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꽃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김영하는 요즘 잘 나가는 젊은 소설가 중 한 명인데, 이번에 동인 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서 그의 수상작 "검은 꽃" 을 읽었다
생각보다 훨씬 재밌었다
독특한 제목이 돋보이는 그의 단편집 "오빠가 돌아왔다" 는 별로였는데, 이 책은 정말 재밌다
지루하지 않고 빨아 들이는 매력이 있다
직접 멕시코와 과테말라까지 가서 쓴 책이라고 하니 현장성이 더욱 돋보인다
역시 단편은 아무나 쓰는 게 아니다
작품이 좀 길어야 플롯도 들어가고 하고 싶은 얘기도 다 할 수 있는 것 같다

언젠가 TV에서 염정아와 옥소리가 나오는 애니깽에 관한 드라마를 본 적이 있다
초반에는 재밌게 봤는데 그들이 늙은 후 김혜자 등으로 바꿔 나올 때는 좀 황당해서 거의 안 봤다
어쨌든 그 때 이 두 자매가 멕시코 에네켄 농장으로 이민을 간다
언니 염정아는 공산주의자가 되서 한국으로 돌아오고, 동생 김혜자는 아마 큰 부자가 되서 해방 조국으로 돌아올 거다
그 드라마가 생각나는 소설이다

조정래가 쓴 "아리랑" 도 비슷한 얘기다
배경은 하와이다
솔직히 "아리랑" 류면 어쩌나 걱장을 했는데, 역시 신세대 소설가는 다르다
만약 이 소설을 "아리랑" 처럼 썼다면 상도 못 받고 대중에게 외면당했을 것이다
왜냐?
시대가 바뀐 것이다
더 이상 민족주의와 선악 이분법 구도로는 작품을 끌어 갈 수가 없다
독자들은 보다 입체적이고 개인적인 소설을 원한다
이념과 이데올로기가 사라진 시대이므로 독자의 요구도 변했다
뒤에 나오는 평론에서도 이 점을 강조한다

조정래의 "아리랑" 을 보면 인물들의 선악 구도가 너무나 명확하다
착한 놈은 계속 착하고 나쁜 놈은 끝까지 나쁘다
평면적인 캐릭터라 재미가 없다
반면 김영하 소설의 주인공은 보다 인간적이다
사실 나쁘기만 하고 착하기만 한 인간이 어딨겠는가?
인간성의 좋고 나쁘고는 있겠지만 선악을 분명히 따진다는 건 사실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도 소설을 읽다 보면 대부분의 캐릭터는 전형적인 성격을 띈다
즉 그들의 행동은 거의 예측 가능하다
특히 역사 소설은 더욱 그렇다
그래서 가끔 지루하다

주인공의 이름도 현대적이라 마음에 든다
김이정은 가수 이정이 생각나고 이연수라는 이름도 조선 시대의 촌스런 한문 이름 같지가 않다
그녀의 동생 이진우도 현대적인 이름이다
박정훈도 마찬가지
아무래도 신세대 소설가가 짓는 이름은 현대적이다

이정과 연수는 멕시코로 가는 화물선에서 만나 사랑을 나눈다
연수는 왕족인데 아버지와 달리 현실을 빨리 받아들인다
또 그녀는 자신이 욕망에 충실한다
연수나 이정 모두 외모가 괜찮은 사람들로 나온다
내 예상으로 둘은 결혼해서 행복한 삶을 살 줄 알았는데 작가의 결말은 뜻밖이었다
제일 황당한 건 이정의 최후다
이정은 주인공인 만큼 (읽다 보니 특별한 주인공도 아닌 것 같지만) 성품도 남다르고 세상을 잘 헤쳐 나갈 것 같았는데 의외로 인간성도 나쁘고 허망한 죽음을 맞는다
이정과 연수의 재회도 이뤄지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주인공 이정은 갖은 고난을 겪은 후 자신의 아이를 가진 사랑하는 연수를 되찾아 와야 하는데, 왠걸 그는 멕시코 혁명군이 되어 사람들을 죽일 뿐이다
또 굳이 연수에게 매달리지도 않는다
그저 과거의 추억 쯤으로 간직할 뿐 그녀를 위해 어떤 모션도 취하지 않는다
나중에 연수의 남편 박정훈의 이발관에 찾아가 그녀와 자신의 아들을 보긴 하지만 만나지도 않고 떠나 버린다

김영하는 주인공에 대한 애정이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소설 읽기가 더욱 편했다
이정은 혁명군이 되어 과테말라의 마야 용병으로까지 건너 가지만 결국 거기서 총맞아 죽는다
농장에서 탈출해 혁명군이 될 때는 그래도 뭔가 한 가닥 할 줄 알았는데 왠걸, 그냥 허망하게 밀림에서 남의 나라 군인 손에 죽을 뿐이다
멋진 전투나 영웅적인 행동도 없었다
연수나 아들을 못 잊는 것도 아니다
작가의 눈이 매우 냉정함을 느낄 수 있다


연수 역시 마찬가지다
이정의 아기를 벤 후 권력을 누리는 통역사 권용준에게 남편을 찾아 달라고 부탁할 때만 해도 사랑을 위해 뭔가 할 여자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허망하게 권용준의 첩으로 들어 앉는다
조선으로 떠나는 권용준을 배신하고 그의 돈을 훔쳐 달아날 때도 그녀가 이정을 찾아 역경을 헤쳐 나갈 걸로 기대했다
그러나 역시 중국집의 하녀 내지는 매춘부로 팔리고 만다
무려 8년을 그렇게 보내다 중국집 손님으로 온 박정훈에게 구출된다
옛날 소설 같으면 이정을 그리워 하며 정절을 지킬텐데 또 그녀는 박정훈과 쉽게 살림을 차린다
사랑에 목숨 거는 전형적인 여주인공의 역할을 거부하고 보다 현실적인 여자로 사는 것이다

그녀가 농장으로 아이를 찾으러 갔을 때 그녀의 어머니 소식은 정말 충격이었다
그녀가 권용준의 첩이 된 후 더럽다고 말 섞은 것도 거부하던 그 꼿꼿한 왕실의 여자가, 마야인 감독의 아내가 된 것이다
자살까지 생각하던 조선 왕실의 여자가, 딸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던 그 여자가 어떻게 남편을 배신하고 농장 감독과 결혼할 수 있을까?
지배자인 스페인 귀족도 아니고 자신들과 별 다를 것도 없는 마야인과 말이다
한 문장에 불과한 얘기지만 이 소설의 핵심 반전 같다
연수의 어머니도 망해 버린 나라 붙들고 앉아서 일할 생각조차 않하는 이 왕족 남편에게 질린 것이리라

