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당한 페미니스트로 살기로 했다 - 웃음을 잃지 않고 세상과 싸우는 법
린디 웨스트 지음, 정혜윤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7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모름지기 사람은 모두 서로 다르기 때문에 충고 같은게 도움이 될 확률이 매우 낮다. 어떻게 나를 변화 시킨 것들이 당신을 변화시키겠는가? 내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대체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그리고 마침내 당신이 당신 자신이 되었다는 사실은 과연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p64

 

어떤 것에 대한 설명은 그것을 정당화 하는 것으로 들리기가 너무도 쉽다는 사실 때문이다,

 

                                          p101

 

어떤 사람들이 특정 가치에 접근하는 거슬 막는 일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음험한 정서적 폭력의 한 형태다 그리고 우리 문화는 소외집단들을 끊임없이 쪼그라뜨리고 침묵시키기 위해 그 권력을 마구잡이로 휘두른다,

                                  p 118 

 

 페미니스트들은 강간이 다른 범죄보다  '더 나쁘기' 때문에 강간 농담을 배제하려는 게 아니다,우리가 그것을 배제하는 이유는 우리가 적극적으로 성폭행의 정의를 축소시키기 위해 애쓰는 문화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문화는 스토킹 행위를  로맨스에다 집어넣고 희생자들이 잘못된 옷을 입고 잘못된 장소에 갔거나 잘못된 상대와 시시덕거렸다고 비난하며 여성 혐오가 깔린 변명 (남자는 다 그래) 으로 후토하고 강강범죄 신고에 대한 정서적 사회적 비용을 말도 안되게 높여버려서 신고를 꺼리게 만들며 실제로 이루어진 나쁜 행동보다 무고행위가 더 심각한 문제인 것처럼 말하고 강간 희생자에게 그들이 성적 유린을 당한게 '신의 계획'이라고 말하는 정치인을 선거에서 뽑고 재판까지 간 강간 사건에 대해 5퍼센트도 안되는 비율로 유죄판결을 내린다. 코미디언이 자구 살인이나 다른 범죄 행위들에 관해 우리가 농담을 할 때는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서 그건 이중 기준이 아니냐고 항변한다. 뭐 다행히도 살인이 일어나고 있고 만연해 있다는 사실에 대해 의구심을 제기하거나 그런 일을 당한 것을 신고하지 못하게끔 억압하는 문화적 서사는 없다 아마 사법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한다면 우리는 강간도 다른 범죄처럼 취급하기 시작할 것이다,

                            p 249 

 

어떤 일을 내가 직접 겪어보지 못했다고 해서 그게 사실이 아닌 것은 아니다, 얼마나 멋진 생각인가!

                       p 297 

 

 

 그가 그렇게 평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나니 무서웠다. 그에게는 같이 즐겁게 일하는 여자 동료가 있었고 그를 사랑하는 실제 인간인 여자친구도 있었다 그들은 그가 온라인에서 재미로 여자들을 괴롭혀서 정신적 외상이 남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다, 어떻게 그 두 인물이 같은 뇡서 나올 수 있는 걸까?   트롤들은 우리 주변에서 살고 있다, 극장에서 나를 만났는데 내가 나쁜  년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익명으로 글을 올린다, 혹은 식당에서 내 시중을 들었는데 내 가슴이 사진에서 봤던 것만큼 크지 않았다거나 혹은 6년 전에 한 바에서 내 옆에 앉았는데 당시 내가  먹은 메뉴들이 이러이러한 것들이었다고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인터넷에서 일어나는 일은 중요하지 않다고 그것은 실제 삶이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인터넷 트롤들 덕분에 나는 문명 세계와 우리의 가장 끔찍한 자아 사이에 경계가 그저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떠울리게 된다

                                     p 364

 

지금 나의 직업적인 삶에서 내가 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사람들아에 공개적으로 나서서 틀렸다고 단단한 방패를 내걸고 그것을 꿋꿋하게 지켜나가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선한것보다 쿨한 것을 더 중시하는 사람에게 그건 틀렸다고 말한다, 나는 내 몸을 무기로 만들어 나를 공격하고자 하는 여성혐오주의자들을 향해  그건 틀렸다고 말한다, 나는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자기네 들이 화가 났을 때 불태울 땔감으로 가볍게 취급하는 사람들이 내 관심과 존중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느끼는 남자들에게 그런 생각은 틀렸다고 말한다, 나는 내가 배아보다 덜 중요하다고 ㅈ장하는 종교적 열성당원들에게 그건 틀렸다고 말한다,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으라는 내 본능을 향해 그러지 않을 거라고 말한다, 

 

 그것은 사회가 여자들에게 정해놓은 경계 고분고분하고 다른 이를 돌보는 사람이 되고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으라는 명령을  걷어차서 무느뜨리고 나 자신의 경게를 세우는 한가지 방식이다, 나는 이걸 할거야 저걸 할거야 하면서 말이다, 당신이 나를 예속시빌 수 있다고 믿는 한 나는 당시에게 친절할 필요가 없다, 나는 바쁜 사람이고 내 시간이 무슨 공공재도 아니다 당신은 지루해빠진 사람일 뿐이니 그냥 내 앞에서 꺼지란 말이다,  이것이 바로 세계를 만드는 일이다,

                                               p368

 

 

페미니스트는 한가지 방식이 아니다, 엄격하지 않고 절대적이지 않으며 단 하나의 신념이 아니다, 수많은  이질적인 생각들 서로 다른 입장과 그들의 생각들이 모여서 서로를 인정하고 폭넓게 받아들이는 삶의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단지 남성 여성의 문제만이 아니라 모든 차별과 편견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아우르는 일이다,

엄격하게 이런것이 페미니즘이라고 규정할 필요가 없다,

내가 있는 자리에서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 그리고 다른 의견을 받아들이고 곰곰히 생각해보는 일들이 모두 페미니즘이 될 수 있다,

단 마음을 열고서

그럴 수 있겠구나.

니가 틀린 건 아니야  라고 하면서

누군가가 배제되거나 소외되지 않았는지 예민하게 감수성을 세우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다른 사고나 관념에 대해 비판할 수 있고 반대할 수 있지만 그 존재를 무시하지 않는 일이다,

 

저자는 뚱뚱한 페미니스트임을 전반에 내세우지만  비만 혐오나 다이어트 문화 외모지상주의 이외에 낙태 생리 몸에 대한 여러가지를 다루고 있다,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 내 몸에 대한 결정권은 누구보다 내가 먼저라는 것을 이야기한다, 유쾌하고 통쾌한 방식으로....

글은 내내 유머가 넘치고 사이다처럼 시원하지만 그래도 저자가 겪었을 마음고생이 상처가 느껴저서 마냥  즐겁게 넘길 수 없다, 게다가 그 문제는 지구반대편 여기서도 똑같은 문제이다,

'일베'는 어디나 있구나 하는 씁쓸함도 함께 알게 된다,

내가 속한 세대 사회 구성원이 모든 것이 아님에도 내가 느끼지 않은 것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꽉 막힌 사고가 자꾸 편견을 낳고 소외를 낳는다.

내가 어떤 크기의 세상을 살건인가 그건 내가 정할 일이다,

깨지는게 나쁘진 않다, 세상이 확대되는 일일 수 있다면...

