굶기의 예술
폴 오스터 지음, 최승자 옮김 / 문학동네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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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굶기의 예술"을 고른 까닭은 "달의 궁전"에서 폴 오스터가 묘사한 배고픔에 대한 미학에 흥미를 느꼈기 때문이다

폴 오스터라면 내면의 아이덴티티를 찾기 위해 애쓰는 작가인데, 그가 좋아하는 대가들 역시 그런 성향의 사람들이다

역자의 지적대로 폴 오스터를 감동시킨 작가들은 대부분 오스터처럼 유태인으로,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 이유를 고민하는 사람들이다

 

책 제목인 "굶기의 예술"은 노벨상 수상자인 노르웨이 작가 크누트 함순의 소설 "굶기"에서 따 온 것이다

나는 오스터가 이 책을 읽고 "달의 궁전"에서 마르코가 보여 준 의도된 가난을 서술했으리라 확신한다

잠깐씩 보여 주는 함순의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달의 궁전"에서 느꼈던 것과 똑같은 느낌을 받았다

"달의 궁전"에서 인상깊었던 것은 의도된 가난을 택한 뒤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자신을 시험하는 주인공의 독특한 심리 구조였는데, 함순은 그 심리를 아주 자세하게 묘사한다

의도된 가난이란 종교적 의미의 단식이 아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한 고행이 아니라, 그저 내적 충동에 맞서기 위해 선택한 자기 학대일 뿐이다

극한 상황으로 자신을 몰고 감으로써, 보다 명료한 정신으로 예술을 추구하길 원하나, 배고프면 글도 쓸 수 없다는 현실을 깨달을 뿐이다

육체적 만족이 없으면 결국 정신적 성취도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함순 소설의 주인공은 결국 죽든지, 음식을 구하기 위해 일을 하든지 둘 중 하나의 아주 단순한 선택의 기로에 선다

죽으면 예술이고 뭐고 없기 때문에 주인공은 너무도 당연하게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도시를 떠난다

 

어쩌면 예술가의 이러한 치열한 고뇌나 내적 투쟁은 지나치게 미화되고 과장됐을지도 모른다

글을 쓰는 것이 예술이라는 범주에 속해 있을 뿐, 작가들에게는 먹고 살기 위한 직업으로서의 기능이 더 클 수도 있다

그러므로 모든 작가에게 예술성의 추구를 위해 자신을 파괴하라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마치 평범한 의사에게 슈바이처와 같은 행동을 요구하는 것처럼)

위대함은 글쓰기가 먹고 살기 위한 수단을 넘어서 자신의 생과 동일시 될 때 완성되는 건지도 모른다

 

오스터가 대담한 이집트 출신의 유태 시인 에드몽 자베스 역시 그런 사람이다

이스라엘 건국 이후 2차 대전 중에도(즉 독일군이 이집트를 점령했을 때도) 평화롭게 이집트에서 살던 자베스는, 유태교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유태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이집트에서 쫒겨나 프랑스로 망명한다

프랑스로 간 이유는 그가 지금껏 프랑스어로 시를 발표했기 때문이다

자베스는 자신에게 있어 글쓰기란 마치 자신이 유태인이라 낙인찍히는 것과 동일하다고 말한다

아무리 벗어 던지려 해도 벗어 버릴 수 없는 유태인이라는 표딱지처럼, 글쓰기 역시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고 고백한다

유명한 "사자의 서"를 탈고한 후 그 때까지 잠잠하던 천식이 펜을 놓음과 동시에 찾아와 생명을 위협하는 경험을 한 뒤, 그는 글을 쓰지 않으면 죽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는다

 

뒤쪽에 나온 오스터의 인터뷰를 보면, 오스터 역시 글쓰기가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증명해 주는 사람 중 하나라는 걸 알 수 있다

(사실 그가 문학적으로 어떤 평가를 받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므로 이것은 지극히 주관적인 느낌이다)

나는 오스터가 내면의 세계에 대해 많은 얘기를 하고 싶어 하는 작가라 생각했는데 (글을 길에 쓰길 좋아한다는 의미) 초창기에는 시를 썼다고 해서, 좀 놀랬다

시라면 상징과 은유, 함축 등의 기법을 이용해 생각을 압축해서 하고 싶은 말을 훨씬 적게 해야 하는데, 오스터의 이미지와 참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시인으로서는 거의 평가받지 못했다

오스터가 성공한 시점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유산을 물려 받으면서이다

책이 안 팔려 극단적인 상황까지 몰린 오스터는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가 죽으면서 약간의 유산을 남겼고, 그 덕에 몇 년간 글쓰는 데만 전력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죽음"이 곧 "성공"이라는 잔인한 등식을 가져다 주었다고 고백한다

 

"달의 궁전"에서도 그렇지만 오스터는 우연이라는 기법을 차용하길 좋아한다

그것은 오스터의 표현대로 사건의 정황을 짜맞추려는 유치한 인과관계 성립을 위해서가 아니라,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불안하고 예측할 수 없는 인생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사실 우리 삶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이 명확한 인과 관계를 갖는다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다

오스터의 소설처럼 가난한 예술가가 거대한 유산을 상속받는 일은 아주 드문 일이긴 하지만, 지금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까닭도 우연히 한 통의 전화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삶의 대부분의 사건들은 우연한 일 투성이다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일이 대체 몇이나 되는지...

