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비밀과 거짓말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1월
평점 :
좀 급하게 읽은 책이다
소설을 읽다 보면 한 장면 한 장면 꼼꼼히 읽기 보다는, 다음 내용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성급하게 다음 장을 넘기게 된다
사실 이런 소설에서, 아니 어느 정도 수준있는 소설에서 줄거리 자체는 큰 의미가 없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그다지 질높은 독자가 아닌 나로서는 자꾸 결말을 빨리 알고 싶다는 충동에 시달린다
더구나 한 번에 쭉 읽지 못하고 꽤 오랫동안 만지작거린 책이라, 더더욱 ?기는 기분으로 급하게 읽어 버렸다
이런 걸 두고 체한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은희경이 제시한 새로운 갈등 관계, 자식의 삶에 관여하고자 하는 한국 아버지들의 그 가족주의가 마음에 들긴 했는데, 저자 후기를 읽으면서 약간의 반발심이 생겼다
은희경은 평론에서도 인정받고 이름만으로도 책 수 십만권은 팔아 치울 수 있는 이른바 문화권력을 가진 작가인데, 내면의 고민들, 그러니까 나같이 안 풀리는 독자 입장에서 보면 배부른 고민들에 불과한 얘기들을 후기랍시고 주저리주저리 늘어 놓는 게 좀 아니꼬왔다
왠지 위선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소위 배알이 뒤틀린다
진짜로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도 아니면서, 괜히 고뇌하는 척, 실은 사소한 것에 불과한,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밖에 없는 본질적인 고민들을, 평소에는 가볍게 치부해 버리는 그것들을, 작가후기에 멋진 문장과 함께 필력 자랑하려고 끼워 넣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내가 너무 꼬여 있는 걸까?
하긴 내 고민이라는 것도 남들이 들으면 배부른 소리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잠시 시간을 두고 생각해 봤는데, 은희경 입장에서 보면 작가로서의 고민은 있을 수 있겠다
더 좋은 작품을 쓸 수 없을지 모른다는 공포감,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야 한다는 부담감, 더 근원적인 것은 현재의 위치를 유지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분명 내제되어 있을 것이다
결국 고민이란 것은 너무나 개성적이고 제각각이라 처음부터 크고 작고의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건지도 모르겠다
작가의 주제 의식에 깊이 공감하는 바다
가족주의로 묶여 있는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아들딸들의 공통적인 문제인지도 모른다
직장에 처음 들어갔을 때 바로 윗상사가 서울 사람이었는데 전라도 지방으로 혼자 학교를 와서 좋았던 점은, 무리에 쉽게 어울리기 힘들고 외로웠던 점도 있었으나, 가족이나 선후배 같은 사람들로부터 벗어나 진짜로 하고 싶은 걸 다 해 보고 살았다는 점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때만 해도 그런가 보다고 들었던 얘기가, 타지로 떠나 있는 요즘 자주 생각이 난다
주변을 둘러 봐도 그렇고 나 역시 가끔은 차라리 가족이 없었으면 어땠을까 이런 발칙한 생각을 해 본다
가족이 없다면 한 학기에 등록금이 300만원씩이나 하는 사립 대학을, 그것도 원룸에서 살면서까지 다닐 수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가족이 주는 혜택만 누리고 의무나 간섭은 벗어 던지고 싶은 이기적인 욕심에 빠진다
대한민국 부모들이 얼마나 자식에게 헌신적인지는 너무나 유명한 사실이다
심지어 결혼을 해서도 직장 나가는 딸을 위해 기꺼이 노년을 손자 키우기에 바치는 게 바로 대한민국 어머니들 아닌가?