 

처음엔 좀 산만하지만 읽다보면 저자의 매력에 점점 빠져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연찮게 "가정폭력 상담활동가를 위한 양성교육"을 듣게 되었다.

과정이 끝나고 활동가로 활동을 하게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강의 내용이 좋아서 신청을 했다,

가보니 관심이 있어서 신청한 일반인보다는 현재 활동하고 있는 분들이 많이 있었다,

100시간의 과정이수가 필요해서 오신분들이 많고 몇몇 나처럼 그냥 관심을 가지고 온 사람들

혹은 다른 분야에서 상담활동을 하고 있는 분들...

강의는 새로운 것을 알게 되는 것보다 아는 것이 명확하게 정리되는 것 그리고 현장에서의 경험들을 들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의외로 아직도 사람들의 사고가 여성, 페미니즘  가정폭력에 무지하고 무심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는 걸 다시 느끼는 경험이었다,

일주일에 두번  6시간씩의 강의가 쉽지는 않았다.

앉아서 듣기만 하면 되는 거지만.. 일단 모든 강의가 3시간을 꽉꽉 채워서 끝났고

모든 이야기가 쉽게 듣기엔 힘들때도 있고 마음 아프기도 하고 때로는 강사들이 울컥하는 모습에 저절로 나도 울컥해질 때도 있었다.

아직 초반이라 남은 강의가 많지만 여태 걍의는 다 괜찮았다,

특히 성 소수자에 대한 강의는 그게 최근이어서도 있지만 가장 인상적이었다,

전혀 거부감 없기  이해하기 쉽게 성정체성 성별정체성 등등을 설명하는데 3시간이 30분처럼 흘러갔다, 알고 있지만 정리되지 않았떤 개념들이 정리되고 아하. 그렇구나 하는 깨달음이 이어졌다.

유익할 뿐 아니라 재미까지 있어서 왜 여태 아무도 저렇게 쉽게 설명하거나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을까 싶기까지 했다

너무 재미있어서 돌아와 딸한테 설명하면서 이런 강의가 학교마다 행해지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순진하게 말했더니 (난 그저 쉽고 아무런 거부감없이 설명하고 이해시키는데 너무 감동해서)

딸이 무심하게 말한다,

 "그런 강의 한번 하면 아마 학부모 항의전화가 빗발칠껄..."

아.. 너무 쉽게 생각했구나

난 학생들도 충분히 이해가능한 좋은 강의라는데만 촛점이 맞춰졌는데

그 내용은 보편적인 것이 아니구나... 양성애도 동성애도 가능하고 그건 이상현상이 아니라는 것

트렌스젠더에 대한 이해와 세상에는 여성 남성 이외의 다양한 성이 존재한다는 것 그 언급만으로도 불편하고 불쾌할 사람들이 아직도 많이 있지... 하는 건 깜빡했다,

나 역시 강의 한 번 들었다고 사람이 드라마틱하게 달라진 건 아닐것이다,

어쩌면 귀가 얇아서 쉽게 빠졌을 수도 있고 조금은 의식있고 다르게 보이려는 마음에서 이해하고 싶다는 욕구가 더 강하게 이기적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다,

아이에게 설명하면서  이해된 개념들이 다시 꼬여가긴 했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알게 된건

 

세상이 모두 이성애자라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어버리는 사회적인 관습이  누군가에게는 폭력이 될 수도 있다. 세상에서 당연하다고 믿었던 것들이 언제부터 당연한 것이었는지 그리고 누가 당연하다고 정한 것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도 있다는 것

 

자신을 설명해야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두려움과 불안을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세상에는 우리가 모르는 부분이 많이 있고 우리가 무른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세상에 소개하거나 설명하지 않아도 인정받을 수 있다는 건 하나의 특권이고 권력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고 있다.  성적 지향이나 성 정채성으로 차별 받을 수는 없다는 것

 

자기가 이성애자라거나 타고난 남성 혹은 여성이라고는 일일이 설명하지 않는지만 동성애자이거나 양성애자이거나  자기가 결정하지 않은 , 등록된 성별과 자기의 정체성이 다를 경우는 그걸 일일이 셜명하고 이해받아야 하는 입장은 평등하지 않고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다,

 

라는 것이다,

나도 몰랐는데 나는 많은 권력과 힘을 가지고 있었던 거였다,

단지 타인에게 내가 누구이고 어떤 취향인지 (극히 사적이고 개인적인 부분)을 설명하거나 이해시킬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말이다

 

책을 통해서 알게 되고 깨닫게 되는 것과 다르게 누군가 그 입장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는 또다른 강한 충격이고 꺠달음이다,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더 넓은 세계가 있고 내가 아는 범위밖의 존재들이 있고 그 세계와 그 존재들이 결코 비정상적이거나 모자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설령 비정상적이거나 모자란다고 하더라도 그 이유때문에 차별받고 부당하게 대우 받을 이유는 없다, 그건 사람이 사람을 해치거나 위해를 가하는 일이 아니다,

 

상담하려는 사람의 입장에서  알아야 할 것은 성 소수자들이 그들이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불안하고 두려워하는 게 아니란다, 그들은 자기의 취향과 존재에 당당하지만 그런 자기들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 하나밖에 없는  가치관과 기준때문에 남들이 자신들을 다르게 보고 모자라게 보고 비정상적으로 보는 시선이 두렵고 불편하고 불안한 것이다,

솔직히 나도 내 아이가 그런 소수자가 아니길 바라고 아니었으면 좋겠고 아니면 다행일 것이지만

행여 그렇다면.... 그렇다는 이유로 차별받고 멸시받는 일은 없었으면 하는 이유로  그런 어쩌면이기적인 이유로 .. 지금 현재 그들이 차별받거나 무시당하지 않기를 원하고 지지하려고 한다,

어쩌면 여태까지 내가 그게 어때서? 라고 했던 태도들은 나와 상관없다는 입장에서 조금은 시혜를 베푸는 입장에서  그냥 무관심하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닌데 뭘... 하는 심정으로 괜찮다고 말했던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해치는 것이 아닌다음에야.. 다르다는 것은 차별의 이유가되어서는 안된다... 라고 이제는 믿게 된다,

 

 

강의이후 읽게 되는 벨 훅스의 책은 쉽게 정리되어 들어온다,

 

 

즉 지배가 있는 곳에 사랑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페미니즘 사고와 실천은 동반자관계와 육아를 통한 상호 성장과 자아실현의 가치를 강조한다, 누구나 욕구를 존중받고 누구나 권리를 누리고 누구든 예속이나 학대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관계에 대한 이러한 비전은 가부장제가 관계의 구조를 지키기 위해 고수하는 모든 것과 반대가 된다,  우리 여성들은 대부분 아버지나 남자 형제 또는 이성애자 여성의 경우  연애관계까지 사생활에서 접하는 친밀한 관계에서 남성의 지배를 경험했거나 경험할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남정과 여성이 모두 페미니즘 사고와 실천을 받아들일 경우 두 사람의 감정적 행복은 더 깊어질것이다, 진정한 페미니즘 정치는  언제나 우리를 속박에서 자유로 사랑없는 곳에서 사랑이 넘치는 곳으로 이끈다, 상호 동반자 관계야 말로 사랑의 토대다, 그리고 페미니즘 의 실천은 상호성의 토양을 만드는 우리 사회의 유일한 운동이다,

 

    17장  다시 사랑하기 위하여

 

 

