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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듣지 않는 남자 지도를 읽지 못하는 여자
앨런 피즈 외 지음, 이종인 옮김 / 가야넷 / 2000년 9월
평점 :
절판


이 책의 2탄인 "거짓말을 하는 남자, 눈물을 흘리는 여자"를 인상깊게 읽은 터라 1권에 대한 기대도 컸다


결과는 작가의 의견에 상당 부분 동의할 수 없었다


저자가 주장하는 남녀의 차이는 물론 인정한다


그렇지만 전체적인 내용이나 풍기는 냄새가 썩 맘에 들지 않는다


2편을 읽지 않았다면 자칫 저자를 오인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어쩌면 1편에 대한 반발심을 무마시키기 위해 2편은 좀 더 부드럽게 간 건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본인이 반페미니즘으로 몰릴까 봐 상당히 신경을 쓴다


말끝마다 과학적인 분석임을 강조하고, 욕 먹을 수도 있다는 걸 잘 알지만 용기를 낸 것이라고 여러 차례 밝히고 있다


서구에서는 페미니즘이 확실히 대세이긴 한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조심할 이유가 없을테니까


 


사실 남녀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현실적이다는 생각도 요즘 들어 하고 있다


그건 남녀의 차이에 국한된 게 아니라, 빈부 격차라든가 민주주의, 권력 등등 여러 불합리한 사회 제도들에 대해 보다 현실적인 눈을 가지려고 애쓰고 있다


말하자면 100% 완벽한 도덕과 이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실적으로 그나마 가장 바람직한 방향으로 가는 게 어떤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페미니즘 역시 투사 같던 과거 이미지와는 달리 남녀의 생체적인 차이는 인정하면서 사회적인 차별을 없애는 쪽으로 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주장하는 논지는 상당히 불편하다


저자는 자꾸 직업에 있어 여성성과 남성성을 강조하는데 과연 그 이유 때문에 현재와 같은 직업 구조가 형성됐을까?


여자는 남을 보살피는 것과 언어적인 측면에 능하기 때문에 간호사와 교사 같은 직업을 선호하고, 남자는 공간적이고 성취적인 것을 중요시 하기 때문에 엔지니어나 비행기 조종사가 된다고 한다


정치인 중에 남자가 많은 것도 다 정치가 남성적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정말 그럴까?


직업을 선택할 때 가장 중요시 되는 것은 자신의 특성 보다는 경제적 수입과 사회적 지위 등이다


본인의 재능대로 직업을 갖는 사람은 기껏해애 연예인이나 예술하는 사람 정도일 것이다


여자들이 사회적으로 덜 대우받는 직업을 택하는 이유가 정말 여성성 때문일까?


남자 중심으로 구성된 사회로부터 상대적으로 소외받기 때문이 아닐까?


 


직업 자체가 정형화된 여성성과 남성성을 가질 수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남녀에 상관없이 보다 나은 수입과 명예, 혹은 지위를 보장하는 직업을 택한다


성별에 적합한 직업을 택하라는 논리는 현대 사회에 어울리지 않는다


더구나 갈수록 유니섹스화 되가는 21세기에는 말이다


남녀의 차이를 개인의 일상에 중점을 두고 연구하는 것은 좋지만, 사회적으로 확장시킬 때는 보다 조심스런 태도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오해를 살 소지가 다분하다


저자의 주장대로라면 남녀의 차이만큼, 인종간의 차이도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당위도 현실에서는 맞지 않는다는 식으로 비약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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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
배수아 지음 / 고려원(고려원미디어) / 199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제목이 독특해서 읽고 싶었는데, 역시 실망스럽다


단편이 소설적 완결 구조를 갖춘다는 건 참 어렵다


짜임새 있는 중,단편은 어쩌면 작가의 능력을 드러내는 바로미터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문열에게 다시 한 번 감탄하게 된다


단편 소설을 좋아한다면 "아우와의 만남"이 들어 있는 이문열 중단편집을 보라고 권하고 싶다


혹은 "저문 날의 삽화"가 있는 박완서 단편 모음집도 참 좋다


(그녀는 도시의 소시민에 대한 날카로운 관찰력을 지니고 있다


그 위악성과 삶의 애환을 어쩜 그렇게 잘 표현하는지!!)


