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혐, 여자가 뭘 어쨌다고 - 김치녀에서 맘충까지 일상이 돼버린 여성 차별과 혐오를 고발한다
서민 지음 / 다시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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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입장에서는 그저 인터넷에 떠도는 이런저런 이야기들이고 처음 접하는 입문서라기엔 조금 가볍고 군데군데 모호하고 낡은 표현도 있고
남자입장에서 남자들이 가지는 혐오를 조목조목 알려준건 좋은데.. 뭘까 좀 걸리는부분은? 뭐라고 말하기 참 애매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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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나만 지키면 손해 아닌가요? - 나의 행복과 우리의 행복이 하나라는 깨달음 아우름 12
김경집 지음 / 샘터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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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의 입장에서 똑같이 분노할 수 있는 것. 내가 하고자 하지 않는 일을 남에게 시키지 않는 일. 정의는 의외로 단순하고 누구나 알고 있다. 다만 그것이 머리속에 들어있는게 아니라 가슴으로 발로 이어져 움직여지는 것이 중요한 일. 쉽게 읽히지만 쉽지 않은 내용들이다. 정의에 대해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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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남성을 분석한다 도란스 기획 총서 2
권김현영 엮음, 권김현영.루인.엄기호 외 지음 / 교양인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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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대목은 어려웠고 몇몇 대목은 흥미있었다.

 저자의 생각들을  아직은 모두 이해하지 못했다.

 어쩌면 일방적인 시각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문득 했다.

 내가 리뷰를 쓰거나 평가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냥 읽은 내 느낌.. 내가 받아들인 만큼 그리고 내가 밑줄 그은 문장들을 기록하려고 한다.

 서재는 넓고 좋은 리뷰는 많고 이 책에 대한 글들도 좋은 것들이 많다.

 이 글은 지극히 개인적인 끄적임이다.

 

 

한국남성들은 아비없는 자식과도 같다.

아비가 자식에게 몸으로 보여주며  따라하게 하는 역할모델을 하며 자식이 성장하는 법인데

어느 순간 한국 남성은 내가 따라야 할 롤 모델이 사라졌다.

일제와 함께 시작된 근대화에서는 이미 조국은 사라졌고 기존의 가치관은 땅에 떨어졌고

일본을 모방해서 살아남거나 그저 식민지하의 남성으로 열등하게 살아가거나 하는 방법밖엔 없다. 살아남기 위해 따라야 하는 관습은 우리것이 아니고 내게 익숙할 수 있는 방법은 여성의 것이거나 노예의 것뿐이다. 그렇게 혼란스럽게 스스로 자기가 어떤 모습을 해야하는지 급하게 결정하거나 주어진 대로 살아야 했다. 그리고 광복된 후 들어온 서양의 문화와 정치를 단계를 건너뛰며 받아들인다.

더 좋아보이고 더 힘이 있어 보이는 문화를 걸치지만 그것 역시 내것이 아니어서 비틀리고 어딘가 품이 어정쩡한 형태로 내 몸이 되었다.

남자다움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그리고 외환위기를 겪으며 고개숙인 남자라든가 어깨가 쳐진 가장 같은 표현이 등장한다.

경제적 위기로 모두가 절망에 빠진 그 때 누구보다 남자들이 더 힘들다는 말들이 쏟아져 나온다.

가장의 외로움.....

얼마나 외롭고 고독하고 불안한 삶을 살아내지 않았으면 그런 변화가 천지개벽할 일처럼 여겨졌을까?  여성도 함께 겪여내야 하는 일에 남자들에게 더 동정이 떨어지고 호들갑스러웠다.

가장이니까 자를 수 없고 여자가 나가는게 모양새가 좋지 않은가 하는 말들이 오간 것도 그때였고, 여자들은 돌아갈 가정이 있다고 핑계를 댄 것도 그때였고 신문이나 문학이나 모든 것들이 남자를 위로하기바빴던 것도 그때였다.

세상은 늘 변한다.

내가 고작 반백년도 살지 못했는데 컴퓨터가 등장하고 핸드폰이 등장하더니 스마트 폰으로 바뀌고 인터넷으로 내가 모르는 세상이 없고 나를 지켜보는 눈들이 여기저기 생겨나며 더 이상 개인공간이란 존재하지 않은 시대가 되었다.

변하는 세상에 맞춰 변해야 하는 건 옳고 그름을 떠나 어쩔 수 없는데

남자들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줄 알았고 변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남자라면 의례 그래야 하는 것들을 놓고 싶지 않은데 세상은 자꾸 변하라고 하고 여성들은 변해가고 나의 영역은 점점 좁혀오고 이건 제대로 된 것이 아니라고 느끼는 걸까?

결국 남자다움 혹은 남성성에 집착하면 점점 세상이 좁아지는 것 뿐인데 그걸 바꾸려고하지도 않고 그저 유지하고 싶어한다.