페미니즘 운동은 연령과 여남을 불문하고 모든 사람들이 성차별주의를 철페하기 위해 노력해야 진보한다, 이런 노력을 실천하기 위해 꼭 어떤 단체에 가입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선 그에서 페미니즘을 위한 행동을 하면 된다, 우리는 가정에서 우리가 사는 지역에서 우리자신과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을 가르치며 페미니즘을 위한 노력을 시작할 수 있다,

(중략)

페미니즘으로 가는 길은 하나가 아니다, 사람마다 살아온 배경이 천차만별이므로 각자의 삶에 곧장 말을 건네는 페미니즘 이론이 필요하다, 흑인 여성 페미니즘 사상가로서 나는 페미니즘 투쟁이 흑ㅇ니의 삶을 개선하는데 매우 중대한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모든 흑인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구체적인 관심사와 전략을 찾아내기 위해서 반드시 흑인의 삶에서의 젠더 역할을 비판적으로 검토해보야야 한다고 생각한다,

선구적인 급진적인 페미니즘은 우리 모두에게 제국주의 백인 우월주의 자본주의 가부장제 내에서 우리가 어떤 위치에 서 있는지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게끔 젠더와 인종 계급의 관점에서 각자의 삶을 용감하게 되돌아 보라고 격려한다,

 

                      19장 페미니즘의 미래

저자는 페미니스트인 우리가 반대하는 것은'남자'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남성 중심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중요하지마 남자를 반대할 수는 없지 않은가 또한 여성이라고 해서 모두가 피해자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때로는 여성이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남자아이들은 주로 성차별주의적 남성성 규범에 맞지 않게 행동을 할  때  이런 학대의 대상이 된다' '가족내 성차별주의자의 주요 전파자는 대게 여성 양육자이다' '성인 여성이 아동에게 폭력을 행사한다는 사실을 페미니즘 운동이 직시하려들지 않으면 여성이 다양한 형태로 아동을 학대하는 현실을 쉽사리 무시하게 만든다' 같은 구절은 그도안 페미니즘에서 강조되어온 남성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의 다른면을 정확히 짚어낸다 젠더를 이분법으로 딱 잘라 남성과 여성으로 나누고 남선을 없애는 식으로는 성차별주의를 없앨 수 없다,

벨 훅스는 "케럴 길라건같은 페미니즘 사상가들이 질리지도 않고 여성이 더 다정하고 윤리적이라고 말했지만 여성들이 자시보다 더 힘없는 다른 여성들에게 하는 행동을 보면 도무지 그 말에 동의할 수 없다'며 여성들이 자신이 속한 정체성이라고 생각하는 같은 민족이나 인종집단에 보이지 않은 보사림의 윤리는 그들이 공감할 수 없고 동질성이나 연대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미치지 않았다'는 점을 통력하게 지적하기도 한다, "페미니즘은 테어나는 것이 아니라 민들어진다"는 것이다, 그르므로 여성 혹은 남성이라도 이원화된 성별 구분은 페미니스트 되기에 있어서 결정적이지도 생각보다 중요한 문제도 아니다,

 

나는 이런 시대에 특히 예민함이라는 감각이 재평가되ㅓ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민하다는 것은 상처를 잘 받는다거나 약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예민한 사람들은 상황을 잘 이해하는 사람들이다, 예민함은 이상한 상황을 이사하다고 생각하고 이상하다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이다, 에민하다는 건 주어진 질서의 오류와 모순을 눈치 챌 정도로 지적이며 동시에 강인하다는 것이기도 하다, 생각을 멈추지 않은 삶이라는 점에서 예민함이란 감각은 자기에의배려 혹은 통치되지 않으려는 의지로 이어질 수 있다, 예민함은 약자에게 강요되어지는 부정의한 제약을 거부하는 감각이다, 바로 그렇기때문에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은 때로 권력이 될 수 있다, 예민한 사람은 약자가 아니라 강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손에 쥔 사람이다, 사실 진짜 취약한 위치에 있는 사람 착취와 억압에 저항할 수 있는 자원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에민할 겨를이 없다, 예민함이라는 감각을 생각하고 말 할 수 있는 능력으로 이해하게 되면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스스로 점점 무력해진다고 느끼는 고립감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더불어 '상처받았다"  발화자의 위치를 피해자의 위치로 지정해서 말하기에서 ' 상처주네?"라고 상대에게 되묻는 말하기로 전환하는  페미니즘 정치학을 제안하고 싶다, 페미니즘은 약자를 위한 정치학이지 약자가 되자는 정치학은 아니다.

 

 

                 해제  우리에겐 미래가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차별을 옹호하거나 개선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가 전혀 아니다, 나는 모든 불평등에 분노한다, 차별, 그리고 그로 인한 불편과 피해 고통 억압은 저항의 대상이며 교정되어야 한다,

이것과는 별개의 논의다, 다만 이 글에서 문제 제기하고 싶은 것은 기존의 차별 기준이나 개념 자체가 차별을 심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차별을 시정하는 것만큼이나 차별 현상을 다양하게 해석하는 작업의 '해방적' 의미에 대해서이다,

차별은 불평등이 아니라 다름으로 재개념화 하는 것은 차별의 기준과 내용을 누가 정하는가의 문제이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하다, 상대방이 차별한다 해도 그것을 수용하지 않거나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거나 무관심하게 생각한다면 억압자가 의도한 차별의 효과는 이익을 보기 어렵다, 이렇게 생각할 때 차별에 대한 다양한 실천도 가능하다, 차별 가해자에게 같은 대우를 요구하는 투쟁도 필요하지만 상대방의 시선으로부터 스스로 자유로워지는 것도 중요한 저항이다,

일상에서 이러한 예는 무수히 많다, 세게 공용어가 영어라서 미국사람들은 행복할까? 요즘 미국인에 대한 정의는 1개 국어를 쓰는 사람이다, 미국의 문맹율이 전 세계 최고라는 사실은 차치하고라도 지금 이 살벌한 글로벌 경제에서 1개 국어만 해도 먹고 사는데 별 지장 없는 무식한 사람들은 미국인 밖에 없다,  (중략)

한국에서 일하는 방글라데시나 베트남 노동자는 대개 모국어와 한국어를 둘 다 잘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보통 한국인보다 언어능력이 뛰어난 그들을 우월하다거나 지식인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어는 구경도 못해본 대개의 미국인이 영어잘하는 한국인을 대하듯 말이다,

탈 식민 햏방이란 지배 세력이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을 정의하는 실천으로부터 시작된다, 서울의 시선으로 나를 정체화하고 그들과 같아지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서울을 상대화 하는 것 서울을 기준으로 삼지 않은 것 서울을 안식의 참고문헌에서 제외하는 것 서울을 왕따시키는 것 서울과의 거리로 지기 지위를 판단하지 않은 것이다,

여기서 상기해야 할 사실 중의 하나는 "평등"이 대개는 흡수를 의미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서울이든 미국이든 남성이든 후리가 흔히 중심이라고 불리는 경계선 그 집단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 집단 내부는 결코 균질하지 않기 때문이다, 서울 사람이 다 같은가? 미국 내부의 차별이 얼마나 많은가? 남성 내부의 차이는 남녀간의 차이보다 큰 경우가 대부분이다, 중심과 같아짐을 의미하는 평등은  바람직하지도 않지만 그 이전에 불가능한 프로젝트이다,

