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들어진 고대 - 아시아연대총서 5
이성시 지음, 박경희 옮김 / 삼인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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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교포 역사학자가 쓴 한국의 고대 관련 책이다
아마도 이 책은 "만들어진 전통" 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인의 필요에 의해, 고대 역사를 현대인의 시각으로 이해하고 이데올로기까지 덧붙여 실체가 없는 거대한 담론으로 변질시킨다는 뜻이다
진실을 밝힌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데올로기가 가미된 역사 해석은 절대로 지양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민족주의 역시 이데올로기의 하나로 이해될 수 있다
이 책에서는 조심스레 논쟁의 핵심을 피하고 있긴 하지만, 아마도 저자는 발해가 과연 한국사 영역에 포함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회의적일 것 같다
저자의 말마따나 지배계층이 고구려인이었다고 해서 국민 대다수를 차지했던 말갈인을 무시하고 무조건 한국의 역사라고 하는 것도 모순이 있다
더구나 대조영은 고구려인이 아니라 말갈인이었다는 기록도 있기 때문에 과연 발해사를 한국사라고 단정지을 수 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많은 문제다
구당서에서는 대조영을 고구려의 별종이라고 표기했고, 신당서에서는 말갈인이라고 썼다고 한다
엄청나게 다른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저자의 지적대로 고구려 시절에 이미 말갈인이 국민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은 고구려의 별종이라는 것이 말갈인을 가리키는 말이 될 수 있다
또 지배층이 고구려인이었다고 하더라도 과연 한 나라의 성격을 지배층의 출신 성분만 가지고 결정할 수 있느냐도 생각해 볼 만한 문제다
직접적인 주장은 피하고 있지만, 글의 맥락으로 볼 때 저자는 분명히 발해를 한국사로 이해하기 보다는, 말갈인이 대다수를 이룬, 또다른 역사로 인식하고 있다
임지헌이 주장한 바대로 변경사로 아우를 수도 있을 것 같다
사실 발해가 고구려를 이은, 한민족의 나라가 아니라면 굳이 연구할 필요도 없는 무의미한 역사가 된다는 말이 될 수도 있지만, 어쨌든 여러 민족이 섞여진 고대 국가를 하나의 성격만으로 단정짓는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더구나 그것을 현대 국가의 이데올로기나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중국의 동북 공정도 문제가 있지만, 거기에 대응한답시고 역시 똑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는 국내의 일부 여론도 문제다

 

오래 전부터 떠돌던 광개토대왕비 조작설도 음모에 불과했음을 저자는 증명하고 있다
일본 장교가 석회를 발라 글자를 왜곡했다는 얘기인데, 일본인이 발견하기 훨씬 전에 떠 놓은 원석탁본이 속속 발견되고 있어 근거없는 음모론에 불과함이 밝혀졌다
석회를 바른 것은 글자를 조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고른 탁본을 얻기 위한 작업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일본이 역사 왜곡을 위해 비석을 훼손시켰다는 음모론이 통용되고 있는 걸 보면 참 한숨이 나온다
이것이 과연 일본을 이기는 극일의 옳은 방법일까?

 

이희진이 쓴 "전쟁의 발견" 에서는, 왜구의 침략이 국가를 흔들 정도로 엄청나서 광개토대왕이 군사를 직접 이끌고 정벌하러 온 게 아니라, 백제와 가야가 얽힌 여러 정황 때문에 일시에 해결을 하려고 일부러 큰 부대를 이끌고 원정을 왔다고 해석했다
그러니까 왜구 세력이 그렇게까지 컸던 게 아니고, 실제로는 매우 빈약했음에도 불구하고, 단기간에 승부를 볼 목적으로, 즉 규모에 놀라 지레 겁을 먹도록 하기 위해 광개토대왕이 직접 원정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들어진 고대" 의 저자 이성시는, 비문의 문체가 영웅의 고난이 클수록 그것을 해결한 영웅은 더욱 위대해진다는 방식으로 쓰여져 있기 때문에, 왜구의 침략 세력을 크게 쓴 것이라고 해석했다
어떻게 보면 이희진의 의견과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다른 것 같기도 한데 왜구가 신라를 침략한 것은 분명히 큰 사건이었고, 후대에 조작한 것도 아니라는 입장인 것 같다
즉 정인보의 해석처럼 가운데 생략했을 것이라고 지레 짐작하고 목적어 등을 넣어 고구려쪽에 유리하게 해석을 하는 건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내 생각에도 없는 글자를 생략됐을 것이라고 일부러 보태서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건 문제가 있다고 본다

 

동아시아 문화권에 대한 해석은 매우 유용했다
한자, 한역불교, 유교, 율령 제도로 대표되는 동아시아 문화는, 중국의 세력권 내에 있었던 베트남, 한국, 일본 등 주로 네 나라를 칭한다
그런데 단지 거대한 문명권의 주변에 있었다는 이유 만으로 영향을 받은 건 아니었다고 한다
일례로 티벳 불교는 중국의 한역 불교와 매우 다르고, 한자 대신 자기들만의 글자를 따로 쓴다
또 베트남 이외의 동남 아시아도 중국의 문화권에 속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이 세 나라만 동아시아 문화권에 해당되는 걸까?
저자는 이것을 책봉 관계로 봤다
단순히 옆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영향을 받는 게 아니라, 책봉 관계를 맺어야 그 문화를 공유하게 된다는 것이다
한자를 쓴 이유도 중국 조정에 외교 사절을 보내고 문서를 보내야 하기 때문에 배웠다는 얘기다
대항해 이전 시대만 해도 각기 분리된 세계에서 살았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중국의 인정을 받는 것이 곧 세계화였을 것이다
고립을 피하고 중국과 교류하는 것이 선진화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 베트남, 일본 등은 중국과 책봉 관계를 맺고 인정을 받아야만 비로소 정부의 권위가 서고 각기 독립적인 문화를 발전시킬 여유가 생긴다
어떻게 보면 좀 모순된 얘기 같기도 한데, 저자는 중국의 책봉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자문화를 발전시킬 조건이 형성됐다고 설명한다
당나라가 멸망하자 발해, 신라, 일본의 야마토 정권 등이 비슷하게 멸망한 것도 좋은 예가 된다
결국 신라나 조선이 사대외교를 한 것은, 국가의 존속을 위해 반드시 했어야 하는 매우 현명한 정책이었음을 알 수 있다

 

200 페이지가 조금 넘는 짧은 분량의 책이었지만 굉장히 재밌게 읽었다
역시 재일교포라서 그런지 보는 눈이 한국의 사학자들보다 훨씬 객관적이다
민족주의는 결국 패권주의와 연결될 수 밖에 없다고 보는 나로서는 이런 책들이 매우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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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6-12-04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음, 눈에 들어오네요.

marine 2006-12-04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괜찮은 책이예요 주장을 에둘러 말하는 게 좀 답답하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