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책을 읽은 건 아닙니다..

책 읽어주는 팟캐스트에서 들었지요.

서간문인줄 몰랐습니다.. 김영하가 서간문 소설이라니 뭔가 어울리지 않네 하는 것이 첫 생각이었습니다. 어딘가 신경숙의 <풍금이 있는 자리>를 닮았고 김애란의 <서른>이 떠올랐습니다.

여성분이 낭독해서인지 아니면 주인공 화자가 여성이어서인지 여성적이라고 느꼈습니다.

 

세상에 흥미로운 부녀지간이구나 하며 듣고 있는데 자꾸 이상하다는 느낌이 드는 겁니다.

물론 정상이라고 볼 수 없는 관계이긴 하지만 그냥 정상이 아닌 독특한 경우라고 하기엔 뭔가 불편하고 유쾌하지 않았습니다. 관계가 답답하고 소극적이어서인가 했는데 그것때문만은 아닌거 같더군요.

뭐랄까 화자는 딸이고 딸이 자신의 입장에서 아버지와의 관계 가족의 이야기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는데, 분명히 딸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데 도데체 그 딸의 모습이 잡히지 않는 겁니다

아버지는 차라리 뚜렷하게 보였습니다.

자신만만하고 이기적이고 여성편력도 있고 그러면서 어린아이같은 면도 있는  한마디로 대책없는 유형이구나 하는 게 딱 왔어요. 젊어서 자기가 원하는대로 살고 나이 먹어서도 철들지 않은 영원한 피터팬처럼 살면서 보여지고 보여줄 수 있는 것에 집착하는 사람이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 딸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왜 정작 말하고 있는 사람은 보이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는걸까?

남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대도 말입니다.

자기를 드러내지 않은 건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 아니면 드러내는 법을 몰라서

아니 어쩌면 자기가 어쩐 사람인지 어떤 존재인지를 몰라서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딸은 그냥 아버지의 딸 그 이외의  존재감은 없었으니까요

그렇다면  왜 그렇게 아버지에게 벗어나질 못했지?

다른 가족이 하나 둘 아버지 곁을 떠나고 아버지가 다른 평범한 아버지와 다르고 자기와의 관계조차 평범한 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왜 그렇게 복종하고 따랐을까 의문이었습니다

배울만큼 배웠고 알만한 건 다 알고 있을  성인인데 말입니다.

 내 입장에선  한없이 어리석고  미련하고 어떤 면에서는 무책임해보였습니다.

어떻게 저렇게 완벽하게 아버지에게 길들여질 수 있을까?

딸은 아버지와 둘이 떠난 유럽 여행에서도 아버지의 기이함을 느낍니다.

혼자서 거리를 걸어보고 싶다는 말에 화를 내던 아버지 . 이국의 역에서 만난 한국 대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눴다는 걸로 냉담해지는 아버지는 분명 정상은 아닙니다.아직은 어린 딸을 걱정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그런 식으로 표현하지는 않지요. 그렇다고 그 아버지가 딸을 이성으로 좋아하는 건 아니었습니다. 그냥 내 딸이라는 인식이 '내 것'이라는 소유와 일치외면서 모든 것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따라주길 바라고 있는 것이라 보였습니다.

그 지점도 편하질 않은데 어떤 저항도 없이 그대로 따르는 딸이 더 불편했습니다.

자유로운 대학생활을 동경하지도 않았나? 이성에 대한 호기심도 없었나?

물론 아버지와의 테이트 외식등이 더 고급지고 더 편리하다는 걸 알지만

그 또래 딸이라면 아버지가 주는 물질적 풍요로움도 이용하면서 한편으로는 나의 자유도 갈망하고 달콤한 사랑도 꿈꾸지 않을까요?

딸의 모든 기준은 아버지이고 아버지와의 생활이 삶의 중심입니다.

물른 짐작하다시파 사회관계는 점점 좁아지고 사람들이 멀어지고 가족마저 모두 떠나고 혼자 아버지와 남게되죠. 그 아버지 역시 딸에게만 집중하진 않습니다.

끊임없이 다른 여성을 만나고 추문을 만들고 딸은 자기의 성공한 하나의 장식정도로만 여기는 걸 뻔히 알지만 딸은 오히려 아버지의 기대에 못미친다는 것에 죄책감마저 느끼고 미안해합니다.

중간에 아버지로부터 벗어나야겠다고 동생과 엄마가 있는 미국으로 달아나지만 결국 다시 돌아와 아버지의 임종을 홀로 맞이합니다. 결국 죽음으로 아버지와 분리되는 거죠

누군가는 스무살에 누군가는 더 늦더라도 살아서 해내는 일을 그 딸은 죽음이 와서야 비로소 독립아닌 독립이 되고 성장 아닌 성장을  시.작. 하.려.합.니.다.

 

어린 왕자의 <길들여진다>는 건 참 매혹적이고 따뜻한 의미였습니다.

서로가 관계를 맻고 의미가 되며 그래서 세상이 더 넓어지고 풍요로워지는 것이지요

그러나 <오직 두 사람>에서의 길들여짐은 조금 끔찍합니다. 서로가 겹치며 확장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거 포함되어져서 그러니까 먹혀서 비로소 하나가 되어버리는 의존적이고 식민지의 형태로 길들여집니다.

아버지가 정한 전공과 아버지가 정해주는 진로를 따라가지만 자기의 것이 아니니 늘 남의 옷처럼 어색하고 엉뚱한 별에 떨어진듯 적응할 수 없습니다. 누

딸은 아버지를 통해 세상을 보고 사람들을 만나고 자기의 꿈과 가치관을 결정합니다.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인지 하지 않은것인지 자꾸 혼돈스럽지만 어쩌면 하지 않은게 더 편해서 하지 않음을 선택했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서서히 온도가 올라가는 냄비속이 편하다면 개구리는 굳이 밖으로 나갈 이유가 없지요. 그 냄비속의  개구리처럼 딸은 조금씩 조금씩 아버지에게 젖어가고 익숙해지고 그 바깥의 세상은 알지 못하게 됩니다.

