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살아보세 (dts 2disc)
안진우 감독, 변희봉 외 출연 / 팬텀 / 2006년 12월
평점 :
품절


오랜만에 비디오로 본 영화
닥터 uro와 함께 봤다
요즘도 비디오가 나오는지 처음 알았다
dvd 출시 전에 먼저 나온다고 한다
그렇게 재밌지는 않고 기대했던 것보다 떨어지지만 뭐, 그런대로 안 자고 볼만 했다
평점을 주자면 5점 만점 중 딱 3점에 해당될 영화다

 

사랑니에서 김정은의 연기에 반했던지라, 이번에도 기대를 좀 했건만 시나리오가 워낙 평범해서 그런지 김정은 역시 딱 그 수준의 연기 밖에 못 보여준다
어쩌면 어울리지 않는 역이었는지도 모른다
경상도 사투리는 너무 어색해 차라리 안 썼으면 좋겠고, 안 맞는 옷을 입은 느낌이 들어 보기 불편했다
오히려 이범수가 어리숙한 농촌 아저씨 역에 딱 어울렸다
이 사람이야 말로 드라마에서는 절대 안 팔릴 정도로 평범 그 자체라, 영화에서 소시민을 잘 그려낼 수 있는 것 같다
이범수 파트너로 나온 전미선은 영화에서 최악의 캐스팅이었다고 생각한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시골 촌부 역이었다
안내상의 코믹 연기도 왠지 좀 뜨는 것 같고...
변희봉이나 아들 역 맡은 배우의 연기는 자연스러웠다
박정희 전문 배우의 연기도 좋았다

 

애 낳아달라고 정부가 사정을 하는 요즘 세상에 비춰 보자면, 70년대 산아제한은 희극적인 요소가 다분하다
영화가 주장하는 바가 뭔지는 잘 모르겠으나 어쨌든 애를 낳지 말아야 잘 산다는 김정은에 대해, 마을 이장인 변희봉은 아이야말로 삶의 가장 큰 기쁨이고 축복이라고 대항한다
전체적인 영화 내용으로 보자면 왠지 피임을 강요하는 정부시책을 우롱하는 기분도 든다
나는 여기서 "결혼, 달콤하고도 씁쓸한 유혹" 에서 일본인 여의사가 보여 준 주장을 떠올리게 된다
아이를 낳을지 말지는 전적으로 개인에게 달린 문제다
결혼 역시 마찬가지다
정부에서 국가 시책으로 개인의 사생활을 좌지우지 한다는 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70년대 산아제한 운동 때문에 피임을 강요하는 문화도 문제지만, 어쩌면 더 큰 문제는 아이 안 낳는 여자들을 이기적이라고 매도하는 요즘 세태인지도 모른다

 

맨 마지막에 이범수의 부인이, 남의 씨를 잉태했다는 오해를 사서 마을 유지인 변희봉을 찾아가는 장면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범수와 변희봉은 계속 대립 관계였는데 왜 느닷없이 문제가 생기자 그 부인이 변희봉에게 몸을 의탁한단 말인가?
마치 지주 계급과 노동자 계급의 극적인 화해를 매개하는 기분이 든다
그런데 솔직히 웃긴다
과연 마을 전체를 소작농으로 부리던 위세 당당한 지주 계급이 어느날 갑자기 소작농들과 화해할 수 있을까?
감독의 어설픈 계급 화해 시도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식으로 간단히 해결된다면, 즉 서로 마음 좀 넓게 쓰는 걸로 해결된다면 대체 계급 문제가 왜 발생하겠는가?