 


이건 e-book으로 읽은 최초의 책이다


장편 소설인 줄 알았는데 의의로 80 페이지 남짓되는 짧은 소설이다


그래서 뭔가 일어날 줄 알았지만, 허무하게 끝나고 만다


사실 작가가 무슨 얘기를 하고 싶어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마음에 드는 부분도 몇 군데 있다


그럴듯한 직업을 갖지 못할 게 뻔한 희망없는 여대생이 갖는 서글픔이 사실적으로 묘사된다


개학해서 학교에 가면 멋진 옷을 입고 자태를 뽐낼 여학생들 틈에 낄 수도 없다는 부분에서는, 능력도 없는데 예쁘지도 않은 평범한 소시민이 갖는 삶의 페이소스가 느껴진다


우리 대부분은 다 그렇다


잘난 사람들 틈에 끼어 한없이 초라해지고 비참해져 일탈을 꿈꾼다


그렇지만 대부분 일상이 주는 편안함과 안전함을 포기하지 않고 제자리에 머무는데. 유독 배수아 소설의 주인공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뛰쳐 나간다


 


여대생이 집을 나가 백화점 직원으로 사는 게 쉬운 일일까?


또, 소설 속의 주인공들은 예쁘지 않다고 스스로 고백함에도 불구하고 흔히 쉽게 사랑을 한다


그래서 소설이 진행되는 건지도 모르지만, 주인공들은 쉽게 사랑을 하고, 쉽게 일탈을 하며, 대체적으로 감정에 얽매이지 않고 쿨하다!!


(주인공의 쿨한 성격은 드라마에서 재벌 2세를 보는 것만큼이나 흔한 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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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4-12-07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보셨는지도 모르겠는데요, 김영하의 단편짐 ' 엘리베이터에 끼인 남자' 를 추천합니다. '호출' 이 더 낫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영화에선 느끼지 못하는 단편의 짜릿함을 느끼실 수 있을거에요. 좀 더 고전으로 간다면 체호프 단편과 심리소설의 달인 로얼드 달의 ' 당신을 닮은 사람 ' 도 같이요. 로얼드 달은 동화에서도 특이한 정신세계를 보여줬는데, 그의 심리소설들은 정말 대단합니다.! 동서미스테리북스에서 나왔어요.

marine 2004-12-07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은 김영하의 다른 단편집 "오빠가 돌아왔다" 를 읽고 좀 실망해서 그 책은 안 읽었는데 읽어봐야겠네요 로얼드 달은 처음 듣는 사람이예요 도서관에서 찾아 봐야겠다^^
 
나를 변화시키는 좋은 습관
한창욱 지음 / 새론북스 / 200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정말 이런 책 안 읽으려고 했는데, 또 뭔가 활력소가 되지 않을까 싶어 집어들었다


워낙 넘쳐 나는 자기 계발류라 오히려 거부감이 들지만, 그래도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건 아니다


다만 너무 좋은 말들을 늘어 놓기 때문에 행동으로 바꾸기 힘들다는 어려움이 있을 뿐^^


읽은 책에 대해서는 성실하게 감상문을 쓴다는 원칙 아래 짧게나마 기록한다


 


다 좋은 말이라 고개를 끄덕이며 읽긴 읽었다


기억에 남는 말이라면 21세기 리더는 유머 감각을 갖춘 사람이라는 것이다


남희석이 서울대 나온 치과 의사와 결혼한다는 기사를 읽었을 때 유머 감각에 반한 게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유머 감각이란 단순히 재밌는 얘기를 하는 게 아니라 재치있게 주변 상황을 묘사할 줄 아는 위트라고 할 수 있다