 

오스터는 소설가로 성공하기 전 평론가 일을 했는데, 여기 실린 글들은 그 당시 잡지 등에 기고한 것들이다

그가 분석한 작가들은 카프카를 제외하고는 다 모르는 인물들이라 완벽한 몰입은 어려웠다

그렇지만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증명해 내려는 사람들이라 모두 흥미롭다

특히 첫 장에 소개된 노르웨이 작가 함순의 "굶기"라는 소설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는 내가 "달의 궁전"을 읽고 작가의 의도에 대해, 혹은 등장인물의 묘사되지 않은 심리 구조에 대해 온갖 상상을 다했듯, 삶에 깊은 각인을 남긴 작가들에 대해 치열한 분석을 시도한다

(문학적인 분석이 아니라, 지극히 주관적으로)

카프카의 말처럼 문학이 얼어 있는 강에 도끼를 던지는 정도의 충격을 주지 않는다면 우리가 책을 읽을 필요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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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궁전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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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달의 궁전을 다 읽었다

한 소설을 며칠에 나누어 읽기는 처음이다

400페이지가 넘는 긴 소설을 하룻밤에 다 읽으려고 들면 내용을 음미하지 못한 채 줄거리에 치우치게 될까 봐 하루에 읽을 분량을 정해 놓고 읽었는데, 결과적으로 아주 만족스럽다

대단히 꼼꼼하고 진지하게 통독한 셈이다

 

오늘 등장한 인물은 에핑의 아들 솔로몬 바버다

마르코는 에핑의 유언장을 전해 주고, 그와 뉴욕에서 만나게 된다

그런데 솔로몬이라는 남자는 상상하기조차 힘든 특이한 외모를 가졌는데, 160kg의 비만에다가 대머리라는 점이다

책의 주인공이 이 정도의 고도 비만으로 묘사된 예는 일찌기 없었는데, 참 놀랍다

160kg이라면 상상하기 힘든 덩치다

폴 오스터는 이렇게 거대한 육체를 가진 인간이 어떻게 세상에 적응해 가는지를 자세히 서술한다

(그의 아버지인 에핑과 아들인 마르코가 모두 삐쩍 마른 인물인 걸 보면, 솔로몬은 아마도 돌연변이인 모양이다)

 

솔로몬이 21세기에 살았다면 많은 재산으로 위 절제술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정도의 비만은 말 그대로 병이기 때문에 식습관 조절이나 운동 따위로는 절대 해결될 수 없다

(그는 결국 등뼈가 부러져 입원한 후 음식을 튜브로 공급하게 되자 지나치게 살이 많이 빠져 면역력 약화로 죽고 만다)

솔로몬은 자신의 육체를 천형으로 받아들이고 대신 책에서 만족감을 얻으려고 노력한다

그는 일부러 공원 등을 산책하며 사람들이 자신을 비웃는 것에 아무렇지도 않게 대응하는 법을 연습한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는 것을 포기한 채 자신만의 세계에 침착하는 법도 배운다

가장 좋은 방법이 독서라는 사실을 깨달은 솔로몬은 생의 의지를 공부에 쏟아 부어 고등학교 졸업 때는 대표로 연설도 하게 된다

 

대학에 진학한 그는 의미있는 논문들을 많이 발표하여 졸업 후 여러 유명 대학의 러브콜을 받는다

오하이오 주립 대학에 첫 직장을 잡은 그는, 그 때까지만 해도 성욕을 버린 건 아니었다

학창 시절 연애란 꿈도 못 꿔 본 솔로몬은 대학 교수가 된 후 자신감을 얻어 프로포즈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상대가 막 대학에 입학한 1학년 생이라는 것이다

몇 번의 구애를 거절당하다 우연히 그녀의 기숙사에서 정사를 벌이게 되는데, 불행히도 기숙사 잡역부에게 현장을 발각당한다

그는 대학에서 쫒겨나고 여학생, 에밀리 역시 학교를 중퇴한 뒤 멀리 떠난다

솔로몬은 그녀를 붙잡기 위해 애를 쓰지만, 에밀리는 당신이 내 인생을 망쳤다며 그의 가슴에 비수를 꽂은 채 사라진다

그 후 솔로몬은 그녀에게 대한 죄책감으로 괴로워 하고, 대학에서 쫒겨 난 후 자신감을 잃어 다시는 연애 따위는 꿈꾸지 않는다

 

그 가엾은 여학생이 바로 마르코의 어머니다

에밀리는 불행히도 단 한 번의 정사로 아이를 가졌고, 미혼모로써 불행한 삶을 살다가 마르코가 7살 되던 해 버스에 치여 죽고 만다

솔로몬 역시 그 경력이 오점이 되어, 또 그 거대한 외모 때문에 다시는 유명 대학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름없는 시골 대학을 전전한다

그는 오히려 시골을 만족스러워 한다

시골 대학생들은 경험의 폭이 적어 솔로몬의 엄청난 장서들만 봐도 충분히 경의를 표했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익숙해질만 하면 대학을 바꾸는 식으로, 사람들과의 관계를 철저히 끊었다

 

처음에 에핑의 아들 솔로몬이 마르코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고, 지나친 우연의 남발 같아 거부감이 들었다

(사실 그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진 키티에 대한 것도 별다른 서술 없이 그저 갑자기 사랑에 빠졌다는 식이라 좀 못마땅했다)

폴 오스터는 마르코의 입을 통해 "세상이 갑자기 우연에 뒤덮힌 것 같군요"라고 말하면서 독자의 이해를 구한다

그렇지만 솔로몬의 생애를 묘사하는 부분에서는 완전히 책에 빠져 들었다

에핑과 솔로몬과 마르코는 다같이 내면의 세계에 침착한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어쩌면 그것은 유전적으로 전달되는 그들의 기질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불행이 닥쳤을 때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반응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행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애쓰는데, 그들은 그 불행을 고행으로 생각하고 정신적 가치를 높이는 방편으로 여긴다

마르코는 가난 때문에, 에핑은 사막에서의 조난과 불구 때문에, 그리고 솔로몬은 비만 때문에 (여기서 비만이란 단순히 살이 쪘다는 얘기가 아니라 생명이 위험할 정도의 고도 비만이다) 운명으로부터 결정적인 타격을 입는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운명을 받아 들이고, 책에서 해답을 찾는다

 