 

                                          - 차별의 효능- 중

 

 

 

저항이란 무엇일까 이기는 것인가? 인간다운 것인가? 정의인가? 단도직입적으로 약자가 저항하면 이익을 보는가? 아니면 약자는 도덕적이어야하므로 이익보다 대화를 추구해야하는 가? 윤리적 사법적 문화적 차원에서 저항의 개념은 모두 다르다, 이 불일치때문에  피해자들은 저항하면 할수록 2차 3차 피해를 겪을 가능성이 크다, 약자들이 저항할 줄 몰라서 저항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대개의 경우 저항하면 더 큰 피해를 입기 때문이다,

저항해서 자존감이 회복되거나 실질적 보상을 얻는 경우는 드물다, 저항과정의 사소한 문제가 가해의 본질보다 더 문제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갑질'은 하지 않지만 ' 있는 자;들은 이 억울함을 모른다, 없는 이들의 저항은 폭력으로 간주된다, 하회불안 조정세력이 되거나 허수아비 취급을 받으면서 누가 시켰느냐며 배후를 조사받는다면 가해와 피해의 상황은 사라지고 양비론에 사생활까지 파괴된다,.... 저항해도 저항하지 않아도 비난받는다, 부정의는 끝이 없다, 유명진보 인사나 강남좌파가 저항하면 명에든 실질적 힘이든 얻을 확율이 있지만 없는 이들이 저항하면 박수보다 뭉개진 억장에 다시 억장이 덮친다, 저항하지 않았다는 누구의 시선인가? 그들은 저항했다,

 

                -그들은 저항했다- 중 

 

 

 

 

상실은 보편적 경험이지만 애도는 자격을 요구한다, 그 자격은 가족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다했는가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이름만 식구이거나 심지어 가족을 괴롭혔던 사람도 정상 가족 규볌에 부함하면 가족으로 간주된다, 장레식장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는 가족간의 갈등이나 주먹다짐은 그러한 상황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 이처럼 부고란은 이성애제도와 중산층 중심의 일부일체제를 생산 유지 상기하고 이데올로기를 사실로 만들어 보도한다, 인위적 제도가 자연스러운 인생사로 둔갑하는 것이다,

삶이 불공평하듯 죽음 역시 그러하다, 애도의 위계는 말할 것ㄷ 없다, 애도를 서열화 하는 사회 제도와 문화적 인식은 매우 다양하다, 누구의 죽음을 슬퍼하고 기념할 것인가? 죽음의 가치를 둘러싼 논쟁은 인류의 역사 그 자체이다,

 

 

보편적이라고 여겼던 것들

상식이라고 믿어버린 것들에 대해 뒤집어서 다르게 보는 시선이 필요하다,

어쩌면 누군가가 자기의 혹은 자기 집단의 이익을 위해 이것이 보편적이고 상식이며 누구에게나 통하는 것이라고 지칭한 것들에 대해 나는 (우리라고 하고 싶지만 일단은 나는) 아무런 고민없이 의심없이 받아들여왔다,

그냥 뒤집어 볼 생각없이

뭘 그런 엉뚱한 질문을 하냐고

세상에 설명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그렇게 말도 안되고 논리도 없이 믿고 살아왔다,

세상의 정의는 저마다 다르고 권리도 제각각 다르다,

모두가 나의 정의를 세우고 나의 권리를 주장하며 나의 평등을  내세운다면

세상은 지옥도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누구도 누구와 같지 않고 욕구도 감정도 다 다르다,

그 다름이 매일 매시간 매 초 부딫지지만 우리가 그나마 안전하고 평화롭게 사는 건

어쩌면 나도 모르게 내 몸속 어딘가 간직하고 있는 양보와  주저함 그리고 믿어주는 유전자때문인지 모르겠다,

세상이 정의라고 하니까 상식이고 보편이라고 하니 그렇게 믿고 내가 조금 고치면 되겠지 내가 조금 양보하고 불편하면 되겠지 하는 마음들이 모여서 그나마 세상이 굴러가고 있는게 아닐까

세상을 뒤집어보고

마땅하다 믿었던 것들이 사실 말 하지 않았지만 몹시 불편했었다고 한다면

또 어디선가 나같은 사람이 사실은 나도 그랬어 라고 소심하게 말할지 모른다,

 

내가 까다롭고 성질이 못되서 불편했었나 싶었던 것들이 나만이 아니었음을....

비록 내 판단이 틀릴 수 있을지라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나말고도 있음에 반가웟다,

주저하지 말고  그럼에도 예의있고 이런거 불편하지 안나요? 하고 말을 거는 행위가 필요한 시대다,

나는 아무렇지 않고 오히려 편하게 여겼던 어떤 관행들 일상들 언어들 표현들이 누군가에게는 따끔하게 다가갈 수 있음을 다시 생각한다,

사람은 저마다 다르기 때문에 살만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집 근처 도서관에는 구판이 있었다,

개정판과 비교해보니 몇몇 부분이 더 첨가 되었고 빠진 부분은 모르겠다,

굳이 개정판을 찾아 읽지 않아도 상관없을거 같다,

 

요즘 복지관에서 상담수업을 듣는데 강사가 하는 말 중에 와닿는 것

심리학이란 사람에 대해 알고 싶어 시작된 학문이다,

심리학 이론은 결국 심리학자 각각이 자기 문제를 고민하다가 만들어낸 이론이며

세상에는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의 수만큼의 심리학 이론이 나올 수도 있다,

꼭 하나의 이론에 세상 모든 사람을 끼워맞추려고 하지 마라

맞지도 않을 뿐 아니라 타인을 오해하고 점점 더 모르게 되는 수가 있다,

심리학이란 결국 타인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공부이다,

공부를 하면 할 수록 타인을 알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를 알아가는 것이다,

나를 잘 안다는 것도 타인을 아는 것 만큼 중요하다,

 

여성학이란 학문도 결국은 사람을 위한 사람을 공부하는 학문이다,

세상은 편리하게 남성과 여성으로 나ㅜ면서 여성들은 이러이러하다는 판단을 하고 평가를 하지만 세상에는 여성의 수만큼 다양한 여성학 이론들이 존재한다,

그저 남성의 대척점으로서의 여성이 아니라 여성과 여성 사이에서도 무수한 다름이 존재하고 하나의 이론으로 종합할 수 없는 개성들이 있으며 제각각 안고 있는 문제들의 크기와 질감도 제각각이다,

같은 성안에서도 나이 인종 계급 학력  직업 지역 등등 여러가지 요소들이 제각각의 여성들을 특징지으며 서로다른 문제를 가지고 있다,

나에게 문제가 되는 일이 같은 여성임에도 저이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고 저이에게 지독한 생사의 문제가 나에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이기도 하다,

할수록 어렵고 할수록 꼬여가며 수학처럼 딱 맞게 떨어지는 공식이 있는 것도 아닌 것이 사람이다, 어떤 작품에서 묘사되듯이 가장 뜬금없고 맥락없고  논리적이지도 않은 이렇게 저렇게 묶어보고 조합해봐도 어딘가 어설프고 튀어나온 부분이 거슬리는 존재가 바로 사람이다,

누군가의 오랜 연구를 통해 세상에 나온 어떤 이론도 세상 모든 사람에게 모두 적확하지 않다,

그래서 계속 새로운 연구가 필요하고 다름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결국 세상에서 내가 아는 부분은 세상의 극히 일부분일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겸손함만 남게 되는 것