촌철살인의 말을 할 수 있을 정도의 날카로운 직관력이 있어야 한다


진정한 유머 감각의 소유자라면 책을 많이 읽고 다양한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 열린 사고 방식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인맥이란 목적을 위해서 맺는 인간 관계라 만남 그 자체를 즐기는 것이라는 말도 기억에 남는다


나중에 도움받을 것을 예상해 사람을 사귀는 게 아니라, 다양한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 정보를 교환하게 된다고 한다


만남이 즐거우려면 만나고 싶은 사람이 되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결국 인격을 갖추고 유머있는 사람이 되라고 충고한다


처세술에 관한 책을 읽다 보면 결국 바르게 살라는 황금률로 귀결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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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세이노 2008-08-24 0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글들이 너무 좋습니다^^..언제나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
전경린 지음 / 문학동네 / 1999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책 이름이 좋아, 또 전경린이라는 작가 이름이 예뻐서 꼭 읽어 보고 싶던 책이었다


조금만 읽고 자려고 했는데 소설의 흡입력에 끌려 한 권을 다 읽고 말았다


그리고 오랫만에 눈시울이 약간 붉어졌다


 


작가는 등장 인물의 이름을 짓는데 꽤 고심한 것 같다


흔한 이름들이 아니다


주인공 "미흔"도 그렇고, 남편 "효경"도 여자 이름 같은데 남자에게 주어지니까 묘한 분위기가 풍긴다


아들 "수"는 말할 것도 없고, 미흔과 게임을 벌이는 "규"도 흔하지 않는 외자 이름이다


간통하다 들켜 시아버지를 낫으로 살해한 엽기적인 마을 여자의 이름도 "부희"다


"수"와 "규"가 제일 마음에 든다


 


그녀에게 몇 달 간 상대를 사랑하지 않고 정사만 벌이는 게임을 제안한 "규"란 남자는 사설 우체국의 주인이다


부동산과 주식 등으로 재산을 축적해 가고, 돈 많은 이혼녀와 결혼해 그녀의 아이들을 키우며 자신의 아이는 갖지 않는, 잘 생긴 바람둥이다


아내와 아이들은 도시에서 자라고 방학 때 잠깐 규에게 다녀간다


소설을 읽으면서 줄곧 탤런트 이종원을 떠올렸다


이 소설을 영화로 만든 "밀애"에서 남자 주인공 "규" 역을 맡은 배우인데, 소설에서 묘사된 이미지와 아주 잘 어울린다


(영화에서는 시골 의사로 나온다 그래서 처음에 미흔이 다리를 삐어 보건소로 가자 뭔가 이뤄지는 줄 알고 긴장하며 읽었다)


가벼운 사랑을 하면서도, 결코 가벼워 보이지 않고, 내면에 깊은 슬픔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일부러 여자에게 냉정하려고 애쓰는, 그렇지만 사실은 사랑에 대한 열정을 숨겨 놓은, 겉보기에는 차갑고 자유로운, 또 한편으로는 삶에 대한 희망을 어느 정도 포기해 버린 권태로운, 그리고 아주 잘 생긴 남자, 규!!


이종원을 생각하니까 "규"에 대한 이미지가 더욱 선명해져서 감정 이입이 쉬웠다


그래, 시골에 그 정도 남자가 있다면 권태로운 결혼 생활 도중 사랑에 빠질 수도 있겠구나...


 


사실 결혼의 신성한 의무를 먼저 깬 사람은 남편 효경이다


인쇄소 사장인 효경은 여직원과 바람을 피우고 낙태까지 시킨다


그리고 대담한 여직원이 집에 찾아와 직접 미흔에게 낙태한 사실을 말하면서, 그녀의 평화로운 일상은 산산조각이 난다


예민하고 여리며, 결벽증이 있는 미흔은 자신의 인생에 하나 뿐이라고 믿던 남편의 배신에 치를 떨며 헤어지지도 못하고 용서하지도 못한 채, 만성 두통에 시달리며 산다


결국 효경은 속죄하는 마음으로 서울 생활을 접고 미흔을 위해 시골로 내려가 서점을 연다


 


