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재밌는 연애 소설을 읽은 적이 있던가?
소설을 안 좋아하기 때문에 근래 읽어 본 기억이 별로 없다
이 소설은 마치, 고등학교 때 수업 시간에 선생님 몰래 책상 아래 숨겨두고 읽었던 로맨스 소설 같다
물론 그 재미나 수준은 하이틴 로맨스 소설과는 비교할 수도 없다
그러고 보면 나는 옛날부터 로맨스 소설을 별로 안 좋아했다
신데렐라에 대한 환상이 없어서인지, 도무지 소설 속의 모든 완벽한 조건들에 동화되지가 않았다
완벽하게 아름다운 주인공, 뭐든 척척 잘 해내고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다만 돈이 없다는 게 유일한 흠인데 그것마저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난 돈 많고 성격 좋은 남자가 채워준다
대체 이런 일이 현실에서 가당키나 하냔 말이지...
그런 거부감 때문에 완벽한 주인공이 등장하는 소설은 언제나 흥미 밖이었다
그런데 이 소설은, 정말 너무 완벽하게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제인 에어, 과연 그녀는 19세기 영국의 일반적인 여인이었을까?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현대적이고 너무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친다
정말 이렇게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여자가 19세기에도 가능했을지 나로서는 참 신기하다
내가 생각하는 당시 여자들은 매일 파티에 나가서 부잣집 남자 고르는 게 지상 최대의 목표던지 (오만과 편견에 나오는 리즈의 어머니처럼) 아니면 먹고 살기 힘들어 노동에 치여 사는 그런 피폐한 여자들 뿐이었다
내 상상력의 빈곤인가, 아니면 시대를 앞서가는 샬롯 브론테의 놀라운 창작력인가?
그녀 역시 사립학교를 세우려고까지 한 걸 보면, 평범한 여성은 아니었던 것 같다
또 결혼도 죽기 1년 전, 그러니까 서른 여덟 살에서야 한 걸 보면 아마도 독신으로 살 결심도 했을 것 같다
말이 나온 김에 그녀의 일생을 잠깐 훑어 보면, 목사의 셋째 딸로 태어났으나 위로 두 언니는 기숙학교에서 죽고 만다
제인 에어에 나오는 로우드 학교가 바로 이 기숙학교를 모델로 한 것이라고 한다
로우드 학교는 빈민구제를 목적으로 세워진 자선 학교인데 형편없는 식사와 엄격한 규율 때문에 학생들이 숨막혀 하고, 발진 티푸스가 돌자 절반 이상의 학생들이 사망한 끔찍한 학교다
아마도 그녀는 자신의 경험에 기반해 로우드 학교를 창조해 냈을 것이다
전염병에 취약할 수 밖에 없는 당시 현실을 이해는 하지만, 기숙생들의 발육에 지장을 줄 정도로 형편없는 식사를 제공하는 자선학교는 문제가 있다
더구나, 그 이사장은 학생들을 굶기는 것이 극기를 배울 수 있는 길이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심을 키우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샬롯 브론테는 종교적 근본주의자, 혹은 원리주의자들이 얼마나 위험한지 여러 대목에서 보여 준다
무조건 하나님을 갖다 붙이면 된다는 생각, 인간 사회의 관습이나 상황 등은 초월할 수 있다는 어처구니 없는 망상, 정말 치떨리게 싫다
또 이런 생각들이 중세 암흑기를 낳고 종교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던가?
그렇지만 따지고 보면 소설 속의 근본주의자들만 비웃을 게 아니다
우리 역시 명분과 논리에 휩싸여 마치 그것이 반드시 지켜내야만 하는 지고지순한 것이라도 되는 양 상대방을 공격한다
얼마 전 알라딘에서도 확인한 바이다
특히 정치적인 논쟁이 붙었을 때 나중에는 대체 저런 쓸데없는 말싸움을 왜 하나, 싶은 생각이 든다
말을 위한 말,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투쟁, 알맹이는 하나도 없는 껍데기들, 그러나 상대의 가슴에는 비수가 되는 날카로운 언어들...