그 후에도 연수의 운명은 놀랍기만 하다
그나마 제일 잘 풀렸다고 해야 하나?
착실한 이발사 박정훈과 결혼한 후 비교적 평탄한 삶을 살 것 같던 연수는 남편이 심장마비로 죽은 후 재산을 가지고 고리대금업과 매춘업을 한다
큰 돈을 모았지만 기부 따위는 절대 안 하고 악착같이 모아 고스란히 아들에게 물려 주고 죽는다
여주인공이라면 사랑하는 남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헌신과 더불어 도덕심이나 애국심도 뛰어나기 마련인데, 그녀는 전형적인 설정을 거부하고 돈이 최고다는 배금주의적 자세를 갖는다
과테말라에서 총 맞아 죽는 이정의 삶 만큼이나 쇼킹했다

그녀의 아버지 이종도는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다
일단 왕족 씩이나 된 사람인 멍청하게 멕시코 이민을 떠난 것부터가 어리석다
그래도 왕족이면 주어 들은 정보라도 있을텐데 어쩜 그렇게 순진하게 가족을 이끌고 생판 모르는 곳으로 가는 노동자들의 배를 탔을까?
그가 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다행히 환경 변화에 민감한 아들 이진우 덕에 먹고 살기는 했지만 평생을 지나가 버린 것에 집착해 산다
일도 안 하면서 아들이 벌어 온 돈으로 밥과 반찬은 제일 많이 먹는다
마치 잘 먹는 게 자신의 유일한 의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무능한 가장들은 뻔뻔함이라도 있어야 버틸 수 있는 걸까?
이종도의 아내가 마야인에게 가 버린 후 책에 묘사된 건 없지만, 아마 폐인이 됐을 것이다
미치지 않고서야 마누라가, 그것도 왕족의 부인이 외국인에게 재가해 버린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는 자존심도 없는 것 같다
조선 시대 선비라면 이런 모욕적이고 불가항력적인 상황에서 자살로써 정신의 고매함을 지키기 마련인데, 이종도는 그마저 실천할 용기도 없이 끝까지 살아 남는다
아마도 그가 피로써 썼을 글들은 현실주의자 아들에 의해 불태워지고 만다
참으로 허망한 인생이다!!

권용준이나 이진우는 현실 순응적인 인물로 나온다
그들은 영어나 스페인어가 권력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빨리 깨닫는다
권용준이야 원래 역관 출신이니 그렇다 치지만, 이진우의 변신은 놀랍다
그는 이른바 왕족인데도 자신이 처한 외국인 노동자의 현실을 받아 들이고 적응하기 위해 노력한다
몰락해 버린 왕족 집안의 무력한 도련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울증까지 있었는데 오히려 생판 낯선 환경이 그에게 힘을 준다
생존에 대한 본능적인 욕구라고 할까?
그는 권용준 주위를 얼씬거리며 스페인어를 주어 담고 결국 통역으로 출세한다
고향에 돌아가기 위해 절대 스페인어를 배워서는 안 된다는 사람도 있는데, 어린 아이의 세상 보는 눈이 놀랍다
결국 이진우는 사업가로 성공한다
멕시코에 있었으면 나았을 것을, 쿠바의 사탕수수 농장에 투자했다가 카스트로 집권 후 아무 것도 건지지 못하고 미국으로 ?겨 온다
이진우나 이연수 모두 돈에 밝고 현실 적응을 잘 하는 사람인가 보다
아버지 이종도 대신 어머니를 닮은 모양이다

멕시코 이주민들의 안타까운 최후를 보면서 차라리 미국으로 건너 갔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래도 미국은 세계 최강국이고 사회가 안정되어 그럭저럭 버티다 보면 밥은 먹고 살 수 있으니까
1세대의 희생을 바탕으로 그래도 2세대, 3세대는 중산층으로 편입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멕시코는 정국의 혼란으로 모두들 불행한 삶을 살았다
인간에게 환경은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조건인 것 같다
이런 걸 운명이라 해야 하나?
이정이 미국으로 못 간 후 혁명군에 참가해서 승승장구 하는 걸 보고 그래, 미국 가서도 노동자로 있을 거라면 차라리 어수선한 멕시코가 기회의 땅이 될 수도 있겠다, 잘 하면 권력도 잡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역시 안정된 선진국이 나을 뻔 했다
처음 계획대로 미국에 갔다면 편안한 여생을 보냈을 것이다
이정은 담력도 세고 세상 풍파를 헤쳐 나갈 능력도 있는 남자인데 (더구나 잘 생긴 사람으로 묘사된다) 어쩌다 길을 잘못 들어 과테말라 밀림에서 총살됐는지, 그의 삶을 생각하면 안타깝다
멕시코 이민선에서도 일본인 요리사들 시중을 들며 먹을 것을 해결하던 사람이 아닌가!!
어린 나이지만 어떻게 하면 먹고 살 수 있을지를 본능적으로 아는 똑똑한 놈이었다
그런데 상황 판단을 못하고 과테말라 용병으로 떠나다니!!
세상 일을 다 알 수는 없는 것 같다

최선길의 캐릭터는 좀 마음에 안 든다
도둑놈이던 최선길이 멕시코에 온 후 천주교도가 되면서 같은 조선인을 학대한다는 설정은 너무 뻔하다
그 상황이 되면, 즉 동료를 배신하고 그들을 감독해야 할 입장이 되면 마음의 부담감을 벗기 위해서라도 더 잔인해지는 걸까?
난 그래도 최선길이 조선인과 멕시코인 사이에서 마음의 갈등도 하고 괴로워 할 거라 기대했는데, 그는 더욱 잔인해진다
그의 농장 주인 이그나시오는 광신도다
종교란 왜 사람을 폭력적으로 만들고 그것에 명분을 부과하는가?
요즘 문제가 되는 이슬람의 테러도 그렇지만 참 안타까운 역사다
이그나시오는 박수 무당에게 마귀를 ?는다고 채찍질을 한다
농장 노동자들에게 채찍질을 하면서도 성당에 앉아 울면서 기도하는 이 모순적인 인간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럴 때 보면 대체 신의 뜻이 무엇인지 헷갈리기까지 한다
여호와 하나님은 질투하는 신, 분노하는 신이라고 했다
그렇다고 이그나시오 같은 뻔뻔한 인간의 행태를 용서해 주실까?
그는 결국 최선길과 함께 노동자들에게 잡혀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다
기가 막힌 최후다
어쩌면 예수와 같은 최후를 맞았다고 기뻐하며 죽지는 않았을까?