 

마지막에 이범수가 이사가는 걸로 끝나는 건 꽤나 슬펐다
결국 이런 결론 밖에 낼 수 없는 걸까?
정부 시책이라는 단어 대신 개인의 선택이라는 단어가 널리 퍼진 그런 사회에서 살고 싶다

 

사족 한 가지
남자들의 질투심은 감히 여자의 질투에 댈 게 못 되는 것 같다
다른 남자와 잤다는 걸 안 이범수의 분노는, 그야말로 남자들 질투심이 얼마나 무서운지 새삼 느끼게 했다
여자들은 기껏해야 머리채 잡고 흔드는 걸로 끝나지만, 남자들은 폭력이 수반되기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된다
문득 "친절한 금자씨" 의 뚱뚱한 죄수가 생각난다
남편이 바람피자 그 내연녀와 남편을 살해한 후 인육을 불고기로 구워 먹었다는 대단한 여자다
여자들의 질투도 이 정도는 되야 남자들이 감히 바람필 생각을 못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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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6-12-09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남자들의 질투는 가히 상상을 초월하죠...그러면서 여자의 질투가 훨씬 더 센 것처럼 구라를 친다죠.

marine 2006-12-09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호, 역시 공평한 마태우스님^^
 
현대과학과 기독교의 논쟁 우리시대의 신학총서 1
리처드 칼슨 지음, 우종학 옮김 / 살림 / 2003년 3월
평점 :
절판


어쩌면 내 신앙 역사의 한 획을 그을지로 모르는, 너무나 중요한 책과의 만남이었다
너무 많은 부분을 옮겨 적어 거의 1/3은 베낀 것 같다
그 동안 내가 고민하던 문제를 나 외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도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이 기뻤고, 나보다 지적으로 훨씬 더 현명한 사람들이 현명한 답을 이끌어 냈다는 사실이 정말 고맙다

 

신앙과 과학, 혹은 그리스도인과 진화론은 어쩌면 현대를 살아가는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고민해 볼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언제나 나는 왜 성경을 있는 그대로 믿지 않고, 혹은 교회에서 가르치는대로 믿지 않고 의심하는 도마가 되야 하는지 괴로웠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했는데, 나는 항상 성경 말씀과 그것을 해석하는 목사나 신부님의 강론에 의문을 품었었다
내가 생각하기엔, 교회에서 과학을 빗대어 성경을 해석하는 일이 매우 불합리하다고 여겨졌다
특히 성경은 과학이다, 와 같은 자극적인 제목의 강론이 정말 못마땅했다
왜 성경을 과학의 테두리 안에 가두는가?
이 책의 저자 중 한 명인 폰드의 말에 따르면, 과학은 새로운 발견에 의해 계속 변하는 속성을 지닌다
그런데 그 변화무쌍한 과학에 하나님의 말씀을 끼워 맞춘다면, 과연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성경이 어떻게 권위를 가질 수 있겠는가?
과거에도 우리는 성경을 근거로 천동설을 주장했고, 지금도 성경을 근거로 지동설을 지지한다
심지어 성경에 빅뱅 이론이 나와 있다고까지 주장한다
그러나 먼 훗날 다시 지각변동이 일어나 지동설도, 빅뱅 이론도 모두 틀렸다는 게 입증된다면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과연 성경학자들은 뭐라고 변명할 것인가?
성경은 과학이 아닐 뿐더러, 과학이라는 작은 테두리 안에 갖힐 수 없는 훨씬 더 권위있고 훨씬 더 포괄적인 경전이다
성경에서 과학을 찾는 사람이야 말로, 성경의 의미를 인간의 행위로 시키는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책을 전부 읽지는 않았지만, 내가 동의하는 입장은 진 폰드의 상호독립이다
이 책에서는 네 가지 입장이 나온다
첫째는 성경의 무오설을 믿는 과학자들이고, 두번째는 진 폰드처럼 성경과 과학이 별개의 영역이기 때문에 겹치는 일이 없다는 상호독립 쪽이며, 세번째는 요즘 유행하는 지적 설계론이고, 마지막 네 번째는 성경과 과학이 서로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상보론이다
가장 문제시 되는 이론이 바로 지적 설계론이 아닌가 싶다
아직 그 부분을 다 읽지는 않았지만, 도킨스 등의 기존 진화론자들의 비판을 들어보면, 지적 설계론이야 말로 과학을 흔드는 매우 위험한 발상이고, 가장 교묘하게 과학적 사실을 부정하는 이론이라고 들었다
기존의 성경 무오설과 다를 게 없음에도 불구하고 포장만 달리해서 마치 성경과 과학을 조화시키는 가면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시 한 번 양쪽의 비판을 제대로 읽어 본 후 판단해야 할 것 같다