 

 

이 책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는 젠더 연구로서 남성성을  분석하는 인식론과 방법론을 제안하는 것이다. 이 책의 필자들은 남성성과 관ㄹ녀한 신체 심리 문화는 실재가 아니라 규범이자 신화라고 본다. 또한 페미니즘이 여성을 여자다움에서 버어나도록 하여 자기 자신으로 살 수 있게 하는 이론이라면 남성 역시 남자다움의 구속으로 부터 멋어날 수 있게 해주는 사상이며 그것이 모두에게 좋은 일이라는 데 동의한다. 이 책에서 우리는 기존의 남자다움의 규범을 해체하는 동시에 남성성에 대한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열고자 한다.

 

                        <들어가는 글>에서

 

 

식민지배를 경험한 한국 사회에서 낫어과 함꼐 살아가야 하는 여성들에게 식민지 남성성은 여성주의의 가장 큰 논쟁거리이자 이론과 실천의 어려움을 안긴다. 한국 남성들은 해방 후 친일 청산과 대미 사대주의 극복을 제일 과제로 삼앗지만 그 방법론을 둘러싸고 정치적 갈등을 빚게 된다. (중략) 남성 세력간의 투쟁과 세력 교체(정권교제) 자체가 한국 사회의 정치적 전선을 독점하면서 한국의 페미니즘은 독자적 정치학으로서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젠더는 모든 권력 관계의 모델이다. 특히 국제 정치학은 논리자체가 젠더 은유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흔히 강대국은 남성으로 약소국은 여성으로 재현된다. 한국의 오랜 오세 콤플렉스는 실제 침략당한 경험과 주변 강대국과의 관계에서 생성된 것이다. 한국남성은 '여성'으로 간주되거나 스스로 '여성'암을 자처했다. 자신은 영원한 식민지 피해자라는 것이다. 한 사회의 주된 남성 문화를 '식민지 남성성'으로 명명하기 위한 전제는 다음과 같다.

 

 1) 남성은 보편적 주체로서 자신을 국가나 민족과 동일시 한다.

2) 자신의 성별 정체성을 국내 여성과의 관계에서 구성하기보다는 외세와의 관계에서 파악한다. 이때 자신은 강대국에 비해서 약자이므로 '여성'으로 정체한다.

3) 하지만 자신은 '본질적'으로 남성이므로 강자에 저항하거나 강대국을 '이용해야하는 중대한 업무를 띠는데 이때 자기 옆의 여성들이 자신과 뜻을 함꼐 하지 않고 평등을 외치는 것은 반민족 반국가적 행위라고 생각한다.

4) 여성해방은 계급 해방이나 민족 해방 이후의 과제이다

5) 이때 여성의 역할은 강자와의 투쟁에 바쁜 자신을 대리하여 자녀를 바르게 양육하고 자신의 성적 욕구를 해결해주는 것이다. 즉 여성은 성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그것이 대의이다.

6) 동시에 자신이 지쳤을 때는 언제나 위로와 지지와 격려를 해주는 정치적 '동지'여야 한다.

7) 자원ㅇ 부족할 때는 자국 여성에게 적의 '성적 노리개'가 도어 먹을 것을 얻어오라고 강요한다. 이때 우울해하거나 (이상의 날개) 자존심이 상해 여자를 도리어 두둘겨 패거나 여성을 혐오한다.  환향녀(화냥년)라는 낙인을 찍어 공동체에서 매장한다.(안정효 은마는 오지 않는다) 혹은 중산층 여성에 대한 적대감으로 피해 여성을 진정한 민중으로 숭배하거김기덕 해안선) 나 분노로 인해 스스로 미친다(남정현 분지)

8) 손상된 자신과 아버지의 자존심을 되찾ㄱ위해 어머니와 누이에게 더 큰 희생을 요구하거나 이 영화를 아버지에게 바친다

9) 좌파 민족주의 진영은 가해국(일본)과의 투쟁에서' 우리에겐 위안부카드가 있다'며 외세 협박용으로 삼거나 우파 민족주의자들은 '군 위안부'문제에 대한 사과 대신 경제 협력이나 군사 원조를 받아낸다. 강대국에게 군사력이 협상할 수 있는 힘이라면 한국 남성에게 그 자원은 여성이다.

10) 자신의 이 모든 고통을 해결하는 방법은 자기 성찰이나 강자에 대한 저항이지만 강자는 멀리 있거나 강대국 자체도 균질적 존재 (여성이나 흑인이 있다)가 아니므로 도리가 없다. 결국 술을 마신다. 무겨력 자기 연민 고뇌하는 자기도취상태에 있다.