멕시코의 인디오들은 대부분 카톨릭으로 개종했는데, 요즘도 사순절이 되면 십자가를 끌고 가서 못박히는 행사를 거행한다고 한다
그 기사를 보면서 광신적인 행위가 거북스러웠는데 책을 읽으면서 그것이 그들의 역사임을 알았다
저자의 설명으로는 인디오들은 카톨릭을 자신들의 종교 형식으로 바꿔서 받아 들였다고 한다
즉 인육을 바치는 제사처럼 해석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마리아 숭배에도 열광한다

조장윤이란 캐릭터도 독특하다
처음 서술로 보면 뭔가 큰 일을 할 것 같은 대단한 사람으로 보이는데, 결국 그가 꿈꾸는 세상이란 박정희식의 독재자 정부였다
문 대신 무가 지배하는 세상, 한 사람의 초인에게 권력이 집중되서 일사분란 하게 일하는 세상 말이다
조장윤은 군인으로 배에서 이정에게 이름을 지어 준 사람이다
그는 멕시코 농장에서 조선인 노동자를 대표해 협상도 끌어낸다
계약에서 풀린 후는 조선인 협회도 세운다
그런데 여기서부터가 문제다
자아도취에 빠진 것이다
그는 심지어 과테말라에 나라를 세울 계획까지 갖는다
그런데 웃긴 건 막상 밀림에 도착하고 보니 자기 계획이 전혀 현실성이 없다는 걸 깨닫고 자기가 데려 온 용병들을 버리고 줄행랑을 친 것이다
훗날을 기약한다는 어처구니 없는 명분을 앞세우면서 말이다
원래 인간이란 이렇게 불완전한 존재인가?
우리가 감탄에 마지않는 영웅이란 어쩌면 환상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원하기 때문에 과장되고 부풀러진 신화 속에 쌓여 있는, 실은 인간적인 즉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이며 사실은 별 능력도 없는 그런 인간이 영웅의 실체는 아닐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밌게 읽은 책이다
문학상 수상할 정도로 작품성이 뛰어난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재밌는 건 확실하다
한 편의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어져도 시청자들 많이 끌 것 같다
일단 혁명이 끼어 드니까 화면 구성이 화려할 것 같다
솔직히 부럽다
이렇게 재밌는 소설 쓰는 작가를 보면 부럽기 짝이 없다
그의 행보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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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04-11-18 2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딴 작가같으면 한 다섯권 이상으로 불려서 질질 끌 얘기를 한 권에 녹여내는 작가의 역량이 참 대단하게 느껴졌어요.또 짧디짧은 문장과 건조한 문체로도 이렇게 입체적으로 얘기를 재미있게 끌고 갈 수 있구나 하면서 감탄했던 작품입니다.

marine 2004-11-19 0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죠 대하소설로 쓸 만도 한데 확실히 요즘은 그런 책은 안 먹히는 것 같아요 솔직히 김영하의 단편들 읽고 좀 실망스럽긴 했는데, 이 책은 정말 재밌어요

하얀달 2004-11-19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상을 참..간편하게 쓰신다는 느낌이 드네요. 참, 솔직합니다.

marine 2004-11-20 0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은 일기 형식으로 쓴 비공개 글을 올린 거라 내면적인 얘기들이 많습니다 좀 부끄럽기도 하네요
 
달의 제단 - 개정판
심윤경 지음 / 문이당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입소문이 괜히 난 게 아니었다
정말 재밌다
전경린의 소설을 읽을 때처럼 참 문장을 잘 쓴다는 느낌이 든다
나는 이런 가지런한 문장이 좋다
열심히 글 쓰는 연습을 했을 이런 문장이 마음에 든다
어쩜 그렇게 곱게 쓰는지, 줄거리와는 상관없이 글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정실이는 초등학교 밖에 안 나온 다리 병신이다
더구나 행랑채에서 일하는 달시룻댁의 딸이다
애를 못 낳기 때문에 더욱 섹스가 부담없다
조씨 문중의 종손인 상룡은 세상에서 가장 만만하고 탈 날 일 없는 하인 같은 바보 여자애와의 섹스를 즐긴다
만약 상룡이 소설에 흔히 등장하는 파렴치한이었으면 차라리 읽기 편했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 소설에 그런 전형적인 캐릭터는 없다
다들 현실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복잡다단한 인물들이다
출생의 비극을 안고 태어난 상룡은 어려서부터 할아버지 위세에 눌려 뭐 하나 맘대로 해 본 적이 없다
연애 한 번 걸어 볼 베짱도 없던 상룡은 군대 갔다 온 후 성욕을 정실에게 푼다

처음에는 상룡의 그 위선적인 행동에 치를 떨었다
아마 대부분의 남자들이 사랑하지 않는 여자와 잠을 잘 때 그런 생각을 할 것이다
온 마음을 뺏긴 여자라면 또 모를까, 대부분의 섹스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상룡이 정실이를 대하듯 그런 마음으로 욕구를 풀 것이다
그런데 상룡은 정실과 살을 섞을수록 그녀에게 빠져 든다
그녀를 무시하고 구박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끌림을 느낀다
결국 그녀가 자신의 아이를 베자 한 번도 대적해 본 일이 없는 할아버지에게 그녀와 결혼하겠다고 선포한다
성욕을 풀기 위해 시작한 일이 어느새 책임감과 애틋함으로 바뀐 것이다
살을 섞다 보면 정든다는 옛말이 바로 이런 경우일까?

조상룡의 할아버지는 종가를 지키는 사람이다
가끔 신문에 전통을 지키는 종가집이 등장하곤 한다
사라져 가는 것을 지키려고 애를 쓰는 모습이 안타까워 관심을 갖고 읽는다
그런데 이 소설을 읽다 보면 그것이 다 얼마나 허망하고 위선적인 일인지 느끼게 된다
무덤에서 발견된 이 집안 며느리의 편지는 대를 잇는다는 명분이 인간의 삶을 어떻게 짓누르는지 생생하게 보여 준다
어은이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종부는 남편과 아들을 잃은 후 자살할 것을 명받는다
하필 출산한  아이가 딸이자 시아버지는 그 딸을 죽이고 며느리는 자살하게 한 뒤 사내 아이와 바꿔치기 해서 그 애로 종통을 잇게 한다
현대 자본주의의 물질 만능주의에 비견될 만한 놀라운 가문 승계 의식이다
돈이 사람을 잡아 먹고 가문이 또 사람을 죽인다
수백년 이어 내려 온 종가라는 것이 실은 이렇게 잔인하게 인간을 죽여 가면서 얻은 명분이라는 얘기다

