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설 - 하 열린책들 세계문학 51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송태욱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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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다 읽었다.
무척 분량이 긴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쉬운 글쓰기의 전형을 보여 준 책이라 정말 편하게 읽었다.
지하철에서는 보통 집중이 잘 안 되서 가벼운 책만 읽게 되는데 이 책 덕분에 지루한 줄 모르고 며칠을 다녔다.
역자 후기를 읽어 보니 노인이 며느리의 발을 빠는, 좀 엽기적이고 변태적인 성욕에 관한 소설들을 많이 썼다고 한다.
상당히 에로틱한 걸 좋아하는 작가 같고, 문득 떠오르는 사람이 마광수씨였다.
그런데 또 세설은 그런 류의 소설은 전혀 아니라 역자의 말대로 약간 예외적인 책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서사성이 정말 풍부하고 어찌 보면 아무 것도 아닌 일상적인 이야기로, 마치 일일연속극을 보는 것처럼 네 자매의 가정 생활과 혼담을 중심으로 어쩌면 이렇게 맛깔스럽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지 저자의 기술 능력에 감탄하는 바다.
특히 간사이 지방의 풍속과 자연, 말투 등을 애정어린 눈으로 묘사하여 실제 일본 사람들이 읽는다면 자기 고장에 대한 애향심이 굉장하게 생길 것 같다.
정작 작가 자신은 도쿄 태생이고 재혼한 아내가 오사카 유명 상인의 딸이었다고 한다.
이 아내에 대한 사랑이 세설을 탄생시킨 게 아닐까 싶다.
젊은 시절 어떤 기생을 좋아했는데 이미 그녀는 다른 남자의 연인이 되버려서, 대신 그 동생과 결혼을 했는데 의외로 동생은 너무 정숙했기 때문에 작가의 미움을 받았고, 그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던 수하의 문인이 그녀를 사랑하게 되고, 작가는 아내 양도 각서 이런 걸 써서 신문에 내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런데 또 나중에는 다시 아내를 돌려 달라고 하고, 하여튼 보통 사람이 아닌 것 같다.
에로티시즘은 그다지 흥미는 없지만 어쩐지 이런 대가가 쓰는 소설은 천박하지 않고 고상한 맛이 있을 것 같다. 