인질이 자기를 잡고 있는 자에게 동화되는 스톡홀롬 신드롬처럼 보일 뿐입니다

제가 이해할 수 없는 건 그 여행 이전에도 그 딸은 아버지에게 이미 길들여졌던 걸까요? 아니면 여행을 통해 어떤 전환점이 되고 아버지에게 종속도어버린걸까요?

아버지는 아내나 다른 가족은 (또 하나의 딸이 더 있는데)  관심이 없었을까요?

다른 가족은 아버지가 이상하다는 걸 알면서 왜 그 딸을 그냥 두었을까요?

다 듣고 나니 (읽은 책이 아니니) 여행전 엄마의 말이 참 섬뜩합니다.

지금 여행을 가지 말고 나중에 동생 수험생활이 끝나면 그때 함께 가는게 어떠냐고 딸에게 말을 하던 엄마에게 딸이 지금 여행을 가겠다고 말했을때 엄마가 그러죠

정확한 워딩은 아니지만

 " 이건 니가 선택한거야" 라고..

아직 미성년자이고 미숙한 딸에게 선택을 묻고 책임을 지워버리는 말 참 무서웠습니다.

그 말 이후 딸은 선택을 하지 않음을 선택해버린걸까요 그리고  다른 가족은 두 사람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선택을 해버린거구요

 

소설의 첫머리에 아무도 모르고 오직 두 사람만이 알고 있는 언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더 이상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없고 그 언어를 배운 사람이 없이  그 언어를 오직 두 사람만 알고 서로만 사용합니다. 오직 두 사람만이 관계를 맺고 서로가 서로의 모든 세상이며 의지처입니다. 무심하게 듣기 시작했던 그 부분이 마지막에 다시 반복되면서 이것역시 끔찍해졌습니다.

왜 그들은 세상 다른 타인의 언어를 배우려고 하지 않을까?

두 사람의 언어로 두 사람이 대화하는 것도 하면서 동시에 조금 더 세상을 넓혀보려고 하지 않으까? 왜 한 사람이 사라진다면  남은 한사람은 영원히 고립되어버리는 삶을 선택할까?

아니면 다른 이에게 자신의 언어를 가르쳐주지 않았을까?

두 사람만의 관계 그것으로 만족해버려서일까요?

아니면 타인들의 무관심때문일까요?

내가 어쩌면 그 딸의 입장이 아니니 이해하지 못하는 나의 문제인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불편했던건 아버지의 독재보다 그렇게 길들여지고  복종하게 되고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 것 생각은 하더라고 행동하지 않는 딸의 모습이었습니다.

아무런 의심도 없고 질문도 없고 다른 호기심도 없을 수 있을까?

그런데 그건 꼭 그 화자만은 아닐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도 익숙하고 편안한 무언가로부터 안정감을 느낀다면 다른 건 굳이 알려고 하지 않은 경험이 많지 않을까요? 나의 선택들이 어떤 면에서는 익숙하고 안전한 무언가를 기준으로 했던 것일 수도 있고 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누구나 그럴 수 있는 거죠.

그렇게 안전한 무언가가 있다면 다르 세상에 대해 알고 싶어지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누군가에게 다가가ㅗ 이해하고 이해받는 과정을 다시 되폴이 하고 싶지 않거나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거나...

나랑 언어가 통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굳이 다른 사람을 또다른 행동이나 노력으로 사귀거나 알고 싶지 않은 그 런 마음도 있다고요..

위험하고 불길한 건 좁은 울타리에 갇히는 일이고 동시에 자기가 갇혀 있다는 걸 모르고 있는 것이고 더 나아가 알지만 굳이 나가고 싶지 않아하는 무기력함입니다.

 

이 단편이 불편하고 불안했던 건 알고  익숙한 것들에 안주하게 되면 언젠가 이렇게 서서히 길들여져서 어떤 의문도 없이 내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때문이었습니다.

언제나 편안하고 익숙하게 있지 못하고 끊임없이 의심하고 질문하고 따져야 하는게 아닐까 하는 조바심과 언젠가 내가  익숙하게 퍼질러 있다가 수렁에 빠져 있게 되는 나를 발견할지 모른다는 강박이죠.

세상을 의심하고 아는 사람을 다시 보게 되는  어디서도 긴장을 풀 수 없는 상황이 이 세상이라는 경고가 빨간 점등과 함께 깜빡이면서 내가 쑥 들어와버렸습니다.

 

이제 아버지가 죽고 딸은 혼자가 됩니다.

그 딸은 이제 스스로 살아가야 할테고 어떤 시도도 할겁니다.

많이 불안하고 상처받을테고 돌이킬 수 없는 실패로 주저앉을지도 모르겠네요

그 딸이 무엇보다 내가 누구이고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를 먼저 들여다 보고 자기를 이해하고 자기와 친해지면 좋겠습니다. 다시 성장기가 되어 자아를 찾는 과정을 경험하기를 말입니다.

 

소소하고 별 이야기 아닌 짧은 이야기가 섬찟할 수도 있다는 묘한 경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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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처음 읽었을 때는 흥미로웠다.

그저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만 전전긍긍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와 가해자의 심리를 알아가려고 애쓰는  면이 좋았다. 그냥 형사나 탐정이 아니라 심리학자니까 사건을 해결하는 것이 주 된 관심이 아니라 왜 그런 일이 생겨났는지 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고민하는 조 오로클린이 매력있었다.

 

저번에 읽었던 미미 여사의 스기무라와도 닮은 점이 있다.

아름답고 자기에겐 과분한 아내가 있고 딸이 있는 아버지이고 (스기무라는 한명이고 올로클린은 두명이다) 자기 나름의 핸디캡이 있다. 올로클린은 파킨슨 병에 걸렸다는 것과 아내가  가장노롯을 하는 것 그래서 아릅답고 유능한 아내를 노리는 남자들이 많지 않을까 전전긍긍이고 스기무라는 자기로서는 도저히 꿈도 꿀 수 없는 대재벌의 딸과 결혼했으니 언제 내쳐지더라도 당연하다는 마음을 가지고 산다.