그것이 사람에 대한 이해이고 어쩌면 여성학이라는 것도 그런 것이다,

 

책을 읽으며 불쑥 불쑥 떠오르는 감정이나 분노  그리고 끄덕이게 되는 이해들을 어떻게 정리해야하나.. 고민하다가 그냥 그저 내가 밑줄 긋고 기억해야겠다고 결심한 부분들을 못믿을 내 머리보다는 무딘 연필끝을 믿는 마음으로 기록하는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나의 기록 역시 누군가 이 책을 읽은 다른 이들에게는 뜬금없고 맥락없는 부분일지 모르겠지만

세상의 모든 사람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나란 사람은 이런 부분에 와닿았구나  하고 받아주면 좋겠다,  이해까지는 아니고 그냥 이런 사람도 있구나 하는 마음만 부탁한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경험하지 않을 것에 대해서는 지배 이데올로기나 대중매체에서 떠드는 것 이상을 알기 어렵다, 알려는 노격 세상에 대한 애정과 고뇌를 유보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타인에게 상처를 준다. 한나 아랜트가 말했듯이 사유하지 않음 이것이 바로 폭력이다,

 

(중략)

 

여성 이 독특한 정치적 약자들은 왜 그토록 집요하게 자기를 '자기 편'을 부정할까? 아이를 낳지 않거나 레즈비언이거나 담배를 피는 여성은 그 연예인의 편견을 깨는 '대중적인' 여성운동가가 될 수 없는가? 지배 계급으로서 남성은 5천년동안 피지배 게급인 엿어을 때리고 죽이고 교환하고 사고 팔고 해고하고 착취해왔다, 그렇다면 '적'이 아닌가? 왜 여성은 남성을 적으로 상정하는 것을 두려워할까?

어떤 면에서는 억압집단으로서 자본가와 미국이 저지른 잘못보다 억압집단으로서 남성이 행한 잘못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물론 나는 남성도 자본가도 미국도 단일한 정체젓으로 환원할 수 없기 때문에 '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의 주장은 남성을 적으로 상정해야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남성응ㄴ 적이 아니라는 여성들의 자기다짐과 잠자를 안심시키는 발언들 그리고 남성과 대립하고 싶지 않은 자기 최면의 배후에 혹시 '가부장제는 정치적 문제가 아니다'라는 무의식이 자리집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질문해보자는 것이다,

 

                                                                         34-37

 

마지막으로 여성학에 대한 편견 두가지 여성학은 편협하고 깊이가 없으며 공부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르므로 학문이 아니다 라는 주장과 '여성학은 현실과 상관없이 너무 어려운 이야기만 한다는 견해는 사실 같은 애기다, 이것은 모두 기존의 남성 중심적인 학문 개념에서 나온 편견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 중에 여성학이 학문이 아니라고 믿느 ㄴ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므로 여성학이 여성 현실과 거리가 있어서 여성운동에 도움이 안된다는 비판에 대해서만 말하겠다, 법학이나 물리학의 어려움은 그 학문을 비판하는 이유가 되지 않는다,에 언제나 여성학이 어려운 것만 문제가 된다, 나는 여성학이 어려워야 하고 어려운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만일 여성학이 여렵다면 그것은 여성학자가 현학적이어서가 아니라 여성주의가 익숙하지않은 세계관때문이다, 여성학의 내용이 여성 '현시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면' 새로운 세계를 향한 상상력과 용기를 주지 않는다면 존재할 필요는 없다, 여성학은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여성학이 쉽다면 이는 우리 사회의 통념에 도전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고 그런 여성학은 존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44-45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근대적 인권 개념과 인간의 범주에서 여성을 제외하려는 가부장제 사이의 모순은 모성의 발명으로 극복되었다, 아동기와 모성의 창조는 남성 가장 노동자를 개인으로 상정한 가부장적 자본주의의 전개를 위해서도 필수적인 것이었다,  서구에서 존 로그이전 바로 1세기 전까지만 해도 세상에 태어난 아이는 원죄에 의해 오염되어 있다고 믿었다,

오늘날과 같은 모성 이데올로기는 아이들은 어머니가 어떤 것이라도 쓸 수 있는 백지 상태라는 관점과 함께 탄생한것이다, 이후 어머니는 자신의 노력여하에 따라 아이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엄청난 부담감과 죄의식에 시달리게 되었다,

어느 누구도 타인의 인생을 대신 살 수 없지만 유독 어머니만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머니는 남편을 출세시키고 자녀를 조은 대학에 보내야 한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맞으면서도 그를 변화시켜야 하고 어머니는 생명을 위협하는 폭력앞에서도 자녀들에게는 모성애를 발휘해야한다. 아이를 남기고 폭력 가정을 탈출하는 엿어에게 쏟아지는 비난은 순결이 그러하듯이 모성애 역시 여성의 목숨과 맞바꾸어야 한다는 맛어 사회의 메세지다, 훌륭한 어머니가 되려는 여성은 자신을 파괴하려는 유전자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어머니는 남을 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61

 

 

 

포르노에서 남성 관객혹은 남성화된 관객이 느끼는 '쾌락'은 권력 행동의 결과이다, 포르노의 쾌락은 여성이 벗었기 때문이 아니라 여성이 응시의 대상 폭력의 대상으로 재현되어 남성 소비자가 자신에게 권력이 있다는 느낌과 의식으로 만족할 때 발생한다,

 

영화 <원초적 본능>의 감독 폴 벤호벤의 후속작 <쇼걸>은 제목답게 더 많은 여성들이 더 많이 벗었지만 기대와 달리 흥행에 크게 실패했다, 이 예상치 못한 결과는 성차별 사회에서 포르노 누드 산업이 생산하는 에로틱한 쾌락이 어떤 권력 관계에 서 가능한지 보여준다, <쇼걸>은 쇼걸들의 벗은 몸을 보여주지만 이 영화의 주제는 여성의 벗은 몸을 보여주어 남성 관곅의 시선을 만족시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쇼걸들의 연대와 자매에를 강조했기 때문에 돈벌이에 성공할 수 없었다, 이 같은 권력 구조때문에 포르노 산업은 성별화된 정치경제학에 의존해야만 작동이 가능하다, 따라서 여성은 포르노를 만들어 돈을 벌거나 구매하는 주체가 되기 어렵다,

                                                               94

 

 

 

아는 만큼 보인다 라는 말은 아름답지만 동시에 냉정하다, 건조하게 다시 쓴다면' 고정관념이 사실을 만든다'  영화 <가스등>에서 잉그리드 버그먼의 분열처럼 성차별 사회에서 인식 주체로 인정받지 못하는 여성은 늘 '내가 본 것을 믿을 것인가 남성이 말한 것을 믿을 것이가"의 문제로 고통받는다,

대개 여성에 대한 폭력은 공적인 문제 정치적인 ㄴ사건이라기 보다는 '선정적인'이슈 지면 편집 용어로 말한다면 '쉬어가는 코너"쯤으로 여겨진다, 나는 여성 폭력을 다루는 한국 사회의 일반적인 접근처럼 문제의 심각성을 강조하면서 여성의 비참한 현실과 남성의 비인간성을 폭로하는 것에 관심이 없다, 혹은 대책을 논하면서 엄격한 법 집행과 의식 개혁을 주장할 생각도 없다, 이 글은 가정폭력의 실태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이 문제를 바라보는 한국사회의 시각에 대한 바판에 초점을 맞춘다,