특별히 이 이야기가 과장된 거라고 보지 않는다
씨받이라든가 남편 따라 죽은 열녀 이야기는 흔하다
조선 시대의 지배 원리는 가문, 종가 이런 거였다
현대 사회가 자본주의에 의해 운영되듯 말이다
그런 거 생각하면 전통 사라진다고 안타까워 할 것도 없다
힘을 잃은 이데올로기는 사라져야 마땅하다
이문열이 붙잡고 있는 문중이란 개념도 다 허망하게 느껴진다

가엾은 손녀딸, 세 살 때 어머니를 잃은 손녀를 금지옥엽 키워 시집보낸 후 첫 아들을 낳아 기뻐하던 친정의 할머니
전화도 안 되던 시절 사람 사서 시댁 눈치 보며 큰 일 있을 때만 편지를 띄우는 조손간의 모습이 애절하게 느껴진다
손녀는 길게 편지를 쓰지만 편지 받는 할머니는 그 인편으로 바로 답장을 줘야 하기 때문에 늘 시간에 쫒겨 짧게 쓴다
얼마나 하고 싶은 말이 많았겠는가!
시댁에서 귀여움 받는다고 마음을 쓸어 내렸을 그 할머니는 외증손이 죽고 손자 사위가 죽은 뒤 임신한 손녀가 시아버지로부터 자진 명령을 받았다는 편지를 받았을 때, 자진하지 말라, 자진하지 말라고 간곡히 써 보내는 그 심정이 오죽 했을까?
그 짧지만 애끓는 편지를 읽으면서 마음이 울컥 했다
아무리 가문이나 문중이 중하다 할지라도 손녀딸이 그것 때문에 죽는 꼴은 못 볼 것이다
비록 그 할머니는 며느리에게 가문을 위해 죽어라 말할 수 있어도 자기 손녀에게는 절대 못할 것이다
가엾은 조선 시대 여인들!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희생자들!
대체 자기 자신보다 더 중요한 가치나 이념이 어딨겠는가?

자기 하나 죽는 것은 슬플 것 없어도 막 태어난 딸까지 죽여 버리는 시아버지의 잔인함에 그만 며느리는 살 의욕을 잃고 만다
그 딸은 사내 아이와 바꿔치기 해 종가의 대를 이어야 하므로 꼭 죽어여 한다
이 잔인한 시아버지와 조상룡의 할아버지와 다를 게 없다
또 딸이라고 낙태하는 부부와 다를 게 없다
대체 대를 잇는다는 게 다 무슨 허망한 일인가?
이데올로기가 인간을 잡아 먹고 있다
자본주의의 황금 만능주의만 인간성을 경시하는 게 아니다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나 공산주의 혁명 등도 다 마찬가지다
왜 이념이 우리를 죽이는가?

조상룡의 할아버지는 무력한 노인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망해가는 종가를 다시 일으킨 능력있는 사람이다
그는 돈과 권력의 향방을 잘 아는 사람으로 큰 돈을 벌어 문중에 투자한다
돈을 그렇게 잘 버는 사람이 왜 전통적인 가치관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지 참 이해할 수 없다
이런 전근대적인 사람에게 돈이 잘 벌리는 것도 신기하다
자기가 워낙 잘난 만큼 무력한 아버지와 사이가 안 좋았고, 역시 무능한 아들도 못마땅해 했다
원래 똑똑한 사람은 자식 못난 꼴을 못 보는 법이다
더구나 우리처럼 혈연 관계가 얽혀 있는 곳에서는 더욱 그렇다
차라리 관심을 끊어 버리면 덜 괴로울 것을, 워낙에 단단한 애증 관계로 묶인 문화권인지라 쉽게 못난 아들을 포기할 수도 없다
그러니 제 마음에 차지 않는 자식을 들들 볶아 조금이라도 고쳐 보는 수 밖에
그러나 그 시도는 늘 불행했다
흔하게 접할 수 있는 부모 자식간의 불행한 이야기들이다

조상룡의 아버지는 결국 생각지도 못한 일탈을 저지른다
서울로 대학을 가서 결혼해 버린 것이다
집안에 아버지의 위엄에 눌려 숨도 못 쉬었을 아들이 아버지를 벗어나 한 여자에게 빠지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그런데 그가 사랑한 이 여자의 캐릭터가 재밌다
그녀는 지고지순한 여자가 아니다
요즘은 팜므 파탈의 요부들이 뜨는 모양이다
조상룡의 어머니는 바람끼 강하고 돈에 밝은 여자로, 미련없이 남편과 이혼하고 아이를 떼어 준다
아마 조상룡의 아버지는 아내의 배신감에 치를 떨다 자살했을 것이다
흔히 소설에 보면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가난하게 살 만큼 둘의 사랑이 단단하기 마련인데, 왠 걸 이 여자는 오히려 이혼할테니 가게 하나 차려 달라고 요구할 정도로 뻔뻔하고 대담하다
억지로 이혼시킨 아버지도 아버지지만, 돈 받고 자신과 아들을 버린 아내에게 더욱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
결국 집으로 내려와 억지 결혼을 한 그는 자살로 배신감과 열패감을 극복한다

아들의 죽음을 보고도 조상룡의 할아버지는 신념을 바꾸지 않는다
정실이 상룡의 아이를 가졌다는 얘기를 듣고 옛날과 똑같은 방식으로 일을 처리한다
정실을 끌고 가 유산시키려고 한 것이다
모든 죄는 내가 다 뒤집어 쓰고 너는 흠없는 길을 걸어가라는 결연한 말도 숭고하게 들리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결국 손자와 종가의 앞날에 도움이 되는 희생적인 행동이라 믿는 그가 어리석어 보인다
결국 그는 제정신이 아닌 손자에게 폭행을 당하고 부끄러운 집안의 과거가 적힌 그 언문 편지를 불태우려다 종가를 지탱하던 효계당 전체를 잃고 만다
불길 속을 빠져 나오길 거부한 그는 죽는 순간 어떤 생각을 했을까?