인간적인 결험을 가지고 있는 탐정이란 늘 매력적이다.

홈즈나 포와로같은 완벽함을 갖춘 탐정이 아니고 힘으로 밀어붙이며 무조건 범인을 잡는대만 혈안이 되어 있는 형사도 아니다.

그들은 그저 평범한 소시민이고 한 가정의 가장이고  우연히도 또는 어쩔 수 없이 사건이 연관되면서 그 사건으로부터 벗어나질 못한다. 그건 책임감이기도 하고 개인적인 사명일 것이다.

 

조 올로클린이 매력적이라는 건 반박할 수 없지만

그의 작품을 내리 세편을 읽으면서  피로감을 느낀다.

사건을 해결하는 인물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올로클린이나 그의 가족들이나 그를 도와주는 몸이 먼저 행동하는 빈센트나 냉정하려려는 베로니카까지 모두 매력이 있다.

다만 사건들이 너무 힘들다.

굳이 이렇게 여자들을 납치하고 살해하고 강간하고  수치감을 줄 필요가 있었을까?

왜 매번 사건들에서 여자들이 그것도 아직 여리고 순수하고 약하기만 한 소녀들이 희생이 되어야 하는지  조금 다른 사건을 다룰 수는 없었을까

겨우 세권을 읽었기 때문일까 다른 책에서는 다른 사건이 일어났을까

너무 많이 불편했다.

굳이 그렇게 피해자에게 치욕과 부끄러움을 안겨야 했을까

꼭 대상이 소녀들이어야 했을까

강간하고 희롱하는 장면들 발가벗고 있다는 묘사들이 꼭 들어가야 했나?

 

올료 클린이 심리학자이다 보니 피해자나 가해자의 심리적인 분석이 많이 치중을 한다.

사실 내면을 파고 들어가고 그의 사연을 듣다 보면 타당성이 없는 행동이 있을까

부모에게 학대를 받거나 심한 폭력에 노출되었거나 그로인한 심각한 트라우마를 겪고  잘못된 행동을 익히고 삶의 패턴을 가지게 된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렇게 된 사연엔 충분히 공감하고 이해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으로 도덕적으로 그렇다고 타인을 죽이고 해치고 폭력을 휘두르는 일이 용서가 될 수 없다.

물론 책에서 그들을 용서하지 않는다. 어떤 경우든 타인을 죽어기나 폭력을 행사하고 삶을 망가뜨리는 일은 처벌이 뒤따른다.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가해자를 이해하려고 하는 마음이 때로는 피해자에게 폭력이 되기도한다. 사실 욜로클린조차 자기 가족이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은 동안은 타인에 대해 냉정하게 판단하고 모두에게 사정이 있다고 배려한다. 심지어 그의 가족이 인질로 잡혔을 때 겨우 가정폭력에서 벗어난 가해자의 아내와 딸에게 존재를 드러내달라고 부탁하는데 겨우 피해를 벗어나 (물론 불법적인 방법이지만 ) 안정을 찾는 가족에게  가해지는 이차 폭력이란 생각이 든다.

내 아픔을 해결하기 위해 타인의 아픔은 그냥  가벼워지나?

물론 그 가족의 이기심도   불편하지만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나에겐 또 이해가 되니

모든 이해관계가 얽히고 설키면 도데체 정의란 무엇이고 도덕이란 무엇인지 헷갈려버린다.

 

무기력한 피해자의 모습도 불편했다.

세권의 책을 읽으면서 그럴 수도 있겠다. 불안 할 수 있겠다. 이 사람을 믿어야 하나 믿지 말아야 하나 혼란스러운 상황일 수 있겠다. 오랜 시간 감금당하고 학대받는 공포속에 있다보면 무기력해질 수 있겠다고 공감갔던 부분이 세번째 책에 오면서 아이의 위험이 부모에게 얼마나 큰 공포인지 알지만 그렇다고 저렇게 맹목적으로 따를 수 있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런 일이 있다는 걸 알고 난 후에도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있을까

뭐 보이스피싱사기만 해도 뭘 그런 거에 속나 싶지만 많이 배우고 이성적인 사람도 순간적으로 착오를 하게 하고 공포감에 떨게 되고 그 순간이 지나면 아차하게 된다고 한다.

그러니 그럴 수 있지만  그럼에도 모든 피해자가 여성이고 연루되는 것도 여성이며 무기력하게 끌려가는 것도 여성이라는게 많이 불편하다.

조 올로블린이 상하고 다정한 인물이지만 그는 많은 인간적 실수를 저지르고 잘못된 길로 내달리기도 하지만 결국은 히어로처럼 모든 일을 해결해낸다. 짠!!! 만진창이가 되지만 그는 결국 영웅이된다. 소녀를 구하고 여인은 구하고 그들에게 자상하다.

그의 보호아래에서는 어떤  두려움도 없다.

 

결국  올로클린도 별거를 하게된다.

3편을 읽는 동안 이혼은 하지 않고 아직 서로에 대한 감정이 남아있지만 아내는 과감하게 별거를 선택한다.

한때 남편이 자신의 부정을 의심해서만이 아니다. 남편이 늘 사건을 몰고 다녀 불안해서만도 아닐것이다. 그 모든 것 뒤에 나를 믿어주지 않고 불안하게 바라보고  무작정 자기 기준으로 보호하려고만 드는 남편에게 지친건 아니었을까

내가 누군가의 사명감에 휩쓸리게되고 내가 나 자신으로 사는 일에 미안해지는 일이 자꾸 반복되면 그냥 모든 걸 포기해버리고 싶었을거다. 내가 먼저 서기 위해서...

또 다른 이기심인지 모르겠지만 경찰에서는 왜 그렇게  조 욜로클린을 불러내는지 알 수 없다.