나는 미흔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랑하지 않으면 떠나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남편을 용서하지도 못하면서 절대 넌 나를 못 버려, 넌 계속 죄책감에 시달리며 나를 부양해야 돼, 하는 식으로 남편을 정신적으로 괴롭힌다


물론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수습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고 흘러 가는 대로 내버려 둘 뿐이다


나라면 이혼을 할 것이다


자식을 생각하고, 여전히 남편에 대한 일말의 애정이 남아 있고, 가정의 울타리 밖에서는 살 수 없다는 판단이 서면, 또 남편이 결혼 생활을 유지하길 원한다면, 용서하고 잊어 버릴 것이다


미흔처럼 스스로와 남편을 괴롭히며 몇 년을 한 집에서 사는 건 못 견딜 것 같다


 


시골로 내려 온 젊은 여자는 당연하게 정해진 수순인 것처럼, 역시 혼자 사는 젊고 부유하며 잘 생긴 남자와 썸씽이 생긴다


규가 미흔에게 서로를 사랑하지 않고 섹스만 즐기는 4개월짜리 게임을 제안했을 때, 통속적이고 유치한 싸구려 비디오를 보는 기분이 들어 전혀 흥미롭지 않았다


결국 나이 들어 남녀가 만나면 섹스 빼고 서로에게 원하는 게 뭐가 있겠어? 하는 식의 냉소적인 시선을 버릴 수가 없었다


잘생기고 고독해 보이는 괜찮은 남자 같은 규도 결국 원하는 건 섹스일 뿐이다, 사랑 따윈 없지...


 


그런데 미흔은 규가 바람둥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섹스를 즐기기 위해 만난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면서도 규에게 빠져 든다


어쩌면 처음부터 규에게 게임을 허락했던 이유도 이성으로서의 호감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즉, 미흔 자신은 섹스할 상대가 필요했던 게 아니라, 감정을 교류할 사랑하는 남자를 원했던 것이다


통속 소설과는 다르게, 오히려 현실적으로 규 역시 미흔에게 빠져 든다


그렇다고 둘이 죽고 못사는 사이도 아니다


다만 서로를 그리워 하고, 생각하면 애틋해지고, 상대의 고통을 보면 마음이 아파지는 그렇고 그런 평범한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책을 읽으면서 사랑의 감정이란 반드시 그 상대여서가 아니라, 상대가 누구라도 어떤 상황이 되면 빠질 수 있는 감정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므로 이 사람 아니면 안 된다는 절박함은 자칫 집착으로 사랑을 변질시킬지도 모른다


 


규를 사랑하는 미흔의 감정은 소설 곳곳에 잘 드러난다


사랑을 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절박함과 그리움, 혹은 안타까움과 떨림을 함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나이가 들어서 단지 섹스를  위해 만나는 사이라 할지라도, 남녀간의 감정 교류에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정의될 수 있는 흥분이 존재하는 모양이다


사랑 따위는 없어, 라고 쉽게 말해 버리는 사람도 막상 이성에게 호감이 느껴지고, 그의 불행이 가슴 아프게 다가오면 흔들리기 마련일 것이다


규에게 부치지도 못할 장문의 편지를 쓰고, 가방 안에 간직하고 있다가 결국 남편에게 들켜 어이없이 발각되고 마는 미흔의 어리석음을 이해할 수 있다


사랑을 하면 감정의 과잉이 넘치기 마련이다


상대에게 그 격렬함을 쏟아 낼 수도 없고, 스스로 삭이지도 못해 가장 주도면밀 해야 할 때조차 (증거를 남기면 안 되는 불륜의 경우에도) 부치지도 못할 편지를 쓰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건 흔한 일이다


 


규가 보고 싶어 잠옷 바람으로 창문을 넘어 그의 집으로 숨어 들어 온 미흔을 냉정한 시선으로 보내는 규를 이해할 수 있다


아마 그도 미흔을 보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마저 사랑의 격렬함에 빠지면 걷잡을 수 없는 일상의 혼란이 온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숙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욕망을 억눌렸을 것이다