 

폰드는 상호독립론에서 스티븐 제이 굴드를 자주 인용한다
워낙 유명한 사람이라 나 역시 몇 번 들어 본 적이 있는 얘기였는데, 재밌는 건 왜 도킨즈가 굴드를 비판했는지 실감났다는 점이다
굴드는 아마도 신앙과 과학을 별개의 것으로 치부함으로써 종교적 갈등을 해결한 것 같다
그런데 도킨스는 아예 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진화론자로서 굴드의 어정쩡한 태도를 비난했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나는 도킨스의 글을 읽으면서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른다
"이기적인 유전자" 는 감탄하면서 재밌게 읽었는데, 그 다음에 읽은 도킨스의 에세이 모음집인 "악마의 사도들"은 정말 가슴이 떨려 제대로 읽지도 못했다
왜냐면 도킨스는 그 책에서, 진화론을 믿는다면 신의 존재를 부정해야 한다고 명백하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화론이란 자연선택에 의해서 생물이 진화해 왔다고 믿는 이론이다
하나님에 의해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인간이 창조된 것이 아니라, 자연선택에 의해 생식에 유리한 방법으로 무의미하게 진화되어 왔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진화론과 신앙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겠는가?
성경 무오설을 주장하는 패더슨이나, 지적 설계자론자도 다른 모든 과학은 받아들여도 절대로 진화론만은 안 된다는 입장이다
그러니 진화론이 절대적인 사실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내가, 어떻게 갈등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상호독립론이나 상호보완론은 이런 나의 갈등을 해소시켜 줬다
과학과 신앙은 서로 다른 영역이기 때문에, 즉 다른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에 부딪칠 일이 없다는 것이다
신이 존재 유무에 대해, 폰드는 과학은 과학의 영역에서만 진리를 밝히면 된다는 입장이다
진화론을 소급하여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낸 도킨스에 대하여, 자기 영역을 넘어선 사람으로 평가한다
그런데 지적설계론자들은 폰드의 이런 주장에 대해 눈 가리고 아웅이라는 식의 반응을 보인다
사실 폰드의 말처럼, 진화론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참신앙인인지 의심하는 비난을 많이 듣는다
마치 진화론을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로 진짜 신앙이 가려진다는 식이다
폰드는 다윈 역시 기독교인이라고 믿지만, 지적설계론자는 다윈의 이론에 따르면 절대로 다윈은 기독교인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무엇이 옳은가?
하나님만이 심판하실 일이다
도킨스와 같은 과격한 진화론자들이나, 진화론을 아예 부정하는 지적설계자들은 둘 다 같은 논리로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또 인정한다
all or nighting인 셈이다
그러니 상호독립이나 상호보완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도 저도 아닌 회피론자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솔직히 나 역시 아직 확실한 신념은 없다
다만 나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진화론과 신앙의 조화 문제로 고민하고 있고, 결국은 둘 다 옳은 진리임이 명백하게 밝혀지리라 믿고 있을 따름이다
적어도 나는 외롭지는 않다

 

