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로 읽는 세계사 - 살아남기 위한 세계 왕실의 치열한 생존기
우야마 다쿠에이 지음, 전경아 옮김 / 책밥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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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람들은 유럽 역사의 자잘한 부분들까지 참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왕실이 아직 존재하는 나라이니 아직까지 남아 있는 왕조 국가에 대해서도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는 것 같기는 하다.

21세기 대중민주주의 시대에 왕실이 왠 말인가 싶지만, 아마도 헐리우드 스타들을 동경하듯 대중들은 왕자와 공주님이라는 로맨스의 주인공들이 필요한 것 같다.

평등 좋아하고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나라에서 드라마 주인공들은 거의 재벌 2세들이고, 심지어 가상 왕실 드라마까지 만들어 유행시키고 있으니 인간의 속성에는 뭔가를 숭배하고 싶은 심리가 숨어 있는 것 같다.

아이돌 팬덤 문화를 봐도 그렇다.

음악이 너무 좋다, 영화가 너무 멋지다, 이 정도면 될텐데 자발적으로 시녀 노릇을 하려고 든다.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는 정치인도 아이돌처럼 숭배하는 나라구나!

프랑스가 유럽을 좌지우지 하는 강국이 된 것은 2천 만명에 달하는 인구를 보병으로 전환시켰기 때문이란 걸 알게 된 점은 소득이다.

사실 프랑스는 유럽에서 러시아를 제외하고는 가장 큰 영토와 인구수를 자랑하는 농업 대국이었다.

그래서 프랑스 혁명 이후 주변 각국의 공격을 물리치고 나폴레옹이 등장해 유럽을 좌지우지 할 수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러시아는 어떤가?

프랑스보다 훨씬 더 큰 국토와 인구수를 가졌지만 변방에 위치한 탓에 일류 국가가 되지 못한 것인가?

다양한 민족과 광활한 영토를 다스려야 하는 러시아 제국의 특성상 전제 군주가 나올 수 밖에 없다는 분석이 흥미롭다.

마치 중국처럼 말이다.

그러고 보면 이민자들이 모여 민주정을 수립하고 세계 최고의 선두 국가가 된 미국이 놀랍다.


<인상깊은 구절>

93p

국왕 루이 16세가 처형당하자 주변 왕국들은 혁명이 자국에도 영향을 미칠까 우려해 프랑스에 군사 개입을 실행하려 했다. 혁명 후, 영국과 같은 섬나라에서는 다른 나라의 개입이 없었으나 대륙에 있는 프랑스는 사정이 달랐다.

 프랑스는 자국에 개입하려는 프로이센 왕국과 오스트리아 제국의 준대를 물리치기 위해 강력한 육군이 필요했다. 이 육군 병사를 구성한 것이 하층계급인 민중이었다. 전장에서 목숨 걸고 싸웠던 그들에게는 강한 정치적 발언권이 있어서 누구도 그들을 얕볼 수 없었다. 혁명 후, 영국의 크롬웰은 가차 없이 하층계급을 탄압했으나 프랑스에서는 하층계급에 대한 탄압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른 나라의 침략 위기에 노출된 프랑스에서는 하층계급 병사들이야말로 혁명 국가의 첫 번째 수호자였으므로 그들의 권리와 주장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병사들에게 추대되어 단숨에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였다.

 나폴레옹 시대인 19세기 초에는 육군 병사의 수가 전쟁의 승패를 좌우했다. 그리고 19세기 후반부터는 병사의 수보다 장비와 병기의 질이 승패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나폴레옹이 강했던 이유는 인구수에 비례하여 징병 가능한 병력의 수가 다른 나라를 압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프랑스의 강대한 군사력을 뒷받침한 것이 하층계급인 민중이었다.

131p

"개인 사이에는 법률과 계약서와 협정이 신의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권력자 사이에 신의를 지킬 수 있는 것은 힘밖에 없다." -마키아벨리

166p

러시아의 차리즘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러시아는 슬라브계, 아시아계, 노르만계 등이 모인 다민족 국가였다. 근대 이후 러시아의 영토가 확대되면서 민족의 다양성도 늘었다.

