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도교의 기원과 역사 이화학술총서
정재서 지음 /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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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도교 관련 전시회를 한 적이 있다.

그 때 도록과 함께 전시됐던 책이라 흥미를 갖고 있었는데 근처 도서관에 없어 오랫동안 숙제처럼 갖고 있다가 드디어 읽게 됐다.

오래 전에 나온 책이라 편집이나 내용이 다소 옛스럽긴 하나 300 페이지 정도의 짧은 분량으로 읽기 편하고 도교가 아닌, 한국 도교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이 무척 신선하다.

도교도 모호한데 한국 도교는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막연히 고구려 고분 벽화에 도교적 색채가 보인다 정도 밖에 몰랐다.

책에 따르면 한국의 도교는 고구려 영류왕 시절 당으로부터 전해진 역사적 기록 외에도 자생적 요소가 있었다고 본다.

이 책의 주제가 바로 한국 도교의 자생적 기원과 고유성을 밝히는 것이다.

화랑의 신선적 성향이나 고구려 벽화의 신선들, 백제의 금동대향로 등을 증거로 내세우고 최치원을 도교의 비조로 본다.

정확히 이해는 못했지만 산을 숭배하고 수련을 통해 신선을 지향하고, 성황신이나 칠성신, 조왕신 같은 무속적인 것도 자생적 도교의 속성으로 보는 것 같다.

샤머니즘이나 무속이 곧 원시 도교라 할 수 있을까?

중국은 도교가 하나의 종교나 학파로써 명확히 실체가 있는데 한국의 도교는 저자의 책 내용만으로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저자는 도교가 발해만 주변의 동이에서 비롯된 변방적 성격의 사상으로써 중원과 다르다고 강조하는데 동이가 곧 한민족도 아니고 중원이 아니면 중국이 아닌 것도 아니니 공감하기가 어렵다.

조선 시대 단학파에 대한 고찰이 무척 흥미롭다.

주자학 일변도의 시대라 다른 학문이라면 기껏해야 실학이나 양명학 등 유교의 다른 갈래만 있는 줄 알았는데 내적 수련을 통해 신선의 경지에 오르려는 단학파라는 흐름이 있었다는 게 신선하다.

김시습, 정렴, 정지승, 권극중 등이 소개된다.

또 최제우의 동학이나 증산도, 원불교 등도 수련을 통한 신선을 추구하는 도교적 성향을 지녔다는 점이 흥미롭다.

원불교는 이름 때문에 막연히 불교 계통인 줄만 알았는데 저자의 평대로 다원주의적 세계관과 평화를 추구하고 생태계까지 아우를 수 있는 포괄적인 사상 같다.


<인상 깊은 구절>

67p

한국 도교에서 성립된 복원궁, 소격서 두 도관의 경우를 볼 때 이들은 결국 왕실과 국가의 도교 의례를 담당하기 위한 공적 기관이었지 도교 수행 자체를 목적으로 한 조직은 아니었다. 따라서 본래 중국 도관이 갖고 있는 여러 기능 중의 일부를 담당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한국의 사족 계층에는 도관의 형태를 갖추지는 않았으나 소규모의 자발적인 수련 조직 및 집단은 적지 않게 존재하여 그들 나름의 계보를 갖고 계승되어 왔던 것 같다. 

79p

한국 도교 자생설은 단군 신화 및 고구려 건국 신화에 대한 도교적 윤색 내지 재해석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으며, 민족 의식이 기본 정서로서 바탕에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민족 의식의 정도는 후대로 내려갈수록 높아지는데 이는 종주국이었던 명이 망한 이후 조선 후기에 일기 시작한 소중화적 자존 의식, 점차 기울어져 가는 국세에 대한 우국적인 정서의 표출 등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90p

전국 시기에 발해만 일대라는 변경에서 일어났던 문화 현상을 단원론적 문화사관에 의거, 오로지 중국으로 환원시키는 것은 주변 문화의 정체성을 고려하지 않는 일방적인 논단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고대 중국과 주변 문화와의 관계를 과연 오늘날의 배타적인 국가, 영토 개념으로 규정해도 좋은 것일까? 국경과 문화의 경역은 역사적으로 유동적이어서 일치할 수도, 서로 넘나들 수도 있다.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중국'이라는 개념은 근대 국민 국가 성립 이후에 확립된 것인데 우리는 은연중 이 개념을 고대 중국 문화에까지 연장하여 사용하고 있다. 그 배후에 중국을 고정불변한 실체로 보는 인식이 존재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러한 속지주의적인 문화사관은 현재의 중국 영토 내에서 일어난 일이기만 하면 과거의 현상일지라도 모두 '중국적'인 것으로 귀속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대륙 학자들의 '토생토장'이라는 관습적인 표현은 이러한 뉘앙스를 강하게 풍긴다.

 근래까지도 중국은 문명의 외래설, 특히 서방 기원설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내고자 부심하였다. 그러나 동아시아 내부의 문화 문제에 있어서는 이른바 화이론적 사고로써 주변 문화의 정체성을 홀시하고 그것을 모두 중국으로 환원하려는 이중적인 문화사관을 견지하고 있다. 중국 역외의 학자들 역시 이러한 입장을 답습할 뿐 주변 문화의 변별적 자질을 읽어 낼 시각이 부재한 것이 현실이다.