 

                                            정희진 < 한국 남성 식민성과 여성주의 이론> 중

 

 

누구와 동일시할것인가 누구와 함꼐 무엇을 할것인가의 내용은 완전히 다시 쓰여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평등의 기획이었던 근대는 차이들을 만들어내는 시공간으로 다시 이해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남자들 간의 차이를 드러낼 수 있는 움직임은 헤러웨이(Donna J. Haraway0 의 표현을 빌린다면 세계속에 차이를 낳으려는 노력이다. 잰도룰 꾾임없이 이분법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우리를 ㅍ평등하게 하지도 못했고 자유롭게 하지도 못했다. 더구나 그 결과 한국 남자들은 끊임없이 보편의 위치와 동일시할 수 없는 처지를 한탄하고 자신의 남성성을 확인하기 위해 외부 생식기의 기능에 집착하며, 자신들을 탈식민지화 하는 게 아니라 여성들을 식민화함으로써 정신 승리를 유지하고 있다. 이것을 정상적이고 보편적인 남성문화로 승인하는 순간 남자들간의 차이는 사라져버린다. 남자들 간의 차이가 드러날 수 있어야 만 다시 지배적 남성성을 획득하려는 불가능한 기획이 반복 수렴되는 무한 루프를 멈출 수 있다. 그래야만 식민지 남성성은 여성성이 아니라 남자들의 남성성 중 하나가 될 수 있고 이때 비로소 탈 식민지의 가능성이 열릴 수 있다.

 

                                        권김현영 < 근대 전환기의 한국의 남성성>

 

 

인간을 두가지 젠더로 인식하는 문화 장치이나 이를 자기 범주로 몸에 익히도록 하는 과정인 섹스-젠더 이분법 혹은 이원젠더체계는 언제나 근대 의료 기술과 인식론을 밑절미로 삼는다. (중략)

근대적 젠더는 늘 개인을 명료하게 인식할 수 있도록 한다. 분류하고 정의하여 한 개인을 교집합 없는 범주에 가두고 단 하나의 명료한 범주로 설명할 수 있도록 하며 한 개인의 몸을 둘 중 하나의 범주에 오차없이 부합하는 형태로 만든다. 하지만 개인을 명료하게 만드는 작업은 언제나 남성이냐 남성이 아니냐로 나뉘고 트랜스젠더퀴어나 인터섹스 혹은 다른 젠더 범주의개인은 남성 범주와 무관하게 된다. 남성 범주는 민족을 대표하는 동시에 그 민족 자체이기때문에 순수하다는 신화를 유지해야한다. 남성성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이를 이협하는 요소는 모두 비낭성 범주로 버려진다. 병역을 위한 신체검사는 바로 이 과정 남성의 몸과 그 몸에 당연히 부착해 있다고 여겨지는 남성성을 여과하는 과정이며 특정한 남성 신체에 남성성이 자연스럽게 발현된다는 신화를 영속하는 정책적 과정이다. 하지만 규법적 남성성은 트렌스젠더퀴어와 인터섹스없이 결코 존재할 수 없다. (중략)

근대 의료 기술은 남성성을 통해 제지위의 변화를 꾀했고 남성성은 의료 기술을 통해 제 실체를 구축하고자 했다. 이렇게 구축된 실체는 불분명하다. 구체적인 것은 외부 성기 음경과 고환뿐이다. 이성애 관계에서 재생산을 할 수 있는 음경이 있어야 비로소 의료 규범적인 남성이다. 재생산할 수 있는 음경이 있다면 자신의 젠더 인식과 상관없이 남성이어야 한다. 이것은 의학에서 신생아를 남성으로 판별할 때 가장 중시하는 조건이다. 이 조건은 아이러니하다. 근대의 이상게서 남성성은 과학적 합리성과 이성을 대표한다. 비합리적이고 우발적인 사건은 언제나 비남성성에 속한다. 아울러 자연적인 것 생물학적 본능에 따른 것도 남성성의 성질은 아니라고 회자된다. 남성성은 과학적 이성이며 감정없는 판단이어야 한다. 하지만 이런 과학과 이성을 자신의 밑절미 삼은 의학과 의료 기술기획이 규정한 남성/성은 외부 성기와 재생산 능력에 근거하고 있다. 이것은 아이러니지만 아이러니가 아니다. 성폭력 가해 남성이나 성구매 남성이 가장 많이 하는 항변은 남성의 성욕은 생물학적 본능이라는 것이다. 이런 식의 항변은 성폭력 가해와 폭력을 정당한 것으로 설명하려는 시도이자 생물학 혹은 의학을 본질주의로 만들고 규범으로 만드는 과학적 실천이다. 즉 근대적 이성 과학적 합리성은 거의 언제나 남성 (혹은 지배규범) 의 욕망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실천 양식이다. 따라서 남성의 성욕은 생물학적 본능이라는 식의 언설은 의료 근대화가 기획하는 남성성의 핵심을 요약한다.

 

                                               루인 < 남성 신체의 근대적 발명> 중

 

 

 

 

새로운 인간 개념은 존재 자체를 사회적으로 존재할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으로 사유하고 사회적인 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사회에 기여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민권을 다시 상상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산하는 노동과 재생산하는 노동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노동이 생산이자 재생산이며 존재하는 모든 인간은 이미 그 생산과 재생산의 거대한  사회적 과정에 개입한다고 받아들여야 한다.그래서 시민권은 노동하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여기 이자리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의 권리로 혁신 될 필요가 없다. 이는 우리들이 평등의 문제를 어떻게 다시 정치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가에 전적으로 달려있다.