책은 이 삼대를 엮는 중요한 매개체가 된다

마르코는 삼촌이 남긴 유일한 유산인 책을 처분하기 위해 미친듯이 그것을을 읽은 뒤 헌책방에 팔아서 생계를 유지했고, 에핑은 눈이 멀고 하반신 마비가 된 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비서가 읽어주는 책에 몰두했고, 솔로몬은 너무나 비대했기 때문에 움직이기도 어렵고 사람들로부터 거부당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도서관에 책을 읽는 걸로 시간을 보냈다

그들은 모두 불행한 상황을 독서로써 극복했다

또 책을 읽는 것 외에는 별다른 선택이 없었기 때문에 기꺼이 책에 몰두하기도 했다

 

마르코의 불행은 키티와의 관계가 끝장난데서 비롯된다

그는 여러 행운들에 의해 아사 직전에 구출되어 에핑과 솔로몬으로부터 많은 유산을 물려 받았으나, 키티가 그의 곁을 떠나므로써 모든 것을 잃고 만다

키티는 처음부터 맹목적으로 마르코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녀는 어떤 일이 닥쳐도 절대 그의 곁을 떠날 것 같지 않았고, 그래서 많은 변화가 생겼지만 나는 마르코의 행복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불행은 늘 어처구니 없는 데서 시작한다

피임에 실패한 키티는 임신을 하게 되고 마르코는 강렬하게 아이를 원하지만, 무용수인 키티는 24세에 엄마가 되어 일을 포기할 수는 없다고 완강하게 버틴다

마르코는 사생아로 태어나 어머니가 일찍 죽고 외삼촌 손에서 외롭게 자랐다

그가 아이를 낳고 가족을 이루고 싶어하는 건 당연한 욕구일 것이다

(나 자신 보다도 더 큰 집단에 속하고 싶었다는 그 문장에서 나는 마르코의 뼈저린 외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 결혼한 사이도 아니고, 전도 유망한 줄리어드 무용과 학생에게 임신이란 버티기 힘든 무거운 짐에 불과했을 것이다

특히 소설의 앞부분에 키티가 얼마나 무용을 잘 하고, 또 사랑하는지 잘 나타난다

(어쩌면 이것이 그들의 결별에 대한 복선이었는지도 모른다)

 

키티 역시 부모가 모두 죽은 후 미국으로 이민 와 유색인종으로써, 또 고아로써 혼자 세상을 헤쳐나간 여자다

책에서는 그녀의 내면 세계에 대한 묘사가 거의 없지만, 여러 상황으로 유추해 볼 때 그녀가 무용에 자신의 생을 걸었음은 분명하다

결코 평탄하지 못한 상황에서도 (더구나 그녀의 어머니는 첩이라 어린 시절 다른 큰 집 가족들에게 많은 구박을 받았을 것이다) 그녀는 늘 건전하고 행복한 웃음을 잃지 않으며 세상으로부터 고립되려는 마르코를 헌신적으로 돌보는데, 이러한 긍정적인 성격을 유지하게끔 만든 원동력은 무용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무용에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했다면, 그녀 역시 불행한 환경에 함몰되어 인생을 막 살거나 정상적으로 산다 할지라도 우울하고 어두운 성격을 갖게 되기 십상이다

그런 키티에게 계획되지 않은 임신이란 더 이상 무용을 할 수 없다는 사형 선고와 다름없었을 것이다

키티는 완강하게 출산을 거부하고 마르코와 격렬하게 다툰 후 결국 유산한 다음 이별한다

(이런 갈등 구조는 남녀 사이에 흔한 일이다 "고백"이라는 드라마에서도 연극배우인 정선경과 유부남인 유인촌이 세상의 비난을 무릅쓰고 결혼을 감행하지만, 원치 않는 임신으로 둘 사이가 파탄났다 남성에게 임신이 격정적인 흥분을 가져온다면, 여자에게 임신이란 견디기 힘든 정신적 고통이 되는 모양이다)

 

물론 키티 곁을 떠난 사람은 마르코다

남에 대해 배려하지 않고, 타인의 보살핌을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던 마르코는 그 갈등을 견디지 못하고 키티 곁을 떠난다

키티는 그가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또 마르코 역시 그녀를 너무나 그리워 하지만 내면적 고통이 이별을 견디는 쪽으로 가도록 한다

(키티에게 고통을 주었기 때문에 나도 속죄하는 기분으로 이별의 고통을 견뎌 내야 한다는 역설적인 이유로 말이다)

나중에 솔로몬이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고 그가 죽은 후 마르코는 키티에게 전화해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매달린다

그러나 너무나 뜻밖으로 키티는 그의 혼란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도 다시 만나는 것을 거부한다

"내가 이 상황을 견디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냉담해지는 것이었다"는 그녀의 대답은, 여전히 마르코에 대한 사랑이 남아 있지만 옛날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키티의 그 대답을 충분히 이해한다

그녀는 마르코를 아무 조건 없이 열렬하게 사랑했으나,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유산) 그가 떠나갔다

가족도 없는 그녀에게 이별이 얼마나 큰 상처였는지 알 만 하다

그녀가 버티는 유일한 방법은 세상에, 혹은 자신의 사랑에 대해 철저하게 냉담해지는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감정의 증폭을 이기지 못해 미쳐 버렸을테니까

 

이런 키티의 고통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마르코는 엉뚱하게 딴 남자가 생겼냐고 묻는다

대답할 필요가 없지만 그렇지 않다고 말하며 이제 다시는 옛날로 돌아 갈 수 없다고, 키티는 그에게 작별을 고한다

키티가 떠난 후 마르코는 삶의 의지를 잃고서 방황한다

에핑의 동굴을 찾으러 떠났지만 (말하자면 그것을 생의 목표로 삼고) 이미 그곳은 수몰 지역으로 변했고, 설상가상으로 솔로몬이 남긴 유산 만 달러가 든 자동차도 도난당한다

그는 수중에 든 여행자 수표를 아껴 가며, 그 옛날 가난으로 굶어 죽기 직전에 센트럴 파크를 떠돌았던 것처럼, 이제는 태평양을 향해 국토 횡단을 시도한다