(이런 식으로 따지면 발해나 고구려 역시 과연 한민족의 역사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중국에만 요구할 것이 아니라 모든 나라의 고대사 전체를 현재의 영토 국가와는 다른 관점에서 봐야 할 것 같다)

104p

당 황실은 원래 서방의 이민족 출신으로 문벌을 중시하던 당시의 풍조에 따라 자신의 혈통을 신성시하기 위해 노자를 원조로 모시게 되고 이에 도교는 국교가 되어 불교, 유교의 위에 군림하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당대의 관방 도교는 도교와 황권의 완벽한 결합을 의미하며 이것은 당시의 정치적 목적과 긴밀히 상관된다. 첫째로 이미 말하였듯이 당 황실은 도교의 신권을 빌어 자신의 출신을 윤색하고 건국의 정당성을 보장받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둘째로 당시 왕성해 있던 불교의 세력을 꺾음으로써 일정한 정도의 사회, 경제적 효과를 도모하였다. 즉, 사원 경제력의 환수로 인한 국가 수입의 증대, 승려의 환속으로 인한 노동력의 증가 및 세수의 증대 등이 그것이다.

123p

도교는 중원 지역에서 자생한 문화라기보다 변경으로부터 유입된 외래의 이족 문화로서의 성격이 짙다. 초기 도교의 경전들이 모두 동방의 방사 계층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전설 및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따라서 도교가 근원적으로 갖고 있는 주변적, 이족적인 속성은 본질적으로 다원적인 가치성을 지향하게 되므로 한국 문화와 쉽게 동화되면서 자연스레 자주 의식의 입장에 선 대외 자세를 갖게 된다. 고구려의 당에 대한, 고려의 주변 강국들에 대한 도전적인 입장들과 같이 역사상 도교와 자주 노선의 정책과는 긴밀한 상호관련이 있다. 근래 천황제와 도교와의 긴밀한 관계가 밝혀진 바 있었지만, 관방 도교의 강력한 영향하에 성립된 일본의 왕권이 대외적으로 과시하였던 자주성은 이 문제에 대한 유력한 좌증이 될 것이다.

137p

동학은 강일순이 최제우를 선도의 종장으로 칭했을 정도로 도교적 색채가 농후하다. 최제우가 득도를 자각하게 된 신비로운 체험부터 이미 상당히 도교적인 분위기에 휩싸여 있다. 어느 봄날 최제우는 갑자기 몸이 전율하며 자칭 상제라고 하는 초월적 존재의 계시를 듣게 된다. 최제우의 이러한 종교 체험은 오두미도의 장도릉, 신천사도의 구겸지 등 중국의 초기 도교 교주들의 득도 상황과 거의 비슷하다. 교주들은 신비 체험 중에 신인(대개 천상노군)으로부터 교법이나 경전은 전수받는다. 최제우와 도교 교주들의 이러한 공통적 체험은 양자의 뿌리가 무속에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 

 동학의 교법 중에서 가장 민간 도교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것은 부주의 사용이다. 이른바 영부는 최제우가 앞서의 명상 체험중에 상제로부터 받은 것으로 동학교도에게 있어서는 도교의 불사약이나 선약에 상응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75p

도교의 한국 신화의 전유가 명조의 붕괴 이후 조선 후기의 지식계층 사이에 대두한 문화적 자존의식의 한 표현이었는지, 아니면 중국 도교에서 보여지듯이 한국 신화가 한국 도교의 내용이나 특성을 구현함에 있어 자발적인 전변 과정을 거쳐 왔는지 구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204p

"도가적 인생관이 현실 도피만이 아니라 차원을 달리한 현실 참여라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하고 이에 따라 가령 정렴의 도교 수행을 가세의 변동으로 인한 개인적 굴절로 보기보다는 본래부터 있었던 '일가의 학풍'에 바탕한 자연스러운 처신으로 인식했다. ... 이제 우리는 조선조 단학파의 성격이 종래의 피상적 소견과는 달리 일정한 정치적 지향을 띠고 있으며 그것의 이념적 내용은 민족주의라든가 자주적 역사의식과 상관됨을 알 수 있다.

253p

최치원 도교학의 훌륭한 점은 그가 중국으로부터 귀국한 후 신라에 자생하고 있는 민족의 선도를 재인식하고 그 지위를 중국 도교보다 우위에 둔 점이다. 그는 <난랑비서>에서 고유의 선도에 대한 주체적 인식을 표명하였다. 결국 최치원은 중국의 내단수련법을 체득하고 이를 다시 풍류도의 삼교합일 체계 안에 수용함으로써 한국 수련 도교의 독특한 경지를 이룩해낸 것이다. 최치원 도교학의 이러한 경지는 이후 이자현, 이명, 김시습, 정렴 등에 의해 계승되어 고려, 조선 시기 문인, 사대부 수련 도교의 큰 줄기를 형성하게 된다. 최치원을 한국 도교의 비조라고 일컫는 까닭이 실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258p

"그대는 이미 세상 밖의 사람이 되었으니, 

모름지기 세상 밖의 일을 행하게나"

마지막 두 구절은 노인이 김시습에게 당부한 말이다. 이제 수양대군에 대한 분노, 단종 복위에 대한 열망은 세상 밖 사람이 된 김시습에게 있어서 모두가 부질없는 일일 뿐이다. 그가 해야 할 의미있는 일이란 '세상 밖의 일' 즉 수련을 하여 신선의 경지에 도달하는 일이다. ... 그러나 이러한 유불도 3교합일의 성향은 김시습 개인 학문의 특성이 아니라 상고 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한국 古仙道의 전통이다. 한국 고선도 즉 풍류도의 또 하나의 중요한 취지는 사대주의를 배격하는 자주적 역사 의식이다. 

268p

<용호비결>은 조선의 의학사상 특히 허준의 <동의보감>의 원리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동의보감>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이 허준만의 독창적인 작품이 아니다. <동의보감>의 기획에는 당대의 여러 학자들이 관계했는데 정렴의 막내 아우 정작이 儒醫로서 참여하여 결정적인 이론을 제공하였다. <용호비결>에서 전개된 정기신론이 <동의보감>의 독특한 도교 의학 체계를 구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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