이런 상황에서 앞에서 이야기한 두가지 다른 양상의 남성성이 출현했따. 이 둘은 국민국가의 주권적 존재인 남성의 위기에 전혀 다르게 대응하는 두가지 방식이다. 한쪽은 주권자로서 남성의 위기에 반응하여 자신을 피해자로 규정하고 자신들 역시 기득권자가 아니라 박탈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들에게 남성이 더는 주권의 독점자일 수도 생계 부양자일 수도 없는 재편된 사회 구조 속에서 자신들의 다음이 무엇이어야 하며 그 무엇이 되기 위해서 자신의 우치를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지에 대한 언어는 없다. 이들이 자신의 처지에 대해 말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지만 그 자리를 채우고 있는 것은 자기 연민의 언어이다.

그리고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하는 남자들이 있다. 이들은 국민국가의 틀에 갇혀 특수성을 강조하는 모든 언어를 야만적이고 후진적인 것이라 공략하면서 낙후시킨다. 이들이 운명 담론을 을 즐겨 사용하는 이유이다. 흥미롭게도 피해자 남성들의 언어가 자기 연민적이라면 이들의 언어는 자기 확신적이다. 이들이 이렇게 자기 확신을 할 수 있는 것은 페미니즘이 사회적 약자의 언어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보편적인 언어이기 때문이다. 즉 보편성에 대한 확신이다. 따라서 이들이 스스로 페미니스트라 말하는 것은 곧 자신을 보편성의 옹호자로 선언하는 것이다.

 

 

                                                        엄기호 < 보편성의 정치와 한국의 남성성> 중

 

 

 

우리는 남녀라는 성별 이분법뿐만 아니라 이성애와 동성애라는 이분법 부치와 펨이라는 이분법 생물학적 성별과 사회적 성별이 대립적으로 있다는 섹스와 젠더 이분법까지도 모두 넘어서야 한다. 이분법을 넘어선다는 것은 두 개보다 더 많이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숫자는 애당초 중요하지 않다. 이분법을 깬다는 것은 대립된 한 쌍으로 이루어진 구조의 언정성에 대한 거부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항상 그렇게 명쾌하고 깔끔하게 분류될 필요가 없으며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질문은 다시 시작된다. 이른바 이성애자 남성은 누구인가? 이성애자 남성의 정의는 무엇인가 어떻게 구분하고 판별할 수 있는가? 어떻게 이성애자가 될 수 있었고 남성이 될 수 있었는가? 여성을 사랑하기에 이성애자가 된 것인가? 이성애자이기 때문에 여성에게 끌린 것인가? 이성애자 남성은 상대의 성별이 다르다는 것을 어떤 감각으로 판단하는가? 우리는 모두 같은 인간이면서 동시에 다른 성별을 지녔는가? (중략)

남성성과 이성애를 동일시 하는 이성애자 남성들은 레즈비언을 남성성이 과잉된 여성으로 게이를 남성성이 결여된 존재로 다룬다. 그러다면 과잉이나 결여가 아닌 적정량의 남성성이란 과연 얼마만큼일까? 왜 남성성은 이토록 쉽게 과잉되거나 결여될 수 있는가? 게이 커플의 사랑을 아름답게 그린 드라마를 보고 자신의 아들이 게이가 될 수도 있다고 주장하는 이성애자 부모들은 왜 그런 걱정에 사로잡힐까? 이성애는 자연의 질서이고 남성성은 타고나 ㄴ것이라 확신하면서도 왜 그토록 쉽게 허물어질까 두려워하는 걸까? 남성서과 이성애의 정상성에 대한 믿음은 그토록 강력하면서도 인정성에 대한 믿음은 왜 이토록 허약할까?

이 시대를 뒤덮은 동성애 혐오와 여성 혐오는 사실상 이성애자 남성들의 불안과 공포의 작동때문이다.

 

                           정채윤 < 이성애 제도와 여자의 남성성.>

 

 

트랜스 남성의 남성성은 일견 전형적인 한남이 되고 싶은 욕망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서두의 인용문에서 내가 처음 느꼈던 평범한 남성성은 일상에 만연해 있고 한남들이 과시하는 바로 그 남성성이다. 태어날 때 지정받은 성별이나 페니스 유무를 비롯해서 신체적 차이등 들킬 위험을 내재화하는 맥락상 조건은 분명 다르지만 마초스러운 너무나 마초스러운 트렌스남성은 한국 사회의 남성성과 구분짓는 게 무의미하다.

한국 사회에서 남성성의 규범을 완벽히 수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니 수행 불가능 그자체가 남성성의 특성이기도 하다. 언제나 지연되는 것 늘 실패하는 것 적절한 좌절을 추동력 삼아 사회적 남근이라는 성별 위계와 역할을 지속하는 것이 지배적 남성성을 구성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한국 ㅏ회에서 남성으로 살아가는 이들은 모두 이러한 남성성을 구성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남성으로 살아가는 이들은 모두 이러한 남성성의 속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각각의 남성 집단들이 바련하는 남성성이 그러하듯 트랜스 남성 역시 한남으로서 남성성이 지니는 수행 불가능성을 이행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트랜스남성에게 남성성이란 언제나 획득할 수 엇음으로써 얻어지는 역설적이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트랜스 남성의 트랜지션 과정은 그저 한남이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트렌스 남성의 남자되기 욕망과 실천은 결국 이 사회 주류 남성의 문화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트렌스 남성은 지금껏 그래왔듯 자신들의 맥락과 입장에서 성별 규범을 충실히 수행하고 남성성을 발현하며 살아갈 것이다. 트렌스 남성성은 한남이 됨으로써 한국 남자의 남성성을 충실히 따라갈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과는 다른 방향으로 변화가 생겨날 수도 있다. 다음과 같은 질문이 그 다른 방향의 변화를 만들지도 모른다"트래느 남성이 되거 싶은 것은 한남인가?"