사회적인 지탄을 받는 관계는 이성적으로 냉정하게 행동해야만 일상의 틀을 유지하면서 사랑도 즐길 수 있다


한밤중에 연인이 보고 싶어 잠옷 바람으로 남편 몰래 자기 집으로 기어 들어 온 여자는 위험하다, 나라도 정신을 차려야지,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역시 미흔에 대한 사랑의 감정으로 자신의 일상이 흔들리고 있음을 두려워 했다


사랑이란 늘 조용한 (그러나 권태로운) 일상을 뒤흔들어 논다


 


결국 작은 시골 마을에서 둘 사이의 관계는 남편 효경만 모른 채 퍼져 나간다


규는 미흔을 보호하기 위해 바람둥이라는 이미지에 어울리게 일부러 다른 여자와 어울린다


미흔이 규의 깊은 뜻을 안다는 건 소설에서나 현실에서나 불가능한 일이다


사랑하는 남자가 자신의 전화를 피하고 젊은 여자와 나도는데 그걸 이성적으로 판단할만한 냉철한 여자는 없을 것이다


미흔은 더욱 더 질투심과 소유욕으로 몸이 단다


마지막 끝이라도 잘 맺자는 심정으로 규를 만나러 간 미흔은 그 모텔을 나오다가 남편에게 들통이 난다


꼭 소설이 아니라 할지라도 현실에서도 이런 어이없는 우연은 흔하게 일어난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나간 자리에서 꼭 덜미가 잡히게 마련이다


효경은 모텔에서 나오는 미흔을 보고 이성을 잃고 그녀의 가방에서 나온 편지의 주인이 누구냐고 몰아 세운다


물론 미흔은 두려움에 떨지만 끝까지 함구한다


효경이 규에게 찾아가 행패 부리는 꼴을 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내가 남편의 손에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사랑하는 남자가 봉변 당하는 일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굳은 결심을 한 양, 그녀는 효경의 폭력에 몸을 맡긴 채 끝까지 규의 이름을 불지 않는다


 


그녀는 효경에게 짖밟히면서 과연 이 남자가 이렇게까지 분노할 정도로 나에 대한 애정이나 집착이 남아 있었나, 의심스러워 한다


미흔은 왜 효경이 분노하는지 의아해 하며, 왠지 그 분노가 가짜 같다는 생각을 한다


나 역시 그렇다


왜 효경은 미흔을 죽일 듯 달려 들었을까?


배신당했다는 기분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여전히 미흔을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둘의 결혼 생활을 보면 서로에 대한 신뢰가 완전히 깨져 회복하기 힘든 상태에서 억지로 유지해 나가는 지경이었는데, 왜 효경은 미흔에게 그토록 분노하며 폭력을 휘두를 정도까지 흥분했을까?


나중에 효경이 심경을 고백한다


"왜 하필 그 때였니? 내가 너와 수를 위해 최선을 다해 살겠다고 결심한 그 때, 가족을 위해 나 자신을 희생하겠다고 결심한 바로 그 때, 왜 하필 그 순간에 나를 배신하거니?..."


 


효경에게 발각된 후 온 몸에 멍 투성이 된 미흔을 차마 보내지 못하고 자신의 차에 태우고 떠나는 규를 보며 마음이 너무 아파 눈시울이 붉어졌다


규에게 전화를 걸어 절대 약속 장소로 나오지 말라고 당부하는 미흔의 떨리는 목소리를 듣고, 오히려 한걸음에 달려 오고 만 규의 아픈 마음이 그대로 전이되는 기분이었다


그녀를 데리고 떠난다고 해도 결국 되돌아 올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오늘은 당신을 이대로 보낼 수 없소, 어쨌든 오늘은 보낼 수가 없소..."