네 명의 자매 중 가장 현대적이고 과감한 다에코는 신분이 다른 사진사 이타쿠라와 결혼하려고 했으나 뜻밖에도 그가 유양돌기염 수술을 하다가 사망하고 만다.
사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너무 화가 났었다.
명백한 의료사고이고 최소한 의사가 도의적인 책임이라도 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가난하고 시골 출신의 못배운 부모 때문에 항의 한 번 못하고 오히려 잘못을 숨기려는 의사에게 쫓겨나기까지 한다.
가끔 병의 경과가 나쁜 코스로 갈 수 밖에 없는 경우인데도 소송을 걸어 의사를 죽일 놈 취급하는 경우를 보고 기가 막힐 때도 있지만, 소설 속의 이런 경우를 보면 약자를 위한 사회안전망이 있어야 할 것 같다.
다에코가 결혼을 한 상태로 이타쿠라가 사고가 났다면 적어도 다에코 집안에서라도 소송을 걸지 않았을까?
하긴 다에코 역시 사산을 하고 원장이 직접 자기 실수였다고 말을 했는데도, 언니 유키코가 오히려 실수를 인정한 원장에게 고맙다고 말을 할 정도니, 1930년대 일본의 현실에서 전문직인 의사를 상대로 소송을 거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의사가 높은 신분이냐면 그것도 아니다.
유키코의 맞선 상대자 중 한 명은 독일에 유학까지 갔다 온 내과 의사이고 제약회사의 중역에 있는데도, 유키코를 높은 신분의 사람으로 생각한다.
일종의 전문직이지 사회적으로 귀족층은 아니었던 것 같다.
독일과의 교류가 많은지 유학갔다 온 사람들도 자주 등장하고 독일인 이웃도 나온다.
여자들을 중심의 이야기라 그런지 모르겠으나 의외로 중일전쟁이라 2차 대전 얘기는 많이 나오질 않는다.
다에코는 이타쿠라가 사망한 후 자신을 쫓아다니는 오쿠바타케와 헤어지기 위해 바텐더의 아이를 임신한다.
그것도 혼전에!
사실 유키코의 경우 맞선 상대와 말 한 마디 제대로 못 나눌 만큼 내외를 심하게 하고 답답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다에코의 혼전임신은 나로서도 놀랍다.
그러고 보면 옛날 시대가 배경인 소설에서 지금 정서로는 이해가 안 가는 일도 그 당시로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세대마다 가치관과 도덕관이 다르기 때문에 시대가 다른 우리가 그 당시 등장인물들을 100% 이해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전이 가치가 있는 것은, 이런 시간의 흐름을 이겨내고 여전히 감동과 재미를 주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내 다음 세대는 혼전임신이 왜 이슈가 되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는 재밌는 일화들이 있다.
사치코의 딸 에스코가 성홍열에 걸렸는데 무려 40여 일을 집안에서 격리되어 지낸다.
전염병이긴 하지만 요즘에는 딱 하루만 항생제 쓰면 전염력이 사라지고 열만 떨어지면 3~4일 내로 퇴원할 수 있다.
항생제가 보편화 되기 전이라 그런가?
그것도 간호사를 따로 입주시켜 병 간호를 하게 하다니, 인건비가 굉장히 쌌다는 걸 알 수 있다.
식모들도 많이 나온다.
사치코 집안이 몰락한 상인 가문임에도 부리는 사람들이 몇이나 등장한다.
특히 오하루의 경우, 다에코가 이질에 걸려 설사할 때 요강을 버리는 것은 물론 심지어 대변 처리까지 해 준다.
아프면 당연히 그럴 수 있지만 가족도 아닌 일하는 사람이 이런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한다는 게 참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가정부라기 보다는 몸종 느낌이 든다.
다에코가 이질에 걸려 죽게 생겼는데 수액을 놓지 않고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헤매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요즘 같으면 이질에 걸릴 위험도 거의 없지만 만약 실제로 이질에 걸렸다면 항생제를 쓰고 당장 병원에 입원해 수액 치료를 할 것이다.
그러고 보면 돈 천 원도 안 하는 수액이 얼마나 많은 탈수 환자를 살리는지, 현대의학에 참으로 감사할 일이다.
일본은 꽤 근대화 되고 잘 사는 나라로 나오는데도 환자 치료가 저 정도라면 식민지 치하의 조선 사람들은 과연 제대로 된 의료 혜택을 받았을지 답답하다.
하여튼 잘 살고 볼 일이다. 

유키코는 과연 누구와 결혼을 할지 궁금했는데 뜻밖에도 서자이긴 하지만 화족의 아들과 혼인을 한다.
이것도 참 재밌는 게, 딱 한 번 사진으로 얼굴을 본 후 남자 쪽에서는 이미 결혼을 하기로 마음을 정했다는 사실이다.
요즘 같으면 정말 상상도 못할 일인데 집안을 미리 조사해서 큰 하자가 없고 사진이 마음에 들면 벌써 맞선을 보기도 전에 하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하긴 옛날에는 얼굴도 안 보고 시집 갔으니 그나마 본인 의사를 물어 보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책이 시작할 때 서른 셋이었던 유키코가 서른 다섯에 시집을 갔으니, 지금 시대로 봐서도 꽤 나이가 들긴 했다.
그래서 선 보는 사람들이 죄다 애 딸린 상처한 남자들이었나 보다.
심지어 유키코는 전처 자식이 귀여웠으면 좋겠다는 조건까지 미리 내건다.
결혼 상대자인 미마키는 비록 화족의 지위는 계승하지 못했으나 어쨌든 지체 높은 집안 자식이고 미국 유학도 다녀온 엘리트에다가 초혼이니 오래 기다린 보람이 있었던 셈이다.
문제는 일정한 직업이 없다는 것.
유키코가 결혼 후에 일어나는 얘기를 후속편으로 써 봐도 참 재밌을 것 같다.
어쩌면 사랑을 찾아 결혼한 다에코가 가장 잘 살지도 모르겠다.
더군다나 다에코는 양제 기술도 있으니 네 자매 중 제일 다이나믹한 삶을 살 것 같다. 

너무 재밌게 읽은 소설이고 일본 소설에 대한 편견을 바꾸게 했다.
내친 김에 이 작가가 현대어로 번역했다는 겐지 이야기도 읽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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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깨비 2016-01-16 0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으면서 꼭 일일연속극 보고 있는 느낌이었는데 같은 소감을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댓글을 남겨봅니다. 이야기를 여기서 끝내지 않고 쭉 이어서 대작으로 갔다면 어떨까 아쉬워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