 

                                                    준우 <트랜스 남성은 어떻게 한국 남자가 되는가>

 

남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만들어진다.

한국남성은 한국 남성으로 만들어진다.

남성의 성기를 가지고 국가에서 부여하는 주민번호 뒷자리를 홀수로 부여받는 순간 남자로 길러지고 만들어져간다.

내 의사나 성향 어떤 호르몬의 작용과는 상관없이 남자라는 틀에 들어간다.

남자답지 못하게.....

남자가  그러면 안되지....

남자가 이깐 일로....

남자라면 당연히....

어떻게 남자한테 감히...

남성은 권력이고  힘이고 세상의 기준이 된다.

세상은 남자와 남자가 아닌 나머지로 나뉜다.

그렇게 기준이 된 그들은 그 기준에 벗어나는걸 못견디고 두려워한다.

세상에는 똑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으며 모두가 다 다르다고 하는데 세상에는 모두가 같은 남자와 다른 나머지들이 있다.

모두 같아야 하는 남자들은 힘들것이다.

나도 내가 아닌 것을 그런 척 하는게 힘들다는 걸 알고 그건 꼬마들도 몸이 배배꼬이는 일이라는 걸 안다.

그냥 다른 수도 있고 다양할 수도 있다는 걸 인정하는게 편하다,

세상이 변하니까 내가 변해가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면 좋겠다.

변하하는 세상에 몸을 맡기고 조금씩 움직여가는게 편하지 않나? 모두가 행복해지는 일은 변해도 되고 달라도 되고 힘을 빼도 된다는 걸 아는 일이다.

페미니즘이 여성뿐 아니라 남성에게도 좋은 방향이라는 걸 이렇게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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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페미니스트 - 아이를 페미니스트로 키우는 열다섯 가지 방법 쏜살 문고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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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마만다 옹고지 아디치에의 두번째 페미니즘 서적

 

아이를 페미니스트로 키우기 위해 조언을 해달라는 친구를 위해 그녀가 열네가지 제안을 한다.

이 제안들은 아이에게도 좋은 지침이 되지만 엄마에게도 그리고 여성들  아니 모든 사람들에게 제안하는 것들이다.

사람에 따라서 이정도 쯤이야 하는 사람부터 아니 이렇게 막 나가도 되는거야? 싶은 사람까지 다양하다. 내 입장에서는 다 대단하지 않고 알만한 것들인데 다만 내가 얼마나 몸에 익히고 있느냐의 문제들이다.

사람이 바뀌기 위해서는 우선 새로운 깨달음이 있어야 하고 그 깨달음을 실천 해야하며 계쏙되는 반복과 훈련으로 몸에 익혀야 비로소  제것이 된다.

누구나 책을 읽고 공부하고 생각을 하게되면 꺠달음의 단계를 가질 수 있다.

여태 내가 어떤  모순된 패턴으로 살아왔는지를 알 수 있고 내 속의 검은 그림자나 자라지 못한 내면아이를 직면할 수 있고 내가 어떤 태도로 가치관으로 살아왔으며 그게 어떻게 잘못되었거나 왜곡되었나를 깨달을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이제 알았으니 되었다.. 라고 생각하그 마무리한다.

알았으면 행동해야한다. 몸이 바뀌는 일이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그리고 다리로.... 세상에서 가장 험하고 먼 여행길이다.

그렇게 행동하게 되면 조심스럽게 두 눈 질끈 감고 한번 해버리면 의외로 쉽네?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누구나 한 번은 쉽다.

바뀐 깨달음을 내 몸이 익혀야 하고  계속 훈련을 해서 무심코 바뀐 행동이 나올때 비로소 나는 변한 것이고 조금은 더 나은 사람이 되어있다.

 

사실 저자가 말하는 열네가지 제안은 몇권의 페미니즘 책을 읽었다면 다들 알고 있는 것들이다

 

충만한 사람이 될 것

같이 할 것

성 역할은 완전히 헛소리라고 가르칠 것   

                   "여자니까"는 그 무엇에 대한 이유도 될 수 없어 절대로

내가 '유사 페미니즘'이라고 부르는 것의 위험성에 주의 할 것

독서를 가르칠 것

흔히 쓰는 표현에 대해 의구심을 가르칠 것 

                       언어는 우리의 편견 믿음 추측의 저장고야. 