특별한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자동차를 도난당해서 걸을 수 밖에 없었다

태평양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산마루에 다다른 그는,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본다

그 옛날 가난으로 몸부림 치던 때 아파트 밖으로 보이던 레스토랑 "달의 궁전" 간판 대신, 진짜로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본다

그리고 바로 여기가 삶의 새로운 시작점임을 깨닫는다

그의 수중에는 4백 달러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지만, 에핑이 사막에서 버려졌을 때처럼 그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각오를 세운다

아마도 그는 산에서 내려와 다시 활기차게 삶을 시작할 것이다

여전히 자신이 운이 좋다는 사실을 굳게 믿으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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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노래 (1.2권 합본) - 우리 소설로의 초대 4 (양장본)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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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 책이 노무현 대통령과 엮어져서 안 받아도 될 오해를 받는지 모르겠다

리뷰를 읽어 보면 꼭 "노무현"이라는 세 글자가 따라 다닌다

대통령의 선전과는 상관없이 2001년 동인 문학상 수상작이기 때문에 책 만으로도 충분한 가치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에게는 큰 감동이 없었지만 말이다

 

아무리 좋은 책이라 해도 나랑 스타일이 안 맞는 책들이 있다

줄거리보다는 작가가 서술하는 태도에서 반감, 혹은 호감을 느끼게 되는데 이 책은 나와 궁합이 좀 안 맞는다

내가 좋아하는 문체는 은희경이나 이만교 같은, 좀 삐딱한 시선의 시니컬한 문장인데 (배수아 스타일은 절대 아니다 겉멋 부리는 시니컬함 같아 안 좋아한다) 이 작가의 소설은 내 취향이 아니다

그렇지만 죽음을 옆에 두고 싸우는 무장의 고뇌와 두려움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이순신이라고 하면 무과 시험 당시 낙마한 후 버드나무로 다리를 싸매고 달렸다는 에피소드나, 그 보다 더 유명한 "내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는 마지막 유언으로 대표되는 조선 최고의 영웅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개인적인 숭배 때문에 갑자기 최고의 성웅으로 등장했다는 말도 있지만, 어쨌든 임진왜란 당시 혁혁한 공훈을 세우고 장렬하게 전사한 훌륭한 위인임이 분명하다

위대한 인물들이 흔히 그렇듯, 이순신 역시 인간적인 면모 보다는 범인들과는 다른 출중한 재능과 성인 같은 삶의 궤적으로 점철되기 일쑤라 그가 걸어 온 진짜 삶의 모습은 찾기 힘들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의 시도는 참으로 신선하다 할 수 있겠다

비록 소설의 형식을 띄고 있으나, 과장없는 위인전이라 해도 될 것이다

위인전 속의 인물들을 평범한 인간으로 끌어내려 숨은 고뇌와 인간적이 위악성들을 그려내는 시도가 많아졌음 좋겠다

(개인적으로 광해군의 인간적인 고뇌를 그린 책이 나오길 바란다 10년 동안 왕의 자리에 있은 후 20여년을 죄인으로 유배지에서 질긴 목숨을 이어 간 그의 속내를 유려한 필체로 그려 줄 작가가 있다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종종 군인들을 생각했다

명령에 따라 무조건 진격해야 하는 사병들 말고, 그들을 지휘해야 하는 장교들의 고뇌를 생각했다

전쟁이 발발하면 인간성을 상실하게 된다

무기를 들고 적진으로 돌진하는 군인들은 늘 죽음을 옆에 두고 살 것이다

그 공포와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더욱 잔인해지는 건지도 모른다

특히 자기 휘하의 군사들과 주변 백성들의 생명을 책임져야 하는 지휘관의 고뇌는, 자신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더불어 견딜 수 없는 무거움으로 마음을 짓누를 것이다

"칼의 노래"에는 그러한 인간 이순신의 고뇌와 두려움이 잘 녹아 있다

 

전쟁 앞에서 인간이란 얼마나 형편없고 하찮은 존재인지!!

한 끼 먹을 식량을 위해 한나절 내내 고민해야 하고, 그것이 해결되지 못하면 허망한 죽음을 맞게 된다

전쟁 중이라 그런지, 아니면 원래 중세 사회가 그런 건지 모르겠는데 걸핏하면 죽음으로써 잘못의 댓가를 치룬다

군량미 빼돌리면 사형, 보고서 늦게 보내도 사형, 소집에 응하지 않아도 사형

책에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 바로 "목을 베었다"이다

언젠가 한글로 번역한 난중일기를 읽은 적이 있는데, 거기서도 여러 번 접한 문장이다

그래서 성웅 이순신도 부하들을 많이 죽였구나, 좀 충격을 먹기도 했었다

아마 김훈의 책에 나온 예화들은 대부분 난중일기에서 인용한 것이리라

 

"칼의 노래"에서 주목한 대립 관계는 이순신과 선조다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정작 원균과의 갈등 구조는 보이지 않는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책의 서술 시점이 이순신이 백의 종군 할 때부터라 이미 원균은 전사한 것으로 나온다

(난중일기에는 무과 선배인 원균이 삼도수군 통제사가 된 이순신의 명령을 거부하여 선조에게 장계까지 올릴 정도로 갈등 구조가 심각했음이 자주 등장한다고 한다 김훈이 말미에 그 부분을 짧게 기록한 것을 두고, 이순신과 원균이 서로 불화했다는 식으로 역사를 왜곡한다는 비난을 받은 모양이다)

선조는 임진왜란과 광해군을 기록한 여러 책에서 무능하고 의심많고 형편없는 임금으로 등장하는데, 여기서도 예외는 아니다

전쟁에서 패해 의주 땅까지 쫒겨간 무력한 왕이면서도, 혁혁한 성과를 거둔 의병장들과 무관들을 의심해 죽음으로 몰아 넣는 어처구니 없는 왕으로 묘사된다

(그의 시호에 "조"자가 붙은 건 참 아이러니컬 할 정도다)

 

선조가 느꼈을 분노와 비애를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오랑캐들에게 아홉 번 절을 해야 한 손자 인조나 망국의 비애를 짊어 진 고종 등보다 더 불행했다고는 할 수 없으나, 지독히도 운이 없는 왕임은 틀림없다

왜 하필 자기 치세에 그런 난리가 일어나야 한단 말인가!!