살해현장이나 범인 검거과정에 그를 불러낸다는게 이해가 안된다.

그냥 누군가의 심리적 면담이 필요한 경우에만 호출하면 되는게 아닌가?

그리고 가족이 그렇게 말리는데도 기어이 사건에 뛰어드는 주인공도 이해하고 싶지 않다.

이기적이라고 해도 할 수 없다.

 

맞고  납치되고 강간당하고 살해당하는 여성들

연약하고 불안한 소녀들을 내리 읽고 나니

누가 억지로 읽게 한 것도 아니지만   도데체 나한테 왜이러세요 하는 마음이 한가득이다,

뉴스에서는 내 아이또래의 소녀들이 치누를 잔인하게 린치하고 사진을 찍고 자랑하듯 공개하는 사건이 전국에서 빵빵 터지고 있고 인터넷 한 구석에서  조그맣게 그럼에도 연일 빠지지 않고 올라오는 가족간의 성폭력 부부간의 성폭력문제 데이트 폭력  학교에서의 성추해등등은 올라오는데 여기는 그 마음을 안아주는 조 올로클린도 없는데 .... 그래서 더 화가 나고  부들부들거리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다.

그의 잘못은 아님에도 가장 만만하고 사람좋은 그에게 화를 퍼붓고 있는 중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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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일영 옮김 / 북스피어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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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기무라는 소위 행복한 사람이고 남들이 충분히 부러워할만한 사람이다.

예쁜 아내와 딸이 있고 안정된 직장이 있다. 게다가  누구나 다 아는 대 재벌이 장인이다.

때문에 남자 신데렐라라고들 하지만 정략적인 결혼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고 선택한 결혼이며 결혼으로 인해 처가쪽의 권력다툼에 끼어들지도 않았고 어쩌면 차라리 맘편하게 회사의 중심축이 아닌 주변부인 홍보실에서 근무하면서  편안하지만 오래오래 다닐 수 있는 든든한 보험을 지닌 셈이 되었다.

통속적으로든 일반적으로든 충분히 행복하고 팔자 좋은 사람이다.

 

그런 스기무라가 사건에 뛰어들어 사람들의 뒤를 조사하고 문제를 고민하고 풀어내는 일은 좀 의외이긴 하다. 사건이라고 하기에도 소소한 일들이고 또 스스로가 문제를 풀겠다고 주체적으로 뛰어들었다기 보다는 장인의 거절할 수 없는 의뢰로  책을 출판하는 일을 도와준다고 시작했지만 사람들 사이의 불편한 기색이나 감추는 모습들을 예민하게  느끼면서 사고는 사건이 되고 그 주된 사건과 다른 사건이 줄줄이 드러난다.

 

스기무라는 참 예민한 사람이다. 남의 감정에 쉽게 이입되고  그 마음에 어쩔줄 몰라하며  끊어도 상관없을 관계를 계속 이어간다. 개인적인 궁금함도 물론 포함되어 있겠지만 사람을 쉽게 잘라내지 못하는 성격도 한몫한다. 그저 책을 내겠다는 자매의 바램에만 촛점을 맞추었다면 그냥저냥 책을 내고 끝났겠지만 두 자매의 갈등을 포착하고 감추어진 비밀에 대한 호기심이 더해지고 인간에 대한 예의가 첨가되고 누군가의 아픔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연민이 뿌려진다. 그렇게 계속 사건의 깊은 곳으로 점점 다가간다. 알지 못해도 상관없을 일들을 알게 되고 나랑 관계없는 비밀을 알지만 그 비밀을 관계자에게는 절대 말할 수 없는 상황을 알게 되고 혼자 괴로워하지만 결국 혼자 다 짊어지고 자기 속에만 남겨놓기로 한다.

스기무라는 좋은 사람일까?

다정한 남편이고 아빠이고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다정하다.

항상 상대방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고 그 사람의 입장에 맞춰주고 스스로 늘 행복하고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런 스기무라의 속에는 깊은 갈등도 있다.

자기의 행복이 언제까지 지속될까 하는 불안감. 자가기 받은 행운에 비해 자기가  지탱할 수 있는 운의 총량은 단지 음료컵 크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전전긍긍하기도 하고 그 작은 컵이라도 소중히 해야겠다고 마음 먹기도 하며 하루하루를 산다.

결혼으로 인해 본가에서는 죽은 사람이 되어버렸고 (물론 형제와는 연락을 하지만) 처가에서도 구석자리에 만족할 줄아는 절제만 보인다.

그는 한편으로는 행운아이지만 한편으로는 굉장힌 불행하다.

본인의 선택이지만 뿌리째 뽑혀서 새로운 토양에 뿌리를 내려야하는 운명이다.

결혼으로 환경이 바뀌고 직장이 바뀌고 처신해야하는 자세가 달라진다.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누구와도 친하지만 퇴근후 함께 술잔을 기울일 동료가 없고 옛친구들은 이제 서먹하다.

참 좋은 사람인데... 참 우울하기도 하고 어둡기도 한 스기무라를 본다.

그가 사건에 빠지고 사건을 위해 동분서주하게되는 건 어쩌면 모든 걸 가졌지만 텅 비어버린 마음속을 채우기 위해서란 생각을 한다.

내게 필요하지만 내가 없어도 그렇게 흔들리지 않을 가정이나

이젠 남처럼 되어버린 본가나

언제 내쳐져도 이유가 있을거라고 생각되는 처가와 회사가 아니라

오로지 내가 해낼 수 있는 내 일이 갈급했을것이다.

사건을 마주치고 관계자를 만나고 그들을 위로하고 마음을 알아주는 일은 오롯이 스기무라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사건이 별볼일 없이 시시하다고 해도 끝까지 해낼 수 있는 건

스기무라가 가진 성실성도 한몫하지만 그가 가진 텅 빈 마음이 큰 탓이다.