                       하지만 아이한테 그 점을 가르치려 면  우선 너부터 네가 쓰는 말에 의구심을                    가져야 해

                      질문들을 할 때 항상 일상적인 예를 드는 것이 유용해

                      추상적인 언어는 쉽게 와 닿질 않아

결혼을 업적처럼 이야기 하지 말것

호감형이 되는 것을 거부하도록 가르칠 것

                           호감가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충만한 사람 정직한 사람. 친절한 사람

                           용감한 사람이 되라고 가르쳐 자기의견을 말하고 다른 사람도 자기와 동등

                           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

                           누가 날 좋아하지

않아도 괜찮고 내가 누군가를 좋아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도록

민족의 정체성을 가르칠 것

아이의 일 특히 외모와 관련된 일에 관여할 때 신중히 할 것

                             나의 외모에 대한 관심이나 취향이 누군가 타인의 기준이 아니라 나의

                             만족감이 기준이 되어야 해  화장을 좋아하고 꾸미기를 좋아하는 아이는

                             그렇게 하고 외모에 무심한 아이는 그렇게 존중받을 권리가 있지

우리 문화가 사회 규범에 대한 근거를 들 때 선택적으로 생물학을 사용하는 것에 의구심을 갖도록 가르칠 것

                                   생물학은 매력적인 학문이지만 사회규범을 정당화 하기 위한 근거로

                                   받아들이지는 말아야 한다고 가르쳐 사회규범은 인간이 만든 것이고

                                   결코 바꿀 수 없는 사회규범은 존재하지 않아.

일찍부터 성교육을 할 것

사랑은 반드시 찾아올테니 응원할 것

억압에 대해 가르칠 대 억압당하는 사람을 성인으로 만들지 않도록 조심할 것

차이에 대해 가르칠 것

 

 

꼭 페미니스트가 아니어도 자녀교육에 좋은 조언들이다.

건전한 시민으로 살기 위해서 서로 존중하고 정체성을 인정하는 것 타인을 공감하는 건 중요하다.

그의 말대로 쉬운 말로 일상적인 내용을 예로 들어 씌여 있어 언제 어디를 펼쳐 보든 좋다.

내가 조금 흔들린다고 느낄 때 내가 가진 가치관에 혼돈이 올때 보면 좋겠다.

아이도 쉽게 읽을 수 있고..

다만 책의 부피에 비해 가격은 좀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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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한엄마 2017-09-09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금 배송받아 읽고 있습니다.
정말 양에 비해 가격이 무겁지만
그만큼 읽는 제 눈도 무거워서인지 빨리 읽히지 않더라고요.
 
트라우마 - 가정폭력에서 정치적 테러까지
주디스 허먼 지음, 최현정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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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뉴욕타임스]로부터 “프로이트 이후 출간된 가장 중요한 정신의학서 중 하나”라는 찬사를 받으며 등장한 <트라우마>는 사람들이 트라우마에 대해 생각하고 이해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는 전문용어로 불리는 한 정신과정 증상에 관한 이야기를 인간 해방의 역사라는 도덕적, 정치적 차원의 이야기로 전환시킨 것이다.

허먼은 가정폭력이든 정치적 테러이든 폭력의 메커니즘은 어디에서나 동일하며, 이러한 폭력을 종결짓기 위해서는 인권 운동 같은 정치적이고 공적인 행위의 개입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왜? 남성이 여성보다, 어른이 아이보다, 국가가 군인보다 우월한 위치에 서 있기 때문이다. <트라우마>는 인간이 폭력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지, 그리고 인간은 얼마나 사악할 수 있는지를 고통스럽게 보여준다. 고통의 심연을 드러내는 생존자들의 증언과 인간 심리에 대한 허먼의 깊은 통찰력은 인간 조건의 한계와 가능성을 동시에 열어 보일 것이다.    

 

 

 

1. 어떤 형태의 폭력이든 흔적을 남긴다.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더 선명해지고  더 나를 옥좨는 압박으로 다가와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고 쓸모없는 존재라고 여기게 하고 나는 이미 끝났다고 여기게 만들기도 한다. 왜 잊지 못하느냐고 왜 너만 그 모양이냐고 세상은 나를 나무라지만 내 몸속에 남은 폭력의 흔적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아니 사라질 수 있는 것이다, 다만 그걸 내가 어쩌지 못한다. 내게 남은 흔적이고 내 것이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폭력은 그렇게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게로 와서 나의 주인이 되고 나를 무너뜨리고 나를 서서히 죽여간다. 그래서 폭력이다.

 

2. 한때 여성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생리를 하는 불결한 존재였고 그저 생명을 낳고 세대를 이어주는 동물적인 존재였다. 여성은 남성과 다르지 않다는 것은 존중의 의미가 아니라 여성이 처한 상황과 현실에 대한 무지였다. 충분히 무시할 수 있고 함부로 대해도 되는 존재라고 여기면서 동시에 그로 안한 상처나 열패감은 의식하지 않는다. 예민하고 불안하고 상처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은 보이지 않고 그로 인한 고통만 마구 함부로 말한다. 히스테리를 일으키는 존재 성녀가 아니면 마녀이거나 엄마가 아니면 창녀라고 여길 뿐이다. 여성의 문제는 문제라고 할 수 없는 배부른 투정이거나 사회성이 떨어지거나 남성보다 하등하기 때문이다. 여성의 히스테리가 그저 여성이 하등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억압받고  강요 당하는 사회적인 문제라는 것이 드러나게 되면 남성 위주의 사회질서는 뒤집어 질 수 밖에 없다.