그것도 하찮기 그지없는 왜놈들에게 쫒겨 그 멀고 먼 의주 땅까지 피난을 떠났어야 하니 참으로 불행한 왕이다

그가 왕으로써 느꼈을 무력함과 분노, 혹은 모멸감이 조금은 공감이 간다

어쩌면 그의 바램대로 전장터가 되버린 조선을 버리고 강을 건너 요동으로 가 버리는 게 역사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왜군의 진격 소식에 놀라 왕위를 세자 광해군에게 넘기고 명으로 피신하겠다는 발언을 했다는 것 자체가, 그가 얼마나 무력한 왕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모르긴 해도 태종이나 세종 혹은 영조나 정조처럼 국가를 확실하게 장악한 왕이라면 절대 그런 말은 입 밖에 꺼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선조는 선왕들의 무덤을 파헤친 왜장 고시니의 목을 간절히 원한다

고시니의 목을 쳐서 선왕의 위패에 제사를 지내야 무너진 자존심을 회복한다고 믿은 모양이다

아마도 권위를 세워 줄 상징물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 고시니를 잡을 기회를 놓쳤다고 생각했으니, 이순신이 압송당한 건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작가의 분석으로는 실제 이순신이 몸을 상할 만큼 고문당하지는 않은 것으로 본다

하긴 진짜 역적으로 여겼다면 죄가 밝혀지기도 전에 문초 과정에서 이미 죽었을 것이다

책에는 이순신이 정치적으로 고립됐다고 나오는데, 그래도 풀려난 후 백의종군이라도 하게 된 걸 보면, 고문받다 죽은 김덕령 보다는 더 나은 처지였던 것 같다

 

(어렸을 때 "조선왕조 5백년"의 임진왜란 편에서 이순신이 고문 당하는 걸 본 기억이 난다

그 때 배우가 김무생이었는데, 고문 장면은 압슬형이었다

지금도 꼿꼿한 이미지인데, 훨씬 젊었을 그 당시의 김무생 이미지는 청렴결백 하고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이순신에 딱 어울렸다

무거운 돌이 무릎뼈를 으스러뜨려도 신음 소리를 거의 내지 않으며 지긋이 눈을 감는 모습은 범인들과는 뭔가 다른 성웅의 모습이었다

실제 이순신이 받은 고문의 내용은 전해지지 않는다고 한다)

 

"칼의 노래"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그것을 담담하게 이겨 내려는 인간 이순신의 고뇌가 전면을 흐른다

꼭 이순신이라는 위대한 영웅에게만 국한된 감정은 아닐 것이다

전쟁에 나가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모든 군인들이 겪어야 할 고통들일 것이다

이순신이 선조의 시기를 두려워 하여 일부러 마지막 전투에서 자결했다는 말이 있는데, 책에서는 그런 식의 상투적인 내용은 자세히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늘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는 장수가 결국은 총알을 맞고 생명이 아스라져 갈 때 그 사라져 가는 의식을 묘사하고 있을 뿐이다

점점 의식이 혼미해져 갈 때, 전투는 계속 중이고 전 생을 걸고 쫒은 적들은 여전히 내 앞을 어지럽히고 있다

내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고 할 수 밖에 없는 그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기도 하다

 

누구나 자신의 생을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다

다만 전쟁 때는 좀 더 극적으로 보일 뿐이다

여진족과 싸울 때의 진중일기나 임진왜란 중의 난중일기를 꼼꼼하게 남긴 걸 보면 이순신은 전쟁 중이 아니라 할지라도 자기 삶을 치열하고 꼼꼼하게 산 인물이라 생각된다

문인도 아닌 그가 매일 매일의 기록을 이토록 성실하게 했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성격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어쩌면 이 소설은 다만 이순신이라는 역사적 인물을 빌렸을 뿐, 죽음을 불사하고 순간순간을 치열하게 살아 간 인간들의 얘기를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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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된 농담
박완서 지음 / 실천문학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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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을 읽으면서 도대체 무슨 내용일까, 짐작이 안 갔다

"아주 오래된 농담"이라,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걸까??

마치 신경숙의 소설 "풍금이 있던 자리"를 처음 봤을 때처럼 제목과 내용이 전혀 매치되지 않았다

설마 의학적인 얘기일 줄은 몰랐다

아들이 의사였기 때문에 의사들의 삶에 더 애착을 가진 걸까, 아니면 처음부터 관심을 가지던 분야였을까?

어쨌든 비교적 소상하게 의사들의 삶을 인터뷰한 게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겪어 보지 않은 직업의 애환에 대해 쓴 글은 왠지 모를 생뚱맞음이 있다

잘 조사되고 연구된 정확한 사실들의 나열은 그저 소설 속의 문장으로만 존재할 뿐, 마음을 흔드는 애잔함 따위가 없다

그렇다고 소설을 폄훼하는 건 절대 아니고...

 

소설 자체의 내용만으로는 큰 공감이 안 갔다

좋아하는 소설가이기 때문에 열심히 읽긴 했는데, 책마다 연분이 맞는 게 있고 아닌 게 있는 모양이다

남들은 다 감동하고 좋다고 칭찬해도 나한테는 무심한 것들도 있고, 통속 소설이라 할지라도 가슴을 뒤흔드는 책도 있다

그래서 "책은 나름의 운명을 지닌다" 라고 말했던가...

