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하 열린책들 세계문학 5
제임스 미치너 지음, 윤희기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상권을 먼저 구입하고 하권은 도서관에서 빌려 읽게 됐는데, 도서관에는 2006년도에 출간된 상하 합본이 있었다.
처음 상권을 봤을 때만 해도 상하로 나눠질만큼 내용이 길구나 생각했는데 막상 합본된 책을 보니 500페이지가 미처 못되는 분량으로 충분히 한 권으로 출간될 수 있는 분량이었다.
꼭 상하로 분책을 했어야 하는지 의문이다.
더군다나 가격은 한 권으로 출간됐을 당시가 13000원이었는데 두 권으로 분책된 후 각각 9800원의 가격이 매겨졌다.
하나의 소설은 가능하면 한 권으로 출간해 주는 게 독자들을 위해서도 더 편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많이 아쉬운 부분이었다. 

하권에서는 비평가 칼 스트라이버트와 독자 제인 갈런드의 입장에서 기술됐다.
스트라이버트 부분은 아무래도 비평가의 입장이다 보니 문학에 대해 논하는 이론적인 부분이 다소 딱딱하고 쉽게 공감하지 못했고, 마지막에 독자인 갈런드 부인 편은 편집자 이본 마멜 편처럼 주로 사건의 전개를 다루는 서사적 구조라 훨씬 쉽게 읽혔다.
작가와 비평가는 남자, 편집자와 독자는 여자라는 어쩐지 능동적인 것과 수동적인 것, 이론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 고상한 것과 생활적인 것 등의 이분법이 자꾸 느껴지는 대목이다.
스트라이버트가 최악의 미국 작가로 지목한 펄 벅, 헤밍웨이, 스타인벡, 싱클레어 루이스는 모두 노벨 문학상 수상자들이다.
펄 벅과 헤밍웨이의 경우는 문학적 성과에 비해 과도하게 찬사를 받았고, 심지어 펄 벅의 경우 노벨 문학상 수상이 부끄러운 경우로 지목된 칼럼도 보긴 했다.
펄 벅의 <대지>는 청소년 세계문학전집에 실려 있어 굉장히 감동하면서 봤던 책인데 줄거리 위주로 너무 쉽게 쓰여져서인가?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 나 <에덴의 동쪽> 은 언젠가 꼭 읽어 봐야지 벼르던 책이고 싱클레어 루이스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칼이 최고의 작가로 선정한 사람 중 두 사람은 모르겠고 나머지 허먼 멜빌과 포크너는 알고 있다.
<백경>과 <음향과 분노> 역시 읽고 싶은 목록에 포함되어 있다.
해럴드 블룸의 책을 읽으면서도 느낀 바지만 역시 기본 상식이 되는 원전을 먼저 읽어야 논쟁과 토론이 가능하다.
일단 읽어봐야 좋다, 나쁘다 평가를 할 게 아닌가.
문학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자극이 됐다. 

스승인 데블런과 제자 칼의 특징은 굉장히 논쟁적이고 사람들의 반발을 사는 민감한 사안들을 피해 가지 않고 일부러 대중에게 노출시켜 격렬한 찬반 논란을 불러 일으킨다.
민감하지만 중요한 주제에 대해 정면으로 승부하는 자신감이 돋보이고 본인들의 의도와는 별개로 이런 공격적인 자세는 이슈거리가 되기에 충분하고 슈퍼스타로 떠오를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칼 역시 미국 최고의 작가, 최악의 작가를 선정해 대중들이 참여한 토론회장에서 공표하므로써 전국적인 스타가 된다.
최고의 작가는 누구나 자랑스럽게 밝힐 수 있지만, 최악의 작가를 공개적으로 언급한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더군다나 우리나라처럼 체면 문화가 지배하는 곳에서는 더욱 말이다.
칼은 같은 지역의 베스트셀러 작가인 루카스 요더의 글쓰기 방식을 못마땅해 한다.
에즈라 파운드를 숭배하고 대중적인 것 대신 고급 독자를 겨냥하는 칼에게, 평이하고 안이한 방식의 글쓰기를 지향하는 요더는 문학적으로 맞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매우 성실한 작가이고, 네 권의 책이 베스트셀러에 올랐으며 무엇보다 칼의 책을 출판해 주는 키네틱 출판사의 가장 중요한 작가이다.
더군다가 칼이 재직하고 있는 메클랜버그 대학에 거액을 기부했다.
인간관계가 이중 삼중으로 얽혀 있는 상황에서 자신이 부당한 명성을 얻고 있다고 생각하는 작가를 공격한다는 것은 비평가로써 참으로 어려운 일일 것이다.
사실 나는 왜 요더에 대한 칼의 공격적인 비판이 잘못됐다는 식으로 소설의 분위기가 흘러 가는지 잘 모르겠다.
진정한 비평가라면 자신의 기준에 합당치 않다면 소신껏 비판할 수 있는 문제 아닐까?
내가 너무 순진하게 문학동네를 보고 있는 건가?
어쩐지 미국은 그런 온정주의에서 벗어나 있을 거라 기대했는데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한 모양이다. 

제일 충격적인 반전은 역시 칼의 동성애였다.
확실히 우리나라는 아직까지는 동성애가 일반적이지 않아 주인공을 돕는 동성 친구는 단순히 우정일 뿐이지 둘 사이가 발전될 거라 의심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미국 소설을 보면, 주인공을 물심양면으로 돕는 동성 친구의 존재는 꼭 이런 식으로 연인 관계를 형성한다.
데블런 교수가 어린 제자에게 장학금을 수여하고 외국을 여행할 수 있게금 돈을 마련해 줬을 때만 해도 설마했는데, 직접 그리스로 날아가 결국 그들은 한 침대에 눕고 만다.
동성애가 우리보다는 훨씬 일반화된 느낌이다.
맨 마지막 장에서 이본 마멜이 칼에게 애정을 느끼고 있는데 과연 그녀는 칼의 성향을 알고 있는지 궁금하다.
양성애자도 있다고 하니 두 사람이 잘 됐으면 좋겠다.
데블런과 칼의 문학에 대한 고급 대화는 성적 친밀감과는 별도로 무척 이상적으로 보였다.
특히 데블런이 그리스 연극들을 보여 주면서 그리스 문학의 정수를 맛보게 하자 칼이 아트레우스 가계의 비극을 하나의 연표로 만들어 학생들 지도에 활용하는 예는 굉장히 신선했다.
역시 그리스 신화는 서양 문학의 영원한 원천인 것 같다.
데블런 교수가 죽고 칼의 촉망받는 제자 티모시 툴이 등장했을 때 혹시 제자와도? 이런 추측을 했는데 특별한 애정 관계는 형성되지 않았다.
오히려 티모시가 살해당하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났다.
이 살인 사건이야말로 소설의 가장 큰 반전이고 클라이막스 같다.
루카스 요더의 입을 빌려, 애플버터가 돈 때문에 이웃을 살해하게 방치한 무심한 독일인 가정을 비판하는 장면이 나왔는데 너무 짧게 묘사되서 그런지 크게 인상적이지는 못했다.
어쨌든 요더는 그렌즐러 8부작을 끝으로 절필을 선언했지만, 이웃 청년 애플버터의 무지막지한 살인을 계기로 칼 스트라이버트와 티모시 툴이 추구했던 혁신적인 글쓰기에 돌입한다.
역시 그는 성실한 작가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