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부, 사람이 해서는 안될 거의 모든 것
하르트무트 크라프트 지음, 김정민 옮김, 이태주 감수 / 열대림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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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이든 안 읽는 것보다는 읽는 게 낫다는 걸 새삼 느끼게 해 준 책이다.

아주 유명한 고전이 아닌 이상 가급적 새로 출간된 책을 읽는 게 낫고 아무래도 영미권 책이 접근하기 쉽다는 것도 새삼 느꼈다.

훌륭한 고전은 시간이 지나도 전혀 촌스럽지 않지만 10여 년이 지나고 나면 대부분은 시의성이 떨어져 공감이 안 가는 부분들이 있다.

이 책도 터부의 기원을 밝히는 인류학적 책이라기 보다, 독일이라는 사회에서 터부라는 기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임상의사의 책인지라 아무래도 발간된지 20여 년이 다 되다 보니 거리감이 느껴진다.

터부라는 제목 보다는 사회적 금기가 더 어울릴 것 같은 책이다.

대표적인 터부로는 근친상간과 이슬람이나 인도의 음식 금기가 해당될 것이다.

존속살해나 성폭행 등등 사회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강력한 법적, 도덕적 금기가 터부인데 이를 어기게 되면 공동체로부터 추방된다.

격리에 대한 두려움이 일종의 초자아로써 개인의 욕망을 억제하고 있는 셈이다.

왜 근친상간이 터부시 됐느냐는 족외혼이 공동체 유지에 유리했기 때문이라 해석한다.

반면 유럽 왕실에서는 재산이 나눠지는 걸 막기 위해 오히려 친족간 결혼을 장려했다.

재밌는 것은 이슬람의 돼지고기 금기에 관한 해석이다.

보통 중동에서 돼지는 사람의 곡물을 먹고 병충해가 많아 키우기가 어려워 금기시 됐다고 하지만 단지 이익적인 측면에서가 아니라 지키기 다소 어려운 것을 강제함으로써 공동체의 정체성을 보존하는 방법이라고 해석한다.

돼지고기를 먹을 수 있지만 못 먹는다고 해서 큰 일이 나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계기로 금기시 된 이 규칙을 지키는 것이 바로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것을 외부에 드러낸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 터부는 정체성의 표현이 되고 이것을 지켜가는 힘이 바로 마나라고 한다.

마나는 터부를 보존할 수 있는 힘을 뜻한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당연시 되는 사회적 금기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달라질 수 있고 터부를 깨는 것은 바로 공개적 토론이라고 한다.

생명윤리나 남녀평등, 인종차별, 양극화 등등 여러 주제들이 있을 것 같다.

터부를 깨기 위해서는 마나보다 더 강한 힘이 필요한데 대부분의 개인은 미약하기 때문에 큰 변화가 있지 않는 이상 이런 금기를 지키려고 한다.

대신 이것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위트를 제시한다.

그러고 보니 정신과에서도 유머를 올바른 승화의 방법으로 제시했던 것 같다.

다시금 인간이 얼마나 사회적 동물인지 느낄 수 있었고 이 거대한 사회가 유지되고 있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강력한 힘이 있고 그것이 반드시 합리적이지는 않지만 최소한 안정감은 준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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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성의 즐거움 - 서울성곽 600년을 걷다
김도형 글.사진 / 효형출판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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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책들이 너무 뻔한 얘기들이 많아 읽을까 말까 고민했던 책이다.

지리학을 전공한 분이라 그런지 꽤 상세하게 서울 성곽에 대해 설명하고 있고 역사적 내용도 꼼꼼하게 찾아쓴 점이 마음에 든다.

조선시대에도 하루 코스로 서울 성곽을 도는 순성놀이가 있었다고 한다.

남산타워 올라가는 길만 가도 숨이 가빠서 죽을 것 같았는데 기본적으로 산을 둘러싸고 있는 성곽을 하루 종일 걸어서 유람하는 걸 보면 우리 조상들 체력이 대단했던 것 같다.

성곽의 해체나 훼손에 대해 기술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일제의 만행인데 이 책의 저자는 꽤 공평한 시각을 유지한다.

기본적으로 서울 성곽은 조선시대부터 보수 정비를 지속해 왔고 근대화가 되면서 전철로를 놓는 등 어쩔 수 없이 철거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유산의 보존은 기본적으로 현대인의 편리함을 담보하는 것이라 부유한 국가가 아니면 어려운 일 같다.

남의 나라 식민지로 전락했을 정도였으니 그래도 이 정도 유적이라도 남아 복원할 수 있을 정도의 경제적 성장을 이룩했다는 게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통행의 편리함이 아니라 풍수지리에 의해 도성문이 폐쇄됐던 것을 보면 확실히 전근대 사회는 현대인과는 다른 사고방식을 가졌던 듯하다.