 

재벌 2세들이 등장하는 드라마나 소설은 왠지 모르게 정이 안 가는데, 상대적인 박탈감이라기 보다는 내 주변에 워낙 없는 일이라 잘 공감을 못하는 것 같다

경험에 비추어 소설을 해석하는 내 독서 습관 때문에,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감동도 잘 안 온다

그래서 지지리도 궁상맞은 소시민들의 애환을 그린 소설들을 좋아한다

노희경 드라마나 박완서의 다른 소설들을 좋아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힙겹게 살아가는 소시민들의 위악적인 삶, 아마 내가 가장 관심갖는 주제일 거다

(가난하다고 해서 착하지 않고, 오히려 기본적인 도덕성이 더 약할 수도 있다는, 그럼에도 크게 나쁜 짓 할 베짱도 없는 그런 소시민적 위악성...)

 

아버지 없이 태어나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다 조건이 나쁘다는 이유로 남자에게 채이고, 고시 공부에도 실패했으나 재벌 2세를 만나 시집가는 영묘의 캐릭터가 현실적이 않아 쉽게 공감이 안 갔다

미국 가서 큰 부자가 되서 모교에 100만 달러를 척 허니 기증하고 금의환향한 형 영준 역시 허구적으로 느껴지고...

특히 부자집 남자에게 시집 가 애기도 안 낳고 큰 돈 받아 이혼한 후 자유로운 삶을 사는 현금의 캐릭터가 제일 맘에 안 들었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왜 다들 일이 술술 풀리는 걸까?

인생이 그렇게 굴곡없고 만만한 거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나마 제일 현실적이고 그럴듯한 캐릭터는 주인공 영빈이었다

의사였던 죽은 아들 때문일까, 작가는 그래도 의사인 주인공 영빈을 제일 성실하고 입체적인 캐릭터로 그린다

"남들은 의사니까 다 잘 살 거라고 기대하지만, 정작 실속은 하나도 없는 허울 뿐인 직업"이라는 문장을 읽으면서, 꽤 열심히 의사들을 인터뷰 했구나 싶었다

그래도 소설 속의 영빈은 모교의 내과 교수로 TV에 명의라고 소개까지 되는 성공한 인물로 나온다

이런 경력을 가진 사람도 자조감을 느낀다면, 이제 의사라는 직업의 기대치도 상당히 낮춰야만 할 것 같다

 

이 소설의 핵심 기둥은 영묘의 남편 송경호의 죽음과, 맨 마지막에 한 페이지 정도 등장하는 치킨 박의 죽음이라 할 수 있다

송경호는 Y그룹의 장남으로 영묘와 결혼 3년만에 두 아들을 둔다

이 집안은 대대로 결핵을 앓는 병력이 있어, 처음 송경호가 피를 토했을 때 무조건 결핵이라 단정짓고 그 보다 더한 병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송경호의 병은 폐암이었다

그것도 수술이 불가능한 종류의 암이었다

영묘의 오빠인 영빈은 호흡기 내과에서 알아 주는 명의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매제를 떠맡지만 가족들은 항암 치료를 극구 거부하고 심지어 환자 본인에게도 절대 비밀로 한다

항암 치료를 하면 기가 빠져 손도 못 써 보고 죽는다고 생각한 송회장은 전국 각지의 대체 요법과 한약 등을 수집해 집에서 자가 치료를 시도한다

할머니는 집안 대대로 길흉화복을 점쳐온 최도사에게 백일 기도를 드리러 다닌다

 

환자들이 대체요법에 의존하고 싶은 심리를 모르는 건 아니다

병원에서는 희망이 없다고 말하고, 항암요법을 해도 나을지는 미지수라고 발뺌을 한다

반면 대체요법이나 민간 치료를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낫는다고 확신을 준다

죽음이 임박해 온 사람이라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매달릴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들이 죽어가는 생명을 살릴 수 있을 것인가?

온갖 첨단 기구와 의학으로도 어쩌지 못한 병을, 단지 그들의 직관에 의존해서 고친다는 게 상식적으로 가능할까?

그들 역시 인간일 뿐인데, 사람을 살려내는 초능력이라도 있단 말인가?

혹 그들이 환자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게 있다면, 살 수 있다는 강력한 믿음을 주는 정도가 아닐까?

그렇다 하더라도 믿음만으로 이길 수 있는 병이 과연 얼마나 될까...

 

소설에서도 나오지만 항암치료를 한다고 해도 겨우 1년 남짓한 수명 밖에 못 산다

병원에서 포기한 환자들은 어디로 가야 할까?

이런 대책없는 환자들을 수용하는 곳이 바로 대체요법이나 민간요법일 것이다

말기암 환자를 대상으로 호스피스 병동을 운영하기도 하지만 불치병에 걸린 사람들에게 병원은 참 무력할 뿐이다

의학은 솔직하게 고칠 수 없다고 말해 버리기 때문에 환자들이 외면하고, 민간요법 등은 고칠 수 있다고 거짓말을 하기 때문에 환자들은 어쩔 수 없이 선택을 한다

소설에도 뜸으로 암환자를 고쳐 낸다는 의사가 나오는데, 송회장은 속는 척 하면서 수백억을 약속하지만, 고친 후에 돈을 지불하겠다고 약은 수를 써 결국 줄행랑 치고 만다

 

송경호는 집안 식구들의 함구 탓에 죽음에 대한 어떤 대비도 못하고, 치료법을 선택하지도 못한 채 이상한 도사의 주술 치료만 받은 채 어느 날 갑자기 운명한다

어린 아들들이나 미망인을 위해 어떤 유언도 남기지 못해, 삼모자는 시댁 식구들의 처분만 바라게 된다

이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망자에게도 죽음을 예비할 시간을 줘야 하지 않을까?