 

예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 건... 스기무라 시리즈가 회를 거듭하면서 어쩌면 나도 스기무라를 그저 팔자좋은 생활밀착형 탐정이라고만 생각했던 것이 착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희망장>을 읽으며 이혼하고 작은 사무소를 연 스기무라가 참 행복해보였다.

물론 이혼하고도 좋은 관계를 이어가는 가족이 아직 있고 나름 본가와도 관계가 다시 괜찮아졌기도 하겠지만 이제 스기무라가 누구에게 맞춰줄 필요없이 오롯이 자기 모습 그래도 살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탐정이라기 보다는 직장인 처럼 성실하고 상담가처럼 타인의 마음에 잘 공감해주는 스기무라

무심하게 읽었던 전 작들에서 작고 소소하지만 절대 사라지지 않을 불안속에 살고 있는 스기무라를 다시 본다.

비현실적인 좋은 사람이라 조금 정이 안가긴 하지만..

그래도 그가 이제 행복해졌다는 생각을 그의 첫 등장작에서  알게 되었다.

 

사족이지만...

세상이 각박하고 뉴스에서 현실같지 않은 사건사고가 연속일 때

차라리 이렇게 소소하고 시시한 사건을 심각하게 파해치는 이야기가 위로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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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9-04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범하고, 행복하게 지내고 있을 때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감하기 힘들어요. 우리 사회에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너무 많습니다. 그게 터지고 나서야 우리는 폭탄이 생겼고, 터진 원인을 알기 위해 분해된 폭탄 파편들을 파헤칩니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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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장편은 처음 읽는다.

그의 수필을 주로 읽었고 단편은 대부분 읽었다.

그를 싫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다.

사실 소설보다 에세이가 좋다고 생각해왔다. 그냥 소소한 일상적인 이야기가 부담이 없어 좋았고 <먼 북소리>의 경우는 소장하고 몇번을 읽었었고 최근 < 여자없는 남자들> 은 응? 나이가 들어서인가? 하루키 소설이 좋구나 하는 생각을 했고 <소설가의 일>에서 그냥 인간 하루키가 꽤 존경할만한 부분이 있구나 생각했다.

내가 나이를 먹었기때물일거다. 나이를 먹으면서 다시 읽거나 혹은 예전엔 미뤄두었던 책을 읽게 되면  의외로 괜찮구나 하는 경험을 많이 하는 중이다. 그리고 반짝하는 천재는 이미 나랑 정말 상관없는 일이 되고 보니 무언가의 분야에서 오랫동안 견뎌온 사람들이 존경스럽다. 하루키는 그런 유형이다. 그래서 좋아하게 되었다.

이젠 하루키의 장편에 도전할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최근 작품이면서 길지 않고 사지 않아도 도서관에서 빌려 읽을 수 있는 책.... 으로 이 책을 골랐다. (모든 조건에 들어맞는다)

오후에 빌려와서 그냘 밤에 다 읽었다.

오래 곱씹어야 할 부분이 눈에 띄이지 않고 몇 번을 읽어야 이해가 되는 부분도 없고 별 일 아니면서 단순하고 또 궁금증을 유발하는 부분도 있어서 도데체 왜 그랬대? 그때 그 녀석들은? 하는 마음으로 계속 읽어나갔다. 그리고. 아.... 하고 책을 덮으며 이젠 장편은 읽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슬쩍 했다. 개인적으로 단편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유일하게 소유하는 소설 < 여자없는 남자들> 이나 다시 읽어보기로 한다.

 

#1

홍상수 영화가 떠올랐다.

어쩌면 소심하고 찌질한 주인공 다자키 쓰쿠루씨는 스무살에 고등학교 시절 절친인 고향 친구들에게 절교를 당한 후 그 이유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받아들인다. 받아들였으면서도 동시에 너무 상처를 받아서 죽음가까이 갔다가 다시 삶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잊고 살아간다. 아니 잊고자 하며 살아왔다. 아니 살아가려고 애썼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으면서

그러다 2살 연상의 여자를 만났고 그 여자에게 과거를 고백하고

여자가 말한다. 과거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우리 사이에 무언가가 끼어들어있는 듯한 껄끄러움이 남는다. 문제를 해결하라...

츠쿠루씨는 그렇게 다시 옛친구들을 만나 그때 왜 그랬느냐고 물어본다. .. 이유는.. 사실 김빠진다. 뭐 고등학생에게는 절실할 수도 있었던 문제였지만 모두가 그렇지 않을거라고 생각했다면서 누구도 먼저 츠크루에게 연락하지 않았고 츠쿠루 역시 사실을 알지도 못했으면서 그냥 그대로 덮어버렸다. 오해도 아니고 그렇게 상처받은 시간들

친구들은 왜 이제야 연락하냐고 ... 하나같이 반가워하고 너를 의심하지 않았다고 하고 너가 가장 강했었다고 말하고 니가 가장 멋지다고 하고... 색채가 없는 무존재감이라고 느낀 츠쿠루는 당혹해하지만 그걸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어정쩡하니.. 아 문제가 해결되었구나 생각하고 연상의 연인에게 고백하기로 결심하지만 혹시 그녀에게 있을 더 멋지고 편안한 남자에 대해 끊임없이 걱정하는 것  

딱 찌질한 남자의 방황기 성장기다. 더구나 여자의 조언이나 도움없이는 한걸음도 내디딜 수 없는 자랄 수 없는 손이 많이 가는... 그러면서 욕구는 왕성한 남자이야기.

상실감이나 연결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찌질하고 소심한 남자가 여자의 도움으로 겨우 강을 하나 건너서 아주 조금 성장하고 있다...끝 

 

 

# 2

결국 그런 이야기로군 하고 책을 덮고 자리에 누웠는데 자꾸 걸리는 부분이 있다.

초반에 나는 분명 이야기에 빠졌다.

물론 초반은 흥미로웠다. 왜 도데체 츠쿠루씨가 다섯명의 완벽한 친구그룹에서 배척을 당했는지 이유가 너무 궁금했다. 이유를 말하지 않고 이유를 묻지도 않고 그냥 그렇게 끝! 이라니....