상룡 역시 화재로 타 죽는 것으론 나온다
정확한 묘사는 없지만 아마도 죽지 않을까 싶다
정실이는 유산이 됐을까?
이미 임신 중반기를 넘어 산달이 가까워지는데 만약 아이를 낳으면 영아 살해가 된다
낙태하기 힘들텐데 제대로 아이를 낳았을까?
그렇다면 그 애가 유일한 종손이 되서 조상룡네 집의 막대한 재산을 이어 받을텐데 불행히도 정실은 그런 이해득실을 따질 만큼 영리하지 못하다
또 그런 순진함이 상룡의 마음을 끌었을 것이다
비록 그 점 때문에 만만하게 생각해서 성욕 채우는 도구로 시작한 일이지만 말이다

상룡은 정실이 다른 남자들에게 성폭행 당한 것을 알고 그녀를 더럽게 여긴다
남자들은 다 그렇다
그 역시 소진이라는 여자애를 임신까지 시켜 놓고서 가엾은 정실의 성폭행에 분노한다
더려운 년이라는 것이다
자기가 한 것은 괜찮고 여자가 하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믿는 이 뻔뻔한 이중성!!
더구나 자신은 정실을 다만 쾌락의 도구로만 생각하지 않았는가?
인간은 왜 이렇게 뻔뻔하고 위선적인지 모르겠다
그나마 정실과 아이에게 책임감을 느끼고 태산 같던 할아버지에게 결혼하겠다고 말한 그 용기를 생각하면, 그래도 아주 나쁜 놈은 아닌 것 같아 다행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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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 지음 / 한뜻 / 199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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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은 일상적인 감정을 철학적으로 분석하는데 탁월한 감각을 가진 사람이다

"생활 속의 철학자"라는 수식어를 붙여 줘도 괜찮을 작가다

"삶의 철학 산책"이라는 에세이에서도 대가들의 철학을 일상성 속에 잘 녹여 놓더니만, 이 책에서도 사랑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감정을 철학적으로 훌륭하게 풀어 놓는다

이 책과 더불어 그의 첫 소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꼼꼼히 읽는다면 다른 연애 지침서는 평생 안 봐도 좋을 듯 싶다

 

이 철학 소설의 주인공은 앨리스라는 24세의 영국 여자다

그녀는 일곱 살이나 많은 에릭이라는 부유한 금융가와 사귀고 있다

(개인적으로 놀라운 것은 에릭이 원래 의사였으나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싶어 금융계로 뛰어들었다는 것이다

의대 6년과 수련 5년을 다하고 군대 3년까지 다녀 와야 비로소 정상적인 의사로 대접받는 우리 사회에 비하면 영국 의사들의 성취는 왜 이렇게도 빠른 것인지!!

우리 나라에서도 의사라는 직업이 예전같은 대우를 못 받고 있지만, 의사가 국가 공무원 신분인 영국 역시 돈을 벌기 위해 금융계로 향하는 현실이 무척 낯설게 느껴진다)

 

지난 번 보통의 소설을 읽을 때도 느낀 것이지만, 영국의 젊은이들에게 섹스는 결혼과 아무 관계가 없는 것 같다

앨리스는 이미 고등학교 때 성관계를 경험한 것으로 나온다

누가 처녀 딱지를 떼 줄 것인가에 골몰하는 장면을 읽으면서, 마치 총각 딱지 못 떼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우리나라 남자들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성에 대한 이중적 잣대 때문에 우리나라의 매매춘이 활발한 것인가?)

앨리스는 에릭과 만난 첫 날, 그와 섹스를 치루므로써 사귀기로 한다

사귄다는 의미가 곧 섹스를 해도 좋다는 뜻인 셈이다

 

에릭은 나이도 많고 돈도 많기 때문에 앨리스와의 관계에서 우위를 점한다

오랫동안 남자 친구가 없던 앨리스는 한껏 비관해 있던 처지라, 신문에 소개된 멋진 레스토랑을 데려가는 에릭에게 완전히 빠져 든다

이 레스토랑의 음식맛에 대한 평가에서 성격이 드러난다

앨리스처럼 타인의 평가에 의해 자신을 규정하는 사람들은 신문의 극찬을 받은 곳이기 때문에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반면 그녀와 함께 사는 친구는 자기가 맛있다고 느낀 곳만 훌륭하다는 평가를 한다

아무리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기사가 실려도 자기가 맛없으면 형편없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다수의 의견에 영향받지 않고 내 눈으로만 세상을 볼 수 있는 주체성을 갖기란, 요즘같은 대중 매체 시대에는 참 어려운 문제다

 

앨리스는 직장 생활에 주는 억압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먼 곳을 휴가를 떠난다

그러나 휴가지에서도 여전히 그녀는 피곤하고 괴롭다

사람들은 흔히 휴가지로 떠날 때 일에 지친 자신은 버려 두고 가길 원하지만, 근심까지 함께 비행기에 싣곤 한다

즉 우리는 여행의 의미를 지나치게 확대해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나 자신을 며칠의 휴가를 통해 근본적으로 바꾼다는 생각 자체가 어리석다

약간의 기분전환은 될 수 있을지라도 결국 나를 둘러싼 일상은 늘 반복되기 마련이다

 

앨리스는 아버지의 직업 때문에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자랐다

그래서 그녀는 전형적인 런던인인 에릭과는 취향이 사뭇 다르다

에릭의 취향은 주류이고 앨리스의 취향은 비주류다

앨리스는 끊임없이 에릭에게 자기 취향의 정당성을 설명해야 하는 당위감을 느낀다

은연 주에 에릭은 비주류 문화권자인 앨리스의 취향을 얕보는 것이다

만약 그들 사이의 주도권이 앨리스에게 있었다면 에릭은 그녀의 색다른 취향을 대단하게 생각하고, 자신의 일반적인 취향이 얼마나 평범한가 따위로 우울해졌을 것이다

 

에릭은 사회적 성취를 중요시 하는 사람이라 앨리스와의 약속을 일 보다 하찮게 여긴다

앨리스와 주말에 만나기로 했어도, 바이어와 약속이 잡히면 그녀와의 약속을 펑크낸다

그는 이것을 당연하게 여기기 때문에 앨리스의 분노를 이해하지 못한다

또 그는 앨리스가 회사에서 높은 지위에 있는 것을 대단히 자랑스러워 한다

그런 까닭에 회사일을 열심히 하는 앨리스는 사랑하지만, 회사일로 징징 대는 꼴은 못 본다

그는 자랑스런 커리어 우먼을 원하는 것이다

 

이 둘의 역학 관계는 앨리스에게 새로운 남자, 필립이 나타나면서 깨진다

고가구를 좋아하는 앨리스의 취향을 에릭이 비웃었기 때문에 그녀는 필립과 전시회장에 간다

그녀는 자신의 자잘한 얘기들, 에릭이 하찮게 여기는 일상의 문제들을 열심히 들어 주는 필립에게 편안함을 느낀다

그리고 자신의 스타일을 존중해 주지 않는 에릭에게 점점 분노를 표출한다

대안이 생기면 당당해지는 법이다

에릭은 그녀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전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했지만, 관성의 법칙에 익숙한 그는 계속 앨리스에게 주도권을 행사하려 들고, 결국 앨리스는 그에게 이별을 선언한다

그 전까지만 해도 에릭 없으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여자가 될 것 같던, 이 타인지향적 아가씨는 이제 에릭의 거드름을 받아 주기에 넌더리가 난 것이다

결국 그녀는 몇 달 후 필립과 식료품점에서 재회한 후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다

이제 좀 더 평등한 관계가 시작될 것임이 분명하다

 

타인의 평가를 가장 중요시 여기는 앨리스라는 캐릭터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특히 여성의 경우 자신의 능력을 과소평가 하고 남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애쓴다

이런 여성이 자신보다 우월하다고 생각되는 남성을 만날 경우, 주도권을 상실한 채 불평등한 관계가 되는 건 뻔한 수순이다

보통은 정체성을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또 어떻게 그것을 성취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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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11-16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재밌게 읽은 책이에요.