책에 소개된 곳들은 가끔 서울 나들이를 하면서 데이트를 했던 곳이라 잠깐 추억에 젖기도 했다.

확실히 서울은 현대적인 대단한 도시면서도 문화유산을 간직한 매력적인 곳이다.


<오류>

197p

실제로 조선 왕조에서 이루어진 26번의 왕위 계승 중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등 단 6명의 적장자만이 왕위를 계승했다.

조선 27대 임금인 순종은 적장자가 아니다. 고종과 명성황후의 적장자는 태어난 지 5일 만에 요절했다.

-> 보통 조선의 적장자 계승을 7명으로 보지 않나 싶다. 5일 만에 요절한 첫째 다음에 태어났다고 순종을 적장자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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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술의 세계사 - 한 잔 술에 담긴 인류 역사 이야기
미야자키 마사카츠 지음, 정세환 옮김 / 탐나는책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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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발간되는 책들은 다양하고 흥미로운 주제들이 많이 나오는 반면 너무 지엽적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이 책은 만족도가 있다.

대중교양서는 쉽게 읽히는 반면 너무 뻔한 내용일 때가 종종 있어 얻는 정보가 적어 아쉬운데, 이 책은 술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어떤 종류가 있는지, 유통은 어떻게 되는지 술에 대해 전반적으로 많은 지식을 전달해 준다.

사실 나는 술을 전혀 마시지 않기 때문에 술 자체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고 다만 인문학적인 배경이 궁금해서 읽게 됐다.

곡물이나 과일이 발효되면 자연스럽게 술이 만들어지므로 농사꾼은 필수적으로 술꾼이 될 수 밖에 없다는 말이 생각난다.

발효주는 알콜 농도가 낮은데, 증류 기술이 생기면서 좀 더 높은 도수의 증류주가 만들어지고, 여기에 각종 향신료 등을 첨가한 혼합주가 나온다.

재밌는 것은 증류기를 개발한 중동에서는 술이 금지된 반면, 유럽에서는 수도원에서 와인을 생산했다는 점이다.

이슬람이라고 해서 술이 절대 금지는 아니고 경전의 해석 여부에 따라 터키처럼 음주가 가능한 곳도 있는 점은 처음 알았다.

와인이 전세계적으로 유행하게 된 것도 대량 수송이 가능하게 된 덕분이라고 하니 과연 인간의 문화는 기술의 발전과 함께 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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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크 - 노르웨이에서 만난 절규의 화가 클래식 클라우드 8
유성혜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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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읽은 드가 편보다는 흥미가 많이 떨어져 아쉽다.

저자가 노르웨이 미술관에서 일하는 덕분인지 노르웨이의 대표 화가인 뭉크에 대한 상세한 소개는 도움이 됐다.

책 내용과는 별개로 이 시리즈는 북디자인을 참 잘하는 듯하다.

갖고 싶은 책, 읽고 싶은 책의 욕구를 확 살아나게 한다.

도판들도 약간 톤다운 되어 있지만 감상하는 즐거움을 준다.

본문에 나온 그림들이 전부 실려 있어 화가의 작품들을 살펴 볼 수 있어 참 좋다.

뭉크의 그림은 솔직히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고 특히 유명한 <절규>는 전혀 감흥이 없어 오히려 노르웨이 화가라는 점만 기억에 남는 정도였다.

이 화가에게 관심이 생긴 것은, 한가람 미술관에서 열렸던 뭉크 전시회를 본 다음부터다.

이 책에 나온 작품들이 많이 왔었던 것 같다.

도판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강렬한 색감과 우울한 분위기, 개성적인 구도가 눈길을 확 끌었다.

솔직히 도판으로 볼 때는 약간 어설프다는 느낌까지 받았는데 실제로 작품을 대하면 너무나 개성적이고 무엇보다 약간 어두운 듯한, 그러면서도 강렬한 색감이 아주 매혹적이었다.

유명한 작품을 직접 볼 때는 실망하기도 하지만, 실제로 봤을 때 훨씬 매력적인 경우도 종종 있어 역시 직접 눈으로 보고 책으로 지식을 얻는 게 좋은 것 같다.

북유럽은 우리와는 매우 다른 자연환경을 가진 곳이고 교류가 적어서 미지의 나라 느낌인데 방문해 보고 싶은 이유가 생겼다.

뭉크 미술관과 오슬로 국립미술관, 비겔란드 조각공원 등을 가보고 싶다.

뭉크는 고흐와 비교되기도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전혀 다른 화풍 같고 오히려 독일의 표현주의 느낌이 든다.

뭉크도 파리에 유학하기도 했는데 파리보다는 베를린 쪽에서 인정을 받았다고 한다.

