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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귀고리 소녀
트레이시 슈발리에 지음, 양선아 옮김 / 강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오래 전부터 읽고 싶었던 책이다

처음 서점에서 봤을 때는 베르메르에 관한 책인 줄 알았다

표지를 장식한 그림은 "우유를 따르는 여인"과 더불어 무척 좋아하는 그림이었기 때문에 소설인지도 몰랐다

책을 편 후 한 번에 다 읽어 버릴 정도로 흡입력이 대단하다

간만에 본 흥미있는 소설이었다

 

책에 나온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무척 예쁘다

주인공 그리트, 카타리나, 프란스, 아그네스, 코넬리아 (빨간머리 앤이 갖고 싶어 하던 바로 그 이름) 등등...

마을 이름인 델프트도 참 예쁘다

 

그리트는 타일공인 아버지가 사고로 장님이 되자, 돈을 벌기 위해 화가 베르메르 집에 하녀로 들어간다

하녀라고 하면 조선 시대 머슴과 주인 관계라고 생각했는데, 요즘 말로 치면 단순히 파출부 정도인 것 같다

그리트가 처음 베르메르 집으로 들어간 후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이 무척 사실적으로 잘 묘사됐다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는 사람들과 새로운 일에 익숙해지기 위해 긴장된 상태로 24시간을 보내는 어린 소녀의 모습이 손에 잡히듯 그려진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에게 부여된 일을 잘 해내면서 서서히 자기 자리를 잡아간다

일을 잘한다는 칭찬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기지도 보인다

먼저 일한 하녀 타네커의 시기심이라든가, 젊은 하녀를 곱지 않은 눈으로 쳐다 보는 안주인 카타리나로부터 미움을 받지 않기 위해, 빨래가 깨끗하다고 칭찬을 하면 햇빛이 좋아서 잘 말랐다는 식으로 넘기는 것이다

사려깊고 분별력 있는 영리한 그리트의 모습이 작은 삽화들을 통해 잘 그려진다

 

그리트의 불행은 주인 베르메르의 그림 그리는 일에 빠져 든 것이다

영리한 그리트는 베르메르의 구도 잡는 일이나 물감 만드는 일 등을 도와 주면서 점점 베르메르에게 빠져든다

어린 소녀에게 화가 베르메르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영혼이었을 것이다

자신에게 청혼하는 푸주간집 아들 피터 대신, 다섯 아이의 아버지인 베르메르에게 마음을 주는 어린 그리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단순히 베르메르가 자신을 고용할 만큼 돈이 많은 남자라서가 아니라, 그가 그리는 예술의 세계를 그녀가 동경했기 때문에 마음을 뺏겼던 것이다

그럼에도 베르메르는 그리트를 단순히 자신의 일을 도와주는 영리한 하녀로 밖에는 생각하지 않는다

자기 일 외에는 남에게 관심이 없는 전형적인 예술가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문제는 그의 아내 카타리나가 그리트를 질투한다는 사실이다

하녀와 남편이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다만 하녀가 남편의 그림을 돕는다는 사실만으로도 카타리나는 심한 질투를 한다

계속 돕다 보면 연애 사건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남편의 예술 세계에 전혀 동참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지에 화가 나서일까?

 

가난한 그리트의 부모는 딸이 푸주간집 아들 피터와 연애하는 걸 환영한다

피터와 결혼하면 고기를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반드시 고기를 먹기 위해서만은 아니겠지만, 가난하면 자식에게 바라는 것도 많아질 수 밖에 없다

안타깝지만 그게 현실이다

그리트는 피터를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베르메르를 동경하면서도)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피터를 거부하지 못한다

사는 건 늘 이런 식으로 사랑을 우습게 만들어 버린다

 

그리트가 베르메르의 모델이 되고, 카타리나의 귀고리를 빌린 사실이 알려지자 결국 그리트는 베르메르의 집을 뛰쳐 나가게 된다

우습게도 아내의 귀고리를 가져 와 자신의 모델인 그리트의 귀에 걸어 준 베르메르는 그리트를 위해 단 한 마디 변명도 해 주지 않는다

마치 그리트가 직접 귀고리를 훔쳐 온 것처럼, 자신은 모른다는 식으로 일관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 태도가 아내가 원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귀고리를 훔치고, 주인을 유혹한 하녀가 되어 집을 뛰쳐나간 그리트는 델프트 시청의 광장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고심한다

피터의 청혼을 받아 들여 푸줏간집 안주인이 될 수도 있고, 다시 주인집으로 돌아가 자신의 결백함을 증명할 수도 있고, 먼 도시로 떠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도 있다

그리트는 운명에 자신을 맡기지 않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고 믿는다

 

결국 당연한 얘기지만, 그리트는 피터와 결혼한다

10여 년 후 그리트에 대한 죄책감을 버릴 수 없었던지, 베르메르는 죽기 전 그리트에게 진주 귀고리를 남긴다

푸줏간 주인에게 진주 귀고리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그리트는 전당포로 가지고 가 20길더로 바꾼다

15길더는 베르메르네 집에서 결혼 전 피터의 푸줏간에 진 빚을 갚는 걸로 치겠다고 생각하고, 나머지 5길더는 간직한다

내가 그리트였다면 나는 아마도 어리석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그리트가 진짜로 사랑한 것은 베르메르라는 구체적인 인간이 아니라, 베르메르가 그려내는 예술의 세계였음이 분명하다

하루 종일 빨래더미와 설거지 할 그릇들에 치여 사는 그녀에게, 물감을 만들거나 구도를 잡는 일은 삶의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차원이 다른 일이었을 것이다

 

한 편의 그림을 두고 이렇게 멋진 소설을 쓴 작가에게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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