가끔 들러서 리뷰 곶감 빼먹듯 하나씩 읽어보겠습니다.
 
빵굽는 타자기 - 젊은 날 닥치는 대로 글쓰기
폴 오스터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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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의 자전적 소설이라고 하는데, 소설인지 자서전인지 구분이 안 간다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스티븐 킹은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냈는데, 오스터 역시 자기 얘기를 하면서도 허구적인 소설이란 생각이 든다

1인칭 시점을 즐겨 쓰는 그의 스타일 때문일까?

자신의 이름이 등장하긴 하지만, 자기 얘기가 아닌 또 하나의 소설을 읽는 기분이다

 

"빵 굽는 타자기"라는 제목이 참 독특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 의미를 되새겨 보니 상당히 슬프다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돈을 벌기 위해 글을 써야 하는 슬픈 현실을 빗대는 말이 아닐까 싶다

지금이야 미국의 대표적인 소설가가 되어 우리나라에 번역된 책만 해도 10여 권이 넘는 인기 작가인데, 그에게도 살기 위해 글을 써야 하는 처참한 과거가 있었던 모양이다

스티븐 킹 역시 "캐리"로 뜨기 전까지 고등학교 교사와 세탁소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힘들게 생계를 유지한 전적이 있는데, 글로 생계를 유지하기까지의 과정은 참으로 험난한 것 같다

데뷔작이 바로 인정받는 운 좋은 작가들에 비하면 불행하지만, 여전히 먹고 살기 위해 잡문들을 대량 생산해 내야 하는 가엾은 작가 예비군들에 비해서는 대단한 행운인지도 모른다

좋은 작가가 되기 위해서 능력은 전제 조건일 뿐이다

실력 있는 작가들이 편집자의 눈에 발탁되어 대중에게 읽혀지기를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다

오스터나 스티븐 킹 정도면 대단히 성공한 소설가들인데, 이들에게도 무명 시절은 혹독했으니 성공은 쉽게 움켜 쥘 수 있는 만만한 것이 아닌 게 분명하다

 

이 책을 읽으면 오스터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전형적인 캐릭터들이 사실은 작가 자신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뉴욕 3부작"에 등장한 팬쇼의 유조선 생활은 오스터 자신의 젊은 시절이었고, 파리 체류 역시 그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탐정 소설을 쓰는 퀸이라는 캐릭터도 실은 오스터 자신이다

그의 소설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미친듯이 책을 읽고 현실을 떠나 고립된 삶을 즐기는 은둔자도 바로 오스터 자신의 모습이다

컬럼비아 대학을 졸업하고 야구를 좋아하는 건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소설과 현실의 차이는 곧 등장한다

소설에서는 현실 감각이 부족한 주인공이 운명적인 사람을 만난 후 곧 물질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지만, 현실에서는 이런 일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오스터가 유명한 소설가로 성공하긴 했지만, 그건 순전히 피땀 어린 노력 탓이지, 그의 소설에 흔히 등장하는 운명적인 구원자 덕은 아니다

말하자면 우리 삶에 행복한 우연이란 흔히 찾아오지 않는다는 얘기다

 

컬럼비아 대학을 중퇴한 오스터는 파리로 건너가 번역일을 하며 책 읽기에 몰두한다

베트남 징집을 피하기 위해 학교로 돌아온 후 졸업한 그는, 유조선에서 식당일을 하면서 돈을 모은다

하루에 두 세시간만 일을 하면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시간을 보내야 하는 단조롭기 그지없는 생활이 그에게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이상적인 삶이었다

노동 시간을 최소화하고 생계에 지장을 안 받으면서 책 읽는 시간을 최대화 시킬 수 있는 삶!!

(배에서의 생활은 "뉴욕 3부작"에서 거의 똑같이 묘사된다)

오스터의 소설을 읽다 보면, 풍부한 고전 인용에 깜짝 놀라게 되는데 그 왕성한 독서력이 그 배 안에서 완성된 모양이다

컬럼비아 대학 시절에도 그는 미친듯이 책을 읽었다고 쓴다

스티븐 킹도 지적했지만 훌륭한 소설을 쓰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은 불타는 독서열인 것 같다

(킹은 트레드밀 위에서도 책을 읽는다!!)

 

졸업 후 좋은 번호를 추첨해 징집을 피한 오스터는 파리로 건너가 그 때부터 생계를 잇기 위한 비참한 삶을 산다

유조선에서 모은 돈이 바닥난 후 먹고 살기 위해 미친듯이 글을 써야 했다

그의 타자기는 훌륭한 작품을 쓰기 위한 창작의 도구가 아니라, 먹고 살기 위해 잡문을 대량 생산해 내야 하는 "빵 굽는 타자기"로 전락했다

결혼 후 아이가 생기면서 그는 더욱 비참해진다

자기 혼자 먹고 사는 것도 힘든데, 무려 세 명의 입을 책임지게 됐으니 그 무력함과 막막함이 얼마나 컸을까!!

 

그런데 참 이상한 게 있다

오스터는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아버지가 죽은 후 많은 유산을 상속해 글쓰는 일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왜 그의 부모는 그를 돌봐 주지 않았을까?

독립하면 부모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지 않는 그들의 사고방식 때문일까?

결국 오스터에게 많은 재산이 상속된 걸 보면, 달리 유산을 나눠 가질 사람도 없고 아버지가 죽기 전까지 꽤 부자였던 모양인데 왜 아들이 세일즈맨으로까지 전락해 이혼하도록 방치해 둔 걸까?