너무 잔인하다.

무조건 이제 절대 우리 누구에게도 연락하지마.

이렇게 잔인한 말이 있을까?   그것도 갓 스무살에게.....

츠쿠루씨가 친구들에게 연연하는 성격은 아닌것 처럼 보이지만 어느 순간 뒤통수를 맞는듯한 배신감은 분명 있었을 것이다. 어떤 조짐도 없이 어떤 계기도 없이 어떤 이유도 모르고.

그 문제가 꼭 내문제같아서 더 책에 몰입했던 거 같다.

갑자기 친구가 쌩까거나 나를 투명인간취급하는 순간의 절망감은 당사자 말고는 아무도 모른다.

뭘 그런걸 가지고... 다른 친구랑 놀면 되지.. 왜 그러느냐고 따지면 되지.. 웃으며  먼저 다가가면 되지 등등 조언은 수도 없이 많이 할 수 있지만 막상 그 순간이 되면 며리속은 하얗고 몸은 일시 정지상태가 되어버리면서 상대에게 무언가를 얻기보다 끊임없이 내가 뭘 잘못했지? 하며 나를 낱낱이 점검하고 검색하고 색출하는 과정이 되풀이될 뿐이다. 하루키가 꼼꼼하게 묘사하지 않았지만 츠쿠루가 죽음에 이르를 만큼 그도 고민하고 자기를 까뒤집어 보는 시간의 연속일것이다

잠도 자지 못하고 식욕도 없고 그저 학교를 기계적으로 가고 기계적으로 수영을 하고 그냥 기계적으로 먹는 나날들일거라는게 그려졌다.

소설의 도입에서 나온 그 청천벽력같은 친구관계가 남의 일 같지 않아 소설에 더 집중할 수 있었다. 이유는 정말 이유같지 않은 이유였지만..

그렇게 내면 깊은 곳의 서랍에 넣어두고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 다짐한 츠쿠류씨도 결국 그 서랍앞에 서서 대면을 결심하고 순례를 떠난다. 아오를 만나고 아카를 만나고 구로를 만나러 핀란드까지 가고  그리고 그들을 통해 시로의 죽음을 전해 들으며 퍼즐을 맞추는데 이미 16년이 지난 지금은 그 때의 그 이유가 궁금한 건 아닐것이다. 이제 답을 얻어봐야 의미는 없다. 다만 그때의내가 풀어내지 못한 과제를 지금이라도 풀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걸 알았을 뿐이다.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와는 다르지만 연결되어 있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삶이라지만 한두 모퉁이에서는 다시 뒤를 조금이라도 되돌아 가서 다시 바로잡거나 다시 새겨야 할 것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츠쿠루씨는 그걸 위해 순례를 떠났을 것이다.

이야기 도입을 위해 조금은 무리한 설정처럼 보이지만 친구들의 갑작스러운 절교는 조금 충격이었다. 개인적으로...

 

#  3

소설은 사실 어떤 큰 위기는 없다. 초반 친구들의 절교를 제외하면 츠쿠루씨가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와서 외모나 내면이 변했다는 건 있지만 그 이후는 물 흐르듯 지나간다.

30대 중반까지 몇몇 여자들도 만났고 중간에 하이다도 만났고 규칙적이고 정갈하고 건강한 삶을 살았고 연상의 사라도 만나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순례를 떠나 만난 옛 친구들 누구도 츠쿠루씨를  외면하지 않고 반갑게 만나며 그를 믿었다고 너는 그때도 멋있었다고 말해준다. 의문은 쉽게 풀린다. 다만 죽은 시로를 만나지 못한게 안타깝고 그 죽음의 비밀이 풀리지 않았지만 그건 뭐 큰 문제는 아니다. 이렇게 모든 일들이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흘러가는 건 어쩌면 16년 동안 성장하지 못한 츠쿠류씨처럼 나머지 다섯 친구들도  성장이 멈춰버렸기 때문인듯 하다.

모두 어른이 되고 직업을 가지고 열심히들 살고 있지만 어딘가 성장이 멈춰서 불균형하고 기이한 모습의 어른이 되어버렸다. 나름의 문제가 있고 나름 회피하고 억압해놓은 부분을 가지고 모른 척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그래서 불균형 상태로 성장한 츠쿠류와 이질감을 느끼지 못했을까

 

#4.

그래도 마음에 드는 결말이다

순례를 떠나고 친구를 만나 답을 얻었어도 여전히 츠쿠류씨의 앞날은 불투명하다는 것

리사와 잘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며 시로의 죽음에 대해서도 여전히 알 수 없고

한때 친했던 하이다의 행방 역시 알 수 없다. 뭐 인생에 스쳐간 만남이라고 하면 그만이지만

항상 츠쿠류씨의 삶에서 사람들은 그렇게 통과해 가버리는 경험 뿐이라... 앞날도 어찌 될지 알 수 없다.

 

# 5

이제 더 하루키를 읽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을 한다.

<여자 없는 남자들>은 구매를 했으니 가끔 그것만 다시 읽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실망했다는 것도 아니지만  아 괜찮은 걸 또 다른 작품이 궁금해 하는 것도 아니므로....그냥 굳이 더 읽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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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 - 가정폭력에서 정치적 테러까지
주디스 허먼 지음, 최현정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1997년 [뉴욕타임스]로부터 “프로이트 이후 출간된 가장 중요한 정신의학서 중 하나”라는 찬사를 받으며 등장한 <트라우마>는 사람들이 트라우마에 대해 생각하고 이해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는 전문용어로 불리는 한 정신과정 증상에 관한 이야기를 인간 해방의 역사라는 도덕적, 정치적 차원의 이야기로 전환시킨 것이다.