                                         115

 

 

나는 가정도 권력 관계가 작동하는 인간 사회인 이상 폭력이 발생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반대로 가정에서 폭력이 없을 것이라는 이데올로기가 가정 폭력의 발생 기제라고 본다, 폭력으로 평화로운 가정이 깨져셔 문제가 아니라 여성의 생명을 위협하는 폭력으로도 (남성 중심적)가정이 깨지지 않은 것이 더 문제다,

비바람이 집안에 들어가도 법은 들어갈 수 없다는 논리가 이제까지 가정폭력을 방치 지지하는 논리였다, 물론 이 논리는 거짓이다, 같은 가정 내 폭력인 아동학대나 노인 학대 문제에 대해서는 이러한 불개입 논리를 적용하지 않는다, 또한 호주제 상속세 가족께획의 예처럼 국가가 가족/ 사생활 에 침투하는 논리는 남성 국가의 이해에 따라 선택적이다,

무엇이 사회이며 사회는 어디에 있는가 가정과 사회는 다른가

남편에게 당하는 고문과 국가로 부터 당하는 고문의 내용은 큰 차이가 없다, 다른 점이 있긴 하다, 국가기관에서 고문당한 사람은 고문 가해자에게 밥을 차려주지 않아도 되며 평생 맞는 것도 아니다, 국가 폭력의 가해자들은 아무리 무소불위의 권력을 후두른다 해도 결국 법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나 가정은 치외법권 지대이며 아내를 구타하는 마성들은 광범위한 사회적 이해와 지지를 받는다,  남녀에게 차별적으로 적용되는  성역활 규범이 남편의 폭력을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사회는 가정폭력 피해여성에게 목숨을 위협받는 폭력 상황에서도 가해 난ㅁ편의 권력(버릇)을 고치고 가정을 지킬 것을 요구한다. 전쟁 조직폭력 학교 폭력의 피해자에게 가해자를 감동시켜 폭력을 멈추게 하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인간응ㄴ 누구에게나 맞지 않을 권리가 있지만 아내일때는 예외이다, 그 인간이 여성이라면 여성이 아내가 되면 맞지 않을 인간의 권리보다 여성으로서 참아야 할 도리가 더 강조된다, 여성은 너무 쉽게 인간의 범주에서 제외된다, 그래서 가정폭력 방지법으로 고소당한 폭력 남편들은 (사람이 아니라)집사람을 때렸을 뿐인데 내가 무슨 잘못을 했냐고 억울해한다,

 

                                         124-125

 

 

이영훈 교수는 정신대 문제와 관련한 과거사 청산에 대해서는 더욱 강력한 청산을 요구했다.

성노예제 조직과 관리라는 일본의 전쟁범죄가 일제만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강제 동원과정에서 협조하고 위안소를 위탁 경영한 한국인 관리자, 위안소를 찾은 한국인 병사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해방 후 대한민국의 일부 군대에서 공식적 비공식적으로 자행된 여성의 성착취 국가적 사회적 차원에서 사실상 방조된 미군 기지촌에서의 성매매 문제도 청산 대상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그는 '군 위안부'뮨제를 민족모순으로만 제한하는 시각을 비판하면서 성폭력과 성매매를 남성 중심 사회에서 발생하는 '동일한 '여성 인권 침해 사안으로 파악한다, 때문에 일제가 물러간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여성 인권 침해인 성폭력과 성매매는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고 그러한 현실까지도 청산의 대상에 포함해야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논리는 남성중심의 획일적인 언어와 인싱ㄱ이 지배적인 한국 사회에서 수용이전에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었다, 한국 남성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그의 급진적인 인식은 나와 내 주변의 여성주의자들을 놀라게 했지만 곧바로 매도 당했다,

가부장 사회에서 남성은 공식 영역 과 비공식 영역 모두에서 성의 자유를 누리지만 여성에게는 가족안에서 출산을 위한 성만을 허용한다, 남성은 두 영역을 마음대로 넘나들지만 여성이 비공식 영역의 성적 제도와 연관되는 것은 낙인을 의미한다, 특히 성판매에 종사하는 엿어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극심한 혐오의 대상이 된다, 인간의 성활동이 성별에 따라 이토록 의미가 다른 것이다, 이처럼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성은 여성의 자아와 인격 가치를 좌우하는 주요한 요소로 간주된다, 그래서 성폭력과 성매매 제도가 여성을 통제하는 권력일 수 있는 것이다,

이 사건에서 내가 가장 두려워한 사실은  이교스의 발언에 대한 온국민의 분노 그 감정의 정체가 성판매 여성에 대한 완벽한 타자화와 혐오를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군 위안부 문제를 전시 성폭력으로 인식하는 근거가 자발적인 성판매 여성에 대한 혐오여서는 안된다, 나는 순결한 피해 여성과 타락한 선판매 여성이 라는 구분보다 성폭력과 성매매가 누구를 위한 제도인지를 질문하는 것이 더 근본적인 문제라고 본다, 현재 대한민국 여성들은 일제에 의해 집단 성폭력을 당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성폭력은 만연해 있다, 일제 시대 정신대로 끌려간 여성들 기지친 성판매 여성들 20044년 여성 노동인구의 4분의 1에서 5분의 1에 이른다는 성산업 종사 여성들 그리고 밤길 걷기를 두려워하는 여성들의일상적 공포는 모두 같은 원인에서비롯된 것이다,

 

한국 남성에게 성폭력을 당하면 개인적인 일이고 일본 남성에게 당하면 민족적인 아픔인가? 성폭력은 가해 남성이 누구인지에 따라 그 성격이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남성에 의한 폭력이라는 사실이 더 본질적인 문제다, 그르므로 여성을 순결한 피해여서과 타락한 성판매 여성으로 구분하는 것은 남성 사회에서 여성의 가치를 정하는 방식이다, 남성의 입장에서 성매매와 성폭력은 자발과 강제라는 반대 현상이지만 여성의시각에서는 구별될 수 없는 연속선이다, 언뜻 모순처럼 보이는 이 현실이 바로 성폭력과 성매매의 원인이다,

남성의 성욕은 통제할 수 없다는 전제 아래 여성을 남성의 성 권력의 희생자와 자발적으로 남성의 욕구에 부응한 여성으로 나누는 것은 누구의 논리인가? 성폭력 피해 여성이나 성산업에 종사하는 여성 모두 결국은 남성을 위한 제도의 희생자들이다, 나는 일본 우익의 주장대로 한국 여성들이 성매매로 전쟁에 참가했다고 하더라도 일본 정부는 명백히 국제법을 위반한 것이며 당연한 사과 배상해야한다고 생각한다,

 

                                                                             140

 

 

어성에게 섹스와 모성은 자원이자 억압이다, 남성은 그렇지 않다, 이것은 가부장제 사회의 가장 근원적인 작동 기제이다, 여성에게 섹스가 자원이가도 하기때문에 억압이 아닌 것이 아니라 이 현실이 바로 성폭력의 원인이다, 남ㅅ어에게는 모순이지만 여성에게는 연속선이다, 여성에게 섹스가 자원이자 억압이라는 사실은 성매매 와 성폭력이 명확히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섹스의 주체는 오로지 남성이라는 의미이다,