내가 제인 에어를 매력적으로 생각하는 까닭은 그녀의 날카로운 지성과 독립심 때문이다
보통 소설 속 주인공들은 아름다운 외모가 기본 조건이라도 되는 양, 하나같이 예쁘고 눈부시다
그러나 샬롯 브론테는 제인 에어에게 눈부시 외모 대신 강인한 의지를 부여한다
벌써 이것부터가 얼마나 현대적인지 모르겠다
외로워도 슬퍼도 절대 울지 않고 오히려 괴롭히는 사람들을 사랑하기까지 하는, 현실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상상적인 캔디 캐릭터가 요즘도 난무하는데, 제인 에어는 부당한 처사에 단호하게 대응한다
또 그런 이유로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받지 못했다
한 살 때 양친이 죽은 후 외숙모 집에서 구박을 받고 살았던 중요한 이유는, 먼저 그녀의 외모가 예쁘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쉽게 기가 죽지 않았다는 점 때문이다
솔직히 나도 그렇다
귀여운 애가 말을 안 들으면 그래도 귀엽게 봐 줄 수 있는데 못생긴 애가 떼를 쓰면 정말 얄미워 쥐어 박고 싶어진다
아마도 반항할 수 없는 어린 아이라는 사실 때문에 무자비한 억압을 쉽게 생각해 낼 것이다
제인 에어는 남의 집에 더부살이 하는 주제에 못생기고, 거기다가 어른들에게도 자기 주장을 펴는 당돌한 꼬마애니, 천성적으로 귀여움 받을 운명이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그녀는 외숙모와 사촌들의 구박에 못 이겨 로우드 자선 학교로 떠난다
그러나 그 학교에서 받은 육 년의 교육은, 제인을 훌륭한 숙녀로 변모시키고 (비록 식사는 형편없었지만) 2년 간 교사로 일할 수 있게 도와준다
다시 한 번 교육의 힘이 얼마나 큰지 실감했다
만약 그녀가 외숙모 집에서 계속 구박덩어리로 자랐다면 아마도 성깔만 있는 형편없는 여자로 전락했을 것이다
제인은 매우 강한 여자다
로체스터와의 결혼식 날 아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녀는 단호하게 돌아선다
가정교사로 근무하면서 얻은 월급, 결혼식 때 받기로 한 패물을 모두 버려둔 채 조용히 몸만 빠져 나간다
비록 로체스터의 아내가 갇혀 지내는 광인이고, 또 그가 제인을 몹시 사랑했지만 정부로 사는 것은 그녀의 도덕 기준에 어긋난다
과연 나라면 미치도록 사랑하는 남자를 단지 도덕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단념할 수 있을까?
그것도 결혼식 바로 직전에 말이다
더구나 제인은 가진 게 하나도 없는 가난뱅이고 로체스터는 비록 스무 살이나 많긴 하지만 매우 부유한 신사다
또 이 두 사람은 서로를 너무나 갈망한다
오, 제인, 넌 정말 대단하다
나라면, 나였다면 절대로 포기하지 못할 것이다
사랑 앞에서 이성을 유지하기란 얼마나 힘든 일인가?
차라리 돈 앞에서 양심을 지키는 편이 쉬울 것 같다
제인이 로체스터의 재산은 단 한 푼도 갖지 않고 그의 집을 빠져 나간 후 죽음 직전의 기아에 허덕인다
나중에 그 얘기를 들은 로체스터는, 비록 나와 결혼하지 않더라도 떠난다는 얘기나 하고 갔으면 내 재산의 절반을 떼어 줬을텐데 왜 말 없이 갔냐고 원망한다
로체스터로서는, 자기 목숨만큼 사랑하는 여자가 돈 한 푼 없이 낯선 곳에서 헤맸다는 사실이 너무나 괴로웠을 것이다
그런 걸 보면 제인이 얼마나 순결하고 도덕적인지, 금방 알 수 있다
그녀로서는 로체스터를 떠나는 이유가, 그의 조건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하고 싶었을 것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로체스터의 호의에 기댄다면, 자기 양심에 비춰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했ㅇ르 것이다
어쨌든 너무 순결한 이 아가씨는, 생판 모르는 곳에 버려진 후 사흘간 기아에 허덕이다 죽기 직전까지 간다
너무 배가 고파 음식점에 들어가 구걸도 해 보지만, 그것도 해 본 사람이 한다고 입도 떨어지지 않았을 뿐더러 누구도 그녀에게 음식을 내주지 않는다
더구나 비바람이 몰아치는 숲 속에서 잠을 자다 보니 생명의 위협까지 느낀다
샬롯 브론테는 이 죽음같은 기아와 공포를 너무나도 생생하게 묘사한다
난 지금도 굶어 죽는다는 말을 실감하지 못한다
풍요의 시대에 당연한 말이겠지만, 소설을 읽으면서 너무 무서워 소름이 쫙 끼칠 정도였다
정말 내가 동전 한 푼 없이 거리에 버려진다면 나에게 한 끼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해 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친척도 아는 사람도 단 한 명도 없는 낯선 곳이라면?
당장 외국 땅을 생각하면 된다
만약 내가 영국 땅에 버려진다면?