부유한 아버지를 두고도 내일 먹을 것을 걱정할 정도의 절대 가난을 겪어야 하는 그 시스템이 신기하다

 

글쓰기에 지친 오스터는 최후의 수단으로 야구 게임을 만들어 판다

그가 얼마나 야구를 좋아하는지 잘 드러나는 일화다

그런데 이 "액션 베이스볼"은 한 마디로 시대 착오적인 게임이다

보드 게임이 새롭게 유행하고 있긴 하지만, 컴퓨터 게임에 익숙한 어린이들에게 카드 게임을 판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는 카드 그림까지 직접 그리는 성의를 보이며 장난감 박람회에서 바이어들을 설득하지만 모욕만 듣는다

바이어들 앞에서 열심히 카드를 늘어 놓고 게임을 하지만, 몇 분 하지도 않고 나가라는 매몰찬 말을 들을 때 그 패배감과 수치심이라니!!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모를 것이다

그의 첫 탐정 소설 "스퀴즈 플레이" 역시 편집자들로부터 수모를 선사한 애물단지였다

요즘 세상에 누가 탐정 소설을 읽느냐는 식이다

 

어쨌든 그는 성공했다

이혼 후 새로 결혼도 하고 쓰는 책마다 비상한 관심을 이끌어 내며 이 먼 한국땅에도 수많은 매니아들을 만들어 냈다

그는 스스로 현실 감각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했지만, 그것을 능력으로 채울 수 있는 운 좋은 사람임이 틀림없다

전업 작가가 되고 싶었지만 먹고 살기 위해 억지로 글을 써야 하는 끔찍한 삶이 싫어 아마추어로 남기로 한 소심한 나에게, 소설가들의 치열한 삶은 늘 흥분을 불러 일으킨다

한 번에 이룬 것이 아니라 고통의 삶을 견뎌 낸 뒤 마침내 성취한 것들은, 객관적인 평가를 떠나서 훨씬 더 위대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천재는 평범한 사람들의 질투를 받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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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sh0903 2005-01-24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용을 전부 설명하는건 쫌......-_-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반양장)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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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씩 정독해야 할 책이다

이런 철학적이고 직관적인 책을 겨우 25세의 어린 나이에 썼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대체 나는 25세 때 뭘 하고 있었을까?

사랑이라는 이름이 가려주는 유치하고 치졸한 감정에 휩싸여 정체성을 잃고 방황했을 뿐이다

저자가 철학을 전공하고, 또 가르치는 사람이긴 하지만 그의 경력보다는 오히려 그의 성향과 관계있는 것 같다

사랑의 실체를 파헤치는 그의 철학적 소설을 읽으면, 우리 안에 숨겨진 위악성과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강한 이기주의, 혹은 나르시즘을 보는 기분이 든다

은희경 소설을 읽을 때의 느낌과 비슷하다

소설의 형식을 빌려 사랑과 철학에 대해 쉽고 간결하게, 그리고 탁월하게 멋진 해석을 제공한다

꼭 소장하고 싶은 책이다

 

이 책의 주인공 "나"는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옆자리에 앉은 클로이를 보고 한 눈에 반한다

"나"는 그녀가 데이트 신청을 받아 줄지 어떨지에 관한 심각한 고민의 시간을 보낸 후, 마침내 정식으로 사귀게 된다

유럽 사람들은 성에 대해 참 솔직하고 화끈하다

겨우 24에 불과한 처녀가 첫 데이트 후 상대가 마음에 들자 자기 집 침대로 데리고 간다

가벼운 굿바이 키스를 남기고 점잖게 돌아서려는 남자에게 클로이는 멋진 한 마디를 날리며 그를 붙잡는다

"우린 더 이상 어리지 않잖아"

섹스를 통한 사랑이 가능한 나이라는 뜻이다

 

아직도 처녀막 재생술이 성행하고 동거 커플을 백안시 하며 (당장 TV 드라마만 봐도 동거에 대한 인식을 확인할 수 있다 "옥탑방 고양이"를 두고 동거를 일반화 시켰다고 비판하는 신문 기사나, 동거했던 과거 때문에 마음 졸이는 한가인이 나오는 "애정의 조건"을 보라!!) 여전히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처녀성 신화가 넘쳐나는 대한민국에 사는 젊은 여자들에게, 클로이의 한 마디는 쇼킹할 수 밖에 없다

모든 문화권에는 나름의 터부들이 있기 마련이지만, 성에 대한 이중 잣대는 사라져야 마땅할 덕목이 아닌가 싶다

또 주인공 "나"는 클로이가 담배 피우는 모습을 좋아하는데, 다른 여자는 피워도 상관없지만 내 여자 친구는 안 된다는 한국 남자들의 이중성과 분명한 대비를 이룬다

심지어 여자가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워도 되는가의 논쟁이 붙을 정도니, 그저 한숨이 나올 뿐이다

 

클로이와 "나"는 서로의 집을 왔다 갔다 하면서 동거에 들어간다

같은 공간에 사는 것을 동거라 정의한다면, 확실한 동거는 아니다

사실 어찌 보면 이게 더 편안한 관계인지도 모른다

동거나 결혼이나 법적 구속력만 제외하면, 거의 비슷한 정도의 부담감을 가지고 있다

모텔 대신 서로의 집을 오가면서 데이트를 즐길 수 있는 관계라면, 좀 더 친밀하고 안정된 관계를 이룰 수 있을 것 같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나"는 클로이의 모든 면에 반한다

그러나 함께 살다 보면, 혹은 상대에 대해 좀 파악하고 나면 자신의 얼마나 근거없는 환상에 시달렸는지 금방 알게 된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에게 부족한 면을 상대에게서 발견하고자 한다

실제 상대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도, 이상화 시킨 뒤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상대의 본모습을 알면,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다

상대는 그저 일관된 모습으로 같은 자리에 있었을 뿐인데, 나의 환상이 나를 사랑에 빠지게 하고, 또 실망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나"는 클로이의 구두에 화를 내지만, 정작 같은 구두를 신은 우유 가게 주인에게는 아무런 적대감도 느끼지 않는다

사랑에 빠지면 그의 취향까지도 내 스타일로 만들고 싶은 어처구니 없는 소유욕에 시달리기 마련이다

연인의 사소한 일상까지 규제하려고 드는 독재적인 태도에 대한 단 하나의 근거는, 내가 너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 뿐이다

그렇지만 그런 소유욕이 없다면, 특별한 관계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분석도 빼놓지 않는다

 

"나"는 결국 클로이에게 버림받는데, 이별을 극복하는 과정은 흡사 새로운 정체성을 찾는 것과 같은 길고 괴로운 시간이었다

클로이를 사랑하면서 그녀가 자기 삶의 일부가 됐다는 얘기는, 그녀가 떠나면 자신의 일부도 무너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나"는 클로이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의 새로운 자아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고군분투 한다

