사위로 인정하고, 흑인과 동성애자 등 자신이 (혹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편견을 하나씩 깨뜨려 가면서 늙어갔다
젊은 시절의 완고한 성격과 고집스러움이 늙음과 함께 사라져 감을 안타까워 하는 딸의 마음이 애잔하게 전해져 와 눈물이 났다
빈스 포스터라는 친구을 잃는 부분에서도 눈물이 났다
아칸소 시절 빌의 친구였던 빈스는 대통령 당선과 함께 워싱턴으로 날아와 클린턴을 도와 공직에 근무하나, 화이트워터 사건 등 대통령 비리 사건에 연루되어 언론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고 만다
아칸소에 있었더라면 변호사 협의회장도 하고 누구에게도 공격받지 않았을 착한 친구가 워싱턴 정가에서 악의적인 비난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자살한 것에 대해 힐러리는 무척이나 마음 아파 한다
유서에는 자신을 악마로 비유한 언론의 보도에 분노하는 글들이 휘갈겨져 있었다고 한다
정치가가 된다는 건 어쩌면 모든 종류의 공격으로부터 단단해지는(동시에 뻔뻔해지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비리 사건에 연루되어 자살한 몇몇 정치인들이 떠오른다
그들도 세상이 자신을 공격하는 만큼, 그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니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해 죽음을 택한 것이었을까?
빈스는 죽기 며칠 전 오히려 활기차고 명랑했다고 한다
정신과 의사에 따르면 죽음에 이를 만큼 심각하고 끔찍한 문제로부터 곧 해방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잠시나마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화이트 워터 사건에 대한 힐러리의 긴긴 변명들은 무척이나 지루했다
본인 생각에는 법적인 문제가 전혀 없는 재산 축적에 대해 언론이나 공화당이 특검까지 도입해 임기 내내 괴롭힌 것이 무척이나 억울했던 모양이다
덕분에 나는 미국 대통령 비리 수사 과정을 자세히 알게 됐다
두 가지 상반된 생각이 떠오른다
하나는 권력자의 비리를 파헤치는 것이 과연 국민들에게 이득을 주느냐는 것이다
그녀는 공화당이 화이트 워터 사건에 온 역량을 집중하는 바람에 정작 중요한 쟁점인 의료 개혁 문제는 뒷전이었다고 안타까워 한다
정치인들의 폭로성 고발들은 우리 신문에도 흔히 등장하는 뉴스거리인데, 그것의 시시비비를 가리기 위해 정말 중요한 정치적 사안들은 도외시 되기 십상이다
오히려 반대당에게 공격할 명분을 줘서 정국을 더욱 혼란에 빠뜨리기 일쑤다
또 하나의 생각은 그나마 언론에서 감시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나마라도 권력을 가진 정치인들이 부정부패에 조심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뭐가 옳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명분에 집착한 지나친 소모성 논쟁은 국민들에게는 별 도움을 못 준다는 건 확실하다
미국 의료 보험도 우리 나라 만큼이나 심각하긴 한 모양이다
의료 개혁 위원장이 된 힐러리는 전국민 의료 보장 제도를 도입하기 위해 애쓰지만 결국 제약 회사와 의료 보험 재단들, 보수주의자들의 강력한 반발에 밀려 실패하고 만다
의료 개혁은 비단 클린턴 정부만 시도한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20여년 전의 닉슨 시절부터 쟁점이 된 사항이었다고 한다
너무나 많은 집단들의 이익이 걸려 있는 문제라 첨예하게 대립된 문제들을 원만하게 해결하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고, 구관이 명관이라는 식으로 기존 질서를 유지하게 됐다
우리 나라 의료 보험 수가가 터무니없이 낮다는 말을 종종 듣는데 확실히 미국 의료 수가는 대단하다
아스피린 한 알에 2달러를 청구하기도 한다고 한다
그렇다고 그 돈이 의사 수중으로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의료 보험 재단의 관리비로 대부분 쓰인다고 한다
모든 국민들이 필요할 때에 적절한 수준의 치료를 받는다는 것은, 밥 굶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야 한다는 명제처럼, 구현하기 어려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미국인들이 의료 개혁에 나선 퍼스트 레이디를 어떻게 평가했을지는 모를 일이나, 회고록에 나타난 힐러리의 모습은 적극적이고 국정 최고 운영자의 파트너로써 적합해 보인다
회고록에 드러난 힐러리의 모습은 입체적이고 생동감이 넘친다
선거철을 앞두고 급조된 정치가들의 홍보 책자가 아님은 분명하다
8년에 걸쳐 20세기와 21세기 미국의 최중심에 서있던 그녀의 이야기는, 세계를 이끌어 가는 미국의 위치를 생각할 때 한 번쯤 읽어 볼만한 가치가 있다
그리고 한 인간이 살아 온 과거에 대한 솔직하고 생생한 이야기도 새로운 감동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