허먼은 가정폭력이든 정치적 테러이든 폭력의 메커니즘은 어디에서나 동일하며, 이러한 폭력을 종결짓기 위해서는 인권 운동 같은 정치적이고 공적인 행위의 개입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왜? 남성이 여성보다, 어른이 아이보다, 국가가 군인보다 우월한 위치에 서 있기 때문이다. <트라우마>는 인간이 폭력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지, 그리고 인간은 얼마나 사악할 수 있는지를 고통스럽게 보여준다. 고통의 심연을 드러내는 생존자들의 증언과 인간 심리에 대한 허먼의 깊은 통찰력은 인간 조건의 한계와 가능성을 동시에 열어 보일 것이다.    

 

 

 

1. 어떤 형태의 폭력이든 흔적을 남긴다.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더 선명해지고  더 나를 옥좨는 압박으로 다가와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고 쓸모없는 존재라고 여기게 하고 나는 이미 끝났다고 여기게 만들기도 한다. 왜 잊지 못하느냐고 왜 너만 그 모양이냐고 세상은 나를 나무라지만 내 몸속에 남은 폭력의 흔적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아니 사라질 수 있는 것이다, 다만 그걸 내가 어쩌지 못한다. 내게 남은 흔적이고 내 것이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폭력은 그렇게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게로 와서 나의 주인이 되고 나를 무너뜨리고 나를 서서히 죽여간다. 그래서 폭력이다.

 

2. 한때 여성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생리를 하는 불결한 존재였고 그저 생명을 낳고 세대를 이어주는 동물적인 존재였다. 여성은 남성과 다르지 않다는 것은 존중의 의미가 아니라 여성이 처한 상황과 현실에 대한 무지였다. 충분히 무시할 수 있고 함부로 대해도 되는 존재라고 여기면서 동시에 그로 안한 상처나 열패감은 의식하지 않는다. 예민하고 불안하고 상처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은 보이지 않고 그로 인한 고통만 마구 함부로 말한다. 히스테리를 일으키는 존재 성녀가 아니면 마녀이거나 엄마가 아니면 창녀라고 여길 뿐이다. 여성의 문제는 문제라고 할 수 없는 배부른 투정이거나 사회성이 떨어지거나 남성보다 하등하기 때문이다. 여성의 히스테리가 그저 여성이 하등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억압받고  강요 당하는 사회적인 문제라는 것이 드러나게 되면 남성 위주의 사회질서는 뒤집어 질 수 밖에 없다.

전쟁이  국가의 정의와 사회의 질서를 위한 어쩔 수 없는 투쟁이 아니라 욕망에 의한 폭력일 뿐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되면 수많은 죽음과  상처는 말그대로 개죽음이 되고 헛짓거리가 된다. 전쟁은 당연히 명분이 있었던 일이고 정의를 수호하는 일이고 국가를 위한 애국적 행동일 수 밖에 없다. 전쟁 영웅이거나 포로이거나 아니면 죽었거나... 사람은 그 이외의 선택은 할 수 없다. 피폐해지고 망가지는 몸과 마음은 온전히 개인의 책임이다. 기존의 정의의 깃발을 붙들기 위해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가정폭력이란 있을 수 없다. 훈육이 있고 가정 질서를 위한 훈계가 있고 체벌이 있을 뿐이다.

가부장은 가정의 안녕과 질서를 이해 가족원들을 다스릴 책임이 있고 가족원들은 가부장에게 보종할 의무가 있다. 집안의 소리는 담장을 넘어가서는 안된다. 그저 개인적인 일이니 국가나 사회제도가 게입할 수 없다. 집집마다 제각각의 질서가 있으니 그걸 존중해야 한다.

사흘에 한번은 맞아야 질서가 이루어진다면 그렇게 하는 건 당연하다.

가족의 행복과 평화를 위해 누군가 입을 막고 귀를 막고 눈을 막아도 유지만 된다면 괜찮다.

그렇게 트라우마는 작은 구멍에서 시작된다.

다들 괜찮다는데 왜 너만 별나게 구냐고... 니가 이상하다고 손가락질 하고 무시하고 터부시 여기는 곳에서 서서히 곪아가면서 무너지고 망가지고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아프다고 소리칠 수 없어서 드러내지 못해서 모두가 아니라고 하니까... 그저 내 개인적인 문제이며 나의 문제일 뿐이다. 내가 못나고 열등하고 부족해서...

그러나 어떤 억압도 폭력이고 그 폭력은 흔적을 남긴다.

오래도록  병들었던 개인들을 방치하면 병든 사회가 된다.

그리고 그 병은 무색 무취의 상태에서 서서히 사방으로 번져간다. 그래서 모두가 아프다.

 

 

오랜 시간 폭력에 노출된 사람들은 트라우마를 가질 수 밖에 없다.

그 폭력은 물리적인 힘일 수도 있고 정서적 학대일 수도 있고 내가 옳다고 믿었던 질서 (젅쟁이나 독재 사회적 문제)로 인한 것일 수도 있다.은밀하게 진행되는 아동학대 가정폭력 성폭력도 포함된다. 그렇게 폭력에 오랫동안 은말하게  혹은 공개적으로 노출된 사람은 정서적으로 불안하다.

세상이 모두 나에게 공격할거라는 , 누구도 믿을 수가 없다는 공포속에 노출된다.

세상 누구도 믿을 수 없기에 오로지 나 자신밖에 없다는 단절을 느낀다.

나는 어떤 자유도 없다. 내가 선택하고 내가 결정했다고 믿었던 나의 신념이나 행동이 결국은 나를 둘러싼 분위기나 억압으로 생겨났다는 걸 모른다. 내가 결정해야하는 자유가 가장 두렵고 누군가가 결정해주고 지정해주는 것이 가장 편하고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 그렇게 나도 모르게 속박된다. 그리고 가장 약하고 작은 어린이들이 고스란히 학대에 노출된다.

어쩌면 그들은 자기가 못나서 스스로 그런 결정을 내렸을 수도 있다.

남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데 다들 이겨내고 잘 사는데 왜 나만? 왜 너만? 그게 개인적인 문제일까?