(앤서니 라빈스가 말한 바로 그 신경회로를 끊는 과정일 것이다 클로이에게 길들여진 신경회로를 말이다)

저자는 자아 정체성에 대한 탁월한 해석을 내리는데, 누구와 함께 있든 혹은 어떤 상황에 처하든 변하지 않는 내적 안정감이라고 정의한다

"나"는 처음 클로이와 데이트 할 때 그녀의 취향에 맞추기 위해 서스럼없이 거짓말을 하며 불안해 한다

모든 신경이 오로지 클로이에게 쏠려, 정작 자기 자신을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나의 취향을 드러내기는 커녕 그녀에게 맞춰 급조해 내는 것이다

어떤 자리에서든, 누구와 함께든 나 자신에 대한 변함없는 안정감과 평화를 가질 수 있다면 아마 그는 도를 터득한 사람일 것이다

 

"나"는 클로이게 버림받은 후 자살을 시도하는데, 여기에는 양립할 수 없는 모순이 존재한다

클로이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 그러므로써 그녀가 다시 돌아오기 위해 스스로를 죽이려 들지만 정작 그녀가 돌아온다 해도 이미 나는 세상에 없다

그녀의 뉘우침을 받아들이려면 나란 존재가 숨쉬고 있어야 하는데, 자살하면 나는 존재하지 않고 반면 그녀를 돌아오게 하려면 내가 죽어야 한다

결국 "나"는 비타민제를 몽땅 털어 넣었다가 뱉어내는 어리석은 과정을 통해 이 모순을 깨닫고 다른 전략을 택한다

 

그것은 "예수 컴플렉스"라 명명할 수 있는데, 클로이를 나쁜 여자로 나는 선량한 희생자로 만드는 것이다

여태까지는 내가 부족하고 못나서 모든 게 완벽한 클로이가 자신을 떠났다고 믿었지만, 이 컴플렉스를 적용하면 "나"는 어리석은 클로이에게 배신당한 가엾은 순교자가 된다

예수를 못박아 죽인 유태인들처럼, 클로이는 "나"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내 친구인 윌에게 가 버린 것이다

기독교가 번창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이 순교 정신에 있다고 한다

옳은 것을 이야기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그를 핍박해 죽임으로써, 거룩한 순교자가 되어 역설적으로 사람들의 동정을 샀다는 것이다

(좀 불경스럽지만) 만약 예수가 나사렛에서 책상을 만들다가 죽기 전 진리에 대한 책 한 권을 썼다면, 과연 사람들이 그의 사상에 열광했겠냐는 얘기다

 

사실 이런 식의 아전인수 격 논리는, 이별을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일 수도 있다

친구와 바람나 미국으로 떠나 버린 애인을 두고 자기 비하에 빠지는 것 보다는, 오히려 그녀를 나쁜 여자로 만들고 나는 희생자라 위로하는 게 정신 건강에 훨씬 이로울 것이다

그녀는 떠나갔지만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는 "나"는 끊임없이 자신이 부족한 인간임을 상기시킴으로써 스스로를 학대한다

헤어진 연인을 잊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떠나간 파트너가 얼마나 형편없는 인간인지를 되새기는 게 현명한 처사다

(소설에서 "나"는 클로이가 없는 쓸쓸한 크리스마스를 지내기 위해 책을 몽땅 싸 들고 호텔로 들어가는데, 기회가 되면 나도 한 번 시도해 보고 싶다)

 

저자는 이런 "나"의 심리에 내제된 이기적인 심리를 잊지 않고 지적해 준다

칸트는 도덕적 명령을 수행하는데 있어, 결과보다 중요한 것이 동기라고 했다

결과가 좋으면 과정이 정당화 되는 공리주의와는 달리, 칸트는 그 행동을 취한 내적 동기가 불순하면 결과가 좋더라도 칭찬받을 수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나" 역시, 나 자신의 감정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클로이를 사랑한 것이므로 그녀가 "나"를 배신하고 떠났다 해도 그녀를 도덕적으로 비난할 처지가 못 된다

"나"나 클로이는 각자의 감정 욕구에 가장 충실히 부합되는 파트너를 찾았을 뿐이다

그녀를 헌신적으로 사랑했다고 자부하는 "나"의 동기가 실은 클로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의 만족감을 얻기 위해서라면, 특별히 내가 클로이 보다 도덕적으로 나을 것은 없다는 얘기다

 

어쨌든 "나"는 남녀간의 사랑 자체를 무의미하게 여기는 금욕주의에 빠지기도 하고, 사랑이란 어린 시절 부모에게 충족되지 못한 욕구를 채우기 위한 과정이라 믿는 낭만적 실증주의에 경도되기도 하지만, 결국 이런 이론들이 허망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금욕주의는 사랑이 주는 고통을 현명하게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그저 피할 따름이고, 낭만적 실증주의 역시 원인을 찾는다고 해서 해결책까지 주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성간의 사랑이 주는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대신, 새로운 연인을 찾으므로써 다시 용감하게 사랑에 대항한다

"나"가 이번에는 보다 현명하게 처신할 것은 분명하다

인간은 경험을 통해 성장하는 법이니까

 

이 소설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대목은, 연인의 단점을 커버하기 위해서는 유머가 필수라는 문장이다

이거야 말로 연인 사이를 원만하게 유지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라 생각되는데, 인간이 어쩔 수 없이 나르시즘에 빠져 사는 동물이라면 아무리 사랑이란 이름을 포장한다 해도 나보다 열등해 보이는 상대의 단점들은 눈에 띄게 마련이다

차이점을 나보다 못하다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런 중요하지 않은 결점들을 참고 넘어가려면 문제를 심각하게 의식하지 않는 지혜가 필요하다

"나"가 클로이의 구두에 대해 불평을 늘어 놓자 그녀는 창 밖으로 구두를 던져 버리는데, 그 후 그들은 상대의 취향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마다 "날 창 밖으로 던지지는 말아 줘"라고 애교를 부린다

연인 사이에 유머 감각을 유지할 수 있다면, 실상 심각하게 고민할 일들은 아주 적어질 것 같다

 

이 소설의 진정한 매력은 연인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을 통해 인간의 근본적인 생각과 감정들을 철학적으로 끌어냈다는데 있다

그 흔한 남녀간의 사랑을 얘기하면서도 저자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칸트 같은 대철학자들의 이론을 쉽게 인용한다

동화를 통해 철학을 쉽게 설명하는 기분이다

사랑을 하는 사람이라면, 혹은 근본적으로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꼭 한 번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인간에 대한, 혹은 "우리"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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