제일 좋았던 문장은, 그리스도인의 주장이 절대로 하나로 통일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우리는 흔히 기독교 교리가 자기가 다니는 교회의 것 밖에 없다고 믿는다
사실 기독교야 말로 얼마나 배타적이고 불관용적인 종교인가?
카톨릭은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고 선언했지만, 대부분의 개신교도들은 여전히 예수로 인한 구원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을 것이다
더구나 한국 교회야 그 보수성은 더 이상 논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있고 각자의 눈으로, 각자 속해있는 사회의 전통을 기준으로 성경을 해석한다
자기가 속한 시대와 전통의 눈으로 성경을 해석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성공회 교리는 그래서 더 실감나게 다가온다
타 종교와의 공존 여부는 차치하고서라도, 기독교 내에서만도 얼마나 많은 교리가 존재하는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타 교파에 대해 과연 얼마나 알고 있고, 또 얼마나 그들의 신앙을 인정하는가?
그러고 보면 이단 논쟁이야 말로 가장 소모적이고 가장 쓸데없으며 가장 권위적인 것이 아닌가 싶다
누가 타인의 신앙을 이단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가?
그 권위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성경을 권위로 든다 해도 그 해석은 읽는 이의 눈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왜 간과하는가?
결국 성경 무오류설이라는 것도 논리적으로 안 맞는 게, 문자의 해석은 읽는 사람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의 일부 문장을 가지고, 미래를 예견했다는 식으로 설교하는 교회의 행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특히 다니엘서나 요한 계시록 등이 섣부른 목사들에 의해 자주 인용되는데, 성경은 과학 교과서가 아님은 물론이고 미래에 대한 예언서도 아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성경 전체를 보라는 말이 어울릴 것 같다
폰드의 말대로 자기가 원하는 구절을 성경에서 찾기란 얼마나 쉬운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의 권위로써 성경을 인용하는 사람들은, 과연 자기가 제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있는지 재차 생각해야 하고 무엇보다 겸손해질 필요가 있다

 

어려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훨씬 쉽고 재밌다
아마도 저자들의 내공이 보통이 아니기 때문인 것 같다
기본적으로 이들은 과학자들이고 대부분의 과학적 사실들을 인정한다
그래서 그들의 주장이 매우 합리적으로 들린다
성경과 과학은 서로 다른 차원이기 때문에 갈등점이 없다는 쪽으로 일단 내 입장을 정리했다
좀 더 많은 책을 읽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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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아니라 학교가 문제다 - 현 교육 시스템에서 아들을 성공시킬 학습 전략 8가지
마이클 규리언.캐시 스티븐스 지음, 고정아 옮김 / 큰솔 / 2006년 11월
평점 :
절판


굳이 아들에 관한 얘기가 아니더라도 아이를 가진 부모라면 한 번쯤 읽어 볼 만한 책 같다

오히려 아들이 문제가  아니라 학교가 문제라는 도발적인 제목이 책에 대한 인상을 깍아 먹는다

뭐랄까, 사람들을 혹하게 하기 위한 자극적인 제목이라는 생각 때문에 첫인상은 과히 좋지 못했다

그렇지만 읽을수록 공감할 만한 내용이 많아서 고개를 많이 끄덕이게 됐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아이에 대한 관심이 아닐까 싶다

꼭 아이에게만 해당되는 말은 아니고, 주위 사람들과의 좋은 관계를 위해서도 상대방에 대한 관심은 필수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부모들은 너무 바쁘고, 아이들이 공부해야 할 내용도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라 부모가 교사의 역할을 하기는 무리가 있다

책을 읽다 보면, 맞벌이 부부의 애들은 인성 교육에 문제가 있지 않겠냐는 뉘앙스를 풍기는 문장들이 몇 개 보여서 좀 불편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따지고 보면 누군가 아이를 위해 전담해 준다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더 나으면 나았지 못하진 않을 것이다

물론 여기서 아이를 위해 희생하는 부모의 존재 의의는 따로 논의되야 하지만 말이다

 

두뇌 손상을 막기 위해 영양분 섭취에 신경쓰고 남자 아이들의 경우 헤딩과 같은 과격한 행동은 삼가해야 한다는 말에 동의한다

머리 좋아지는 식품이라고 썼으면 굉장한 거부감을 느꼈을텐데, 다행히 저자는 합리적인 기술을 택했다

그런데 확실히 남자 아이들은 여자들보다 훨씬 더 활동적인 것 같다

개별적으로 본다면 각기 다르겠지만 통계치를 내면 남자 아이들의 활동량이 평균적으로 더 높은 건 분명하다

그렇다면 남녀의 신체적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한 일일까?