 

영화 <룸>에서의 여주인공은 그 작은 방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고 난 후 더 혼란스러웠다. 작은 방에 갇혀서 어떤 것도 스스로 결정내릴 수 없고 모든 것이 억압이고 공포였고 단절이었던 순간에학습된  습관이나 행동들이 자유를 얻게된 세상에서 무용하다. 그러나 사람은 쉽게 자기 습성을 버릴 수 없다. 해보지 않았던 건 아무리 좋은 것도 익숙하지 않고 두렵고 어렵다.

찬물에서 서서히 끓여지는 냄비속 개구리처럼 나도 모르게 익숙해지는 동시에 죽어가는 것이다.

그냥 단칼에 죽어버리는게 아니라 그렇게 서서히 나도 모르게 나에게서 자존감을 하나하나 빼내고 힘을 앗아가는 것이 폭력이다.

 

가정폭력에서 성폭력에서  사회적인 폭력에서 나를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하나?

트라우마를 가진 오랫동안 폭력에 시달린 생존자( 폭력에서 살아남은) 위한 치료 과정은 크게 세단계를 가진다.

안전 ---  기억과 애도---- 연결의 복구 ---- 공통성

일단 무조건 안전하다는 것을 알게 해야한다. 어떤 과제해결보다 안전이 우선이다.

내가 안전하다는 것을 믿지 못하면 어떤 것도 모래위에 지어진 성이다.

안전은 모든 스포츠의 기초 체력같은 것이고 어떤 공연을 위한 가장 기본적일 호흡법 발성법 스트레칭이다.

내가 피해자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 그것이 내 잘못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체력을 길러야 한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배설하는 일이 무엇보다 우선이다.

안전하지 않으면 먹을 수도 잘 수도 쌀 수도 없다.

기본적인 생리작용만 잘 되도 60퍼센트는 완성이다. 몸이 이겨내야 정신이 이겨낼 수 있다.

정신력으로 몸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고 몸으로 정신을 지탱한다.

모든 치료과정을 내가 스스로 결정할 수 있고 그 결정을 존중받아야 한다. 필요한 치료나 상담과정을 그저 고지하고 행하는 것이 아니라 설명하고 할 것이냐 말것이냐를 내가 결정한다. 내가 선택할 수 있다는 자유. 그리고 내 선택이 받아들여진다는 존중받는 경험은 중요하다. 내가 받아들여진다는 경험은 안전을 의미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나는 안전하다는 경험이다.

내 안전이 확보된 이후 나는 문제에 직면한다. 기억하기조차 끔찍한 상황이라고 그 이전부터 상황발생시까지의 기억과 상황의 기억을 내가 직면해야한다. 기억하는 것 그건 힘이다.

고통스러우니 덮어버리자는 건 지금 이순간만의 위한 면피이다.

기억하고 고통스러워하고 몸을 데굴데굴 구르며 열흘 밤낮을 목놓아 울고 화를 내고 자해를 하더라도 내 감정을 끝까지 쏟아내야 한다. 지치면 쉬었다 가더라도 다시 힘내서 다시 울고 화내고  말하고 소리쳐야 한다. 그렇게 하는 동안 내 문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내가 어떻게 해야할지 길을 생각할 수 있다.

어쩌면 트라우마는 관계에서 상처받고 파괴된 흔적이다. 관계가 무섭고 사람이 두렵다.

그러나 그 상처의 치유도 결국 관계에서 얻게 된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 어떤 관계없이 혼자 살 수 없다. 세상에 오롯이 나만 있는 게 아니므로 결국 관계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다시 사건 이전의 내가 될 수 없지만 그래도 평범하고 일상적인 내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모든 치유의 끝이다.

관계속으로 들어가 내가 결정하고 안전하다고 믿는 관계부터 시작하는 일 그리고 안전하게 삶을 살아가는 일이 치유의 마지막 단계이다.

그러나 어떤 치유든 끝!! 하고 문들 닫아버리는 일은 없다.

삶 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일상의 사건들 전환기들에서 다시 나의 트라우마는 얼굴을 드러내고 나에게 상처를 입힐 것이다. 그러면 다시 시작하면 된다. 언제든 내가 안전하고 다시 사건을 곱씹고 사람들에게 위로받고 도와달라고 하면서... 그리고 또 다시...

 

사람들은 쉽게 말한다.

그렇게 부끄럽고 남사스러운 일을 왜 자꾸 언급하느냐?

너만 당한 일도 아닌데 남들은 가만 있는데 왜 너만 유별나게 구느냐?

사람 사는게 다 그런거지 참 뾰족하게 군다.

똑같이 맞았는데 아홉은 괜찮다고 하는데 한명이 아프다고 한다면..아픈게 정상일까 괜찮은게 정상일까?

 

지금 내가 알지 못하는 어딘가 이웃에서 누군가는 공포에 떨면서도 가족일이라 수치스러워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친구끼리 장난이라는데 나는 너무 마음이 두근거리고 떨리고 그만하고 싶은데 그걸 말하면 내가 찌질한 사람이 된다.  멀쩡해 보이던 배가 가라앉고 내 아이가 이유도 모른 채 죽었는데 사람들은 사고난 걸 가지고 왜그렇게 호들갑이냐고 한다. 몇십년이 지난 과거지만 내가 그 때 이유도 모르고 끌려가 여자로 수치감을 느끼며 폭력을 당했는데 이제와서 그런 남사스런 과거를 들추며 사과를 요구하는 이유가 뭐냐고 한다.

왜 너만 시끄럽고 너만 나대냐고...

모두가 아니라고 하면 아닌게 될까?

모두가 아니라니 아닌거라고 탕탕탕!!! 결정이 내려지는 순간이 폭력의 순간이고 누군가는 상처를 안게 된다. 그게 나일 수도 있다.

트라우마는 나의 문제이며 동시에 모두의 문제이다.

지금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지금 우리 주변에 익숙하게 벌어지는 폭력의 피해자이며 생존자라고 하면 너무 지나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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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9-09-07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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