자식 과외시키려고 식당 아르바이트나 가사 도우미도 자처하는 게 한국의 엄마들이다
그리고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리는 게 또 대한민국 사회다
모든 인간관계는 give and take이라는 점에서 보면, 이렇게까지 헌신을 하는데 요구하는 게 없을 리 없다
절대적인 사랑이란 건, 부모 자식간에도 불가능한 말이다
물질적으로 바라지 않을 뿐,감정적인 기대감은 다른 어떤 나라의 부모보다도 클 것이다
장남이라면 더더욱 문제는 심각해진다
한국 사회에서 아들의 존재는, 더구나 큰 아들의 존재는 너무 엄청나서 장남 컴플렉스라는 말이 생길 정도다
요즘처럼 모든 자식들에게 골고루 경제적 혜택을 줄 수 있을 만큼 잘 살았다면 장남이고 차남이고 별 의미가 없을 수도 있겠으나, 보릿고개를 넘어야 하던 6-70년대만 해도 딸은 물론이고 나머지 아들들에게마저 똑같은 교육적 혜택을 베풀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니 하나라도 잘 되야 한다는, 그래서 그 아들이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는 대전제 아래, 장남에게 온갖 정성을 쏟아 부었고 상대적으로 다른 자식들은 소외됐을 것이다
소설에서는 영준과 영우 두 형제 밖에 안 나오지만 딸이 하나라도 더 있었으면 얘기는 더욱 복잡해졌을 것이다
더구나 이 집안은 아버지가 건설업을 하는, 당시로서는 아주 상류층은 아니나 중산층 중에서도 윗길을 차지할 만큼, 식모를 두고 마누라가 청와대에 초청받을 정도로 유복한 집이었다
그런데도 부모의 기대에 따른 형제간의 갈등은 존재한다
그러고 보니, 단순히 돈이 없어서 장남만 가르치고 차남은 팽개쳐서 생긴, 가난한 60년대 집안의 얘기는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능력있는 아버지가 자식들을 잘 가르치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붓는, 그래서 무조건적으로 그 사랑을 받아들이고 아버지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살아야 하는, 자의식을 잃어버린 형제들의 갈등이라고 해야겠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상당히 현대적인 소설이다
시대배경은 60년대지만, 주제의식은 바로 21세기에 있다
그래서 내가 깊이 공감하는 것이리라
촌놈에 관한 정의도 마음에 들었다
쥐뿔도 없으면서 남이 자기 무시할까 봐 어설픈 치기와 자존심으로 버티는 마초의식 강한 놈들
촌놈의 반대는 쿨함이 아닐까 싶다
스타일은 돈을 쳐 발라 바꿀 수 있다 하더라도 감정의 세련됨까지 익히기는 참 힘들 것 같다
컴플렉스와 자기방어로 똘똘 뭉친, 편견과 독선과 아집 강한 촌놈들
사실 내 모습일수도 있다
솔직히 이 부분을 읽으면서 서울사람들에 대한 컴플렉스가 좀 해소되는 느낌이었다
단지 서울에 산다고 감정의 세련됨을 얻을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걸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주인공 영준이 비록 촌스러움의 대명사인 전라도 시골 출신이긴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감정적인 세련됨, 즉 쿨함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쿨하다는 것은 뭘 의미하는가?
은희경 소설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주인공들일 것이다
냉소적이고 사랑을 일회적이고 순간적인 감정으로 치부하고, 사람과의 관계에 집착하지 않고, 순정보다는 비웃음을 택하는, 그러나 삐딱하기 보다는 세상에 적당히 타협하면서, 한 절반쯤만 적응하는 그런 캐릭터들 말이다
아웃사이더 기질을 가지고 있으나 결코 그 기질 때문에 손해보지는 않는 영악스런 캐릭터들
나처럼 감정의 과잉에 빠져 사는, 거기다가 맨날 손해만 보는 아웃사이더 기질을 지닌 사람은 죽었다 깨나도 쿨한 사람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나도 촌놈에 불과한가?
그래도 소설 속에 묘사된 촌놈과는 좀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주류를 원하면서도 진짜 주류가 되고 싶어서라기 보다는, 안정감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지향하는, 사실은 아웃사이더 기질이 매우 강한 사람이고 보면, 마초같은 촌놈들과는 또 일정한 거리를 둘 수 밖에 없다
영우의 모습은, 어쩌면 동생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남자와 여자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래서 사회적 역할에 대한 부담감은 다르겠지만, 거의 흡사하다
부모의 기대에 못 미치고 부모가 돌보지 않으면 제대로 된 사회생활을 하기 힘든 능력이 부족한 자식으로써 말이다
사회생활을 못한다는 것은 패륜아가 된다는 얘기가 아니라, 사회에서 제대로 자리를 잡고 최소한 중산층 정도의 생활을 유지해야 하는데 스스로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그러니까 내버려 뒀을 경우 진짜 의미의 서민층이 될 사람들이다
의사들이 자조적인 의미로 나도 서민층이다, 하는 그 위선적인 서민 말고 말이다
영우를 그냥 내버려 뒀으면 밑바닥 인생을 살아야 했을 것이다
하급 공무원이나마 안정된 직장을 잡게 해 준 아버지 정욱의 노력은 정말 눈물겹다
사실 정욱이 한 그 청탁을 아빠도 동생을 위해 해 주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능력이 없기 때문에 자꾸 동생에게 화를 내고 불안해 한다
정욱은 원래 건설업자로써 관공서 공사 따내는 일을 업으로 삼은 사람이고, 청탁이나 연줄 같은데는 토가 텄을 것이다
더구나 당시만 해도 알음알음으로 얼마든지 하급 공무원 같은 건 끼워 넣을 수 있는 혼란기였다
아빠가 흔히 하는 말, 세상이 바꿔졌다는 건 바로 그 청탁이 거의 불가능해졌다는 얘기와 통한다
동생은 아빠의 불안을 이해할 수 있을까?