자신으로 인해 온 몸이 상처투성이가 된 사랑하는 여자를 그대로 보낼 수 있는 베짱 좋은 남자는 흔치 않을 것이다


결국 두 사람은 호텔에서 단 하룻밤의 휴식을 취한 후 다시 집으로 돌아 온다


오는 길에 과속으로 사고가 나고 규는 큰 부상을 입는다


 


소설에는 규의 그 다음 이야기를 알려주지 않는다


화자가 미흔이기 때문에 미흔이 규의 소식을 알지 못하는 것으로 나오므로 궁금하지만 어쩔 수 없다


어떤 식의 결말이든 다 신파고, 통속적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작가는 끝까지 규의 근황에 대한 어떤 단서도 주지 않는다


다만 마을 사람들의 소문을 통해 다리 병신이 됐다는 말도 있고, 뇌에 손상을 받아 바보가 됐다는 말도 있으며, 그것도 아니라 옛날처럼 행복하게 잘 산다는 식으로 모호한 결말을 낼 뿐이다


중요한 건 미흔의 결말이다


불륜이 발각된 후 미흔은 규의 이름을 대는 대신 모든 것을 체념한 채 효경에게 힘없이 해결책을 알려 준다


"날 버려"


결국 효경은 처음에는 견딜 수 없는 배신감과 분노에 치를 떨지만, 미흔의 말대로 한다


미흔이 낯선 도시로 소리없이 사라진 후 그녀를 찾아 수개월을 헤매지만, 막상 그녀와 대면해도 달라질 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고 효경은 쓸쓸하게 현실을 받아들인다


다시는 옛날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과, 이제는 정말로 그녀를 버려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오히려 진정으로 그녀를 버렸기 때문에 미흔에게 함께 산 여자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를 베풀어 재산도 떼어주고, 원한다면 아무 때나 아들 수를 봐도 좋다고 허락한다


또 진정으로 니가 잘 살길 바란다고 그녀의 행복도 빌어준다


 


미흔은 이제 사설 우체국의 직원이 되어 낯선 도시에서 자신의 남은 삶을 살아간다


사랑이 헤집고 간 일상을 담담히 받아 들이는 것이다


규를 그리워 하는 짓 따위는 하지 않는다


유효 기간이 끝나 버린 사랑에 집착하는 것은 아름다운 추억마저 훼손시키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단 6개월의 짧은 사랑으로 자신의 전 인생이 바뀐 것에 대해 미흔은 어떤 생각을 할까?


그래도 가치있는 일이었다고 자위할까?


내가 보기에 미흔은 삶이란 이렇게 예기치 않은 사건들을 쏟아 내는 원래 가변적인 것이라고 체념하고 받아들이는 운명론자일 것 같다


그녀는 특별히 규를 그리워 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효경이 바람 피우기 이전의 행복한 가정 생활로 돌아가고 싶어하지도 않으며,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그런대로 성실하게 살아갈 것만 같다


 


사실은 그게 현명한 태도인지도 모른다


나에게 폭풍 같은 사랑의 감정이 몰려 온다면 과연 거부할 수 있을까?


삶의 안정성을 지켜내기 위해 이성적으로 과감하게 뿌리칠 수 있을까?


꼭 사랑만이 그런 건 아니지만, 대체적으로 사랑이란 감정은 제어하기 힘든 욕구이기 마련이다


불행한 결말이 예기되어 있지만 어쩔 수 없이 격렬한 감정을 내 삶 속으로 받아 들이고 말 것 같다


대신 자신이 잃는 것에 대해서도 안타까워 하지 않아야 하겠지


나쁜 사람이 더 많이 사랑한다는 소설 속의 문장을 이해할 수 있다


주변 사람이나 상대의 입장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감정에만 충실한 이기적인 사람이 더 많이, 더 오래 사랑할 것이다


부모와 아이들과 남편과, 기타 자신을 걱정하는 모든 사람들을 버리고 (심지어 상대가 불행한 상황에 처하게 될지라도) 사랑이라는 감정에만 몰두하는 사람, 바로 그 나쁜 사람이 진짜 사랑을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이 느끼는 사랑이란 이기적이고, 욕망에 충실한 아주 저급한 감정이 아닐까?