주체와 피해자의 이분법 그리고 이러한 이분법의 성별화는 남성 주체의 이해와 환상 속에서 구성된 침묵하는 피해여성이라는 관념을 낳았다, 이분법에서 각각의 범주는 겹칠 수 없는 상호 배타적인 것으로 설정된다, 주체 아니면 피해자다, 그래서 여성이 행위자 주체이면서 동시에 피해를 당한다는 주장을 하기가 쉽지 않다, 때문에 피해는 곧 피해자화로 연결된다, 피해는 타자화를 동반하지 않지만 피해자화는 타자화를 견제한다,  

피해여성은 남성 주체의 욕망에 의해 규정된다, 남성의 입낭에서 강간당한 여성은 더럽혀진 여자이거나 기껏해야 무기력한 희생ㅇ자지 성별 계급투쟁의 생존자가 아니다, 그리고 이ㅓ한 남성의 시각이 곧 사회의 시각이 된다, 특히 성폭력 피해 여성에 대한 피해자화는 가부장제 사회의 가장 지부한 가장 오래된 타자회 방식이었다,

 

                                                                     -145   146

 

 

프라이버시는 개인의 개념과 함께 탄생했는데 이때 개인은 중산틍 남성만을 의미한다, 우리 사회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프라이버시 개념은 중산층 남성의 프라이버시다, 프라이버시는 계급화 성별화 된 언어다, 다시 말해 모든 인간이 이간으로 간주되지 않기때문에 프라이버시 역시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보장되지 않는다, 만일 어떤 사람이 9평 아파트에 산다면 9평이 그/그녀의 프라이버시 공간이 되고 50평 아파트에 산다면 50평이 사적인 공간이 된다, 남성에게 집은 프라이버시의 공간이지만 여성에게 집은 노동의 공간으로 프라이버시가 잘 보장되지 않는다, 오히려 여성들은 집에서 나와 공적인 노동응ㄹ 할 때 프라이버시를 가질 수 있다고 한다,

이제까지 가정 내 폭력에 국가가 개입하지 않은 주된 근거는 개인 프라이버시를 침해할 우려였다, 이러한 인식은 여성은 이간이 아니므로 여성의 프라이버시는 남편에게 속해 있으며 폭력당하는 여성의 고통보다 가해자의 프라이버시가 더 중요하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공 사 영역의 분리 대립은 허구이다, 공적 체계와 생활 세계를 대립시켜 체계에 의한 생활 세계의 식민지화를 우려했던 사회학자 위르겐 하버마스의 비판 이론 역시 여성의 시각에서 보면 공 사 분리 이데올로기의 변형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이나 차별은 인권의 시각에서 정의되거나 문제화되지 않고 가족주의 민족주의등 남성 공동체의 관점과 이해에 따라 규정되는 경우가 많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는 여성 억압에 반대하는 이유조차 여성 인권을 중심으로 논해지지 않아 실질적인 효과를 거두기 어려웠다, 예를 들어 여아 낙태는 여아의 생명권과 어머니 여성의 건강에 대한 염려를 중심으로 논의되는 것이 아니라 성비 불균형으로 남자들이 장가 못간다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가 된다, 정신대 문제는 피해여성의 인권이 아니라 민족의 수치를 중심으로만 는의된다, 가종폭력의 해결책 역시 피해여성의 공포나 고통의 해결보다 남성 중심적 가족 유지를 더 강조해왔다, 문제의 원인이 대책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성폭력인가 하는 성폭력 정의의 배제와 포함의 원리를 살펴보면 우리 사회의 반 성폭력 담론이 여성의 인권을 위해서가 아니라 부계가족 보호라는 남성 공통체의 이해에 더 기능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중략)

현행 성폭력 특별법에서 강간은 남성의 성기가 여성의 성기에 삽입되었을 경우에 한정된다, 성폭력을 피해자의 인권 침해가 아니라 임신 가능한 부녀자 보호 라는 가부장적 시각에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군대에서 남성간의 성폭력 성전화자에 대한 강간 여성 성기에 이물질 삽입등은 강간이 아니라 추행죄가 적용되어  강간보다  형량이 낮다,

가부장 사회가 임신 가능한 부녀자만을 여성으로 볼 때 성폭력은 개인의 인권을 침해하는 범죄가  아니라 남성 각자가 소유한 임신 가능한 뷴에 대한 침해죄- 사유재산권 침해 가 된다, 이러한 문화적 규범때문에 성폭력 특별볍이 있어도 아내나 성판매 여성에 대한 강간은 처벌하기 어렵다 자기 아내나 성판매 여성에 대한 성폭력은 다른 남성의 가임가능한 부녀가가 아니므로 남성 연대의 가부장제 질서를 위협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별은 억압적인 제도지만 한편으로는 개인에게 사회 구성원으로 안정된 정체성을 부여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노인이나 장애인 특히 여성 노인이나 여성 장애인은 탈성화된 존재들이다, 이들은 성욕이 없거나 성별 정체감이 없는 존재로 간주된다, 인간이기 이전에 여성 혹은 남성으로서 정체성이 우선시되는 성별 사회에서 탈성화된 사람들은 인간외 혹은 인간이하의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여성주의 사유의 방법의 출발은 "그들이 말하게 하라'였다, 우에노 치즈코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문서화된 역사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여성의 역사가 출발하다보니  그동안 역사는 남성에 의해 여성에 대해 쓰여진 문서나 재현에 의존했다, 그러나 이제까지 남성들이 쓴것은 여성에 대한 '사실'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이 여성에 대해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환상을 갖고 있는가와 관련된 남성의 관념을 웅변하고 있다, 다시 말해 남성이 생산한 여성에 대한 지식은 남성 자신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지 여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고 있지 않다, 이 문제를 남성을 여성주의 자로 여성을 성판매여성으로 바꾸어 본다면 무리일까? 이런 치환은 백인여성과 흑인여성 비장애 여성과 장애 여성 이성애자와 동성애자의 관계에 모두 적용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기존 나의 세계꽌과 갈등을 일으키는 현실이 나타났을 때 두 가지 태도가 가능하다, 하나는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 본다 그래서 결국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 된다. 다른 방법은 자기 단절을 통해 자신을 현실에 개방하는 것이다,

 

 

 

세상을 보는 방법.