적어도 자신이 어떤 치료를 원하고, 어떤 식으로 삶을 마무리 할 것인가에 대한 선택권은 줘야 한다

의사 영빈은 환자 스스로 선택하게 해야 한다는 신념이 강했는데, 매제의 죽음을 보면서 더욱 자신의 믿음을 확신한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그 믿음이 깨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치킨집으로 성공해서 별명도 치킨 박인 중년 남자가 폐암 선고를 받는다

이번에는 초기라 수술만 하면 나을 수 있기 때문에 영빈은 보호자인 아내의 만류를 뿌리치고 남자에게 정확히 병세를 얘기한다

그런데 치킨 박은 그 날로 행방불명이 된 후 병원 지하실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어이없게도 자살을 한 것이다

암에 걸리면 집안 거덜내야 한다던데, 어렵게 일궈낸 치킨 가게를 남의 손에 넘길 수는 없다,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이 정도 이뤘으면 나는 여한이 없으니, 아내에게 아이들 행복하게 키워 달라고 부탁하는 유서를 남긴다

참,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그렇게 영빈이 살 수 있다고 강조했음에도 암이라는 단어가 주는 공포와 절망감 때문에, 가족을 위해 돈 축내지 않으려고 스스로 죽어 버리다니, 이걸 눈물나는 가족애라 해야할지, 무식이 주는 비극이라 해야할지...

 

그렇지만 결국 어떤 삶을 택할 것인가는 자신이 선택할 문제라고 본다

유산 분배 때문에 시끄러워질 걸 대비해, 혹은 환자가 희망을 잃을까 걱정된다는 이유로 끝까지 병을 숨기는 건 환자를 죽이는 것과 매한가지다

나에게 그런 상황이 온다면 나는 당연히 정확하게 알릴 것이고, 또 나 역시 가족들이 그렇게 해 주길 바란다

그러나 죽음을 앞에 두면 가치 판단은 늘 혼란스럽기 마련이다

그저 그 죽음의 공포를 이용해 죽어가는 환자들의 돈과 남은 생명력까지 소진시키는, 신비주의자들이 발붙이지 못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의학이 환자에게 훨씬 더 많은 역할을 해야 하고, 또 책임감을 가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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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주의한 사랑
배수아 지음 / 문학동네 / 199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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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아라는 작가 이름 때문에 그녀의 소설을 한 번쯤 읽어 보고 싶었는데, 이 책이 눈에 들어아 집어 들었다

"부주의한 사랑" 다소 도발적인 제목이지 않는가?

왠지 모르게 유부남과 얽힌 이야기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역시 예감이 맞긴 한데, 아이러니컬 하게도 절대 이런 부주의한 사랑은 안 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작가가 독자에게 원하는 건 이런 결론이 아니었을 것 같지만...

 

배수아는 90년대 감각적 이미지의 글쓰기를 대표하는 작가로 불린다

그 명성에 걸맞게 평론에서도 언급한 것이지만, 읽는다기 보다는 보는 느낌이 드는 소설을 쓴다

책 말미의 평론에서는 그녀의 소설을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에 비유했다

사실 이런 글쓰기는 잘 읽혀지지 않는다

소설이란 감각적인 부분이 중요하다 할지라도 그 기본틀은 서사 구조가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으로서는, 영화의 시놉시스 같은 그녀의 소설이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200페이지에 불과한 짧은 소설인데도 문장들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아 꽤 오래 읽었다

특히 주인공 연연의 나쁜 피가 섞인 태생적 한계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은 다소 억지스러워 보이고, 툭툭 끊어지는 전개 때문에 읽기 힘들었다

 

중국 이름 같은 연연은 역시 중국 이름 같은 어머니 모령의 불행한 사생아로 태어난다

이 소설의 배경이 6.25 직후 50년대이기 때문에 등장 인물들은 아주 가난한고 불행하다

무지막지한 남편에게 시집 간 모령은 평생을 남편과 전처 아이들과 본인이 낳은 자식들 뒷바라지에 허리가 휘도록 일한다

그나마 남편이 죽은지 몇년 후에 낳게 된 연연 때문에 일자리마저 잃게 된다

연연은 모령의 이복 동생인 미령에게 보내진다

모령은 40이 넘은 출산 때문에 그 후 죽었는지, 살았는지 행방이 묘연해진다

 

미령은 60년대에 미대를 나온 인텔리 여성이었으나 여섯 살이나 어린 남자와의 결혼으로 불행해졌다고 믿는 여자다

미령의 남편은 젊고 잘 생긴 물리 선생인데 역시 그의 친구들이 학위를 받고 대학에 남게 되지만 신입생 때 미령을 만나 학업을 포기하고 학교 선생이 된 남자다

미령과 그녀의 남편은 계속되는 출산 때문에 가난해진다

그럼에도 미령의 남편은 자기 생활에 비관하지 않고 가정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애쓴다

반면 미령은 자신보다 여섯 살이 어린 남편이 남들에게 인기가 많은 것을 질투하고, 여러 아이들의 어머니가 되어 뒤치닥꺼리를 해야 하는 가난한 삶을 증오한다

미령은 늘 현실에서 반쯤 발을 뗀 채 살아간다

결국 그녀는 우울증과 강박증에 시달리다 불행하게 죽고 만다

 

이 집에는 이미 모령의 다른 딸이 식모 비슷하게 키워지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 역시 연연인데 무척 아름답지만 학교를 다니지 않는 백치미가 있는 여자로 그려진다

아내의 조카이지만 마을 사람들은 잘 생기고 젊은 주인 남자와 내연의 관계라고 의심한다

아내가 죽은 날, 어이없게도 연연 역시 뒷산에서 정원용 도끼가 가슴에 꽂힌 채 시체로 발견된다

미령의 남편이 내연의 관계였다는 마을 사람들의 증언에 의해 용의자로 잡혀가고, 이 소설의 주인공 어린 연연은 양부모에게 입양된다

 

여기까지가 연연의 태생적 한계를 보여주는 어린 시절 이야기다

소설의 화자는 연연 자신인데, 그녀의 무의식 속에 자리잡은 태어난 배경에 대해 독자에게 들려준다

말하자면 그녀는 나쁜 피가 흐르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일까, 연연은 유부남과 사랑을 나누게 된다