한 가정을 이루고 아버지가 돌아가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자아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하고, 아버지가 진짜 사랑했던 사람은 형이었다는 식으로 분노와 서운함을 터뜨리는 영우를 보면, 동생이 아빠를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 같다
나 역시 텍스트를 통해 전지전능한 관점에서 두 형제의 삶을 내려다 보기 때문에 정욱의 심정을 이해하는 것일 뿐, 실제 상황에서라면 더구나 내 경우라면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영준의 말에 일리가 있다
영준은 학창 시절 내내 아버지가 원하는 장남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한 번도 마음대로 해 본 일이 없다
언제나 우등생 모범생 컴플렉스가 그를 짖눌렀다
반면에 영우는 하고 싶은대로 다 하고 제멋대로 살아도 아버지라는 든든한 빽 때문에 결국은 제 자리로 무사히 돌아오고 상대적으로 훨씬 자유롭게 산 것처럼 보인다
내가 너처럼 사람을 패서 병원비를 달라고 해 봤냐, 오토바이를 사달라고 해 봤냐, 넌 아버지가 나에게 뭐든 다 해 줬다고 하지만, 아버지가 원하는 일만 했기 때문에 해 준 것일 뿐이었다는 영준의 절규를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결국 끝까지 아버지를 외면한 것도 영우가 아닌 영준이었다는 점에서, 영우보다 영준의 마음에 더 큰 상처가 있음이 분명하다
어찌됐든 영우는 아버지 덕에 하급 공무원이나마 하면서 안정된 가정을 이루었고 마지막 임종까지 지켰다
그러나 법대를 장학금 받고 들어간 영준은, 결국 아버지로부터 도망가 장례식 때나 나타날 정도로 완전히 아버지와 담을 쌓았다
그래서 영준은 가정도 이루지 않았다
정욱의 교육법은 옳은 것일까?
능력있는 영준에게는 완전히 틀린 것이고, 모자란 영우에게는 그런대로 괜찮았다는 결론을 내려야 할까?
결과만 놓고 본다면 말이다
영우는 한 번도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해 본 일이 없다고 하지만, 대한민국 사회에서 영우처럼 살다가는 낙오되기 십상이고 아버지 정욱 역시 그 사실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계속해서 영우의 방황을 처리해 준 것이리라
그러나 결국 두 아들 모두에게서 진정한 이해를 받지 못했으니 불행한 아버지라 할 수 있겠다
자식과 부모가 독립된 인격체로 존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은희경은 또, 가족주의에 대해 슬쩍 건드려 본다
사실 소설 전체를 놓고 본다면 마을 청년들이 죽인 L의 집안과 주인공 정씨네 집안, 그리고 경쟁자 최씨네 집안의 얽히고 설킨 애증의 세월이 주제다
그렇게 서로를 미워 했건만 오히려 더욱 질긴 인연으로 묶여, 조부 정성일이 멍석말이로 죽인 L의 딸은 끔찍히도 귀하게 여기던 자신의 큰아들 재욱과 결혼했고, 막내 정욱은 또 원수 같던 최씨네의 외동딸 사이에서 사생아를 낳는다
세 집안에 드리워진 운명은 박수무당이 예언했던 것처럼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강력한 힘인지도 모른다
결국 한국 사회에서 개인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가?
집단으로만 존재하는 한국인들, 특히 공동체가 아닌 그렇다고 개인도 아닌 가족으로만 정체성을 찾는 한국들인들의 혈연주의가 너무 버겁고 힘에 겹다
자식에 대한 집착이 시스템화 되어 있는 사회에서, 나는 도저히 자식을 나와 별개의 독립된 인격체로 받아들이기 힘들 것 같다
그러니까 나는, 끔찍하리만큼 질긴 부모 자식이라는 관계에 발을 딛기가 두렵다
영준이 사랑했던 사촌 누이 명선의 죽음이나, 아버지의 사생아인 또다른 명선의 이야기는, 사실 소설에서 방향 제시만 할 뿐 큰 역할을 못한다
소설에 삽입된 영화 역시 그저 영준의 직업이 영화감독이라는 걸 드러내 주는 것으로 그친다
그 점이 좀 아쉽다
은희경이 죽은 사촌 명선이나, 이복동생 명선이의 이야기를 플롯에 적극적으로 반영했다거나, 영화 내용을 보다 개연성 있게 꾸몄다면 훨씬 재밌는 소설이 됐을 것 같다
이런 점에서 독자들이 불만인 모양이다
물론 나는 은희경이 진짜로 하고 싶은 얘기가 뭔지 충분히 공감하기 때문에 그런 것들은 다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걸 알지만 말이다
어쨌든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독자에게 불친절 했다는 건 인정해야 할 것 같다
그녀의 문장력은 날이 갈수록 높아진다
새의 선물이나 마지마 춤은 나와 함께 등에 비교했을 때 재미가 떨어진다고 불평들이 대단하지만, 오히려 평론가들은 이번 작품을 더 높히 쳐 준다는 것만 봐도 그녀의 문학적 내공이 깊어 가고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자기 고향이기도 한 고창, 소설 속의 K 읍에 대한 묘사력도 대단하고, 영우와 영준, 아버지 정욱 등의 심리 묘사도 놀랍다
맨 마지막에 두 형제가 상대에 대한,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터뜨리는 장면은 이 소설의 백미라 하겠다
따옴표도 없이 줄도 안 바꾸고 쭉 이어서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두 사람의 설전을 이어가는 그녀의 필력에 정말 놀랬다
너무 마음에 들어 따로 옮겨 놨다
더불어, 조감독의 촌놈 타령도 아주 마음에 든다
인간의 위악성을 파헤치는 은희경의 실력을 유감없이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