너무나 오랫동안 남녀차별에 시달려 온 여자들로써는, 신체적 차이를 어디까지 인정해야 하는가에 민감할 수 밖에 없다

20세기가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여자들은 생리를 하기 때문에 운동 경기에 적합하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지 않았던가?

또 의사와 같은 직업은 책임감이 약한 여자로써는 감히 가질 수 없다고 인식되어 왔다

엘리자베스 블랙웰이라는 미국 최초 여의사의 고군분투기는, 지금 읽으면 당시의 편견이 얼마나 형편없고 황당한지 잘 보여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대세는 유전자라서 그런지, 남녀간의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는 쪽으로 흐르고 있다

이 책의 특징은 보통 여성을 약자로 놓는데, 오히려 남자 아이들을 학습에 취약한 약자로 상정했다는 데 있다

책에 따르면, 남자 아이는 언어 능력이 떨어지는데, 학교 수업이 언어 능력 중심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어린 남자 아이일수록 대단히 불리하다고 한다

저자의 대안은, 학교 수업이 교과서 위주로만 진행되어서는 안 되고 (즉 언어 능력에만 의존해서는 안 되고) 남자 아이들이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신체 활동을 늘리고 시각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예술 활동도 교과목에 많이 집어넣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만히 교실에 앉아서 선생님이 써 주는 칠판 지식에만 의존할 게 아니라, 몸을 더 움직이는 쪽으로 수업 방향이 바뀌어야 한다는 얘기다

 

이런 주장이라면 비단 남자 아이에게만 해당하는 게 아니라, 모든 학생들에게 바람직한 방향이 아닐까 싶다

시간이 갈수록 아이들이 배워야 할 지식의 양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나고, 학교로서도 신체 활동을 늘리는 것 보다는, 가만히 앉혀 놓고 일률적으로 지식을 전달하는 게 훨씬 편할 것이다

체육과 예술 활동을 늘리려면 학교의 재정부담은 커질 수 밖에 없다

이런 주장들에 대해 학교 측이 어떻게 반응할지 무척 궁금하다

결국 사립학교처럼 수혜자 부담 원칙으로 가야 하는건지...

 

주변 사람들이 공동 교사 노릇을 해야 한다는 주장도 신선했다

부모는 물론이고 조부모, 친척, 동네 아저씨, 친구 등등을 언급했지만, 솔직히 얼마나 현실성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인생에 멘토를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저자의 말처럼 주변 사람들이 하나도 아니고 이렇게 여러명이 공동 교사가 돼 준다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아다시피 맞벌이 부부들은 자기 애들 챙기기도 힘든 게 현실이다

조부모까지는 이해가 되지만 사실 핵가족화 되면서 학원 등으로 너무 바쁜 아이들 때문에 만나기조차 어렵지 않은가?

오히려 맞벌이 부부를 위해, 도서관 등에서 아이들의 방과 후 교육을 책임지는 시스템이 더 현실적으로 들린다

프랑스나 미국 같은 경우, 아이들은 학원에 가는 대신 도서관에 가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접한다고 들었다

핵가족화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고 보면, 개인의 인맥 내에서 애들 교육을 해결할 것이 아니라, 지역 사회가 줄 수 있는 혜택을 생각해 보는 게 더 현실적일 것 같다

 

남자 아이들에게 ADHD가 많다는 얘기는 다소 충격이었다

ADHD는 뇌의 기질적 손상이라고 하는데, 왜 객관적인 검사 없이 의사의 관찰만으로 진단을 내리지는 의문이다

그런데 나는 저자의 주장에 일부 반대한다

저자는 아이들이 약물 치료를 받을 경우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된다면서 의사들이 진단을 내릴 때 신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진단이 신중해야 함은 물론 매우 중요한 얘기지만, 약물 치료를 이상한 시선으로 보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특히 정신과 치료의 경우 사회적 편견이 매우 강하기 때문에 일단 진단을 받는 것조차 두려워 한 나머지 병을 악화시키는 경우가 많다