 나아가 그들은 부족사회를 형성했다. 사정이 그러하다보니 유럽의 상업국가처럼 법과 사회의 규범에 따른다기보다는 오히려 힘의 강약이 시비를 판가름하는 기준이 되었다. 이렇게 크고 작은 부족 세력이 패권을 다투며 복잡하게 얽힌 상황에서 통치자인 러시아 황제는 절대적인 힘을 갖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반 4세가 잔악무도한 황제이긴 했지만 러시아를 이끌기 위해서는 그런 통솔력 뛰어난 카리스마의 소유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황제가 조금이라도 유약한 모습을 보이면 부족 세력이 커지고 국토가 분단되어 전란에 휘말리게 된다.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강한 황제가 필요했다.

 이러한 사회풍토가 러시아만의 독특한 차리즘을 낳았고, 그것이 오늘날 러시아 정치의 DNA로 계승된 것이다.

168p

표트르 1세는 이러한 주변 지역의 코사크들을 제압하고 이들을 러시아 제국의 군대로 편입시켰다. 그리고 북방 전쟁을 일으켜 그들에게 활약의 장을 마련해주었다. 북방 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은 러시아에 산재하던 코사크 세력이 모여 러시아 제국하에 결속했기 때문이다. 1721년, 승리한 러시아는 발트해로 진출하여 발트해 안에 새로운 수도 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한다.

204p

약 270년간 계속된 에도의 쇼군이 사쓰마, 조슈라는 변경의 다이묘에 굴복하는 치욕을 맛봤다면 막부 세력은 사력을 다해 혁명군과 싸웠을 것이다. 그러면 정권을 쉽게 건네받지 못하고 피로 피를 씻는 끔찍한 내전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컸다.

 막부는 어디까지나 대정봉환으로 천황의 뜻에 순순히 따른 것이다. 사람들에게 천황이 초월적인 존재로 여겨진 덕분에 일본은 내전의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231p

부탄 국왕은 GDP를 중시하는 다른 나라들과 달리 GNH(국민총행복지수)를 기준으로 정신의 풍요로움을 추구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위선과 기만으로 가득찬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부탄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로 GDP가 매우 낮다. 그래서 이를 은폐하기 위해 GNH 라는 기준이 명확하지 않은 지표를 만들어 국민의 환심을 사려고 한 것이다.

 2011년, 지그메 케사르 남기엘 왕추크 국왕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일본의 좌파 세력은 GNH 를 열심히 추켜세웠다.

 하지만 부탄 왕국의 수도 팀푸에는 약물에 의존하는 청년과 알콜 중독자로 넘쳐난다. 가뜩이나 높은 실업률과 범죄율은 낮아지기는커녕 상승일로에 있다. 인구 85만 명이 안 되는 부탄에서 정부가 GNH만 강조하고 어떤 조취도 취하지 않고 있으니 상황은 점점 악화될 수밖에 없다.

279p

고대 아프리카에서는 이집트의 파라오가 왕국을 형성했다. 특히 아프리카 동부는 이집트와 아라비아반도 같은 외부 세력에 둘러싸여 있어 이들에게 대항하기 위해서라도 강대한 왕권이 필요했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왕국이 존립했다. 하지만 외부 세력이 없어 집권적 왕국이 필요 없었던 서,중남부 아프리카에는 여러 부족이 난립했다

 그러다가 8세기 이후, 아프리카 전역에서 이슬람 상인과의 교역이 활발해지자 교환물자로 쓰이던 황금을 관리하기 위해 강력한 왕권이 필요하게 되었다. 8세기 니제르강 유역에 탄생한 가나 왕국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오류>

70p

부활한 서로마 제국은 오토 1세가 죽은 후, 동프랑크 왕국, 서프랑크 왕국, 중프랑크 왕국으로 나뉘는데

-> 오토 1세가 아니라 카를 대제의 아들 루트비히 1세 사후 843년 베르됭 조약에서 셋으로 나뉜다.

105p

부부가 영국 왕에 공동으로 추대된 이유는 영국 왕실과 별다른 연고가 없는 빌럼 3세와 달리 아내 메리가 스튜어트 왕가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 메리가 제임스 2세의 딸이기도 하지만, 빌럼 3세 역시 어머니가 찰스 1세의 딸로, 제임스 2세의 외조카이다.

이 둘은 사촌간의 결합인 셈이다.

115p

그림 9-3

마리 테레즈는 펠리페 4세와, 앙리 4세의 딸 이사벨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카를로스 2세는 어머니가 다르다.

즉 둘은 이복남매이다.

169p

엘리자베타 여제는 예카테리나 2세의 시백모로

-> 엘리자베타의 언니 안나 페트로브나의 아들인 표트르 3세의 배우자가 예카테리나 2세이므로 시백모가 아니라 시이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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