전쟁이  국가의 정의와 사회의 질서를 위한 어쩔 수 없는 투쟁이 아니라 욕망에 의한 폭력일 뿐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되면 수많은 죽음과  상처는 말그대로 개죽음이 되고 헛짓거리가 된다. 전쟁은 당연히 명분이 있었던 일이고 정의를 수호하는 일이고 국가를 위한 애국적 행동일 수 밖에 없다. 전쟁 영웅이거나 포로이거나 아니면 죽었거나... 사람은 그 이외의 선택은 할 수 없다. 피폐해지고 망가지는 몸과 마음은 온전히 개인의 책임이다. 기존의 정의의 깃발을 붙들기 위해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가정폭력이란 있을 수 없다. 훈육이 있고 가정 질서를 위한 훈계가 있고 체벌이 있을 뿐이다.

가부장은 가정의 안녕과 질서를 이해 가족원들을 다스릴 책임이 있고 가족원들은 가부장에게 보종할 의무가 있다. 집안의 소리는 담장을 넘어가서는 안된다. 그저 개인적인 일이니 국가나 사회제도가 게입할 수 없다. 집집마다 제각각의 질서가 있으니 그걸 존중해야 한다.

사흘에 한번은 맞아야 질서가 이루어진다면 그렇게 하는 건 당연하다.

가족의 행복과 평화를 위해 누군가 입을 막고 귀를 막고 눈을 막아도 유지만 된다면 괜찮다.

그렇게 트라우마는 작은 구멍에서 시작된다.

다들 괜찮다는데 왜 너만 별나게 구냐고... 니가 이상하다고 손가락질 하고 무시하고 터부시 여기는 곳에서 서서히 곪아가면서 무너지고 망가지고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아프다고 소리칠 수 없어서 드러내지 못해서 모두가 아니라고 하니까... 그저 내 개인적인 문제이며 나의 문제일 뿐이다. 내가 못나고 열등하고 부족해서...

그러나 어떤 억압도 폭력이고 그 폭력은 흔적을 남긴다.

오래도록  병들었던 개인들을 방치하면 병든 사회가 된다.

그리고 그 병은 무색 무취의 상태에서 서서히 사방으로 번져간다. 그래서 모두가 아프다.

 

 

오랜 시간 폭력에 노출된 사람들은 트라우마를 가질 수 밖에 없다.

그 폭력은 물리적인 힘일 수도 있고 정서적 학대일 수도 있고 내가 옳다고 믿었던 질서 (젅쟁이나 독재 사회적 문제)로 인한 것일 수도 있다.은밀하게 진행되는 아동학대 가정폭력 성폭력도 포함된다. 그렇게 폭력에 오랫동안 은말하게  혹은 공개적으로 노출된 사람은 정서적으로 불안하다.

세상이 모두 나에게 공격할거라는 , 누구도 믿을 수가 없다는 공포속에 노출된다.

세상 누구도 믿을 수 없기에 오로지 나 자신밖에 없다는 단절을 느낀다.

나는 어떤 자유도 없다. 내가 선택하고 내가 결정했다고 믿었던 나의 신념이나 행동이 결국은 나를 둘러싼 분위기나 억압으로 생겨났다는 걸 모른다. 내가 결정해야하는 자유가 가장 두렵고 누군가가 결정해주고 지정해주는 것이 가장 편하고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 그렇게 나도 모르게 속박된다. 그리고 가장 약하고 작은 어린이들이 고스란히 학대에 노출된다.

어쩌면 그들은 자기가 못나서 스스로 그런 결정을 내렸을 수도 있다.

남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데 다들 이겨내고 잘 사는데 왜 나만? 왜 너만? 그게 개인적인 문제일까?

 

영화 <룸>에서의 여주인공은 그 작은 방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고 난 후 더 혼란스러웠다. 작은 방에 갇혀서 어떤 것도 스스로 결정내릴 수 없고 모든 것이 억압이고 공포였고 단절이었던 순간에학습된  습관이나 행동들이 자유를 얻게된 세상에서 무용하다. 그러나 사람은 쉽게 자기 습성을 버릴 수 없다. 해보지 않았던 건 아무리 좋은 것도 익숙하지 않고 두렵고 어렵다.

찬물에서 서서히 끓여지는 냄비속 개구리처럼 나도 모르게 익숙해지는 동시에 죽어가는 것이다.

그냥 단칼에 죽어버리는게 아니라 그렇게 서서히 나도 모르게 나에게서 자존감을 하나하나 빼내고 힘을 앗아가는 것이 폭력이다.

 

가정폭력에서 성폭력에서  사회적인 폭력에서 나를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하나?