사랑의 위대함, 희생정신, 이타심 따위는 다 책에서나 나오는 얘기 같다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갖고 싶고 누리고 싶은 "유토피아"라는 단어의 허구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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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04-11-26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저도 영화 밀애를 보고나서 이 책을 접했습니다. 원작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 궁금해서.... 영화에서는 표현하지 못했던, 남녀관계를 참 섬세하게 표현했습니다.

통속소설이면서 고급스러운 느낌이 나는 이종원의 절제미가 멋져보이는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동감.

하이드 2004-12-06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요. 밀애 보고 나서 책 읽었어요. 둘 다 나름대로 좋았다고 생각해요. 전경린씨 글도 좋아하지만, 변영주 감독의 한폭의 그림 같은 장면들로 이루어진 영화도 못지 않게 가슴 떨렸지요.

marine 2004-12-07 0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반대로 이 책을 본 후 이종원이 "규" 를 어떻게 그렸을지 너무 궁금해 "밀애" 를 보게 됐어요 소설을 읽으면서 이종원을 상상했거든요 결론적으로는 다소 실망했지만...
 
의학과 문학
마종기 손명세 정과리 이병훈 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5월
평점 :
품절


정말 재미없게 읽은 책이다
여러 명이 쓰면 꼭 이게 문제다
전체적인 일관성이 없고 수준이 떨어지는 글도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책은 좀 심하다
여러 필자들의 글을 모을 때는 어느 정도 통일성을 가지고 하나의 주제로 수렴될 수 있어야 하는데 의학과 문학을 소재로 했다는 걸 제외하면 비슷한 점을 찾을 수가 없다
차라리 몇몇 사람들만 선발해서 좀 더 많은 분량을 할당해 깊이있는 분석을 했다면 훨씬 좋았을 것 같다
의학과 문학의 결합이라는 보기 드문 시도를 했다는 점은 높이 사지만, 중구난방 식의 편집은 문제가 있다
편견일수도 있지만 전문적인 글쓰기를 안 하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전체적인 수준도 낮은 편이다
개인적인 얘기를 풀어내는 에세이 형식을 탈피하긴 했지만, 의학과 문학의 상관관계라는 거대한 담론을 펼치기에는 아직은 저자들의 실력이 부족한 듯 싶다

그러나 시도 자체는 가히 혁명적이라 할 만 하다
언젠가 "비블리오 테라피" 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비블리오는 그리스어로 책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책으로 심리 치료를 한다는 얘기다
요즘 음악 치료니, 색깔 치료니, 향기 요법이니 해서 다양한 방법으로 심리 치료를 시도하지만 책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발상은 참 신선했다
비블리오 테라피가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이제 의사들도 인문학적 소양을 갖출 필요성이 생긴다
사실 의사들은 지나치게 자연과학 쪽으로 치우쳐 있다
비단 의사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공계쪽 전부가 인문학적 소양이 부족한 건 사실이지만, 의학은 인간의 몸을 다루고 치료 과정에서 환자와의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하다는 점에서 다른 어떤 자연과학 학문보다도 더 많은 인문학적 교양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책에서도 이 점을 중요시 한다
많은 부분을 검사나 의료 기계에 의존하고 있지만 치료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환자가 알려 주는 정보이다
이 정보를 문진을 통해 충분히 습득하기 위해서는 환자와의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이 매우 중요할 것이다
그런데 의사들은 실제로 이 기술이 매우 서툴다
대중매체에서 흔히 그려지는 부정적인 이미지의 의사는 차갑고 냉정해서 환자의 고통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기계적인 인간으로 나오는데, 상당 부분은 의사들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고 본다
저자들도 지적하는 바지만 대체의학이나 한의학 쪽으로 관심이 가는 까닭은 왠지 그 사람들은 전인적인 치료를 할 것 같고 보다 인간적으로 병에 대한 접근을 할 것 같은 느낌이 강하다
실제적인 치료율을 떠나서 대체의학이나 한의학이 검사나 기계에 의존하는 대신, 전체적이고 인간적인 치료를 한다는 느낌을 받는 이유에 대해 의사들은 한 번쯤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제일 인상적인 글은 질병의 개별성을 강조한 어떤 교수의 글이었다
병원에 가면 환자는 통증을 호소하며 자신의 괴로움을 토로한다
그런데 의사들은 그저 수많은 환자 중 하나로 생각하고 그 질병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즉 환자는 질병을 개별적으로 인식하는데 비해, 의사는 보편적으로 대할 뿐이다
사실 의사가 모든 환자의 질병에 대해 개별적인 관심을 갖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의사 역시 봉사와 사랑을 실천하는 성자가 아니고 일을 해서 먹고 사는 하나의 직업인인 이상 매일 매일 해야 하는 일, 즉 치료과정에 항상 특별한 관심을 유지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더구나 매일 매일 듣는 환자들의 불평이 얼마나 지겹겠는가
그들의 무관심과 일상적인 접근이 이해는 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사는 인간의 생명이라는 대체할 수 없는 가장 고귀한 것을 다루는 직업이므로 다른 어떤 직업보다도 직업 윤리가 투철하고 엄격해야 한다고 믿는다
환자들의 고통을 공감하고 그들을 이해한다는 의미에서도 의사의 인문학적 소양은 반드시 필요하다