저자의 주장처럼 ADHD가 뇌의 기질적 손상이라면 당연히 약물 치료를 받아서 호전시켜야 한다

그런데 책을 읽다 보면 약을 먹는 것은 아이들의 정신 건강에 매우 해롭다는 뉘앙스가 풍긴다

비단 저자의 편견만은 아니지만, 눈이 나쁘면 안경을 쓰듯 몸의 한 군데가 아프면 (그것이 뇌나 정신에 해당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약을 먹어 치료하는 게 당연하다는 인식이 확산되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약 자체가 아니라 사회적 편견이 아이에게 상처를 줄지도 모른다

 

전체적으로 재밌게 읽은 책이다

자극적인 제목과는 달리 합리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에 공감이 갔다

꼭 아들들에게 국한될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학교에서 보다 많은 신체 활동을 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많은 관심을 받으며 성장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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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06-12-07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식이나 기술위주, 교과목 위주보다는 태도,행동변화를 가져오는 과제해결형이나 관계형성을 가져올 수 있는 교육, 교단이 아이들 시선보다 더 낮거나 열린 교실을 만들어보는 시도가 없거나 부족한 것 같군요. ...글구 학생들 수준보다 맞춘 수준에 따라가게 하는 것도...

클리오 2006-12-07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참. 결국은 선정적이고 별 내용없는 책이었군요.. 쳇쳇(전 이 책 제목에 좀 삐딱했어서요... )
 
만들어진 고대 - 아시아연대총서 5
이성시 지음, 박경희 옮김 / 삼인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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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교포 역사학자가 쓴 한국의 고대 관련 책이다
아마도 이 책은 "만들어진 전통" 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인의 필요에 의해, 고대 역사를 현대인의 시각으로 이해하고 이데올로기까지 덧붙여 실체가 없는 거대한 담론으로 변질시킨다는 뜻이다
진실을 밝힌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데올로기가 가미된 역사 해석은 절대로 지양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민족주의 역시 이데올로기의 하나로 이해될 수 있다
이 책에서는 조심스레 논쟁의 핵심을 피하고 있긴 하지만, 아마도 저자는 발해가 과연 한국사 영역에 포함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회의적일 것 같다
저자의 말마따나 지배계층이 고구려인이었다고 해서 국민 대다수를 차지했던 말갈인을 무시하고 무조건 한국의 역사라고 하는 것도 모순이 있다
더구나 대조영은 고구려인이 아니라 말갈인이었다는 기록도 있기 때문에 과연 발해사를 한국사라고 단정지을 수 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많은 문제다
구당서에서는 대조영을 고구려의 별종이라고 표기했고, 신당서에서는 말갈인이라고 썼다고 한다
엄청나게 다른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저자의 지적대로 고구려 시절에 이미 말갈인이 국민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은 고구려의 별종이라는 것이 말갈인을 가리키는 말이 될 수 있다
또 지배층이 고구려인이었다고 하더라도 과연 한 나라의 성격을 지배층의 출신 성분만 가지고 결정할 수 있느냐도 생각해 볼 만한 문제다
직접적인 주장은 피하고 있지만, 글의 맥락으로 볼 때 저자는 분명히 발해를 한국사로 이해하기 보다는, 말갈인이 대다수를 이룬, 또다른 역사로 인식하고 있다
임지헌이 주장한 바대로 변경사로 아우를 수도 있을 것 같다
사실 발해가 고구려를 이은, 한민족의 나라가 아니라면 굳이 연구할 필요도 없는 무의미한 역사가 된다는 말이 될 수도 있지만, 어쨌든 여러 민족이 섞여진 고대 국가를 하나의 성격만으로 단정짓는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더구나 그것을 현대 국가의 이데올로기나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중국의 동북 공정도 문제가 있지만, 거기에 대응한답시고 역시 똑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는 국내의 일부 여론도 문제다