어머니와 형제들이 빨리 죽고 아버지도 괴팍한 사람이었으며 무엇보다 뭉크 자신이 알콜 의존도가 높고 불안정한 감정 상태를 가지고 있었던 성격적 단점에 비하면 80세라는 긴 수명을 유지하고 노르웨이 최고의 화가로 생전에 인정을 받은 점만 봐도 고흐와는 다른 듯하다.

예술가들은 격렬한 성정을 가진 경우가 많은데 남자들의 경우 결혼을 통해 배우자가 잘 보조해 주면 안정적인 작품 활동을 하게 되고, 반대로 뭉크나 고흐처럼 독신 상태면 훨씬 고독한 삶을 살게 되는 것 같다.

지난 번 드가도 독신이었는데 뭉크 역시 권총을 발사할 정도의 격렬한 치정에 휩싸였지만 결국 80 평생을 혼자 지내고 말년의 30년은 바닷가에서 거의 은둔했다고 한다.

이 화가도 평범치 않은 긴 생애를 보낸 듯하다.

뭉크라는 화가에 대해 전반적으로 살펴 본 좋은 시간이었고 역시 다른 책들을 더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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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해상제국 베네치아 이화학술총서
남종국 지음 /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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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도 예쁘고 350 페이지 정도의 부담스럽지 않은 분량이고 주제도 흥미로워 기대감을 갖고 읽은 책인데 역시나 실망시키지 않는다.

대학 출판사에서 이렇게 예쁘게 잘 디자인해서 책을 낸다는 게 신기하다.
제목이 주제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해상제국 베네치아에 대한 이야기다.
작은 섬에 불과했던 베네치아가 어떻게 중세 1000년 동안 해상 제국의 위상을 가졌는가, 그 힘의 원천은 무엇인가, 과연 베네치아는 해상 제국이라 불릴 만 했나 등에 관한 분석이다.
한 권의 책으로 기획된 것이 아니고 그동안 발표한 논문을 손본 것들이라 그런지 겹치는 내용도 있고 상세한 자료들도 같이 실려 있어 다소 지루한 부분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나 같은 일반 독자가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수준의 좋은 책이다.

베네치아를 제국이라 부를 수 있을까?
제국이라고 하면 넓은 영토와 여러 민족을 거느린 거대한 정치권력이라 생각했는데 저자는 베네치아를 상업 제국으로 규정한다.
사실 베네치가가 오스만과 대적하면서 지중해 연안의 여러 섬들을 점령하고 이탈리아 북부에도 육상 영토를 가졌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
신성로마제국처럼 유럽에서 제국의 특징은 '로마' 정신을 계승한다는 뜻이 있어야 한다니 그런 면에서는 과연 적임자일 것 같기는 하다.
원활한 해외 무역을 위해 해군을 파견하여 바다를 정리하고 상품을 수입하는 항구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모습은 대항해 시대 이후 영국이나 네덜란드 같은 상업 제국 같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도 "중세" 해양제국, 즉 이들 보다 앞서 상업제국을 이룩했다는 의미로 지었나 보다.
보통 베네치아는 향신료 무역만 중계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면화의 비율도 거의 절반에 가까웠고, 예루살렘으로 기독교 신자들을 후송해 주는 순례단도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고 한다.
간단히 말해 지중해를 누비는 해군력과 큰 선박을 건조하여 국가에서 운영했기 때문에 해상 운송 능력이 뛰어났던 것이다.
증기 기관차 이전 시대였으니 선박이야 말로 교통의 가장 중요한 전제 조건이었을 것이다.
개인 선단도 있었지만 국가에서 아예 정기적으로 선단을 운영했기 때문에 운송비도 저렴했고 규칙적으로 교역 스케쥴을 짤 수 있어 상업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다.
향신료를 수입하는 중요한 루트가 바로 맘루크 제국이 지배하는 알렉산드리아와 시리아의 베이루트였는데 이들 국가와의 우호적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국가가 나선다.
마치 대항해 시대 이후 영국 등으 제국주의 국가들이 무력으로 상대편의 항구를 장악한 후 상인들이 교역했던 것처럼 베네치아도 상업제국으로서의 면모를 보였던 것이다.
포르투갈의 신항로 발견과 오스만 제국의 득세로 결국 베네치아는 몰락의 길을 걸었지만 일반적인 편견과는 달리 지중해 무역이 바로 몰락했던 것은 아니고 나폴레옹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도 베네치아는 상업 제국의 영화를 이어갔다고 한다.
확실히 유럽은 자본주의가 탄생할 수 밖에 없는 사회였고 동아시아의 전제 군주정과는 매우 다름을 새삼 깨달았다.
베네치아라고 하면 내가 제일 좋아하는 화가 티치아노의 고향이라는 정도의 관심 밖에 없었는데 상업제국으로서의 정체성을 알게 된 정말 좋은 시간이었다.
세상에는 재밌는 책들이 왜 이렇게 많은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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