트라우마를 가진 오랫동안 폭력에 시달린 생존자( 폭력에서 살아남은) 위한 치료 과정은 크게 세단계를 가진다.

안전 ---  기억과 애도---- 연결의 복구 ---- 공통성

일단 무조건 안전하다는 것을 알게 해야한다. 어떤 과제해결보다 안전이 우선이다.

내가 안전하다는 것을 믿지 못하면 어떤 것도 모래위에 지어진 성이다.

안전은 모든 스포츠의 기초 체력같은 것이고 어떤 공연을 위한 가장 기본적일 호흡법 발성법 스트레칭이다.

내가 피해자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 그것이 내 잘못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체력을 길러야 한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배설하는 일이 무엇보다 우선이다.

안전하지 않으면 먹을 수도 잘 수도 쌀 수도 없다.

기본적인 생리작용만 잘 되도 60퍼센트는 완성이다. 몸이 이겨내야 정신이 이겨낼 수 있다.

정신력으로 몸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고 몸으로 정신을 지탱한다.

모든 치료과정을 내가 스스로 결정할 수 있고 그 결정을 존중받아야 한다. 필요한 치료나 상담과정을 그저 고지하고 행하는 것이 아니라 설명하고 할 것이냐 말것이냐를 내가 결정한다. 내가 선택할 수 있다는 자유. 그리고 내 선택이 받아들여진다는 존중받는 경험은 중요하다. 내가 받아들여진다는 경험은 안전을 의미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나는 안전하다는 경험이다.

내 안전이 확보된 이후 나는 문제에 직면한다. 기억하기조차 끔찍한 상황이라고 그 이전부터 상황발생시까지의 기억과 상황의 기억을 내가 직면해야한다. 기억하는 것 그건 힘이다.

고통스러우니 덮어버리자는 건 지금 이순간만의 위한 면피이다.

기억하고 고통스러워하고 몸을 데굴데굴 구르며 열흘 밤낮을 목놓아 울고 화를 내고 자해를 하더라도 내 감정을 끝까지 쏟아내야 한다. 지치면 쉬었다 가더라도 다시 힘내서 다시 울고 화내고  말하고 소리쳐야 한다. 그렇게 하는 동안 내 문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내가 어떻게 해야할지 길을 생각할 수 있다.

어쩌면 트라우마는 관계에서 상처받고 파괴된 흔적이다. 관계가 무섭고 사람이 두렵다.

그러나 그 상처의 치유도 결국 관계에서 얻게 된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 어떤 관계없이 혼자 살 수 없다. 세상에 오롯이 나만 있는 게 아니므로 결국 관계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다시 사건 이전의 내가 될 수 없지만 그래도 평범하고 일상적인 내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모든 치유의 끝이다.

관계속으로 들어가 내가 결정하고 안전하다고 믿는 관계부터 시작하는 일 그리고 안전하게 삶을 살아가는 일이 치유의 마지막 단계이다.

그러나 어떤 치유든 끝!! 하고 문들 닫아버리는 일은 없다.

삶 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일상의 사건들 전환기들에서 다시 나의 트라우마는 얼굴을 드러내고 나에게 상처를 입힐 것이다. 그러면 다시 시작하면 된다. 언제든 내가 안전하고 다시 사건을 곱씹고 사람들에게 위로받고 도와달라고 하면서... 그리고 또 다시...

 

사람들은 쉽게 말한다.

그렇게 부끄럽고 남사스러운 일을 왜 자꾸 언급하느냐?

너만 당한 일도 아닌데 남들은 가만 있는데 왜 너만 유별나게 구느냐?

사람 사는게 다 그런거지 참 뾰족하게 군다.

똑같이 맞았는데 아홉은 괜찮다고 하는데 한명이 아프다고 한다면..아픈게 정상일까 괜찮은게 정상일까?

 

지금 내가 알지 못하는 어딘가 이웃에서 누군가는 공포에 떨면서도 가족일이라 수치스러워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친구끼리 장난이라는데 나는 너무 마음이 두근거리고 떨리고 그만하고 싶은데 그걸 말하면 내가 찌질한 사람이 된다.  멀쩡해 보이던 배가 가라앉고 내 아이가 이유도 모른 채 죽었는데 사람들은 사고난 걸 가지고 왜그렇게 호들갑이냐고 한다. 몇십년이 지난 과거지만 내가 그 때 이유도 모르고 끌려가 여자로 수치감을 느끼며 폭력을 당했는데 이제와서 그런 남사스런 과거를 들추며 사과를 요구하는 이유가 뭐냐고 한다.

왜 너만 시끄럽고 너만 나대냐고...

모두가 아니라고 하면 아닌게 될까?

모두가 아니라니 아닌거라고 탕탕탕!!! 결정이 내려지는 순간이 폭력의 순간이고 누군가는 상처를 안게 된다. 그게 나일 수도 있다.

트라우마는 나의 문제이며 동시에 모두의 문제이다.

지금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지금 우리 주변에 익숙하게 벌어지는 폭력의 피해자이며 생존자라고 하면 너무 지나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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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9-09-07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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