 

오래 전부터 떠돌던 광개토대왕비 조작설도 음모에 불과했음을 저자는 증명하고 있다
일본 장교가 석회를 발라 글자를 왜곡했다는 얘기인데, 일본인이 발견하기 훨씬 전에 떠 놓은 원석탁본이 속속 발견되고 있어 근거없는 음모론에 불과함이 밝혀졌다
석회를 바른 것은 글자를 조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고른 탁본을 얻기 위한 작업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일본이 역사 왜곡을 위해 비석을 훼손시켰다는 음모론이 통용되고 있는 걸 보면 참 한숨이 나온다
이것이 과연 일본을 이기는 극일의 옳은 방법일까?

 

이희진이 쓴 "전쟁의 발견" 에서는, 왜구의 침략이 국가를 흔들 정도로 엄청나서 광개토대왕이 군사를 직접 이끌고 정벌하러 온 게 아니라, 백제와 가야가 얽힌 여러 정황 때문에 일시에 해결을 하려고 일부러 큰 부대를 이끌고 원정을 왔다고 해석했다
그러니까 왜구 세력이 그렇게까지 컸던 게 아니고, 실제로는 매우 빈약했음에도 불구하고, 단기간에 승부를 볼 목적으로, 즉 규모에 놀라 지레 겁을 먹도록 하기 위해 광개토대왕이 직접 원정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들어진 고대" 의 저자 이성시는, 비문의 문체가 영웅의 고난이 클수록 그것을 해결한 영웅은 더욱 위대해진다는 방식으로 쓰여져 있기 때문에, 왜구의 침략 세력을 크게 쓴 것이라고 해석했다
어떻게 보면 이희진의 의견과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다른 것 같기도 한데 왜구가 신라를 침략한 것은 분명히 큰 사건이었고, 후대에 조작한 것도 아니라는 입장인 것 같다
즉 정인보의 해석처럼 가운데 생략했을 것이라고 지레 짐작하고 목적어 등을 넣어 고구려쪽에 유리하게 해석을 하는 건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내 생각에도 없는 글자를 생략됐을 것이라고 일부러 보태서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건 문제가 있다고 본다

 

동아시아 문화권에 대한 해석은 매우 유용했다
한자, 한역불교, 유교, 율령 제도로 대표되는 동아시아 문화는, 중국의 세력권 내에 있었던 베트남, 한국, 일본 등 주로 네 나라를 칭한다
그런데 단지 거대한 문명권의 주변에 있었다는 이유 만으로 영향을 받은 건 아니었다고 한다
일례로 티벳 불교는 중국의 한역 불교와 매우 다르고, 한자 대신 자기들만의 글자를 따로 쓴다
또 베트남 이외의 동남 아시아도 중국의 문화권에 속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이 세 나라만 동아시아 문화권에 해당되는 걸까?
저자는 이것을 책봉 관계로 봤다
단순히 옆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영향을 받는 게 아니라, 책봉 관계를 맺어야 그 문화를 공유하게 된다는 것이다
한자를 쓴 이유도 중국 조정에 외교 사절을 보내고 문서를 보내야 하기 때문에 배웠다는 얘기다
대항해 이전 시대만 해도 각기 분리된 세계에서 살았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중국의 인정을 받는 것이 곧 세계화였을 것이다
고립을 피하고 중국과 교류하는 것이 선진화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 베트남, 일본 등은 중국과 책봉 관계를 맺고 인정을 받아야만 비로소 정부의 권위가 서고 각기 독립적인 문화를 발전시킬 여유가 생긴다
어떻게 보면 좀 모순된 얘기 같기도 한데, 저자는 중국의 책봉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자문화를 발전시킬 조건이 형성됐다고 설명한다
당나라가 멸망하자 발해, 신라, 일본의 야마토 정권 등이 비슷하게 멸망한 것도 좋은 예가 된다
결국 신라나 조선이 사대외교를 한 것은, 국가의 존속을 위해 반드시 했어야 하는 매우 현명한 정책이었음을 알 수 있다