이미 미국에서는 1970년대부터 의과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고 있다
또 일반 학부에서 기본적인 소양을 갖춘 사람을 선발해 4년간 의학 교육을 시키는 대학원 제도를 통해 의사의 인문학적 자질을 장려한다
우리나라 의과 대학은 2년간의 예과 제도를 가지고 있지만 실제적인 인문학적 지식의 습득은 미미한 편이다
미국 의과대학은 대학원 입학을 위한 필수 학점에 문학을 포함시키고 있다
생물이나 화학 등 일반적인 과학 과목보다 문학에 더 많은 점수를 부여함으로써 가능하면 인문학적 지식을 갖춘 사람을 선발하려고 노력한다
인문학적 지식이 많다고 해서 인간적인 의사가 되는 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균형감각을 갖춘 의사는 될 수 있을 것 같다
또 의사가 지역 사회의 리더 역할을 하려면 글쓰기 훈련도 해야 하고 인문학적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우리나라는 연세대학교에서 본과 과정에 문학 수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
예과도 아닌 본과에서 문학을 가르친다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변화라고 생각한다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접목은 비단 의학과 문학에 국한된 일은 아닐 것이다
갈수록 스페셜리스트 보다는 전체를 아우를 수 있고 비젼을 제시할 수 있는 제너럴리스트의 역할이 중요해지는 만큼 자기 전공 분야에만 몰두하는 것은 우물 안 개구리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보다 많은 학문들의 교류가 필요할 것이다
의학은 자연과학 중에서도 특히 인문학과의 접목이 많이 필요한 학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학에서부터 기본적인 인문학 지식을 가르칠 필요가 있다
보다 넓은 시각을 가진 의사를 양성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의외로 의사 출신 작가들이 많다
제일 유명한 사람은 러시아의 작가 안톤 체호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쓴 마거릿 미첼도 의과 대학을 중퇴한 전적이 있다
달과 6펜스, 인간의 굴레 등을 쓴 영국의 서머셋 몸도 일반의였고, 광인일기나 아큐정전으로 유명한 루쉰도 일본의 한 의과대학을 중퇴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의학과 문학의 만남은 아주 낯설거나 이질적인 것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인간의 생로병사를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만큼 누구보다 인간에 대한 애정과 깊은 이해가 가능할 것 같다
그런 의미로 보면 의사 출신 작가들의 등장은 무척 반가운 일이다
마이클 크라이튼이나 로빈 쿡처럼 우리나라에도 의사 출신 작가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안톤 체호프 같은 대문호가 나온다면 더 바랄 게 없을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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