어떤 시선을 세상을 사회를 사람을 여성을 볼 것인가

그것부터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저 상식이라고 믿었던 세상의 잣대가 실은 인류의 절반만을 위한 기준이었고

그 나머지 절반은  앞 서 말한 절만이 만든 기준에 무조건 자기를 우겨넣어야 하거나 반대로 그대로 무지하고 이상하고 다스림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내가 상식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할 때 그 상식은 과연 누구를 위한 상식인지

자꾸 내가 가진 틀을 뒤집어 보는 연습을 해야한다,

우리는  ~ 해야한다는 당위의 말 안에 우리가 누구인지

해야한다는 것이 정말 그러해야하는 것들인지 생각해볼 일이다,

가부장제 안의 성차별 역할의 의미 성판매 여성 노인 장애인 등등

세상에는 참 많은 우리 밖의 사람들이 존재한다,

나는 내가 우리 속에 포함될 수 있다는 것에 안도한다

우리가 어떤 의미의 우리인지 고민해 볼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고 그저 내쳐지지 않음에 안도하고 그들이 나랑 다르다는 걸 증명하고 싶어했다,

내가 여성으로 지금까지 커다란 어려움없이 무탈하게 살아온 것은 내 능력이 아니다,

한편으로는 운이 좋았던 것이고 한편으로는 나는 적어도 주류에 포함될 수 있었던 것이고 또 많이 무지하고 생각하지 않았기때문이기도 하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아무것에도 왜?라는 단서를 달지 않고 만족한다면 어쩌면 더 편할 수 있지만 이미 알기 시작했고 이유가 자꾸 궁금해진 이상 나의 안락함이 조금씩 불편해지고 있다,

내가 이상하다고 부당하다고 여기던 것들이 나의이기심이거나 못된 속성이 아님을 이젠 안다,

물론 개인으로서 나도 당연히 내 욕심이 우선이고 이기적인 마음을 가질 수 있지만

사소한 일에도 누군가에게는 권리인것이 누군가에게는 욕심이 되는 것

그건 올바른 것이 아니다,

남녀의 불평등한 관계가 가부장제를 만들고 그 오래된 제도는 뼈속까지 어떤 단 하나의 기준을 갖게 하고  상식은 늘 정치적으로 옳다고 믿었다

의심하는 일

누군가가 불편하다고 하는 소리을 들어보는 일

나의 불편함을 소리내어 보는 일

그건 정치적이며 동시에 삶이다,

 

여성학 도서를 읽으며 내가 달라진건

많은 여성학 지식을  갖게 되고 더 똑똑해진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다른 시각도 존재한다는 것

다르게 보는 것이 많이 불편하고 힘들지라도 하나하나 새로 배우는 마음으로 바라보는  태도를 가진것이다,

 

구판이라 어쩌면 개정판에서 많이 바뀐 부분이 있는지 모르겠다,

읽으면서도 지금도 이래? 싶은 부분이 많이 보였다,

개정판에서 바뀌었다면 다행이지만 지금도 여전히 이런 세상이 존재한다면 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단어의 사생활 - 우리는 모두, 단어 속에 자신의 흔적을 남긴다
제임스 W. 페니베이커 지음, 김아영 옮김 / 사이 / 2016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글을 쓰다보면 늘 비슷한 패턴이 있구나 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내가 쓰는 글은 어쩔 수 없이 내 스타일이구나 하는 생각

그것이 좋다 나쁘다의 판단은 할 수 없지만 내가 쓰는 글은 늘 비슷하구나 생각한다,

누군가의 글을 읽으며 어쩜 이렇게 쓸 수가 있을까

나도 이렇게 쓰고 싶다,... 라는 욕망을 느끼지만

비슷하게 흉내를 내보아도 결국 내 스타일로 돌아온다,

 

내 스타일이란 어떤거지? 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뭐랄까

투명하지 않고 조금 애매하며 웃기도 울기도 애매한 표정같은거??

 

저자는 사회심리학자로 심리치유적 글쓰기 연구에서 시작에서 사람들이 쓰는 글 특히 그들이 사용하는 단어를 통해 그 사람의 심리를 알 수 있음을 주장한다,

오랫동안 다양하게 프로그로밍된 컴퓨터가 개인이 쓴 글을 분석하면서 엌던 단어를 쓰고 어떤 보조어를 썼는가를 계산하고 분석하면서 사람을 판단한다,

'나'와 '우리'를 쓰는 것에 대한 비교

부정적 감정 긍정적 감정을 나타내는 단어

인칭대명사를 쓰는 빈도

등등등

여러가지 분석을 통해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판단한다,

흥미롭다,

이렇게 사람을 알아볼 수도 있구나

그런데 읽어갈수록... 어쩔 수 없이 부정적인 사고가 강한 나라서인지

그래서 어쩌라구 하는 생각이 불쑥불쑥든다,

어떤 심리학 실험이든 결론은 항상 ... 세상은 세상에 사는 사람의 수만큼 다양한 ... 수많은 경우의 수가 생긴다는 것 그것이다,

그 다양한 경우의 수를 비슷한 것들로 묶을 수 있지만 결국 비슷하다는 것이지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사실 컴퓨터의 정확성을 수치로 여러번 말하지만 사람이 판단하는 50%의 정확성과 차이가 많이 나지 않는다, (내 생각엔)

통계적으로 50%와 75%는 큰 차이가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화고 맞지 않은 50%와 25%는 여전히 존재하지 않는가? 그렇게 많은 변수가 있고 예외상황이 있다면 결국 그저 이렇게 저렇게  대략적 구분이상은 아니지 않나 싶다,

저자도 늘 강조하듯이 사람이 쓰는 단어를 통해 그 사람을 알 수 있지만  사용하는 단어를 바꿈으로써 사람이 바뀌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이러이러한 단어를 쓰고 이렇게 글을 쓰는 사랆 말을 하는 사람은 이런 특성이 있다고는 알 수 있지만  이러이러한 성격이나 특징을 가지려면 이런 단어를 쓰야한다고 말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결국 결과론이 아닐까

그래도 흥미로운 부분이 몇 있다,

 

왜 지위가 높은 사람은 '나'라는 단어를 적게 사용할까?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요 는 자신이 주도권을 잡겠다는 뜻이다,

내가 쓰는 단어를 통해 나의 <성취욕구>  < 권력욕구>  < 소속욕구>를 알 수 있다

'우리'라는 단어는 알듯 모를 듯 최고로 미묘하고 불가사의한 단어이다,

두 사람이 사용하는 단어 스타일로 관계의 지속 여부를 알 수 있다,

권력이 많은 사람들은 더 많이 명사를 쓸까 동사를 더 많이 쓸까?   명사다.

대입 논술에 쓴 단어로 미래의 대학 성적을 예측할 수 있다

위증과 진실로 밝혀진 증언의 차이는 대명사에 있다,

대통력의 연설을 보면 그의 리더쉽을 알 수 있다,

단어는 나를 보여주는 <광고판>이다.

 

 

흥미롭지만 딱 거기까지...

어쩌면 굳이 컴퓨터를 돌려 분석하지 않더라도 그 사람의 말투 쓰는 말 단어 그리고 글에서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다,

딱 구분지어 이러이러한 유형의 사람이라고 나누진 않더라도

내가 지금 대화를 나누는 사람

내가 읽는 이 글을 쓴 사람

내가 바라보고 있는  저 사람의 말투와 말의 내용을 통해서 ...

우리는 사람을 알 수 있다,

 

어제 뉴스룸에 나왔던 한잔 걸친것 처럼 무례한홍준표 답답하게 단답형 대답만 반복하던 안철수 그리고 부들부들하면서도 끝내 침착함을 유지한 손석희의 말을 보면서 그 사람을 다시 알게 된다

사람은 의외로 자기도 모르게 자기의 모습을 많이 흘리고 다니는  존재다.

나도 어딘가 나를 많이 흘리고 다녔을 것이고 그게 나의 전부일 수도 일부일 수도 혹은 전혀 나와 상관없을 수도 잇지만..... 어쨌든 타인의 눈에 보이는 나다,

 

이 책은.... 처음은 창대했으나... 그 끝은 조금 미약하다, 유감스럽지만,

 

 

p.s.  나는 분석적이고 이성적으로 책을 평가하는 글을  쓰지 못한다는 걸 도 알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