 

200 페이지가 조금 넘는 짧은 분량의 책이었지만 굉장히 재밌게 읽었다
역시 재일교포라서 그런지 보는 눈이 한국의 사학자들보다 훨씬 객관적이다
민족주의는 결국 패권주의와 연결될 수 밖에 없다고 보는 나로서는 이런 책들이 매우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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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6-12-04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음, 눈에 들어오네요.

marine 2006-12-04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괜찮은 책이예요 주장을 에둘러 말하는 게 좀 답답하긴 하지만...
 
중세 산책 - 성(城)에 살던 중세인들의 꿈과 일상
만프레트 라이츠 지음, 이현정 옮김 / 플래닛미디어 / 2006년 5월
평점 :
품절


서울가는 차에서 열심히 읽은 책이다
그림도 많고 글씨도 큼직큼직 해서 읽기가 편했던 책이기도 하다
주로 성에 관한 얘기가 많았다
중세 시대는 성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그런 시대였던 모양이다
중세는 언제나 전설 속의 기사와 공주가 있는, 그런 낭만적인 시대다
영주와 하인이 있고, 투구를 쓴 기사가 성을 뺏기 위해 말을 타고 달려 간다
우리에게 알려진 대부분의 서양 동화들은 거의 중세를 배경으로 하는 것 같다
헨젤과 그레텔에서도 가난한 부모는 먹을 게 없어서 아이들을 숲 속에 버렸고 그 아이들은 과자로 만든 집을 찾아낸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아이들을 버릴 수 밖에 없을 만큼 가난했던 시대가 바로 중세였고, 또 과자로 만든 집이라는 환상이 퍼졌던 시대도 바로 중세라고 한다

 

중세라고 하면 흔히 게르만의 대이동 때문에 로마 제국이 멸망한 5세기부터 르네상스가 일어나기 직전인 15세기까지 천 년을 가리킨다
기독교와 봉건 제도를 빼 놓을 수 없을 것이다
교회가 세상을 지배하고, 통일된 강력한 왕국 대신 계약으로 맺어진 수많은 영주와 기사들, 그리고 농노들이 있었다
우리나라 중세와 비교해 보면, 확실히 서양은 武를 숭상했던 것 같다
얼핏 보기에 기사는 조선 시대 선비와 비슷한 계층이었던 듯 하다
기사들은 조선 양반 못지 않게 자부심이 강하고 체면을 중요시 했다
얼어 죽어도 곁불은 쬐지 않는다는 양반들처럼, 기사들 역시 굶어 죽더라도 옷은 화려하게 차려 입으려고 애썼고 마상경기에서 패하면 그것은 곧 사회적인 죽음을 의미했다고 한다

 

중세 시대 생활을 성을 중심으로 재밌게 서술한 책이다
낭만이 있었던 시대로 기억하지만, 들여다 보면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하고 종교가 일상을 지배했던 암울한 시절이었던 것도 분명하다
중세산책이라는 제목처럼 가볍게 산책하는 기분으로 중세 여행을 떠나 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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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6-12-04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림이 많아서 책값이 센가봐요. 아까 클릭했을 때는 별 넷이었던 것 같은데 다시 보니 별 셋이군요. 이 책 흥미롭겠어요.

marine 2006-12-04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총천연색 그림들이 거의 장마다 있거든요

다크아이즈 2006-12-04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루마린님 덕분에 좋은 책 읽게 생겼네요. 비싸도 전 이런 책이 좋아요.

marine 2006-12-04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볍게 읽어 볼 만 합니다 말 그래도 산책하는 기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