아, 정말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하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고, 또 그것이 얼마나 고마운지를 잊고 지낸다
2권으로 이루어진 두꺼운 책이라, 나는 제인이 로체스터와 맺어질 지 아니면, 원리주의자 세인트 존과 맺어질지 못 견디게 궁금해 몇 번이나 마지막 장을 열어 보고 싶어 안달이 났다
그렇지만 소설의 재미를 반감시킬 수는 없으므로 꾹 참고 또 참으며 다음 장을 넘겼다
솔직히 나는 로체스터와 다시 연결될 줄은 몰랐다
내가 알고 있기로는, 제인이 선교사와 결혼해 떠난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돌아가는 분위기가 이건 아닌데, 싶어 고개를 갸우뚱 하면서 읽었다
그녀의 외사촌으로 밝혀진 세인트 존은, 비록 그리스 조각상처럼 잘 생겼지만, 인도로 선교 사업을 떠나겠다는 생각 밖에 없는 원리주의자 목사다
가끔 나는 선교 사업하는 분들이 위대해 보이면서도 그 열정이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했었다
이런 말 함부로 하면 그들에 대한 모욕일 수도 있겠으나, 세인트 존 같은 원리주의적인 열정이 어느 정도는 작용할 것 같다
원리주의의 특징은 신념이 너무 강하다 보니 모든 것을 그 신념에 맞춰 해석하고 남을 재단한다
쉽게 말해 나에게 그렇게 엄격하다면 타인에게는 얼마나 엄격하겠는가?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타인에게는 관대하라는 격언은, 사실 지키기 어렵다
왜냐면 인간은 보통 하나의 잣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남과 나를 구분해서 보기가 매우 어려운 까닭이다
하나의 프리즘으로 세상을 보기 마련이다
만약 제인이 신앙심 때문에 인도로 선교 사업을 떠났다면 아마도 세인트 존의 그 강압적인 신심에 부응하느라 너무 많은 일을 한 나머지 일찍 죽었을 것이다
제인은 몹시도 가냘프고 작은 여인으로 나온다
어쩌면 샬롯 브론테의 분신인지도 모른다
이 가엾은 작가는, 서른 여덟에 결혼한 후 임신한 채 그 다음 해 죽고 만다
그녀 역시 목사와 결혼한다
현명하게도 제인은, 세인트 존의 강압적인 신심에 함몰되지 않고 용감하게 로체스터를 찾아 떠난다
이미 눈이 멀고 한 팔을 잃은 불구였지만, 아내가 죽은 후였기 때문에 제인은 떳떳하게 그와 결혼하고 아이도 낳는다
최고의 번역이라는 광고 문구가 부끄럽지 않을 만큼 문장이 참 매끄럽다
그리고 작가 자신이 반어법이라든가 심리 묘사를 참 잘 구사한다
문장 실력이 보통이 아닌 것 같다
인간의 이중적인 심리라든지 위선적인 부분을 어찌나 잘 꼬집어 내는지 허걱 놀래면서 밑줄을 그은 부분이 많다
위트가 풍부하고 특히 위선적인 행동을 풍자하는 솜씨가 놀랍다
그리고 매우 신심이 깊었을 것 같다
문장에 인용되는 성경 어구들이나 전체적인 내용을 볼 때 아마도 작가의 신앙심이 많이 투영된 듯 하다
또 이런 신앙심이 일반화 된 사회였기 때문에 제국주의의 팽창과 더불어 선교사들도 많이 파견됐을 것 같다
가난뱅이 제인이 있는지도 몰랐던 외삼촌의 재산을 갑작스레 상속해서 부자가 된 점만 빼 놓고는, 별다른 우연의 요소도 없고 모든 설정이 훌륭하다
또 부자가 된 것을 두고, 이제 나도 독립적인 여자가 됐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독립적인 여자, 남편이나 친척의 재산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여자, 이렇게도 명쾌한 부자의 정의가 또 있을까?
제인은 갑자기 생긴 2만 파운드를, 그의 또다른 외사촌들 세 명에게 공평하게 분배한다
요즘 물가로 계산해 보면 만약 나에게 20억원의 유산이 느닷없이 생겼는데 만난지 한 달 밖에 안 된 사촌들에게 5억씩 나눠 줄 수 있을까?
그런데 내 동생들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그들에게 갖는 신뢰감과 애정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 것이다
제인 역시, 그 사촌들이 자신이 누구인지 모를 때 기아로 죽어가기 직전 구해준 후 따뜻한 애정을 베풀어 줬기 때문에 선뜻 나머지 만 오천 파운드를 건네 줬을 것이다
사촌 중 한 명인 세인트 존은, 갑자기 부자가 됐는데도 그것에 휘둘리지 않고 공평하게 분배하는 모습에서 더더욱 선교사로서 적합할 거라고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구애했다
이런 제인의 태도야 말로 그녀를 인격적으로 훌륭하게 만드는 점이다
너무 재밌게 읽고 많은 생각을 한 책이다
아마도 제인 에어라는 캐릭터는 앞으로 내가 살아갈 날들의 좋은 멘토가 돼줄 것 같다
19세기 영국의 소설가가 이렇게도 현대적인 강인한 여성 캐릭터를 만들어 냈다는 점이 정말 놀랍다
샬롯 브론테에게 찬사를 보내는 바다
더불어 유종호씨의 번역도 정말 훌륭했다는 점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