그것도 사귀던 남자의 사촌과 동거를 한다

사귀던 남자애의 이름은 "운"인데 그의 사촌 "택"은 "운"이 사촌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연연도 "사촌"이라고 호칭한다

연연이 사랑하는 남자의 공식 명칭은, 그래서 사촌이 된다

 

사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렇고 그런 통속 소설의 범주에서 벗어나질 않는다

그런데 내가 전율을 느낀 까닭은 부주의한 사랑을 택한 연연의 삶이 어떤 식으로 망가지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탓이다

사촌과 사귀기 전까지만 해도 연연은 집도 있고, 직장도 있고, 양부모로부터 매달 생활비도 받아 경제적으로 전혀 어렵지 않는 여자였다

그녀가 처음에 사귄 "운"은 재경부의 공무원으로 둘이 결혼하면 괜찮은 중산층이 될 운명이었다

나쁜 피가 섞인 태생적 한계와는 전혀 상관없이 말이다

 

그런데 "운"의 사촌이 나타나면서 모든 것이 꼬이기 시작한다

쌍둥이 아기가 있는 사촌은 아내가 임신 중임에도 불구하고 연연과 동거에 들어간다

사업을 하는 사촌은 연연에게 더욱 부유한 삶을 제공한다

연연은 꼭 그래서는 아니지만, 직장에 더 불성실해지고 가족으로부터도 계속 멀어진다

입양됐기 때문에 가족으로 남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연연은 "부주의한 사랑"을 택한 것에 대해 전혀 변명하지 않는다

결국 나쁜 피는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가족으로부터 배척당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미 두 아이가 있던 사촌은 아내가 세 번째 아이를 낳자 8개월 만에 집으로 돌아간다

자식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가 되겠다는 뻔뻔한 말을 남긴 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연은 사촌을 사랑했던 날들을 후회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촌이 자신을 망쳤다는 가족들의 비난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녀는 홀로 남은 집에서 사촌을 기다리지만, 기다림에 지친다거나 그를 원망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

사촌을 사랑했던 날들은 그저 삶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촌을 사랑한 댓가는 너무나 끔찍하다

다만 그녀가 자신이 이렇게 된 것과 사촌은 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할 뿐...

 

직장을 잃고,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았으며, 그 모든 책임을 져야 할 사촌 역시 떠나버린 뒤 연연은 생계를 위해 중국집의 웨이트리스로 취직을 한다

양아버지의 지원이 끊겼기 때문에 겨울 내내 난방도 못하고 며칠을 굶기까지 한다

서서히 보이지 않게 몰락한 그녀의 삶을 보면서 섬뜩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일반적인 통속 소설의 주인공들은 유부남과의 "부주의한 사랑"이 끝난 후에도 이런 식으로 비참해지지 않는다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라는 소설에서 주인공 강진희는 유부남과 사귄 것이 문제되어 대학 교수 자리에서 밀려 나지만, 조금도 비참해지지 않고 평론가로써 예전과 다름 없는 수준의 삶을 영위한다

사회적인 지탄은 받을지언정, 그것 때문에 여주인공의 삶이 피폐해진다거나 가난해지는 건 어떤 소설에서도 본 일이 없다

그런데 배수아는 부주의한 댓가가 어떤 것인지 아주 사실적으로 그려 준다

아마도 작가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겠지만...

 

한 때 사귀었던 "운"은 뇌물 사건에 연루되어 파면된 후 며칠을 방황하다가 연연의 집에 나타난다

사촌과의 동거 때문에 잘 나가던 고위 공무원 남자 친구를 잃었던 연연은 주변의 안타까움과는 달리 (그 남자를 잡았어야 한다는 식의...) "운"에 대한 미련을 두지 않는다

연연이 현명했던 것일까?

사람이든 상황이든 늘 변하기 마련이라는 걸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잘 나가던 고위 공무원 "운"은 파면된 후 결국 연연과의 하룻밤을 마지막으로 그녀의 집 앞 강에 몸을 던지고 만다

자신에게 주어진 어처구니 없는 사회적 몰락을 이겨낼 만큼 강하지 않았던 것이다

 

작가가 결코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이 소설은 부주의한 사랑의 댓가를 너무나 분명하고 사실적으로 보여 준다

만약 연연이 조금 더 자제력이 있고, 현실적이었다면, 그래서 무책임한 유부남 따위는 사랑하지 않았다면,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지도 않았을 것이고 경제적으로도 몰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전경린의 소설 "내 생에 꼭 한 번 뿐인 특별한 날"을 읽을 때만 해도 여주인공 미흔은, 부주의한 사랑 후에도 여전히 매력적으로 그려진다

이혼은 했지만, 또 사랑하던 남자가 가 버렸지만 그녀는 자기 삶을 꿋꿋이 잘 살아 나가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런데 배수아 소설 속의 연연은 냉정하게 말하면 유부남으로부터 농락당한 꼴 밖에 되지 않는다

소설에서 흔히 묘사된 것과는 다르게, 유부남이었던 사촌은 한 때의 사랑보다 가족을 택한 것이다

그는 일반적인 통속 소설에서처럼 가족을 버리는 대신, 현실에서처럼 주인공을 버린다

그리고 주인공은 사회적으로 몰락해 간다

 

웃기는 결론일 수도 있지만, 책을 덮으면서 인생은 신중하게 건너야 하는 외나무 다리라는 생각을 했다

사랑은 좀 더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

"부주의한 사랑"의 댓가가 얼마나 끔찍하고 견디기 힘든 일인지에 대한 예화들은 주위에 널려 있다

우리는 생각만큼 강하지 않은지도 모른다

겨울에 난방을 할 수 없고, 제 때에 식사를 하지 못하면, 금새 비참해지고 초라해질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임을 잊고 지내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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